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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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살바도르 내전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군부의 권력 강화, 좌익 게릴라 조직의 등장,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 등의 사건들이 배경이 되었다. 미국은 반공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엘살바도르 정부를 지원했고, 이는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2년 차풀테펙 평화협정으로 내전이 종식되었고, FMLN은 정당으로 전환되었다. 내전 이후 FMLN은 정치 세력화에 성공했지만, 사회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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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혁명정부는 1979년 쿠데타로 시작된 군사 위원회에서 1982년까지 엘살바도르를 통치한 정부들을 지칭하며, 구조 개혁과 인권 개선을 약속했으나 좌우 세력의 반발, 인권 침해,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엘살바도르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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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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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엘살바도르 내전 |
일부 | 중앙아메리카 위기 냉전 |
기간 | 1979년 10월 15일 – 1992년 1월 16일 (12년 3개월) |
장소 | 엘살바도르 |
결과 | 차풀테펙 평화협정 체결 엘살바도르 군 재편성 국가 경찰이 국가 시민 경찰로 대체; 국가 경비대와 재무 경찰 해체 FMLN 무장 부대 해체, 정치 정당으로 전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엘살바도르 정부 (혁명 정부 평의회 ~ 1982년) 준군사 암살단 외국인 용병 (수백 명 추정) |
교전국 2 | FMLN (CRM, FDR) FPL (BPR) ERP (LP-28) RN (FARN, FAPU) PRTC (MLP) PCES (UDN) |
지원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알바로 마가냐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아돌포 아르놀도 마하노 하이메 압둘 구티에레스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 카를로스 에우헤니오 비데스 카사노바 로베르토 다우부이손 도밍고 몬테로사 (사망) 앨버트 쇼펠버거 (암살) |
지휘관 2 | 샤피크 한다 호아킨 비야로보스 카예타노 카르피오 (자살)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 페르만 시엔푸에고스 아나 마리아 (암살) |
전력 | |
전력 1 | 9,850명 (1980년) 39,000명 – 51,150명 (1985년) 63,000명 – 70,000명 (1992년): 정규군 55,000명, 준군사조직 15,000명 |
전력 2 | 12,000명 – 15,000명 (1984년) 6,000명 – 15,000명 (1985년, 추정 10,000명) 8,000명 – 10,000명 (1992년) |
사상자 | |
사상자 1 | 10,360명 이상 사망 |
사상자 2 | 12,274명 – 20,000명 사망 |
민간인 사상자 | 65,161명 이상 사망, 5,292명 이상 실종, 550,000명 국내 실향민, 500,000명 난민 발생 |
관련 전투 | |
서막 | 축구 전쟁 1972년 쿠데타 시도 정치적 긴장 |
내전 | 1979년 쿠데타 1981년 공세 일로팡고 공항 1982년 공세 1989년 공세 롤로티케 격추 |
학살 | 숨풀 로메로 장례식 선교사 엘모조테 산타 리타 엘 칼라보소 소나 로사 예수회 |
결과 | 평화 협정 진실 위원회 |
기타 | |
언어 | |
지도 |
2. 배경
엘살바도르는 역사적으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왔다. 19세기 후반부터 커피 경제에 크게 의존했지만, 부는 소수의 토지 소유 엘리트에게 집중되었고 대다수 국민은 빈곤에 시달렸다.[26][149] 이러한 불평등은 1932년 농민 봉기와 그에 대한 군부의 잔혹한 진압인 '라 마탄사' 사건[30]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군사 독재 정권이 장기화되었다.[30]
1969년 온두라스와의 축구 전쟁은 엘살바도르 사회에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군부의 권력 강화를 가져왔다.[31] 1972년과 1977년 대선에서는 군부의 지원을 받는 국민 화해당(PCN)이 부정 선거를 통해 집권했으며,[33]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와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 정권 하에서 정부의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국가 민주주의 조직(ORDEN)과 같은 준군사조직은 반대 세력 탄압에 동원되었고,[33][36]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37][109]
이러한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1970년대 들어 파라분도 마르티 인민해방군(FPL), 인민혁명군(ERP) 등 좌익 게릴라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웃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하자, 엘살바도르의 여러 좌익 게릴라 조직들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어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1980년 3월 24일, 정부와 군부의 인권 침해와 탄압을 비판해 온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187] 엘살바도르 내전은 전면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2. 1.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화
엘살바도르는 역사적으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겪어왔다.[149] 19세기 후반, 커피는 엘살바도르의 주요 수출 작물로 자리 잡으며 국가 소득의 약 95%를 차지했지만, 이 소득은 인구의 단 2%에게만 집중되었다. 이는 소수의 강력한 토지 소유 엘리트와 대다수 빈곤층 사이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6] 이러한 불평등은 1920년대를 거치며 더욱 커졌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커피 가격이 하락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7][28]1932년, 중앙아메리카 사회당이 결성되어 농민과 원주민들의 봉기를 이끌었으나, 이는 '라 마탄사'(학살)로 알려진 사건에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며,[30] 이 사건은 군사 독재 정권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토지 소유 엘리트의 경제적 지배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30] FMLN은 이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파라분도 마르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9] 이러한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중산층, 노동 계층, 빈곤층의 저항은 20세기 내내 계속되었다.[30]
1969년 7월 14일, 온두라스의 토지 개혁법과 관련된 이민 문제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축구 전쟁이라 불리는 단기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전쟁은 4일 만에 끝났지만, 엘살바도르 사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양국 간 무역 중단으로 경제적 피해가 컸고, 약 30만 명의 엘살바도르인이 온두라스에서 추방되는 등 삶의 터전을 잃었으나 엘살바도르 정부는 이들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또한 축구 전쟁은 엘살바도르 군부의 권력을 강화하고 부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쟁 이후 정부는 이스라엘, 브라질, 서독, 미국 등으로부터 무기 구매를 늘렸다.[31]
1972년 엘살바도르 대통령 선거는 군부가 지원하는 국민 화해당(PCN) 후보인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 대령에게 유리하도록 대규모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다. 몰리나 정부에 대한 반대는 좌우 양측에서 거셌다. 같은 해, 197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에서 분리된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 파라분도 마르티 인민해방군(FPL)이 소규모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인민혁명군(ERP)과 같은 다른 좌익 조직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좌익 반란의 성장은 1973년 석유 위기로 악화된 식량 가격 상승과 농업 생산량 감소라는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켜 사회 불안을 증폭시켰다. 몰리나 대통령은 대규모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토지 소유 엘리트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32]

1977년 2월 20일 1977년 엘살바도르 대통령 선거에서도 PCN은 국민 반대 연합(UNO)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이번에도 군부 후보인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 장군에게 유리한 부정 선거 논란이 일었다. 악명 높은 국가 민주주의 조직(ORDEN)과 같은 정부 지원 준군사조직은 농민들에게 군부 후보 투표를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33] 선거 이후 로메로 대통령 취임(1977년 7월 1일)까지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고, 정부는 이를 탄압했다. 1977년 2월 28일, 산살바도르 시내에서 선거 부정 항의 시위대에 보안군이 발포하여 시위대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학살이 발생했다. 사망자 수는 200명[34]에서 1,500명[109]으로 추정된다. 몰리나 대통령은 시위의 책임을 "외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고 UNO 고위 당원들을 추방했다.[35]
로메로 정권 하에서도 탄압은 계속되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 엘리트들이 조직하고 자금을 댄 준군사조직(처형대)들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군과 독립적이었으나 곧 엘살바도르 국가 안보국(ANSESAL) 국장 로베르토 다우부이손 소령이 이끄는 군 정보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 국가 탄압 기구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좌익 동조자로 의심되는 수천 명의 노조 지도자, 활동가, 학생, 교사들을 살해했다.[36] 당시 엘살바도르의 주요 인권 단체였던 소코로 후리디코 크리스티아노(기독교 법률 지원)는 1978년 한 해 동안 정부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이 687명, 1979년에는 1,796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37][109] 이러한 탄압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정부 비판 목소리가 커졌고, 정부는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38]
엘살바도르는 농업 사회이며 커피가 경제의 중심축이었지만, 경작 가능한 토지의 77%를 인구의 0.01%가 소유하는 극심한 토지 집중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약 35%의 민간인은 역사적 불의, 전쟁, 시장 변동 등으로 토지를 빼앗긴 상태였으며, 인구는 증가하는데 농업과 무역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토지 소유 구조의 변화는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유한 커피 가공업자 및 수출업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구의 75%가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했다.[149] 대부분 살바도르인들의 생활 수준은 1983년 이후 30% 하락했으며, 실업 및 불완전 고용률은 50%에 달했다.[150] 깨끗한 물이나 의료 서비스 접근성도 매우 낮았다. 군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인플레이션은 거의 40%까지 치솟았으며, 자본 유출 규모는 약 10억달러에 달했고, 경제 엘리트들은 세금 납부를 회피했다.[151] 미국으로부터 거의 30억달러의 경제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인당 소득은 3분의 1 감소했다.[149]
미국의 원조는 주로 도시 기업에 집중되었고, 빈곤한 대다수에게는 거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151] 부의 집중은 미국이 지원한 토지 개혁 프로그램 시행 이전보다 오히려 심화되었다. 농지법은 경제 엘리트에게 예상치 못한 이익을 안겨주었고, 농업 협동조합은 부채에 시달리며 경쟁력을 잃었다. 재벌들은 종종 씨앗이나 비료를 살 돈이 없어 파산한 농민들의 땅을 헐값에 되샀다.[152] 법적 구제 수단은 사실상 부재했으며, 판사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151] 1989년 기준으로 토지 소유자의 1%가 경작 가능한 토지의 41%를 소유한 반면, 농촌 인구의 60%는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했다.[149]
2. 2. 축구 전쟁과 군부 권력 강화
1969년 월드컵 예선을 배경으로 발생한 온두라스와의 축구 전쟁 이후, 엘살바도르에서는 좌익과 우익 세력 모두에 의한 소규모 게릴라 공격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1979년 이웃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하자, 엘살바도르 내 여러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들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어 본격적인 봉기를 준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0년 3월 24일, 인권 침해를 고발하고 정부와 군부의 착취 및 탄압을 비판했던[187]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집전 중 우익 세력에 의해 암살되면서, 엘살바도르 내전은 전면적으로 촉발되었다.
2. 3. 좌익 게릴라 조직의 등장
1969년 온두라스와 벌인 축구 전쟁 이후, 엘살바도르 국내에서는 우익과 좌익 세력 간의 소규모 게릴라 공격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며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였다.[187]1979년 이웃 나라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산디니스타 혁명의 영향으로, 엘살바도르 내 여러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 조직들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쳐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0년 3월 24일, 엘살바도르 정부와 군부의 착취와 탄압, 인권 침해를 강도 높게 비판해왔던[187] 오스카 로메로(Óscar Arnulfo Romero) 대주교가 미사 집전 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전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암살당하기 한 달 전인 1980년 2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 중단을 간청했다. 그는 서한에서 "정치 권력은 무장 세력의 손에 있으며, 그들은 오직 국민을 탄압하고 살바도르 과두 정치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법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하며, 미국의 원조가 "기본적인 인권 존중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온 국민 조직에 대한 불의와 탄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59] 그는 암살되기 바로 전날, 살바도르 군인들과 보안군에게 동족을 살해하라는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의 암살 소식에 카터 대통령은 "충격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규탄했다.[60] 암살 일주일 후 열린 로메로 대주교의 장례식에서는 정부의 비호 아래 배치된 저격수들이 조문객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42명이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61]
로메로 대주교 암살의 배후로는 극우 정치인이자 군 장교 출신인 로베르토 다우뷔송(Roberto D'Aubuisson)이 지목되었다. 1980년 5월 7일, 다우뷔송은 민간인 및 군 동조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던 중 체포되었으며, 현장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그가 로메로 대주교 암살단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우익 세력의 거센 위협과 압력으로 군사정부는 결국 다우뷔송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1993년 UN 진실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다우뷔송이 로메로 대주교 암살을 지시했음을 공식 확인했다.[62]
로메로 대주교 암살과 다우뷔송의 석방 이후 정부군과 우익 세력의 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다우뷔송 체포 일주일 뒤인 1980년 5월 14일, 엘살바도르 국가경비대와 우익 준군사조직 ORDEN은 온두라스 군대의 협조를 받아 숨풀 강 학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강을 건너 피난하려던 약 600명의 민간인(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이 온두라스 군대에 의해 길이 막힌 채 엘살바도르 군대의 총격에 무참히 살해당했다.[63] 1980년 한 해에만 엘살바도르 군대와 주요 보안군(국가경비대, 국가경찰, 재무경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은 농민, 노동조합원, 교사, 학생, 언론인, 인권 운동가, 사제 등 약 11,895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당시 엘살바도르 정부의 인권 기록을 서반구에서 최악 수준으로 평가했다.[64]
2. 4.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 암살
1969년 온두라스와의 축구 전쟁 이후 엘살바도르 국내에서는 우익과 좌익 세력 간의 소규모 게릴라 공격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1979년 이웃 나라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혁명이 성공하자, 엘살바도르 내 여러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 조직들은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하여 본격적인 봉기를 시작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는 정부와 군부에 의한 인권 침해, 민중에 대한 착취와 탄압을 용감하게 비판하며[187] 사회 정의를 외쳤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의 이러한 활동은 기득권 세력에게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결국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는 산살바도르의 한 병원 예배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우익 세력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범의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은 엘살바도르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으며, 이는 정부와 FMLN 간의 엘살바도르 내전이 전면적으로 격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교회 인사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는데,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인 가톨릭 수녀 3명과 평신도 여성 1명이 국민경비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1980년 엘살바도르 미국 선교사 살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65] 1980년 한 해에만 엘살바도르에서 최소 20명의 종교 활동가와 사제가 살해당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교회 인물들에 대한 살해는 계속되었다.[65]
3. 경과
1979년 10월 15일, 군부와 민간인이 연합한 혁명정부군사정부(JRG)가 쿠데타(1979년 엘살바도르 쿠데타)를 일으켜 카를로스 움베르토 로메로 대통령을 축출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가 니카라과나 쿠바처럼 공산화될 것을 우려하여,[39]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부터 새로운 군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40]
JRG는 토지 소유 상한을 제한하는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우익 준군사조직인 국민민주주의조직(ORDEN)을 해산하는 등[43] 초기에는 일부 개혁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군부와 경제 엘리트들의 강한 반발과 조직적인 방해에 부딪혔고, 농촌 지역 협동조합 지도자들이 암살되거나 실종되는 등 정부에 의한 폭력은 오히려 급증했다.[44][172] 군부의 압력으로 군사정부 내 민간인 구성원들이 사임하고 평화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이 발생하는 등[43] 탄압이 강화되었다.
중앙아메리카에 반공주의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경제 원조와 군사 훈련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41] 1984년까지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 정부에 약 10억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했으며,[42] 이러한 미국의 개입은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과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 또한 찰리 작전의 일환으로 엘살바도르군을 지원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강화하고 새로운 통행금지령 규정을 채택하여 사회 통제를 강화했으며, 통행금지 위반자에 대한 살해도 발생했다.[68][69]
1992년, 유엔의 중재로 정부와 반군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간의 평화 협상이 타결되었고, 유엔 평화유지군(PKO)이 엘살바도르에 파견되면서 12년간 지속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94년 실시된 총선에서는 우익 정당인 민족주의 공화동맹(ARENA)이 집권했다. 유엔 진실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기간 동안 발생한 폭력 행위의 85%는 정부군 및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준군사조직(죽음의 부대)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조사되었다.[191]
3. 1. 내전의 본격화
온두라스와 축구 전쟁을 겪은 엘살바도르는 국내에서 우익과 좌익 세력 간의 소규모 게릴라 공격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계열 게릴라들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으로 통합되어 봉기를 일으켰다.긴장이 고조되자, 민정과 군부로 구성된 혁명정부군사정부(JRG)는 1979년 10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가 니카라과나 쿠바처럼 공산화될 것을 우려하여,[39]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부터 새로운 군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40] 이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41] 1984년까지 엘살바도르 정부에 약 10억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42]
한편, 1980년 3월에는 인권 침해를 고발하며 정부와 군부의 탄압을 비판해 온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하면서 내전은 본격적으로 격화되었다.
JRG는 토지 소유 상한을 100헥타르로 제한하는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은행, 커피, 설탕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1982년 2월 선거를 약속하고, 1979년 11월에는 우익 준군사조직인 국민민주주의조직(ORDEN)을 해산했다.[43] 그러나 토지 개혁은 군부와 경제 엘리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부유한 지주들은 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가축을 죽이고 농업 장비를 과테말라 국경 너머로 옮겼으며, 농촌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선출되자마자 암살당하거나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44] 정부에 의한 살해 사건은 1980년 2월 234건에서 다음 달 487건으로 급증했다.[172]
군부의 압력으로 군사정부의 민간인 구성원 3명 전원이 1980년 1월 3일 사임했고, 내각 장관 11명 중 10명도 사임했다. 1980년 1월 22일, 엘살바도르 국가경비대는 평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최대 5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43] 같은 해 2월, 미국 대사 프랭크 데바인은 국무부에 극우 세력이 무장하고 있으며 군부와 연계하여 충돌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45][46]
반군 소탕을 위해 엘살바도르군은 이웃 과테말라 군이 사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대반란 전략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70] 반군의 지지 기반인 농촌 지역 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게릴라는 물고기이고 인민은 바다와 같다"는 마오쩌둥의 이론에 착안하여 "바다를 말린다"는 개념에 기반한 것이었다.[71] 주요 대상은 민간인이었으며,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거나 살해함으로써 반군의 활동 기반을 없애려 했다. 아메리카스 워치의 아리에 네이어는 1984년 이 전략을 검토하며 "이것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으나, 폭격, 기총소사, 포격, 그리고 때때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하는 테러 전술"이라고 비판했다.[72] 1984년부터는 엘살바도르 공군이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 공군기로부터 얻은 정보를 활용해 게릴라 거점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73][74]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중남미에서의 반공 전략을 내세우며 엘살바도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경제 원조와 군사 훈련을 지원했다.[188]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과 우익 죽음의 부대, 그리고 FMLN 게릴라 간의 교전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며 내전은 더욱 참혹해졌다. 특히 정부군의 학살 행위는 큰 논란을 낳았는데, 1989년 11월 미 육군 특수부대 그린 베레의 지휘를 받은 육군 대게릴라 부대 아틀라카틀 대대(Batallón Atlácatl) 대원들이 예수회 신부 6명과 그들의 요리사 및 그의 딸을 살해한 사건이 대표적이다.[189]
1992년, 유엔의 중재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의 일환으로 유엔 엘살바도르 관찰단(ONUSAL)이 파견되는 등[190] 국제사회의 노력 속에 내전은 종식되었다. 1994년에는 선거가 치러져 우익 정당인 국민연합당(ARENA)이 집권했다.
유엔 진실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기간 발생한 폭력 행위의 85%는 정부군과 정부 지원을 받는 죽음의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FMLN 게릴라의 책임은 5%로 조사되었다.[191]
3. 2. 미국의 개입
중앙아메리카에서 반공주의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요청에 응하여 경제 원조와 군사 훈련을 제공했다.[188] 이는 결과적으로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냉전 논리에 따라 소련, 쿠바, 니카라과 등이 FMLN을 지원한다고 주장하며[183] 엘살바도르 정부 지원을 정당화하려 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이른바 살바도르 백서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었으나, 이후 그 내용의 정확성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184]미국의 군사 지원은 엘살바도르 군대의 역량 강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정부군과 우익 민병대인 '죽음의 부대'에 의한 인권 침해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국은 파나마에 위치한 미주 대륙 학교(School of the Americas, SOA)를 통해 엘살바도르 군인들을 훈련시켰는데,[76][77] 이 학교는 죽음의 부대 조직자로 알려진 로베르토 다우뷔손을 비롯하여 후에 인권 침해 사건에 연루된 많은 군 장교들을 배출한 곳으로 비판받는다.[137]
미국에서 훈련받고 장비를 지원받은 대표적인 부대가 신속 대응 반란 진압 부대인 아틀라카틀 대대( Batallón Atlácatles )이다.[76][77] 이 부대는 "산살바도르에 있는 미국 군사팀의 자랑거리"로 여겨졌지만,[78] 카바냐스 주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는다.[80][81] 1989년 11월에는 아틀라카틀 대대원들이 6명의 예수회 사제와 그들의 요리사 모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미 육군 그린 베레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189]
미국 행정부 고위 인사들의 발언은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비판을 받았다. 1989년 미국 부통령 댄 퀘일은 엘살바도르 방문 중 군부에 인권 침해 중단을 요구했지만, 군 관계자들은 이를 미국 내 여론을 의식한 형식적인 발언으로 치부했다는 증언이 있다.[134] 오히려 일부에서는 미군 고문들이 "들키지만 않으면 공산주의자를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하라"는 식의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135] 심지어 전직 미국 정보 장교는 죽음의 부대에게 시체를 바다에 버리라고 조언했다는 주장도 나왔다.[136] 같은 해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3세는 크리스티아니 정부의 반대파 탄압을 "절대적으로 적절하다"고 옹호했으며,[138] 미국 무역대표는 노조원에 대한 탄압이 그들이 게릴라를 지지했기 때문에 정당화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139][140]
내전 종식 후, 미국 내에서 엘살바도르 군 고위 장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적 소송이 제기되었다. 살해된 미국인 메리놀 수녀들의 유족들은 전 국방장관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와 국가경비대 사령관 카를로스 외제니오 비데스 카사노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포드 대 가르시아''). 하지만 이후 다른 고문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로마고자 대 가르시아'')에서는 두 장군에게 5400만달러가 넘는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 이후 미국 상원의원들의 요구로 두 장군에 대한 추방 절차가 시작되었으나, 2010년경 중단되었다.
한편, 1989년 예수회 사제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스페인 법원은 보편적 관할권 원칙에 따라 전 대통령 크리스티아니와 전 국방장관 라리오스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180] 스페인 판사는 미국 정부에 관련 자료의 기밀 해제를 요청했으나, 미국은 정보원 보호 등을 이유로 약 3,000건의 문서 공개를 거부했다.[181][182]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엘살바도르 내전 개입 유인이 줄어들었고, 이는 국제 사회의 평화 협상 지지 분위기와 맞물려 1992년 평화 협정 체결에 영향을 미쳤다.[185]
3. 3. 정부군과 죽음의 부대의 만행
유엔 진실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내전 중 발생한 폭력 행위의 85%는 정부군 및 정부를 지지하는 준군사조직(죽음의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한다.[191] 엘살바도르군과 보안군의 주요 목표는 좌익 게릴라와 그들의 정치적 동맹 세력, 특히 노동조합, 학생, 농민 조직 등 '대중 조직'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들 조직은 군사력보다는 대규모 시위 동원 및 파업 능력을 통해 정부에 위협이 되었다.[47]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미국 군사 원조는 이러한 정부의 탄압을 정당화하고 군부 강경파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 가톨릭 대변인은 미국의 군사 원조가 결국 국가 문제의 근원인 군부와 우익 준군사 집단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48] 심지어 휴먼 라이츠 워치는 1980년 1월, 국가경비대가 체포한 법대생 두 명을 미국 대사관 구내로 데려간 후 사복 남성들에게 넘겨 실종시킨 사건에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사실상 연루되었다고 지적했다.[49]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과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 또한 엘살바도르군에 훈련 및 전술 자문을 제공하며 정부군을 지원했다.
정부군은 계엄령과 통행금지령을 통해 사회 통제를 강화했다. 1981년 1월 12일부터 2월 19일 사이에만 168명이 통행금지 위반으로 보안군에 의해 살해되었다.[69]
반군 소탕을 위해 엘살바도르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대반란 전략과 과테말라 내전에서 과테말라 보안군이 사용한 전술을 차용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70] 이는 "바다를 말린다"는 개념에 기반하여, 반군의 지지 기반인 민간인 자체를 제거(추방 또는 살해)함으로써 반란을 종식시키려는 전략이었다.[71] 아메리카스 워치의 아리에 네이어는 이를 효과적인 전략일 수 있으나, 폭격, 기총소사, 포격, 민간인 학살을 포함하는 테러 전술이라고 비판했다.[72] 1984년부터는 미국 공군의 정찰 정보가 엘살바도르 공군의 게릴라 거점 폭격에 활용되었다고 알려졌다.[73][74]
1981년 3월, 카바냐스 주에서 시작된 군의 "소탕 작전"은 초토화 전술과 무차별적인 살해를 동반했다. 작전을 피해 렘파 강을 건너 온두라스로 탈출하려던 4,000~8,000명의 민간인(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들이 살바도르 공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수백 명 살해당했으며, 최소 189명이 실종 처리되었다.[75]
1981년 11월, 카바냐스 주에서 또 다른 대규모 작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미주 학교에서 훈련받고 미국제 장비를 갖춘 신속 대응 반란 진압 부대인 아틀라카틀 대대가 투입되었다.[76][77] 잔혹함으로 악명 높고 로메로 대주교 암살 연루 의혹이 있는 시기프레도 오초아 중령이 지휘한 이 작전은 공식적으로 "정화" 작전으로 불렸으며, 수백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오초아는 게릴라 수백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나, 노획된 무기는 소수에 불과해 희생자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음을 시사했다.[81]
카바냐스 작전 한 달 뒤인 1981년 12월 11일, 아틀라카틀 대대는 모라산 주의 엘 모소테 마을에서 최소 733명에서 최대 1,00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여성과 어린이 146명 포함)을 학살하는 엘 모소테 학살을 자행했다.[82][83] 현장 지휘관은 아이들을 살려두면 자라서 게릴라가 될 것이라며 어린이 포함 전원 살해 명령을 받았다고 진술했다.[84]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을 오랫동안 좌익의 "선전"으로 치부하며 지속적으로 부인했으나, 1990년대 비밀 외교문서 공개로 사실로 드러났다.[85] 미국 정부와 일부 언론은 학살을 보도한 기자들을 비방하고 살바도르 군의 인권 유린 실태와 미국의 지원 역할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78][86][87][76][77][88]
국제앰네스티는 1981년 보고서에서 살바도르 정규군과 보안 부대가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고문, 신체 훼손, 살해에 책임이 있으며, 시신 처리를 위해 정육 공장을 이용하는 등 살해가 점차 체계화되었다고 밝혔다.[89] 1981년 8월에는 83건의 참수 사건이 보고되기도 했다.[90] 이러한 농촌 지역 탄압으로 수많은 농민이 피난길에 올랐고, 약 2만 명이 온두라스 국경 임시 난민 센터에서 열악한 생활을 했다.[91] 미국으로 도피한 이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망명이 거부되었다.[92]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 격인 ''소코로 후리디코''는 1981년 한 해 동안 정부군에 의한 즉결 처형 사례 13,353건을 기록했으며, 보고되지 않은 사례를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이후 16,000건으로 수정되었다.[95][96] 아메리카스 워치는 이 수치가 "전투와 관련 없음"이 증명된 개별 사례만 집계한 보수적인 통계라고 지적했다.[94] 엘 모소테 학살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도밍고 몬테로사 중령은 이후 인터뷰에서 부하들에게 엘 모소테를 "청소하라"고 명령했음을 시인했다.[98]

1982년 5월에는 산살바도르 인근 푸에르타 델 디아블로에서 실종자 150명의 시신이 묻힌 비밀 묘지가 발견되었다.[106] 1982년 6월, 찰라테낭고 주에서 벌어진 군의 "소탕 작전" 중 6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며, 현장 사령관은 민간인 협력자("마사스")가 사망했음을 인정했다.[107] 같은 달 산살바도르에서는 군인들이 가택 수색 중 비무장 민간인 27명을 거리로 끌어내 처형하고 여성들을 강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방부는 이를 "성공적인 작전"이며 "장병들의 훈련과 전문화의 결과"라고 발표했다.[108]
1982년과 1983년 동안 정부군은 매년 약 8,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109] 이는 1980-81년에 비해 줄어든 수치지만, 표적 처형과 무차별 살인은 여전히 군과 안보 부대의 핵심 정책이었으며, 윌리엄 스탠리 교수는 이를 "대량 학살 전략"이라고 평가했다.[109] 당시 군 최고참모였던 아돌포 블란돈 장군은 "1983년 이전에는 전쟁 포로를 잡은 적이 없다"고 인정했다.[110]
1983년 3월, 엘살바도르 비정부 인권위원회 위원장 마리아넬라 가르시아 비야스가 과사파 화산에서 백린탄 사용 증거를 수집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1984년 2월, 정부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주요 노조 간부 9명을 포함한 80여 명의 노조원을 체포했다. 체포된 간부들은 구타와 심야 심문을 통해 게릴라라는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경찰은 공식 발표에서 이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조장하여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대사관은 "체포 과정을 면밀히 주시했으며 적절한 절차가 준수되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111]

개혁 조치가 논의되는 와중에도 군의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아메리카스 워치에 따르면, 아틀라카틀 대대는 1984년 7월 카바냐스에서 비무장 민간인 80명을, 한 달 뒤 찰라테낭고 주에서 피난민 50명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희생자들은 체계적으로 처형되었다.[120][121]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시기프레도 오초아 페레스 중령은 찰라테낭고 주에서 반군 공격으로부터 농장과 사업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민 방위 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에 의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모든 주민을 반군으로 간주하는 자유사격구역을 12곳 설정했다.[122] 이 구역 내에서는 엘살바도르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 자행되었으며, 1985년 8월에는 오초아의 부대가 자유사격구역 수색 중 민간인 약 40명을 학살하고 적십자의 구호 활동을 막는 사건도 발생했다.[123] 오초아의 부대는 1984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박격포 사격 등으로 약 1,400명의 민간인 반군 지지자들을 해당 지역에서 몰아낸 것으로 알려졌다.[124]
국제앰네스티는 1987년 연례 보고서에서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를 중앙아메리카 최악의 인권 침해 국가로 지목하며, 정부가 납치와 암살을 좌익 반대파 탄압의 체계적인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밝혔다.[125] 1987년 10월, 비정부 인권위원회 소장 헤르베르트 에르네스토 아나야가 무장괴한에게 암살당했다. 이는 1980년대 초 국가 테러로 와해되었던 인민 조직들의 재활성화 움직임과 맞물려 죽음의 부대에 의한 살해 및 실종 사건이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126]
1988년 10월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군과 보안기관 정보부서로 구성된 죽음의 부대는 이전 18개월 동안 수백 명의 반체제 인사 용의자를 납치, 고문, 살해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노동조합원, 협동조합원, 인권 운동가, 사법 관계자, 귀환 난민, 석방된 정치범 등이었다.[130] 죽음의 부대는 사복 차림에 번호판 없는 차량을 이용하며 "소름 끼칠 정도로 효율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대낮에 목격자 앞에서 총격을 가하거나, 납치 후 시신을 유기하거나, 강제로 실종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종종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구 전체를 위협하려는 의도적인 공포 전술이었다.[130]
미국의 댄 퀘일 부통령이 엘살바도르 방문 중 군부에 인권 침해 중단을 경고했으나, 군 내부에서는 이를 미국의 국내 정치용 선전으로 치부한 것으로 알려졌다.[134] 비평가들은 미군 고문단이 실제로는 "들키지만 말라"는 식의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35] 한 전직 미 정보 장교는 죽음의 부대가 시신을 길가에 버리는 대신 바다에 유기하라고 제안하기도 했다.[136] 미주 특수전학교는 죽음의 부대 조직자인 로베르토 다우뷔손과 예수회 사제 살해에 연루된 장교들을 포함한 다수의 살바도르 군인을 훈련시킨 곳이다.[137] 1989년 11월, 제임스 베이커 3세 미 국무장관은 크리스티아니 대통령이 군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다며 정부의 반대파 탄압을 "절대적으로 적절하다"고 옹호했다.[138]
1989년 10월 1일, 좌익 노동자 연맹(UNTS, Federación Nacional Sindical de Trabajadores Salvadoreñoses) 본부가 죽음의 부대에 의해 폭탄 테러를 당해 8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당했으며,[141] 같은 날 희생자 옹호 단체(COMA-DRES, Comité de Madres y Familiares de Presos Políticos, Desaparecidos y Asesinados de El Salvadores) 본부 밖에서도 폭탄이 터져 4명이 부상당했다.[142]
1989년 11월 16일 밤, 아틀라카틀 대대 소속 군인들이 중앙아메리카 대학교 캠퍼스에 침입하여 예수회 사제 6명(이냐시오 에야쿠리아, 세군도 몬테스, 이냐시오 마르틴-바로, 호아킨 로페스 이 로페스, 후안 라몬 모레노, 아만도 로페스)과 그들의 가정부 모녀(엘바 라모스, 셀리아 마리셀라 라모스)를 살해했다. 사제들은 침대에서 끌려나와 총살당하고 시신이 훼손되었으며, 모녀는 침대에서 함께 총에 맞은 채 발견되었다.[143] 이 학살 48시간 전에 아틀라카틀 대대가 미 특수부대의 지도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44] 다음 날에는 산살바도르의 한 지역에서 정부군이 남성 6명과 청소년 1명을 벽에 세워놓고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45]
이후 정부는 군이 게릴라를 지원하는 "위장 단체"라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적 가톨릭 교회 네트워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교회 사무실이 급습당하고 직원들이 체포, 추방되었으며, 표적에는 사제, 평신도, 빈곤층에게 식량, 의료, 난민 구호 등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던 외국인 인도주의 단체 직원들도 포함되었다.[146] 한 미국인 교회 자원봉사자는 재무부 경찰 본부에서 고문당할 당시 미국 부영사가 현장에 있었음에도 개입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147]
이처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과 우익 죽음의 부대는 내전 기간 동안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학살, 고문, 납치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했으며, 이는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고 내전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군에게 훈련받고 지휘받은 것으로 알려진 아틀라카틀 대대(Batallón Atlácatles)는 엘 모소테 학살과 UCA 학살 등 악명 높은 학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189]
3. 4. FMLN의 공세
FMLN(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은 군사 및 경제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늘리기 시작했다. 1982년 1월 27일, FMLN은 산살바도르의 일로팡고 공군기지를 공격하여 공군의 벨 UH-1 이로쿼이 헬리콥터 14대 중 6대, 다쏘 오라강 전투기 18대 중 5대, C-47 수송기 3대를 파괴했다.[100]1982년 2월부터 4월까지 총 439건의 파괴 행위가 보고되었으며,[101] 폭발물이나 방화를 포함한 파괴 행위의 수는 1월부터 9월 사이에 782건으로 증가했다.[102] 미국 대사관은 경제 기반 시설에 대한 피해액을 9800만달러으로 추산했다.[103] FMLN은 수도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고, 내륙의 도시 중심지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당시 반군의 수는 4,000명에서 5,000명 사이[104] 또는 6,000명에서 9,000명 사이[104]로 추정되었다.

1988년 선거 부정과 군부의 테러 전술 및 유권자 위협에 대응하여, FMLN은 1989년 11월 11일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대규모 공세, 이른바 "1989년 최종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세는 분쟁 역사상 처음으로 부유한 산살바도르 교외 지역까지 전투를 확산시켰으며, FMLN은 정치 및 군 관계자, 민간 관리, 상류층 민간인에 대한 선택적 암살 작전을 개시했다.[131]

1991년 중반, 유엔이 중재한 평화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정부군과 FMLN 양측 모두 공세를 강화하면서 전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이는 군대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처형 증가로 이어졌다.[158] 이러한 공방 끝에 1991년 4월 협상이 재개되었고, 1992년 1월 성공적인 휴전으로 이어져 내전은 종식되었다.
3. 5. 평화 협상과 내전 종식
중앙아메리카에 반공주의 정권을 세우려 했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경제 원조와 군사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했다.[188]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정부군과 우익 죽음의 부대, 그리고 FMLN 게릴라 간의 교전을 심화시켜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2년, FMLN은 "광범위한 참여 정부" 수립을 위한 평화협정을 요구했으나, 레이건 행정부는 FMLN이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99] 우익 준군사조직의 공격과 FMLN의 보이콧 요구 속에서 선거는 중단되었고, 살바도르 전국 변호사 연맹은 계엄령 하에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불가능하다며 선거법 초안 작성 참여를 거부했다.
1987년 중앙아메리카 평화협정 협상 과정에서 FMLN은 모든 사살대 해체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살바도르 의회는 내전 관련 범죄에 대한 사면을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게릴라와 정치범뿐만 아니라 인권 침해에 연루된 군대, 보안군, 준군사조직원들에게도 사면을 부여하여 논란이 되었다.[128][129]
10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538만여 명의 인구 중 1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고, 난민들의 주택 중 40%가 완전히 파괴되었다.[153] 1990년 7월 26일 정부와 FMLN이 유엔 인권 협정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살대의 활동은 오히려 악화되었다.[154] 같은 해 6월,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투자 환경 개선을 명목으로 "미주 기업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155]
부시 대통령은 1991년 1월 살바도르군에 대한 4250만달러의 군사 원조를 승인했다.[156] 이후 선거 과정에서 아레나(ARENA, 국민연합당) 당의 선거 방해와 폭력 행위, 유권자 명부 조작 등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공식 관찰단은 선거를 "자유롭고 공정하다"고 선언했다.[157] 1991년 중반, 유엔이 중재하는 평화 회담을 앞두고 군대와 FMLN 양측 모두 우위를 점하려 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군대의 무차별 공격과 처형이 증가했다.[158]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 명분이 약화되었고, 이는 평화 협상 진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85] 마침내 1991년 4월 협상이 재개되어 1992년 1월 16일,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성에서 정부와 FMLN 간의 차풀테펙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159] 이 협정으로 군대의 역할을 규제하고 민간 경찰을 창설하며, FMLN은 게릴라 군대에서 정당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또한 1993년에는 사면법이 제정되었다.[160]
1992년 유엔의 중재와 유엔 평화유지군(유엔 엘살바도르 관찰단) 파견을 통해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190] 평화협정에 따라 군대는 1993년까지 병력을 전시 최대 6만 3천 명에서 3만 2천 명으로 감축했으며, 1999년에는 1만 5천 명 미만으로 줄었다. 인권 침해와 부패 혐의로 기소된 군 장교들에 대한 숙청도 1993년에 완료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는 우익 정당인 민족주의 공화동맹(ARENA)이 집권했다.

유엔 진실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 중 발생한 폭력 행위의 85%는 친정부 세력인 죽음의 부대와 엘살바도르군이 저질렀으며, FMLN 게릴라가 저지른 행위는 5%로 조사되었다.[191] 특히 1989년 11월, 미 육군 특수부대 그린 베레의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육군 아틀라카틀 대대(Batallón Atlácatl)가 예수회 사제 6명과 요리사 모녀를 살해한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189]
전쟁 종식 후, 인권 단체들은 스페인과 미국 법원 등을 통해 책임자 처벌을 시도했다. 2008년 스페인에서는 예수회 사제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전 대통령 크리스티아니와 전 국방장관 라리오스를 상대로 반인도 범죄에 대한 보편적 관할권 원칙에 따라 소송이 제기되었다.[180] 미국에서는 살해된 메리놀 수녀회 소속 수녀들의 유족이 카를로스 외제니오 비데스 카사노바 장군과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 장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그러나 다른 고문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5400만달러가 넘는 배상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스페인 판사는 미국 정부에 예수회 사제 살해 사건 관련 문서의 기밀 해제를 요청했으나, 정보원 보호 등을 이유로 거부당했다.[181][182]
4. 내전 이후
1984년 선거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의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가 군부 독재 하의 극심한 탄압과 폭력 속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54%의 득표율로 국민연합당(ARENA)의 군 장성 로베르토 다우비손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12]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두아르테의 기독교 민주당보다 좌파 성향의 후보들은 참여 자체가 배제되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다우비손의 대통령 당선을 공공관계 측면에서 우려하여 두아르테의 선거 운동에 약 200만달러를 지원했으며,[113] 선거 기술, 행정 및 국제 관찰자를 위해 총 1000만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114]
두아르테의 승리 이후에도 군과 보안군의 인권 침해는 계속되었지만, 이전보다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아르테 정부는 3개의 안보 부대를 국방부 차관 직속으로 배치하여 정부에 대한 책임성을 높이려 시도했으나, 각 부대는 여전히 군 장교가 개별적으로 지휘했고 정부 내 지휘 구조를 고려할 때 책임성 강화 조치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115][116] 또한 두아르테 정부는 심각한 인권 침해에 연루된 안보 부대 인원을 해임하는 대신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는 데 그쳤다.[117]
4. 1. FMLN의 정당화와 정치 참여
1979년 10월 18일 JRG 군사정부가 시행한 조치에 따라 1982년 4월 29일 과도 정부 선거가 실시되었다.[105] 입법 의회는 무장 세력이 지명한 세 명의 후보를 놓고 투표했으며, 알바로 알프레도 마가냐 보르하가 36표를 얻어 17표를 얻은 국민 화합당과 극우 국민 공화 연합(ARENA)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ARENA의 로베르토 다우비손은 하이메 아브둘 구티에레스 아벤다뇨가 ARENA 의원들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바로 알프레도 마가냐 보르하를 대통령직에 임명하려는 그의 개인적인 결정"을 의회에 강요했다고 비판했다. 마가냐는 5월 2일에 취임했다.[105]같은 해 국회 법령 제6호는 토지 개혁 시행 3단계를 중단시켰으며, 이후 수정되었다. 1982년 8월 3일에는 평화, 민주화, 인권, 경제 회복, 안보 및 국제적 지위 강화를 목표로 하는 국가 통합 정부 수립을 위한 아파네카 협정이 체결되었다. 민주 체제를 수립할 과도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정부 구성 세력 간의 합의 부족과 무력 충돌의 압력으로 인해 마가냐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실질적인 변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105]
FMLN은 내전 종결 후 정당으로 변모하여 정치에 참여했다. 1994년 선거에서는 ARENA에 패배했지만, 2000년대 들어 엘살바도르의 양대 정당 중 하나로 성장했다. 마침내 2009년 선거에서 ARENA를 누르고 원내 1당에 오르며 마우리시오 푸네스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후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까지 연이어 대통령을 배출하며 집권했다.
4. 2.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차풀테펙 협정에 따라 수립된 평화 과정은 1991년부터 유엔에 의해 감시되었으며, 특별 감시 임무는 1997년 6월에 종료되었다.
1996년, 미국 당국은 처음으로 내전 중 미군 병력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공식적으로 미국 고문들은 전투 작전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무기를 휴대하고 살바도르 군인들과 현장을 함께 다녔으며 이로 인해 반군의 표적이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21명의 미국인이 전사했고 5,000명 이상이 엘살바도르에서 복무했다.[161]
전쟁 종결 후, 엘살바도르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the Truth for El Salvador)가 설립되어 1980년 1월부터 1991년 7월까지 발생한 22,000건 이상의 정치적 폭력 사건에 대한 고소를 접수했다. 이 중 60%는 집단 살해, 25%는 납치, 20%는 고문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접수된 고소 내용에 따르면, 폭력의 약 85%는 엘살바도르 군 및 보안군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46억달러, 2009년 기준)[162]을 받은 엘살바도르 무장군(Salvadoran Armed Forces)은 고소 건수의 60%에서, 보안군(엘살바도르 국가경비대, 재무경찰, 국가경찰)은 25%, 군 호송대 및 민방위 부대는 20%, 죽음의 분대는 약 10%, 그리고 FMLN은 5%에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었다.[162] 진실위원회는 단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자료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체 사건 중 일부 표본만을 조사할 수 있었다.[163] 위원회 보고서는 내전으로 70,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중 다수가 심각한 인권 침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992년 유엔 평화 조약 체결 이전에는 인구의 25% 이상이 난민이 되어 나라를 떠났다.[164][165]
진실위원회 보고서의 통계는 국제 사회와 인권 감시 단체들의 이전 및 이후 평가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들 단체 역시 엘살바도르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폭력과 탄압이 정부 기관, 특히 엘살바도르 국가경비대와 엘살바도르 군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기록했다.[166][167][168] 1984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는 이전 5년간 살해된 40,000명 중 상당수가 정부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정부군은 인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시신을 훼손하여 유기했다고 밝혔다.[169][170]
정부군은 주로 농민들을 살해했지만, 게릴라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받은 성직자, 교회 평신도, 정치 활동가, 언론인, 노동 조합원, 의료 종사자, 자유주의 성향의 학생과 교사, 인권 감시 단체 회원 등 다른 반대 세력 역시 살해 대상이 되었다.[171] 이러한 살해는 보안군, 군대, 국가경비대, 재무경찰에 의해 자행되었다.[172][173] 특히, 준군사 조직인 죽음의 분대는 정부가 살인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데 이용되었다. 죽음의 분대는 보통 민간인 복장을 하고 번호판 없는 차량을 이용했으며, 희생자 명단을 발표하거나 표적 인물에게 관을 보내거나 자신의 장례식 초대장을 보내는 등의 심리적 테러 전술을 사용했다.[174][175] 휴먼 라이츠 워치의 신시아 아른슨은 "죽음의 분대 테러의 목표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문과 끔찍한 시신 훼손을 통해 인구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기도 했다"고 지적했다.[176] 1980년대 중반에는 군용기의 무차별 폭격, 지뢰 매설, 의료진 괴롭힘 등 민간인에 대한 국가 테러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177]
진실위원회가 기록한 폭력 사건 중 FMLN의 책임은 5% 미만이었지만, FMLN 역시 우익 지지자, 군사 목표, 친정부 정치인, 지식인, 공무원, 판사 등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침해했다. 이러한 침해 행위에는 납치, 폭탄 테러, 강간, 살인 등이 포함되었다.[163]
1987년 10월 26일, 엘살바도르 인권위원회(CDHES) 위원장인 에르네스토 아나야(Herbert Ernesto Anaya)가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4일간의 정치적 시위를 촉발시켰고, 시위대는 그의 유해를 미국 대사관과 엘살바도르군 본부 앞에 안치하며 항의했다. 엘살바도르 전국 노동자 연합은 "이 범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대통령, 미국 대사관, 그리고 군 최고 사령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위원회 보고서는 사살대, 엘살바도르군, FMLN 중 어느 쪽이 아나야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FMLN과 혁명민주전선(FDR)은 아나야 암살에 항의하며 1987년 10월 29일 두아르테 정부와의 협상을 중단했다. 같은 날, 레니 롤단은 국가 화해 위원회에서 사임하며 "아나야의 살해와 다른 사건들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제도화된 폭력 패턴의 일부"라고 비판했다. 아나야 암살은 국제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서독 정부, 서독 사회민주당, 프랑스 정부는 두아르테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유엔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쿠에야르, 아메리카스 워치, 국제앰네스티 등 여러 국제기구와 단체들도 암살 사건에 항의했다.[179]
내전 중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다른 국가의 법원에 개입을 요청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2008년, 스페인 인권 협회와 미국의 정의와 책임 센터(CJA)는 1989년 예수회 사제들과 그들의 가정부 및 딸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스페인 법원에 전 대통령 크리스티아니와 전 국방장관 라리오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크리스티아니가 살인 사건 은폐에 연루되었고, 라리오스는 살해 지시가 내려진 회의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며, 반인도 범죄에 대한 보편적 관할권 원칙에 따라 스페인 법원의 재판을 요구했다.[180]
미국 연방 법원에서는 살해된 메리놀 수녀들의 유족들이 책임자로 지목된 두 명의 살바도르 장군(카를로스 외제니오 비데스 카사노바,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을 상대로 `''포드 대 가르시아''`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배심원단은 두 장군에게 책임이 없다고 평결했고, 항소심과 미국 대법원의 최종 상고도 기각되었다. 그러나 같은 장군들을 상대로 제기된 `''로마고자 대 가르시아''` 소송에서는 고문을 당한 세 명의 원고가 승소하여 5400만달러가 넘는 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후 미국 상원의원들의 촉구로 이민 및 세관 집행국(ICE)은 두 장군에 대한 추방 절차를 시작했으나, 2010년 5월까지 해당 절차는 중단된 상태였다.
스페인 판사 벨라스코는 예수회 사제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20명의 살바도르 군인에 대한 기소장과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미국 기관에 관련 문서의 기밀 해제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181] 정보 공개 담당 기관들은 정보원 보호 등을 이유로 3,000건 이상의 문서를 비공개로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182]
미국 정부가 친정부 세력을 지원하고 FMLN에 반대한 배경에는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가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FMLN이 쿠바, 니카라과, 소련으로부터 비밀 지시와 무기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담은 살바도르 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183] 이 백서는 이후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 정보에 기반한 것이었다.[184]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개입 유인이 줄어들었고, 이는 1992년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185]
내전 당시 엘살바도르의 정치적, 경제적 분열은 매우 복잡했으며, 특정 입장을 옹호하는 분석가들이 간과하는 측면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치적 독립 세력이나 민주주의 연합의 일원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186] 2012년 평화 협정 20주년 기념 세미나 이후, 마이클 앨리슨은 "전후 담론 대부분은 게릴라 또는 정부 측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며, "이들의 관점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다양한 견해를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186]
4. 3. 사회경제적 문제의 지속
1980년대 후반 엘살바도르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인구의 75%가 빈곤 속에 살았으며,[149] 대부분 국민의 생활 수준은 1983년 이후 30%나 감소했다.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인 인구 비율은 50%까지 치솟았다.[150] 게다가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깨끗한 물이나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군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인플레이션은 거의 40%까지 상승했으며, 자본 유출 규모는 약 10억달러에 달했다. 경제 엘리트들은 세금 납부를 회피했다.[151] 미국으로부터 거의 3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인당 소득은 오히려 3분의 1이나 감소했다.[149]
미국의 원조는 주로 도시의 기업들에게 집중적으로 배분되었고, 정작 도움이 절실했던 빈곤한 대다수 국민에게는 거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151] 부의 집중 현상은 미국이 지원했던 토지 개혁 프로그램 시행 이전보다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농지법은 경제 엘리트들에게 예상치 못한 이익을 안겨주었고, 농업 협동조합을 부채에 시달리게 하여 자본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만들었다. 종종 씨앗이나 비료를 구매할 자금조차 부족해 파산한 농민들의 땅은 다시 소수의 재벌들에게 넘어갔다.[152] 당시 상황은 "가난한 사람들 중 지주를 상대로 법적 구제를 구할 꿈을 꿀 사람은 거의 없으며, 사실상 어떤 판사도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될 정도였다.[151] 1989년 통계에 따르면,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경작 가능 토지의 41%를 소유한 반면, 농촌 인구의 60%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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