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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샤르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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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 샤르티에(Émile Chartier, 1868–1951)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필가, 저널리스트, 교육자이다. 그는 리세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칸트, 헤겔 등의 철학을 가르쳤고,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글을 쓰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1903년부터 '알랭'이라는 필명으로 문학, 미학, 교육, 정치에 관한 에세이 형식의 칼럼 '프로포'를 기고하여 명성을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의 어리석음을 경험하고, 이를 담은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체계적인 철학 이론보다는 일상 경험에서 출발하는 실천적인 철학을 강조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했다. 주요 저서로는 『정신과 정열에 관한 81장』, 『예술론』, 『행복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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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샤르티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랑
다른 이름에밀 샤르티에
출생일1868년 3월 3일
출생지모르타뉴오페르슈, 오르네, 프랑스
사망일1951년 6월 2일 (83세)
사망지르베지네, 프랑스
1931년의 아랑
교육
학력고등사범학교 (문학사, 1892년); 국립 학위: 인문학 및 과학 학사: 철학 교수 자격 (국가 교육 면허 경쟁 시험) 소르본: 철학 학사
철학적 배경
지역서양 철학
시대20세기 철학
학파/전통대륙 철학
주요 관심사정치 철학
영향
영향 받은 사상가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바뤼흐 데 스피노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마누엘 칸트, 르네 데카르트, 장자크 루소, 오귀스트 콩트, 스탕달, 오노레 드 발자크, 찰스 디킨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에르네스트 르낭, 쥘 라뇨, , 이폴리트 텐느
영향
영향을 준 사상가앙드레 모루아, 시몬 베유, 레몽 아롱, 조르주 캉길렘, 쥘리앙 그라크, 고바야시 히데오, 요네야마 마사루
작가 정보
필명아랑 (Alain)
직업교사, 철학자, 평론가, 도덕주의자
장르미학, 철학, 정치학, 교육학
대표 작품『』 (1925년)
기타 정보
묘지페르 라셰즈 묘지

2. 생애

1868년 3월 3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현재: 오르느주 모르타뉴오페르슈)에서 태어났다. 리세 미슐레 및 고등사범학교입학하여 철학전공했으며, 학생 시절 쥘 라뇨의 강의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2]

졸업 후 퐁티비, 로리앙, 루앙에 있는 코르네유 고등학교 등 리세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09년부터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근무했다.[2] 그의 제자 중에는 앙드레 모루아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알랭의 전기와 가르침을 묶어 『알랭(Alain)』을 1949년에 출판했다.[23]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글을 쓴 것이 알랭의 첫 저널리스트 경험이다. 1903년경, 알랭이라는 필명으로 루앙의 『데페슈 드 루앙(''Dépêche de Rouen'')』지에 문학, 미학, 교육, 정치에 관한 짧은 에세이 형식의 칼럼 "프로포(''propos'')"를 주 1회 기고하며 명성을 얻었다.[4]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46세의 나이로 지원병이 되었으며, 1921년에 전쟁 체험을 담은 『마르스, 또는 심판받은 전쟁(''Mars ou la guerre jugée'')』을 저술했다.[23] 제대 후 다시 앙리 4세 고등학교로 돌아가 1933년경까지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 퇴직 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1951년 6월 2일 프랑스 르 베지네에서 83세로 사망했다.

2. 1. 유년기와 청소년기

에밀 오귀스트 샤르티에는 1868년 3월 3일 오른 모르타뉴오페르슈에서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모는 모르타뉴의 유명한 상인이었고, 사촌인 샬린 주교의 영향으로 종교는 알랭의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알랭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급진주의 성향을 물려받았다.

1881년 알랭은 알랑송의 리세에 입학하여 호메로스, 플라톤, 르네 데카르트 등 고전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보다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진학을 희망했지만, 리세 미슐레 드 방브에서 철학자 쥘 라뇨를 만나 가르침을 받으며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2]

2. 2. 교사, 운동가, 저널리스트

1889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철학 아그레가시옹에 합격하여 여러 리세에서 철학 교사로 재직했다.[2] 퐁티비, 로리앙, 루앙(1900년-1902년 리세 코르네유) , 파리(리세 콩도르세) 등에서 근무했다. 1909년 리세 앙리 4세 교사로 부임하여 시몬 베유, 레몽 아롱, 조르주 캉길렘, 앙드레 모루아 등 수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다.[3]

알랭은 공화파와 급진파를 지지하며 정치 활동에 참여했으나, 1902년 이후 정치 활동에서 은퇴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설립된 대중 대학과 문학에 헌신했다.[2] 1903년부터 '프로포'라는 짧은 칼럼을 신문에 연재하며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4] 이 칼럼은 처음에는 《루앙•노르망디 급보》에 “일요일의 약속”, 이후 “월요일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주간 연재되었고, 1906년 2월부터 1914년 9월까지 3000편 이상이 작성되었다.[2] 이후 《매일의 약속》을 창간하기 전까지 연재했다. 1921년부터는 다른 저널(주로 ''Libres Propos'')에서 다시 프로포를 쓰기 시작해 1936년까지 총 5천여 개를 썼다.

프로포는 일반 독자를 위해 간결하고 생생한 스타일로 작성되었으며, 인상적인 문장과 경구를 사용하여 곧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확보했다.[5] 처음에는 주로 정치에 대해 논평했지만, 점차 그의 철학과 폭넓은 관심사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확장되었다.[6] 알랭은 훗날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 위를 쳐다보도록 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6] 그는 도발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철학이 저널리즘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저널리즘의 한 장르를 발명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6]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는 "''propos''는 여러 면에서 프랑스 산문의 걸작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7]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알랭은 46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포함한 '최고의 인물들'이 학살당하기 위해 보내지는 동안, 민간인으로 남는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어했다.[23] 그는 포병대에 배치되어 최전선에서 전화병으로 성실하게 복무했으며, 장교로의 진급을 거부했다. 1916년, 베르됭으로 탄약을 운반하는 마차 바퀴에 발목이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몇 주 동안의 입원 치료와 전선 복귀 실패 후, 그는 기상대로 전출되었고 1917년 10월에 제대했다.

요양하는 동안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중 첫 번째 작품은 1921년에 출판된 《화성, 또는 전쟁의 진실》(Mars ou la guerre jugée)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에 대해 가장 강하게 느꼈던 것은 전쟁이 초래한 노예 상태, 즉 평범한 병사들을 동물처럼 취급하며 경멸하는 장교들의 태도였다고 썼다. 군대는 조직적인 학살을 위해 인간을 복종 상태로 유지하는 거대한 기계였다.[23]

2. 4. 만년

알랭은 1930년대에 저명한 평화주의자로서 반파시스트 지식인 감시 위원회를 공동 창립하는 등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병마와 싸우며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1945년 12월, 20세 연하의 가브리엘 랑도르미와 결혼했는데, 거의 40년 전에 사랑에 빠졌던 그녀와의 결혼으로 그의 정신은 다시 살아났다.

알랭은 1951년 6월 2일 프랑스 르 베지네에서 83세로 사망했다. 그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23]

3. 철학

알랭은 체계적인 철학 이론을 구축하기보다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실천적인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정신은 진리의 쓰레받기가 아니다"라고 말하며,[11] 기성 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능동적인 사유를 강조했다. 이성을 높이 평가하며 "잘 판단하는 것이 잘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알랭은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역할과 관련된 급진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적 견해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철학자가 철학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좌파였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도 없이 이데올로기를 불신했으며, 개인의 권리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옹호했다. 시민의 역할은 복종하면서 저항하는 것이라는 역설로 요약되었다. 즉, 법을 준수하지만 모든 합법적인 수단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알랭은 민주주의의 확고한 옹호자였으며, 국제적으로는 끈기 있는 평화 옹호자였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그의 글 전체에 나타난다. "나는 판단의 자유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12] 그는 프랑스어의 말장난인 'penser, c'est peser'(생각하는 것은 무게를 재는 것)를 좋아했다.[13] 이는 그가 '정신'(esprit)에 대해 내린 정의를 통해 확장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의심의 힘, 모든 메커니즘, 질서, 미덕, 의무, 교리보다 더 높이 자신을 세우고, 그것들을 판단하고 종속시키며, 자유로 대체하는 것이며, 자유는 오직 자신에게만 빚을 지는 것이다."[14]

그는 칸트와 라그노의 영향을 받은 정교한 지각 이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각에서 정신의 역할을 강조했고, 세계는 오직 아이디어를 통해서만 파악된다고 보았다.[15]

그의 후기 저작, 특히 ''신들''(Les Dieux)은 종교에 대해 논했다. 신자가 아니었지만,[16] 알랭은 종교, 주로 이교주의와 기독교에서 인간 표현의 힘을 드러내며, 권력과 힘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존경했다.[17]

전반적으로 그의 철학의 목표는 편견을 피하면서 성찰과 합리적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라는 표시는 잠이 드는 사람의 표시고, 깨어나는 것은 머리를 흔들며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18]

4. '프로포'

알랭은 1903년부터 신문에 '프로포(propos)'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4] '프로포'는 제안, 명제, 언급 등 여러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4] 1906년 파리로 이주한 후, 알랭은 매일 '프로포'를 쓰는 것을 의무로 삼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3천 개가 넘는 '프로포'를 썼다.

일반 독자를 위해 간결하고 생생한 문체와 인상적인 경구를 사용하여 쓰인 이 짧은 글들은 곧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5] '프로포'는 시사적이거나 일상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주로 정치에 대해 논평했지만 점차 철학과 그의 폭넓은 관심사를 다루게 되었다.[6] 알랭은 철학이 저널리즘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저널리즘의 한 장르를 발명했다고 스스로 말했다.[6]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는 "'프로포'는 여러 면에서 프랑스 산문의 걸작으로 보인다"고 말했다.[7]

1921년부터 알랭은 다른 저널에서 '프로포'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1936년까지 총 5천여 개를 썼다. 이 글들은 주제별로 묶여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정치, 교육, 종교, 경제, 자연, 미학, 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프랑스에서 꾸준히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는 ''Propos sur le Bonheur''(영어로 ''Alain on Happiness''로 번역)이다.

5. 저작

알랭은 철학, 문학, 예술, 정치,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프로포(propos)'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쓰였다.[4][5] '프로포'는 제안, 명제, 언급 등 여러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4] 알랭은 1903년부터 ''La Depêche de Rouen et de Normandie'' 신문에 짧은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1906년 파리로 이주한 후에는 매일 글을 쓰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직전까지 3천 개가 넘는 '프로포'를 썼다.[4]

이 짧은 글들은 시사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주로 정치에 대해 논평했지만 점차 철학과 폭넓은 관심사를 다루게 되었다.[5][6] 알랭은 "철학이 저널리즘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저널리즘의 한 장르를 발명했다"고 썼다.[6]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는 "'프로포'는 여러 면에서 프랑스 산문의 걸작으로 보인다"고 말했다.[7]

1921년부터 알랭은 다시 '프로포'를 쓰기 시작하여 1936년까지 총 5천 개 가량을 썼다. 이 글들은 주제별로 묶여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정치, 교육, 종교, 경제, 자연, 미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프랑스에서 꾸준히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는 ''Propos sur le Bonheur''(《행복론》)이다.

알랭은 요양 중에도 글을 써서 1921년 『마르스, 또는 심판받은 전쟁』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쟁이 초래한 노예 상태와 평범한 병사들을 경멸하는 장교들의 태도를 비판했다. 군대는 조직적인 학살을 위해 인간을 복종 상태로 유지하는 거대한 기계라고 묘사했다.

전쟁 중 집필 활동은 그의 다작 활동의 시작이었다. 1917년 『정신과 정열에 관한 81개의 장』, 1920년 『예술 체계』를 출판했다. 전후 첫 주요 작품은 1926년에 출판된 『사상과 시대』였다. 여러 편의 『프로포』 모음집 외에도 플라톤, 스탕달, 오노레 드 발자크, 찰스 디킨스에 관한 저서를 포함하여 많은 책들이 뒤따랐다. 1934년에는 종교에 관한 두 번째 주요 작품인 『신들』이 출판되었고, 2년 후에는 그의 지적 자서전인 『나의 생각의 역사』가 출판되었다.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그의 후기 작품을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상적 산문'이라고 묘사했다.

갈리마르의 플레야드 시리즈에서 다음 4개의 컬렉션이 출판되었다.


  • 담론 2권 (1956, 1970) (약 1250개의 담론 포함)
  • 예술과 신들 (1958)
  • 정념과 지혜 (1960)


1906년부터 1914년까지의 "노르망디 사람의 담론"에 대한 완전판은 알랭 연구소에서 출판된 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0–2001)

다음은 한국어로 번역된 알랭의 주요 저작들이다.

  • ''Quatre-vingt-un chapitres sur l’Esprit et les Passions''프랑스어 (1917년). 『정신과 정열에 관한 81장』 고바야시 히데오 역, 신판·소겐 라이브러리 문고. 신초샤 "고바야시 히데오 전 작품 8"
  • ''le Système des beaux-arts'' (1920년). 『제 예술의 체계』 하세가와 히로시 역, 고분샤 고전 신역 문고
  • ''Mars ou la guerre jugée'' (1921년). 『판결받은 전쟁』 시라이 시게오 역, 오자와 서점
  • ''Esquisses de l'homme'' (1927년). 『인간론』 하라 겐키치 역, 하쿠스이샤
  • ''Les idées et les âges'' (1927년). 『사상과 연령』 하라 겐키치 역, 가도카와 문고
  • ''Propos sur le bonheur'' (1928년). 『행복론』 가미야 미키오 역, 이와나미 문고/시라이 겐자부로 역, 슈에이샤 문고
  • ''Histoire de mes pensées'' (1936년). 『나의 사색의 흔적』 가미야 미키오 역, 이와나미 서점, 2022년
  • ''Définitions'' (유고). 『정의집』 가미야 미키오 역, 이와나미 문고/모리 아리마사 역, 미스즈 서방

5. 1. 생전 출판된 저서 (일부)


  • 스피노자 ''(Spinoza)'' (1900)
  • Quatre-vingt-un Chapitres sur l'esprit et les passions|정신과 정열에 관한 81장프랑스어 (1917)
  • Système des Beaux-Arts|예술 체계프랑스어 (1920)
  • Mars ou la guerre jugée|마르스, 또는 심판받은 전쟁프랑스어 (1921)
  • Propos sur le bonheur|행복론프랑스어 (1925, 1928년 증보판)
  • Les idées et les âges|사상과 시대프랑스어 (1927)
  • 신들 ''(Les Dieux)'' (1933)
  • Histoire de mes pensées|나의 사색의 자취프랑스어 (1936)

5. 2. 사후 출판된 저서 (일부)


  • Vingt et une Scènes de Comédie|스물한 편의 희극 장면프랑스어 (1955)
  • Propos|프로포프랑스어 (1956)
  • Les arts et les dieux|예술과 신들프랑스어 (1958)
  • Les passions et la sagesse|정념과 지혜프랑스어 (1960)
  • Propos sur des philosophes|철학자들에 관한 담론프랑스어 (1961)[1]
  • Lettres aux deux amies|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프랑스어 (2014)[2]
  • Journal inédit|미발표 일기프랑스어 (2018)[3]

6. 비판

젊은 시절 알랭은 드레퓌스를 지지했으며, 많은 유대인 친구와 제자를 두었다. 그러나 2018년 그의 ''미발표 저널'' ''1937-1950''이 출판되었을 때, 일부 발언들을 반유대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알랭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9] 이러한 발언들 중 일부는 현재 읽기에 불편함을 주지만,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알랭은 1938년에 "나는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1938년 1월 28일)라고 썼다. 그는 출판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시험하고 성찰하는 장소인 개인적인 저널에 글을 쓰고 있었다. 1943년 그는 평론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다른 발언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반유대주의는 끝날 것이다… 내가 이 잔인한 광기를 용납했던 것이 유감이다" (1943년 9월 19일), 그리고 1947년에는 "내 눈에는 평등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다. 평등한 권리를 의심하는 것조차 엄청난 불의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이 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덤벼들어야 한다."라고 썼다. 철학자로서 그가 자신의 편견을 인식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약점이지, 행동해야 할 편견이 아니었다. 그의 출판된 저작물에는 반유대주의의 흔적이 없다.[10]

참조

[1] 서적 Simone Weil: Portrait of a Self-exiled Jew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0
[2] 서적 Alain: le premier intellectuel Stock 2006
[3] 서적 Un sage dans la cité Robert Laffont 1985
[4] 웹사이트 Alain, philosopher provocateur https://philosophe-a[...]
[5] 문서 Histoire de mes pensées Gallimard
[6] 문서 Propos d’un Normand 1909-12-28
[7] 문서 Jean Jaurès, Journal 1914
[8] 서적 Du tragique au matérialisme (et retour) PUF 2015
[9] 서적 Journal Inédit 1937-1950 Équateurs 2018
[10] 서적 Propos sur Alain Gallimard 2020
[11] 웹사이트 Alain, philosopher provocateur https://philosophe-a[...]
[12] 문서 Histoire de mes pensées Gallimard
[13] 문서 Definitions Gallimard
[14] 문서 Definitions Gallimard
[15] 서적 L’Idée de philosophie chez Alain Bordas 1970
[16] 문서 Histoire de mes pensées Gallimard
[17] 웹사이트 Alain on religion https://philosophe-a[...]
[18] 문서 Propos sur la Religion Rieder 1938
[19] 문서
[20] 문서 広辞苑
[21] 사전 岩波 哲学・思想事典 岩波書店 1998
[22] 웹사이트 アランとは https://kotobank.jp/[...] 2014-04-16
[23] 서적 訳書 みすず書房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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