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슈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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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주 출신의 정치인으로, 매니토바 주 총리(1969-1977)와 캐나다 총독(1979-1984)을 역임했다. 그는 매니토바 신민당 대표를 지냈으며, 총독 퇴임 후 호주, 파푸아뉴기니 등의 고등판무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브랜든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2006년에는 연방 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슈라이어는 캐나다 훈장, 군사 훈공 훈장 등을 받았으며, 문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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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슈라이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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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더 라이트 아너러블 |
이름 | 에드워드 슈라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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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에드워드 리처드 슈라이어 |
출생일 | 1935년 12월 21일 |
출생지 | 매니토바주 비우세주르, 캐나다 |
배우자 | 릴리 슈라이어 |
자녀 | 4 |
모교 | 매니토바 대학교 (BA), (BEd), (MA) |
직업 | 정치인 교수 |
소속 정당 | 신민주당 |
관직 | |
순서 | 22대 |
관직명 | 캐나다 총독 |
임기 시작 | 1979년 1월 22일 |
임기 종료 | 1984년 5월 14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전임자 | 쥘 레제르 |
후임자 | 잔 소베 |
총리 | 피에르 트뤼도 조 클라크 |
순서 | 16대 |
관직명 | 매니토바 주지사 |
임기 시작 | 1969년 7월 15일 |
임기 종료 | 1977년 11월 24일 |
전임자 | 월터 위어 |
후임자 | 스털링 라이언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부지사 | 리처드 S. 보울스 윌리엄 J. 맥키그 프랜시스 L. 조빈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드워드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보세주르에서 태어나 성장했다.[2] 그는 매니토바 대학교 등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여러 학위를 취득했고, 잠시 교수로서 활동하기도 했다.[3][4] 이 시기에 릴리 슐츠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3]
2. 1. 출생 및 가족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보세주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어를 사용하는 독일계-오스트리아 가톨릭 신자인 존 슈라이어와 엘리자베스 고트프리트였다.[2] 그의 외조부모는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오스트리아인이었다.슈라이어는 크롬웰 초등학교와 보세주르 컬리지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유나이티드 칼리지를 거쳐 매니토바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연도 | 학위 | 학교 |
---|---|---|
1959 | 교육학 학사 | 매니토바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
1962 | 교육학사 | 매니토바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
1963 | 국제 관계 문학 석사 | 매니토바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
1963 | 경제학 석사 | 매니토바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슈라이어는 세인트 폴 칼리지에서 국제 관계 교수로 재직했다.[3][4]
슈라이어는 대학원 과정을 밟는 동안 릴리 슐츠와 결혼하여 두 딸 리사, 카멜과 두 아들 제이슨, 토반을 두었다.[3]
2. 2. 학업
슈라이어는 크롬웰 초등학교와 보세주르 컬리지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유나이티드 칼리지와 매니토바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매니토바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총 4개의 학위를 취득했다.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슈라이어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세인트 폴 칼리지에서 국제 관계 교수로 재직했다.[3][4]
3. 정치 경력
1958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22세의 나이로 협동 연방 연합(CCF) 소속 매니토바 주의회 의원에 선출되어, 당시 매니토바 역사상 최연소 주의회 의원이 되었다.[5] 그는 브로큰헤드 농촌 선거구를 대표했으며, 1965년 캐나다 하원 진출을 위해 사임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69년, 슈라이어는 주 정치 무대로 복귀하여 CCF의 후계 정당인 매니토바 신민당(NDP)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4] 그는 농촌 출신이자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중도 성향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고, 영국인 및 개신교 계통이 아닌 최초의 당 대표라는 점에서 기존 지도자들과 차별화되었다. 같은 해 1969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그는 NDP를 이끌고 17석을 추가 확보하며 제1당으로 부상시켰고, 자신도 위니펙 북부의 로스미어 선거구를 통해 주의회에 복귀했다.
비록 과반수에는 한 석이 부족했지만, 매니토바 자유당 소속 로랑 데자르댕의 지지를 확보하여 매니토바 최초의 사회 민주주의 성향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1969-1977) 동안 그는 위니펙 시와 교외 지역 통합, 공공 자동차 보험 도입, 메디케어 보험료 인하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매니토바 수력 발전 담당 장관을 겸임하며 수력 발전을 적극 추진하고 매니토바 보건 보험료 폐지 등을 단행했다.[4] 1973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1977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는 스털링 라이언이 이끄는 매니토바 진보 보수당에 패배했다.
선거 패배 후 1979년까지 야당 대표로 활동하다가, 당시 캐나다의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로부터 캐나다의 총독 직위를 제안받고 이를 수락하며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3. 1. 매니토바 주의회 의원 (1958-1965)
1958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슈라이어는 협동 연방 연합 (CCF) 소속으로 브로큰헤드 농촌 선거구에 출마하여 매니토바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매니토바 주 역사상 최연소 주의회 의원이었다.[5] 슈라이어는 1965년 캐나다 하원 진출을 위해 사임할 때까지 이 지역구를 대표했다.3. 2. 캐나다 하원 의원 (1965-1969)
1958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매니토바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브로큰헤드 농촌 선거구를 대표하던 슈라이어는, 1965년 오타와의 캐나다 하원에 성공적으로 출마하기 위해 주의회 의원직을 사임했다.[5] 그는 협동 연방 연합(CCF)의 후계 정당인 매니토바 신민당(NDP)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1969년 다시 주 정치로 돌아와 매니토바 신민당 대표로 선출될 때까지 하원 의원직을 유지했다.[4]3. 3. 매니토바 신민주당(NDP) 대표 (1969-1979)
1965년 캐나다 하원 진출을 위해 매니토바 주의회 의원직을 사임했던 슈라이어는 1969년 주 정치 무대로 복귀했다. 그는 6월 8일, 협동 연방 연합(CCF)의 후계 정당인 매니토바 신민당(NDP)의 1969년 매니토바 신민당 대표 선거에서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4] 슈라이어는 이전 매니토바 CCF/NDP 지도자들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화되었다. 그는 농촌 출신이었고,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는 당과 거리가 있었던 많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영국인 및 개신교 배경이 아닌 최초의 매니토바 CCF/NDP 대표였다.슈라이어는 1969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NDP를 이끌고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NDP는 이전보다 17석을 더 얻어 총 28석을 확보하며, 주의회 내 제3당에서 제1당으로 발돋움했다. 슈라이어 자신도 새로 만들어진 위니펙 북부의 로스미어(Rossmere) 선거구를 통해 주의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NDP는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한 석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매니토바 자유당과 매니토바 진보 보수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NDP의 집권을 막으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결국 자유당 소속의 Laurent Desjardins|로랑 데자르댕프랑스어이 슈라이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그는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 NDP에 합류했다)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역사상 최초의 사회 민주주의 성향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슈라이어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위니펙 시와 주변 교외 지역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공공 자동차 보험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메디케어 보험료가 대폭 인하되는 등 진보적인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1973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두 번째 임기 동안의 내각은 이전보다 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정책으로는 1974년에 시행된 광산세 법안이 있다. 슈라이어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재무부 장관을 겸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7년까지는 매니토바 수력 발전 담당 장관직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석탄 및 가스 발전소 대신 수력 발전 건설을 추진하도록 부총독에게 조언했으며, 동시에 매니토바 보건 보험료를 폐지하고 가정 간호 및 약물 관리 제도를 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4] 슈라이어는 때때로 연방 캐나다 신민당의 정책 방향과 다른 노선을 걷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 10월 위기 당시, 연방 NDP 대표였던 토미 더글러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의 총리가 전시 조치법을 발동하는 것을 지지했다.
1977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슈라이어의 NDP는 Sterling Lyon|스털링 라이언영어이 이끄는 매니토바 진보 보수당에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었다. 그는 1979년까지 야당 대표로서 NDP를 이끌다가, 당시 피에르 트뤼도 총리로부터 캐나다의 총독 직위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3. 4. 매니토바 주 총리 (1969-1977)
1969년 6월 8일,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신민당 (NDP)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4] 이 정당은 이전의 협동 연방 연합 (CCF)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는 농촌 출신이었고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으며, 이전에는 당과 거리가 있던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기존 매니토바 CCF/NDP 지도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또한 그는 영국인이나 개신교 배경이 아닌 최초의 매니토바 CCF/NDP 지도자이기도 했다.슈라이어는 1969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NDP를 이끌고 획기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NDP는 이전 선거보다 17석을 더 얻어 주의회 제3당에서 제1당으로 발돋움했다. 슈라이어 자신도 새로 만들어진 위니펙 북부의 로스미어 선거구에서 주의회 의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NDP는 총 28석을 얻어 과반수에는 한 석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자유당과 진보 보수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NDP의 집권을 막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자유당 소속 로랑 데자르댕이 슈라이어 지지를 선언하면서 (데자르댕은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 NDP에 합류했다), 슈라이어는 매니토바 역사상 최초의 사회 민주주의 성향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슈라이어 정부는 위니펙 시와 주변 교외 지역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공공 자동차 보험 제도를 도입하고 메디케어 보험료를 대폭 인하하는 등 주목할 만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1973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두 번째 임기 동안의 내각은 이전보다 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정책으로는 1974년에 시행된 광산세 법안이 있다.
슈라이어는 총리직 외에도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재무부 장관을, 1971년부터 1977년까지 매니토바 수력 발전 담당 장관을 겸임했다. 수력 발전 담당 장관으로서 그는 석탄 및 가스 발전소 대신 수력 발전 건설을 추진하도록 부총독에게 건의했으며, 동시에 매니토바 보건 보험료를 폐지하고 가정 간호 및 약물 관리 제도를 도입하는 법안을 추진했다.[4] 슈라이어는 때때로 소속 정당인 캐나다 신민당의 연방 정책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 10월 위기 당시, 연방 NDP 지도자 토미 더글러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전시 조치법을 발동하는 것을 지지했다.
1977년 매니토바 주 총선에서 슈라이어의 신민당은 스털링 라이언이 이끄는 매니토바 진보 보수당에 패배했다. 선거 패배 후에도 그는 1979년까지 야당 NDP 대표직을 유지했으며, 이후 트뤼도 총리로부터 총독직 제안을 받게 된다.
4. 캐나다 총독 (1979-1984)
1978년 12월 2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피에르 트뤼도 총리의 추천에 따라 줄 레제의 후임으로 에드워드 슈라이어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왕실 서명과 캐나다 대인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위임받은 그는 1979년 1월 22일 캐나다 상원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이로써 그는 매니토바 출신 최초의 총독이자, 당시 43세로 로언 후작과 랜스다운 후작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젊은 총독이 되었다.
총독으로서 슈라이어는 여성 문제, 환경 보호, 공식 이중 언어 사용 등을 중요하게 다루며 관련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캐나다 여성의 헌법적 지위를 기념하고 환경 보존 노력을 장려하기 위한 상들을 제정했으며, 학술 연구 지원과 캐나다 사회 문제 논의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특히 암 투병 중이던 테리 폭스를 캐나다 훈장의 동료로 임명하기 위해 직접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포트 코퀴틀람을 방문하여 훈장을 수여한 일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재임 기간 중 슈라이어는 중요한 정치적 상황에도 관여했다. 1980년에는 소수 정부를 이끌던 조 클라크 총리의 조기 총선 실시 요청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1981-1982년 피에르 트뤼도 총리의 헌법 개정 추진 과정에서는 일방적인 강행 시 의회 해산 가능성을 언급하며 총독의 헌법 수호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슈라이어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 노력했으나,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전통적인 총독의 이미지와는 달라 일부 언론으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잔 소베가 임명되었을 때, 시사 주간지 ''맥클린스''는 슈라이어의 통치를 "진지한 프레리 포퓰리즘"이자 "활기 없다"고 묘사하며, 소베가 총독 관저에 "우아함과 세련됨"을 되돌려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4. 1. 총독 재임 시 주요 활동
1978년 12월 2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피에르 트뤼도 총리의 지명을 받아 왕실 서명과 캐나다 대인장에 의해 위임하여 줄 레제의 후임으로 슈라이어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1979년 1월 22일 캐나다 상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했으며, 이로써 그는 매니토바 출신 최초의 총독이 되었고, 당시 43세의 나이로 1878년 로언 후작(33세), 1883년 랜스다운 후작(38세)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젊은 총독이 되었다.총독으로서 슈라이어는 여성 문제, 환경, 그리고 공식 이중 언어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여성 권익 증진: 취임 첫 해인 1979년, 에밀리 머피 등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노력을 기리고 캐나다 여성들이 헌법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게 된 인물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인물 사건 기념 총독상'(Governor General's Awards in Commemoration of the Persons Case)을 제정했다.
- 환경 보호 강조: 1981년에는 환경 보존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관련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총독 환경 보존상'(Governor General's Conservation Awards)을 만들었다.
- 학술 연구 지원: 1983년에는 토론토 대학교에 우크라이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에드워드 슈라이어 펠로우십'(Edward Schreyer Fellowship in Ukrainian Studies)을 설립했다.
- 캐나다 연구 진흥: 같은 해, 이후 4년마다 열리게 되는 제1회 '총독 캐나다 연구 회의'(Governor General's Canadian Study Conference)를 주재하여 캐나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진했다.
- 테리 폭스 격려: 암 투병 중이던 테리 폭스를 캐나다 훈장 최고 등급인 동료(Companion)로 임명하기 위해 직접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포트 코퀴틀람을 방문하여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용기와 헌신을 기렸다.
슈라이어는 총독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 당시 소수 정부를 이끌던 조 클라크 총리가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를 조언했을 때, 이를 즉각 받아들이지 않고 숙고하는 모습을 보여 정치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는 총독의 재량권 행사와 관련된 중요한 선례로 여겨진다. 또한 슈라이어는 훗날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1981년과 1982년 사이 헌법 개정안을 주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면, 의회를 해산했을 수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와 연방주의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슈라이어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개방적이며 친근한 방식으로 국민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당시 총독에게 기대되던 전통적이고 엄숙한 공적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이로 인해 일부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후임으로 잔 소베가 임명되었을 때, 시사 주간지 ''맥클린스''는 소베가 "5년 동안 이어진 에드워드 슈라이어의 진지한 프레리 포퓰리즘과 다소 활기 없던 통치 이후에 총독 관저에 우아함과 세련됨을 되돌려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4. 2. 1980년 총선 관련 논란
1980년, 당시 진보보수당 소속의 조 클라크 총리가 총선 실시를 조언했을 때, 슈라이어 총독은 이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소집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었다. 당시 클라크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소수 정부였으며, 슈라이어의 이러한 태도는 총독의 재량권 행사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슈라이어는 결국 클라크 총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총선을 소집했지만, 이 사건은 총독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선례로 남게 되었다.또한 슈라이어는 이후 자유당 소속의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1981년과 1982년 사이에 헌법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려 했다면, 총독으로서 의회를 해산했을 수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총독으로서 헌정 질서를 수호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3. 1981-1982년 헌법 개정 관련 입장
슈라이어는 총독 재임 중 피에르 트뤼도 총리가 1981년과 1982년 동안 캐나다 헌법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려 했다면, 언제든지 의회를 해산했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당시 헌법 개정 과정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5. 총독 퇴임 이후
1984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에드워드 슈라이어는 자신의 연금을 환경 단체인 캐나다 순상지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5] 그는 다른 전직 총독들과는 달리 정치 및 외교 활동을 계속 이어갈 의지를 보였으며, 실제로 퇴임 직후 호주,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활동했다.[9]
캐나다로 돌아온 후에는 해비타트 국가 대표, 시에라 법률 방어 기금 명예 이사 등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위니펙 도서관 재단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또한, 1989년부터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며 자원 지리학, 에너지 경제, 환경 영향 등에 대해 강의했고,[4]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브랜든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4][10]
5. 1. 외교 활동

1984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슈라이어는 다른 전직 총독들과는 달리 정치 및 외교 생활을 유지할 의향이 있었다.[5] 그는 총독직에서 물러난 같은 날, 그의 후임자에 의해 캐나다 국왕 정부를 대표하여 호주,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1988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으며, 이후 위니펙으로 돌아왔다.
5. 2. 사회 활동
1984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슈라이어는 자신의 연금을 환경 단체인 캐나다 순상지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5] 그는 다른 전직 총독들과는 달리 정치 및 외교 활동을 계속할 의향을 보였다. 총독직에서 물러난 같은 날, 그는 후임자에 의해 캐나다 국왕 정부를 대표하여 호주,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의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1988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한 뒤 위니펙으로 돌아왔다.
캐나다로 돌아온 후, 슈라이어는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해비타트의 국가 대표, 시에라 법률 방어 기금의 명예 이사, 그리고 중국 문화 및 역사 보존을 위한 캐나다 재단의 명예 고문으로 활동했다. 또한 위니펙 도서관 재단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1989년부터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며 자원 지리학, 에너지 경제, 환경 영향과 관련된 주제로 강의했다.[4] 2002년 11월 1일,[4] 슈라이어는 브랜든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10] 2005년 초에 재선되어 2008년 10월 31일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5. 3. 학술 활동
1989년부터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며 자원 지리학, 에너지 경제, 환경 영향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강의했다.[4] 2002년 11월 1일,[4] 브랜든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10] 2005년 초에 재선되어 2008년 10월 31일에 임기가 종료되었다.5. 4. 정계 복귀 시도 (2006)
70세였던 슈라이어는 2006년 캐나다 총선에서 셀커크-인터레이크 선거구의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11] 이는 전직 총독이 캐나다 하원에 출마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전에는 전직 부총독이 정당 소속으로 상원에 임명된 경우는 있었으나, 하원 출마는 처음이었다. 슈라이어는 보수당 현직 의원인 제임스 베잔에게 패배했는데, 베잔은 49%의 득표율을 얻었고 슈라이어는 37%를 득표했다.[12] 선거 운동 과정에서 슈라이어가 과거 동성애를 "고통"이라고 표현했던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이는 신민당이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상대 후보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슈라이어는 2005년 선거 운동 당시, 기존 법률이 종교 단체에게 동성 커플의 결혼 주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13]슈라이어는 또한 야당이 당시 총리였던 보수당의 스티븐 하퍼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추진했던 2008-09년 연방 의회 분쟁 당시에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정권을 유지하려는 모든 집단은 의회의 신임을 기꺼이 마주하고 얻어야 하며, 이를 회피하거나 오랫동안 피해서는 안 됩니다. 더 간결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임 투표 회피'라는 표현을 다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하퍼 정부가 의회의 신임 확인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다.[14]
5. 5. 2008-2009년 연방 의회 분쟁 개입
슈라이어는 야당이 현직 총리인 스티븐 하퍼에 대한 불신임을 위협했던 2008-09년 캐나다 의회 분쟁에 개입했다. 그는 의회의 신임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4]통치를 자처하는 모든 집단은 의회의 신임을 기꺼이 직면하고 구해야 하며, 이를 회피해서는 안 되며 오랫동안 피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그것을 더 간결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신임 투표를 회피하는 것'이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6. 서훈 및 수상
'''임명'''
- 1979년 1월 22일 – 1984년 5월 14일: 캐나다 훈장 총장 및 수석 동반자 (CC)[15]
- * 1984년 5월 14일 – 2013년 5월 8일: 캐나다 훈장 동반자 (CC)
- * 2013년 5월 8일 – 현재: 캐나다 훈장 특별 동반자 (CC)[16]
- 1979년 1월 22일 – 1984년 5월 14일: 군사 훈공 훈장 총장 및 사령관 (CMM)[17]
- * 1984년 5월 14일 – 2013년 5월 8일: 군사 훈공 훈장 사령관 (CMM)
- * 2013년 5월 8일 – 현재: 군사 훈공 훈장 특별 사령관 (CMM)[16]
- 1979년 1월 22일 – 1984년 5월 14일: 예루살렘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의 캐나다 기사 단장, 수장 및 최고 책임자 (KStJ)[18]
- * 1984년 5월 14일 – 현재: 예루살렘 성 요한 병원 기사단 기사 단장 (KStJ)
- 1979년 1월 22일 – 1984년 5월 14일: 캐나다 최고 스카우트
- 1979년 – 현재: 캐나다 육군사관학교 클럽 명예 회원
- 1984년 6월 3일 – 현재: 캐나다 국왕 자문 위원회 위원 (PC)
- 2000년 7월 13일 – 현재: 매니토바 훈장 회원 (OM)[19]
'''메달'''
- 1979년 1월 22일: 캐나다군 장식 (CD)
- 1967년: 캐나다 건국 100주년 기념 메달
- 1977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실버 주빌리 메달[20]
- 1992년: 캐나다 연방 125주년 기념 메달
- 200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골든 주빌리 메달
-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이아몬드 주빌리 메달
'''수상'''
- 1975년: 총독 바니에 상, 올해의 뛰어난 젊은 캐나다인으로 선정
7. 문장
슈라이어는 캐나다 문장원이 설립되기 전에 총독으로 재임했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1988년 6월 4일에야 수여되었다. 이 문장은 브루스 W. 비티가 1980년에 디자인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21] 이후 총독들의 문장과는 달리 슈라이어의 문장에는 캐나다 훈장의 리본과 휘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 관모장식 (Crest): 투구 위에는 녹색과 금색의 화환이 있고, 그 위에 얼음 덩어리를 딛고 서서 붉은 단풍잎을 들고 있는 북극곰이 있다.
- 방패 (Escutcheon): 방패는 세로로 금색과 녹색으로 나뉘어 있다. 중앙에는 파란색과 은색의 물결무늬 줄 네 개가 가로지른다. 윗부분에는 왕관을 쓴 붉은 십자가가 있는 원반이 있다. 오른쪽 아래(문장 기준 오른쪽, 보는 이 기준 왼쪽)에는 밀 다발이 있는 십자가(폼메)가 있고, 왼쪽 아래(문장 기준 왼쪽, 보는 이 기준 오른쪽)에는 가문비나무가 있는 금색 원(비잔트)이 있다.[22]
- 지지물 (Supporters): 오른쪽(문장 기준 오른쪽, 보는 이 기준 왼쪽)에는 어깨에 패스크꽃(Prairie Crocus)이 그려진 마름모꼴 장식을 단 들소가 있고, 왼쪽(문장 기준 왼쪽, 보는 이 기준 오른쪽)에는 금색 백합 문양이 그려진 파란 원(허트)을 어깨에 단 무스가 있다.[22]
- 구획 (Compartment): 지지물들은 오른쪽(문장 기준 오른쪽, 보는 이 기준 왼쪽)에는 침엽수(녹색)가, 왼쪽(문장 기준 왼쪽, 보는 이 기준 오른쪽)에는 밀(금색)이 덮인 언덕으로 나뉜 구획 위에 서 있다.
- 모토 (Motto): ''자유 평등 정의 노동 지식 존엄'' Freedom Equality Justice Work Knowledge Dignity영어
;상징[22]
들소는 슈라이어가 태어나고 자란 매니토바의 문장에서 가져왔다. 무스는 온타리오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가문비나무는 온타리오 북부 숲을 상징한다. 슈라이어는 국회의원과 총독으로 재임하며 온타리오에 거주했다. 들소 어깨의 패스크꽃(Prairie Crocus)은 매니토바의 상징화이다. 밀 다발은 프레리 지역을 나타낸다. 북극곰은 슈라이어가 총독 시절 자주 방문했던 캐나다 북부와 그가 완화하고자 노력했던 환경 변화에 대한 취약성을 상징한다.
물결무늬 선은 슈라이어의 고향 보세주르 근처의 브로큰헤드 강과 매니토바 수상 시절 주도였던 위니펙의 아시니보인 강을 상징한다. 방패의 세로 구분선은 서쪽(왼쪽)의 매니토바 상징과 동쪽(오른쪽)의 온타리오 상징을 나눈다. 붉은 십자가가 있는 원반은 캐나다 성공회의 문장이며, 그 위의 왕관은 군주의 대표로서 슈라이어의 역할을 나타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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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reyer supports legal rights for gay spo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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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let Harper 'duck a confidence vote': former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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