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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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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 플랜은 1929년 도스 계획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독일 배상금 지불 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일 배상 부채를 360억 독일 제국 마르크로 규정하고, 1988년까지 상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 플랜은 독일 경제의 자율성을 회복시키고, 배상금 지불 방식을 조정했으며, 국제결제은행(BIS)을 설립하여 배상금 지급을 관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인한 대공황의 여파로 영 플랜은 좌절되었고, 독일은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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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플랜
개요
명칭영 플랜
다른 이름영안 (ヤング案)
종류배상금 문제 해결 시도
배경
배경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
목표
목표독일 배상금 문제 해결
주요 내용
배상액 감축배상 총액 1,210억 마르크로 감축
연간 지불액연간 지불액 20억 5천만 마르크
배상 기간59년간 배상
라인란트 점령연합군의 라인란트 점령 철수
참가국
주요 참가국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벨기에
일본
결과 및 영향
결과독일의 배상 부담 완화, 국제 금융 안정 도모
영향독일 내부의 반발, 나치즘 부상에 영향
대체로잔 회의에서 배상 중단 결정 (1932년)
관련 인물
주요 인물오언 영 (작성자)
얄마르 샤흐트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연도
발표1929년
같이 보기
관련 조약도스 안
관련 회의로잔 회의

2. 역사적 배경

2. 1. 도스 안의 문제점

1924년 9월 1일에 발효된 도스 계획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를 황금기(1924–1929년)로 이끌었지만, 막대한 대외 부채를 대가로 지불이 이루어졌다는 문제점이 있었다.[2][3] 모든 측면에서 1927년부터 이 계획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4]

월 스트리트 은행과 미국 재무부는 독일이 과도한 부채를 지게 될 것을 우려했다.[4] 1924년 이후 100억 마르크 이상의 외채가 독일로 유입되었으며, 지불 위기 발생 시 사채와 배상금 중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4]

프랑스 정부 또한 1919년 이래 미국이 프랑스의 연합국 간 전쟁 부채 상환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독일 배상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5] 프랑스는 1924년과 1925년의 인플레이션 이후 프랑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긴급 차관이 필요했지만, 전쟁 부채 문제로 인해 미국의 자본 시장은 프랑스에 닫혀 있었다. 이 문제는 1926년 4월 멜론-베랑제 협정으로 해결되었으나,[5] 프랑스 하원은 독일 배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 협정 비준을 거부했다. 프랑스는 독일로부터의 자금이 프랑스의 미국 지불에 사용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배상 계획에 동의하고, 심지어 1921년 런던 지불 계획에서 요구한 금액보다 적은 금액으로 해결하는 데 동의했다.

독일 역시 도스 계획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1928년에는 처음으로 연간 25억 마르크의 전액 지불이 예정되어 있었는데,[6] 이는 독일 정부 지출 총액의 12.4%, 국민 소득의 3.3%에 해당했다.[6] 경제가 계속 발전한다면, 계획의 번영 지수는 훨씬 더 높은 금액을 요구하여 독일의 지불 능력을 초과할 위험이 있었다.

2. 2. 헤이그 회담

1928년 국제 연맹 회의에서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은 배상 문제 해결과 라인란트 점령 종식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7] 1929년 8월 6일부터 31일까지 열린 헤이그 회담에서 영 플랜 초안이 합의되었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라인란트 철수에 동의하여 점령 최종 기한을 1930년 6월 30일로 합의했다.[7] 필립 스노든은 영국에 대한 연간 배상금 지급액 인상을 요구하기도 했다.[7]

1930년 1월 3일부터 20일까지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는 국제 결제 은행 설립 등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다.[8] 또한 독일이 영 플랜을 파기할 경우 채권국은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되찾는 것으로 합의되었다.[9] 주식 시장 붕괴로 인해, 미국 자본 시장이 유럽 채권국을 위한 독일 배상 부채 전체를 자금 조달하는 것은 어려워졌다.[10] 영 플랜은 공식적으로 "새로운 계획"이라고 불렸으며, 라인란트 철수에 대한 합의는 1930년 1월 20일 6개 강대국의 정부 수반들이 서명했다.[10]

3. 내용

영 플랜은 360억 독일 제국 마르크에 해당하는 독일 배상 부채를 규정했다. 이 부채는 1988년까지 이자를 포함하여 상환될 예정이었으며, 총 11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1] 연간 할부금은 17억에서 21억 독일 제국 마르크로 급증하다가 1966년 이후에는 16억 5천만 독일 제국 마르크로 감소할 예정이었다. 1930년을 기준으로 독일은 연평균 수출의 약 12%, 순 국민총생산의 2.5%, 모든 공공 수입의 7.3%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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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 플랜의 송금 보호가 폐지되어, 앞으로 독일은 세입으로 조성된 금액을 외국 통화 또는 현물로 국제 결제 은행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었다. 이 기구는 폐지된 배상 위원회의 기능을 인수했으며, 배상금 지불을 위한 총 대리인의 직위도 사라졌다. 채권국들이 도스 플랜에서 확보했던 독일 국영 철도(Deutsche Reichsbahn)와 독일 제국 은행(Reichsbank)에 대한 통제 역시 중단되었으며,[11] 경제 상황이 유리할 경우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독일이 확신할 수 있었던 번영 지수 또한 폐지되었다.

채권국 기업들과 종종 경쟁 관계에 있었던 현물 인도(예: 석탄)는 10년 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남아있는 외국 통화 지급 의무는 모든 상황에서 외국 통화로 송금해야 하는 무보호 할부금과, "상대적으로 짧은 불황"의 경우 처음에는 독일 제국 마르크로 송금할 수 있지만 2년 이내에 외국 통화를 인도해야 하는 2배 이상 큰 보호 할부금으로 나뉘었다.[13] 보호 할부금은 채권국들이 영 플랜에 첨부한 동시각서(Concurrent Memorandum)를 통해 연합국 간의 전쟁 부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14]

1930년 5월 17일, 영 플랜은 1929년 9월 1일로 소급하여 발효되었다. 동시에 영 채권이 시장에 출시되었다. 독일은 35년 동안 5.5%의 이자로 14억 7천만 독일 제국 마르크(3억 금 마르크)를 차입했다. 이 금액의 3분의 2는 배상 채권자에게 돌아갔고, 독일 경제 지원에 사용되었으며, 3분의 1은 우편 서비스와 국영 철도에 사용되었다. 월스트리트 대폭락 이후 자본 시장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은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15]

도즈 안에서는 일단 배상 총액이 백지화되었지만, 영 플랜에서는 배상 잔액을 358억 1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정했다. 독일은 1988년까지 59년간 연부 형태로 지불한다. 매년 독일은 이자와 도즈 채권의 원금 지불을 포함하여 평균 20억 5천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을 외화로 지불한다. 1930년에는 17억 라이히스마르크, 그 후 21억 라이히스마르크가 되었으며, 1966년 이후에는 16.5억 라이히스마르크가 된다. 실제 지불은 지연되었다. 로잔 회의에서 배상 채무는 감액되었다.

일본은 배상 지불을 받는 국가 중 하나였으며, 스파 회의 (1920년 7월)의 결정에 따라 배상 지불 중 0.75%를 받았다. 영 플랜에서도 첫해에는 125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지불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제8조 C항에 의해 대독 배상 청구를 포기했다. 스파 회의에서 결정된 각국의 분배율은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유고슬라비아 5%였다.

배상 분배 기관으로 국제 결제 은행을 창설했으며, 일본 은행은 배상 채권국임을 이유로 주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일이 후의 금 해제를 위한 보이지 않는 압력이 되었다. 출자금은 일본 흥업 은행을 시작으로, 미쓰이, 미쓰비시, 야스다, 스미토모라는 구 재벌 계열 은행을 포함한 14개 은행이 거의 균등하게 국채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조달되었다.

독일 국내에서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이끄는 국가 인민당, 철모단과 전국 농촌 연맹,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 등은 영 플랜을 "독일 국민 노예화법"이라고 반발하며 반 영 플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은 미국 자본에 의해 지배되었다. 국민 투표가 실시된 결과, 94.5%의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영 플랜은 비준되었다.

공황으로 베르사유 체제는 동요했다. 1934년 2월 발칸 우호 동맹 (터키, 그리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이 조직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와 루이 바르투 암살 사건이 일어나 프랑스가 파울 판 제에란트를 통해 미국에 접근해 갔다.

3. 1. 배상금 규모 및 지급 방식

영 플랜은 360억 독일 제국 마르크에 해당하는 독일 배상 부채를 규정했다. 이 부채는 1988년까지 이자를 포함하여 상환될 예정이었으며, 총 11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1] 1930년을 기준으로 독일은 연평균 수출의 약 12%, 순 국민총생산의 2.5%, 모든 공공 수입의 7.3%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12] 배상 잔액은 358억 1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정해졌으며, 독일은 1988년까지 59년간 연부 형태로 지불해야 했다. 매년 독일은 이자와 도즈 채권의 원금 지불을 포함하여 평균 20억 5천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을 외화로 지불해야 했는데, 1930년에는 17억 라이히스마르크, 그 후 21억 라이히스마르크, 1966년 이후에는 16.5억 라이히스마르크로 조정될 예정이었다.[11][12] 실제 지불은 지연되었으며, 로잔 회의에서 배상 채무는 감액되었다.

도스 플랜의 송금 보호가 폐지되어, 독일은 세입으로 조성된 금액을 외국 통화 또는 현물로 국제 결제 은행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었다. 배상 위원회의 기능은 국제결제은행이 인수하였고, 배상금 지불을 위한 총 대리인의 직위도 사라졌다. 채권국들이 도스 플랜에서 확보했던 독일 국영 철도(Deutsche Reichsbahn)와 독일 제국 은행(Reichsbank)에 대한 통제 역시 중단되었으며,[11] 경제 상황이 유리할 경우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독일이 확신할 수 있었던 번영 지수 또한 폐지되었다.

현물 인도(예: 석탄)는 10년 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남아있는 외국 통화 지급 의무는 무보호 할부금과 보호 할부금으로 나뉘었다. 무보호 할부금은 모든 상황에서 외국 통화로 송금해야 했고, 보호 할부금은 "상대적으로 짧은 불황"의 경우 처음에는 독일 제국 마르크로 송금할 수 있지만 2년 이내에 외국 통화를 인도해야 했다.[13] 보호 할부금은 채권국들이 영 플랜에 첨부한 동시각서(Concurrent Memorandum)를 통해 연합국 간의 전쟁 부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14]

일본은 배상 지불을 받는 국가 중 하나였으며, 스파 회의 (1920년 7월)의 결정에 따라 배상 지불 중 0.75%를 받았다. 영 플랜에서도 첫해에는 125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지불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제8조 C항에 의해 대독 배상 청구를 포기했다. 스파 회의에서 결정된 각국의 분배율은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유고슬라비아 5%였다. 배상 분배 기관으로 국제 결제 은행이 창설되었으며, 일본 은행은 배상 채권국임을 이유로 주주로 인정받았다.

3. 2. 국제결제은행(BIS) 설립

영 플랜에 따라 배상금 지급을 관리하고 국제 금융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이 설립되었다.[11] 폐지된 배상 위원회의 기능을 인수했으며, 배상금 지불을 위한 총 대리인의 직위도 사라졌다. 채권국들이 도스 플랜에서 확보했던 독일 국영 철도(Deutsche Reichsbahn)와 독일 제국 은행(Reichsbank)에 대한 통제 역시 중단되었다.[11]

도스 플랜의 송금 보호가 폐지되어, 독일은 세입으로 조성된 금액을 외국 통화 또는 현물로 국제 결제 은행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었다. 경제 상황이 유리할 경우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독일이 확신할 수 있었던 번영 지수 또한 폐지되었다. 일본 은행도 배상 채권국으로서 BIS 주주로 참여했다.

4. 각국의 반응

4. 1. 프랑스

영 플랜은 프랑스에서 대체로 환영받았다. 좌파 및 자유주의 언론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우파 정치 세력에서만 이 계획과 그에 따른 라인란트 철수가 프랑스 공화국의 재정적, 군사적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총리 레몽 푸앵카레. 그는 프랑스 의회에 영 플랜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외무 장관 역시 총리로서 영 플랜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모든 정부가 민족주의자 및 우익 가톨릭과 연합한 정치적 중도에 기반했기 때문에 프랑스 의회에서 어려움이 발생했다. 1929년 7월까지 영 플랜을 완료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는 연합국 간의 전쟁 부채에 대한 합의 비준 기한이었다. 따라서 푸앵카레는 독일이 영 플랜에 동의하기 전에 프랑스가 미국에 빚진 멜론-베랑제 협정을 의회에 비준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우파 정치 세력과 사회주의자 모두 두 부채를 연계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원은 1929년 7월 12일, 충분한 배상금이 독일로부터 징수되는 한에서만 이행될 것이라는 유보 조항과 함께 멜론-베랑제 협정을 근소한 다수로 승인했다. 조건부 비준은 미국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보 조항은 법적 효력을 얻지 못했고, 부채 협정만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푸앵카레는 며칠 후 사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영 플랜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역시 사임한 후, 민주 공화 연합의 앙드레 타르디외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1930년 3월 29일, 영 플랜 비준에 대한 다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공화 연맹의 여러 의원들의 뜻에 따라 그는 독일 국회가 승인할 때까지 의회 토론을 연기했다. 신임 재무 장관 폴 레노의 연설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영 플랜은 배상금을 독일의 사채와 동등한 위치에 두어 배상금을 확보했으며, 연합국 간의 전쟁 부채를 충당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프랑스 영토 재건을 위한 잉여금을 창출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원래 금액인 1,320억 금 마르크에 이자를 더한 금액은 포기해야 했지만, "이 희생은 영구적인 해결을 위한 대가"였다. 그는 대규모 배상금을 동원하여 연합국 간의 부채를 일시불로 상환하려는 원래 목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뉴욕 증권 거래소의 붕괴 이후 그러한 규모의 재정적 조작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영 플랜 채택 후, 프랑스는 독일과의 더 긴밀한 협력을 모색했다. 타르디외는 독일 대사에게 "독일과의 의식적인 접근"이 그의 정부의 목표라고 말했다. 배상금 문제에 대한 겉보기 영구적인 해결책과 점령된 라인란트 철수로 인해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롯된 마지막 쟁점들이 해결된 것으로 보였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길이 열렸다.

4. 2. 독일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등 민족주의 세력은 영 플랜을 "독일 국민 노예화법"이라 비판하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18]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도 이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18] 이들은 '독일 국민 노예화 반대법(자유법)' 제정을 목표로, 모든 배상금 포기, 새로운 배상 의무 부과 조약 서명 독일 공무원 형사 처벌, 전쟁 책임 및 독일 영토 점령 포기를 주장했다.[19] 1929년 10월 16일, 자유법 제안이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고, 이어진 국민투표에서도 투표율 미달로 실패했다.[20]

영 플랜은 1930년 3월 12일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11]

4. 3. 일본

5. 결과 및 영향

1929년 월가 대폭락은 "영 플랜"의 최초 합의와 채택 사이에 발생했다. 대공황을 알리는 심각한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해,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1931년 7월까지 15개국으로부터 배상금 지불 1년 유예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21]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1932년 로잔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본질적으로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종식시켰다.[22]

그러나 독일은 1924년과 1930년에 발행된 도스 채권과 영 채권에 대한 이자를 계속 지불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었으며, 독일은 1939년 전쟁 발발 시 이자 지불을 중단했다.[23] 1934년 11월, 영국과 독일은 영-독 지불 협정을 체결했는데, 다른 조건들 중 독일은 도스 채권과 영 채권 모두에 대해 파운드 스털링으로 이자를 계속 지불하기로 합의했다.[23]

1931년까지 독일의 총 배상금 지불액은 약 361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4]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국제 회의(독일 대외 채무에 관한 런던 협정, 1953)에서 독일은 통일 후에만 나머지 부채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서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까지 원금을 상환했고, 독일의 재통일 이후 1995년, 새로운 독일 정부는 영 채권을 포함한 이자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2010년에 미국에 이자를 지불했고,[25] 2020년에는 다른 국가에 이자를 지불할 예정이었다.[26] 2010년, 타임지는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배한 지 거의 92년 후인 10월 3일에 대전과 관련된 마지막 배상금 지불을 했다"고 보도했다.[27]

5. 1. 대공황과 영 플랜의 좌절

1929년 월가 대폭락은 "영 플랜"의 최초 합의와 채택 사이에 발생했다. 대공황을 알리는 심각한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해,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1931년 7월까지 15개국으로부터 배상금 지불 1년 유예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21]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1932년 로잔 회담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종식시켰다.[22]

1931년까지 독일의 총 배상금 지불액은 약 361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4]

그러나 독일은 1924년과 1930년에 발행된 도스 채권과 영 채권에 대한 이자를 계속 지불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었으며, 독일은 1939년 전쟁 발발 시 이자 지불을 중단했다.[23] 1934년 11월, 영국과 독일은 영-독 지불 협정을 체결했는데, 다른 조건들 중 독일은 도스 채권과 영 채권 모두에 대해 파운드 스털링으로 이자를 계속 지불하기로 합의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국제 회의(독일 대외 채무에 관한 런던 협정, 1953)에서 독일은 통일 후에만 나머지 부채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서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까지 원금을 상환했고, 독일의 재통일 이후 1995년, 새로운 독일 정부는 영 채권을 포함한 이자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2010년에 미국에 이자를 지불했고,[25] 2020년에는 다른 국가에 이자를 지불할 예정이었다.[26] 2010년, 타임지는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배한 지 거의 92년 후인 10월 3일에 대전과 관련된 마지막 배상금 지불을 했다"고 보도했다.[27]

5. 2. 로잔 회의와 배상금 지급 중단

1929년 월가 대폭락 이후 대공황으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기에,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1931년 7월까지 15개국으로부터 배상금 지불 1년 유예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21]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1932년 로잔 회담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회담을 통해 독일의 배상금 지불은 사실상 종식되었다.[22]

그러나 독일은 1924년과 1930년에 발행된 도스 채권과 영 채권에 대한 이자는 계속 지불했다. 이 채권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었으며, 독일은 1939년 전쟁 발발 시 이자 지불을 중단했다.[23] 1934년 11월, 영국과 독일은 영-독 지불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이 도스 채권과 영 채권 모두에 대해 파운드 스털링으로 이자를 계속 지불하기로 합의했다.[23]

1931년까지 독일의 총 배상금 지불액은 약 361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4]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국제 회의(독일 대외 채무에 관한 런던 협정, 1953)에서 독일은 통일 후에만 나머지 부채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서독은 1980년까지 원금을 상환했고, 독일의 재통일 이후 1995년, 새로운 독일 정부는 영 채권을 포함한 이자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2010년에 미국에 이자를 지불했고,[25] 2020년에는 다른 국가에 이자를 지불할 예정이었다.[26] 2010년, 타임지는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배한 지 거의 92년 후인 10월 3일에 대전과 관련된 마지막 배상금 지불을 했다"고 보도했다.[27]

5. 3. 전후 처리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1931년 7월까지 15개국으로부터 배상금 지불 1년 유예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21]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1932년 로잔 회담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22]

하지만 독일은 1924년과 1930년에 발행된 도스 채권과 영 채권에 대한 이자를 계속 지불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었다. 독일은 1939년 전쟁 발발 시 이자 지불을 중단했다.[23] 1934년 11월, 영국과 독일은 영-독 지불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이 도스 채권과 영 채권 모두에 대해 파운드 스털링으로 이자를 계속 지불하기로 합의했다.[23] 1931년까지 독일의 총 배상금 지불액은 약 361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4]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열린 국제 회의(독일 대외 채무에 관한 런던 협정, 1953)에서 독일은 통일 후에만 나머지 부채를 지불하기로 결정했다.[25] 서독은 1980년까지 원금을 상환했고, 독일의 재통일 이후 1995년, 독일 정부는 영 채권을 포함한 이자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은 2010년에 미국에 이자를 지불했고,[26] 2020년에는 다른 국가에 이자를 지불할 예정이었다.[27] 타임지는 2010년에 독일이 "연합군에게 패배한 지 거의 92년 후인 10월 3일에 대전과 관련된 마지막 배상금 지불을 했다"고 보도했다.[27]

6. 동유럽 문제



1929년 2월 11일 파리에서 최초의 영 위원회가 열렸다.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장 오웬 D. 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에는 모리 겐고와 토머스 래먼트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표로 참가했다. 최종 협상은 1929년 8월과 1930년 1월 헤이그에서 진행되었다. 영 안은 1930년 5월 17일에 발효되어 1929년 9월 1일에 소급 적용되었다. 이처럼 소급 적용이 가능했던 것은 영 안이 그 시점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발표는 검은 목요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유럽의 전승국이 부흥을 위해 미국에서 수입한 상당액의 지불은, 중앙 동맹국에 대한 배상 채권을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체제가 종속시키려 했던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는 세계 대공황의 조짐을 느끼고 자율을 지향하게 되었고, 방치하면 열강 각국의 이권이 교착하는 "유럽의 화약고"로 역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 ·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 벨기에 5개국은 동방 배상 문제가 두 차례의 헤이그 회의에서도 진전되지 않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소협상국 삼국(루마니아 · 체코슬로바키아 · 유고슬라비아)의 다툼인 옵탄-옹글로아 문제에 대해 5개국이 타협안을 제시하고 불복하면 영 안만 성립시키고 철수하겠다고 압박했으며, 해당 분쟁의 상대방인 헝가리의 과실도 지적했다. 이렇게 1930년 1월 회의 종료 전날 밤에 철야 협상이 이루어졌고, 동방 배상 문제는 진전되었다. 마지막 날인 20일에는 여러 협정이 성립되었고,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배상 책임이 면제되었다.

6. 1. 옵탄-옹글로아 문제

옵탄-옹글로아 문제(Conflit des optants hongrois)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동유럽 국가들이 토지 재분배를 위해 농지 개혁을 실시하면서 발생했다. 루마니아에서 전 지주에 대한 수용 보상액은 농지법이 지가의 1%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을 근거로 공정한 보상액을 지불할 것을 주장했다. 루마니아는 내외국인 평등의 원칙을 이유로 양국 혼합 중재 재판에서 다퉜으나, 분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 두 차례의 헤이그 회담에 위탁되었으나 교착 상태에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관계 각국이 두 개의 기금을 설정하고, 5대 강국은 상위 기금의 자금에 충당하기 위해 헝가리에 대한 배상 채권을 포기하며, 영·불·이 3개국은 일정액을 출연하여 상위 기금을 보조하는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동방 배상 문제의 진전에 따라 1930년 1월 20일에 관련 협정이 성립되었다. 헝가리의 배상 문제와 옵탄-옹글로아 문제의 해결을 대강으로 정한 가협정도 서명되었으며, 훗날 파리에서 전문 위원회가 대강을 수정·구체화하고 4월 28일 확정 안건을 작성하여 관계국 대표의 서명을 받았다.

6. 2. 불가리아와의 협정

1930년 1월 헤이그에서 열린 회의에서 보리스 3세의 불가리아연합국과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은 같은 달 20일자로 14개 조항과 최종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오스만 채무 관리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관련 채권 채무 관계를 정리했다. 협정 원본은 한 통이며, 프랑스가 비준서와 기탁 조서의 인증 등본을 서명국에 한 통씩 보냈다. 1936년 10월 7일 하라 가도가 일본어 번역본을 주오 대학에 기증했고, 현재도 동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문구에 국제결제은행이 등장하므로, 이 협정은 영 플랜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채권국은 1923년 3월 21일 의정서에 의해 정해진 불가리아의 배상 채무의 을종 부분을 포기한다. 또한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점령군에 관한 자국의 청구권 중 미불 잔액을 포기한다.

  • 제2조: 채권국은 아래 지불표에 정해진 금 프랑(뇌이 조약 제146조에 의해 정해진 것)에 의한 연금을, 본일까지 미불이었던 불가리아의 배상 채무의 갑종 부분 전액의 변제로서 수락한다.
  • * 1930년 4월 1일 500만 금 프랑
  • * 1930년 4월 1일부터 1940년 3월 31일까지 1000만 금 프랑 10회
  • * 1940년 4월 1일부터 1950년 3월 31일까지 1150만 금 프랑 10회
  • * 1950년 4월 1일부터 1966년 3월 31일까지 1251만 5238 금 프랑 10회

  • 제3조: 전조에 정해진 연금은 무조건적인 채무를 구성하며 서명국은 향후 뇌이 조약 제122조의 적용을 포기한다. 단, 불가리아는 1926년 6월 10일 국제 연맹 이사회에 의해 승인된 재정 계량에 따라, 1926년 7월 23일 배상 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마련된 대체 정지 절차의 적용이 필요한 경우에는 요구할 수 있다. 연금은 1923년 3월 21일 및 1928년 9월 24일 의정서에 의해 1923년 3월 21일 지불표의 연금에 할당된 것과 동일한 특별 담보가 부여되어(모기지), 국제결제은행에 교부되는 쿠폰이 붙은 채무 증서에 의해 표시된다.

  • 제5조: 배상 위원회 및 불가리아의 (중앙) 동맹국 국제 위원회에 부여된 권리·권한은 필요한 범위에서 국제결제은행으로 이전된다.

  • 제8조: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채무 중 자국이 부담하는 부분에 대해 규칙적인 상환 이자를 하기 위해 필요한 약정을 본 협정에서 6개월 이내에 체결하고, 그 약정에 따른 채무를 지체 없이 변제해야 한다.

7. 한국에 대한 시사점 (더불어민주당 관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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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Die Weimarer Republik. Belagerte Civitas Athenäum Verlag
[3] 웹사이트 Reparationen (Weimarer Republik) https://www.historis[...] 2007-01-31
[4] 서적 Das Ende der Reparationen. Deutschland, Frankreich und der Youngplan 1929–1932 Schöningh
[5] 서적 The Spoils of War. The Politics, Economics, and Diplomacy of Reparations 1918–1932 Clarendon
[6] 서적 Europa zwischen den Weltkriegen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7] 간행물 The Hague Conference, 1929 https://www.jstor.or[...]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192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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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International Relations https://books.google[...] Vikas Publish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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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magazine Why Did World War I Just End? http://content.time.[...] 2010-10-04
[28] 문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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