이명우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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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명우는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그리고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며 영화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인 이필우의 동생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촬영, 현상, 편집 등 기술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인 《춘향전》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하며 영화 촬영 및 편집을 담당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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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우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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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2. 생애
이명우는 한성부에서 태어나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영화계에서 일하던 형 이필우의 영향을 받아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1925년 이필우가 《을축년 수해》를 촬영할 때 촬영을 배우기 시작했다.[1]
1927년 《운명》 촬영을 시작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 장례식 실황을 촬영하는 등 기술 인력으로 활동했다. 당시 촬영기사들은 현상과 편집도 겸했기에 이명우 역시 이 작업들을 함께 했다. 1931년 심훈은 이명우를 "재주 있는 사람이니 기사로서 일류"라고 평가했다.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1]
1939년 인기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했는데, 형 이필우가 녹음을, 처남 최순흥이 촬영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복지만리》(1941), 《지원병》(1941), 《조선해협》(1943) 촬영과 《병정님》(1944) 편집 등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으로 참여하고,[2] 《밤의 태양》(1948) 촬영, 《전우》(1949) 편집을 맡았다. 미군정과 공보처에서 촬영기사로 일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되었으며,[3][4]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 1. 초기 활동 (1925-1935)
한성부에서 출생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조선인 최초의 촬영기사이자 녹음기사인 이필우의 동생이라, 어릴 때부터 영화를 접하게 되었다. 이필우에 따르면, 1925년에 자신이 《을축년 수해》를 촬영할 때 이명우가 촬영을 배우겠다고 하여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1927년 데뷔작인 《운명》 촬영에 이어 월남 이상재가 사망하자 《월남 이상재선생 장례식 실황》을 찍었다. 이후 촬영과 현상, 편집을 담당하는 기술인력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직 영화 기술의 분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촬영기사들이 후반 작업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명우는 현상과 편집도 겸하곤 했다. 심훈은 1931년에 이명우를 가리켜 “재조 잇는 사람이니 기사로서 일류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1935년에는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을 연출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2. 2. 감독 데뷔와 친일 영화 제작 (1935-1945)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을 연출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1939년 인기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하기도 했다. 이 영화 제작에는 이명우의 형 이필우가 녹음을 맡아 참여했고, 처남 최순흥도 촬영 감독을 담당했다.[1]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친일 영화 촬영을 맡았다. 만주 이주 정책과 관련된 국책 영화 《복지만리》(1941), 지원병제를 선전하는 《지원병》 (1941), 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조선해협》(1943)의 촬영을 담당했고, 《병정님》 (1944) 편집을 맡았다.
2. 3. 광복 후 활동과 납북 (1945-1950)
조선영화동맹 중앙상임위원으로 참여하고[2], 1948년 《밤의 태양》 촬영과 1949년 《전우》 편집을 맡았다. 미군정 502대 부대에서 촬영기사로 일했으며, 공보처 소속 촬영기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되었다.[3][4] 주인규, 강홍식 등 미리 월북해 있던 사람들이 이명우를 데려갔다는 증언이 있으나, 북조선에서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3. 주요 작품
이명우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후에도 촬영 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친일 영화 촬영을 맡았다. 광복 후에는 《밤의 태양》 (1948) 촬영과 《전우》 (1949) 편집을 맡았다.[2]
제목 | 연도 | 역할 | 비고 |
---|---|---|---|
복지만리 | 1941년 | 촬영 | 만주 이주 정책 관련 국책 영화[1] |
지원병 | 1941년 | 촬영 | 지원병제 선전 영화[1] |
조선해협 | 1943년 | 촬영 | 징병제 실시 기념 영화[1] |
병정님 | 1944년 | 편집 | [1] |
4. 평가
심훈은 1931년에 이명우를 가리켜 "재조 잇는 사람이니 기사로서 일류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이명우는 촬영과 녹음 기술에 다재다능하여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후에도 촬영 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친일 영화 촬영을 맡았다. 만주 이주 정책과 관련된 국책 영화 《복지만리》(1941), 지원병제를 선전하는 《지원병》 (1941), 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조선해협》(1943) 촬영을 담당했고, 《병정님》 (1944) 편집을 맡았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조
[1]
뉴스
22세로 짧은 생 마감한 여배우 차홍녀 -
[2]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시공사
1999-12-25
[3]
뉴스
59편의 영화, 그 첫발자욱 - 홍성기 감독밑에서의 감독수업과 데뷔작 〈여성일기〉
https://web.archive.[...]
씨네21
2001-03-26
[4]
웹사이트
이명우 (李明雨)
http://www.kwari.org[...]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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