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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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백운동 서당으로 시작하여 1550년 명종으로부터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강학당, 문성공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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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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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정보 | |
명칭 | 소수서원 |
부분 | 서원, 한국의 성리학 아카데미 |
위치 | 대한민국 |
등재 기준 | (iii) |
ID | 1498-001 |
등재 연도 | 2019년 |
면적 | 17.16 헥타르 |
완충 구역 | 73.62 헥타르 |
좌표 | 36°55′32″N 128°34′48″E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소수서원 |
한자 | 紹修書院 |
로마자 표기 | Sosu Seowo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Sosu sŏwŏn |
문화재 정보 | |
명칭 |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
영어 명칭 |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Yeongju |
![]() |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사적 |
번호 | 55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소수서원 |
면적 | 18,657 제곱미터 |
문화재청 ID | 13,00550000,37 |
서원 정보 | |
서원 이름 | 소수서원(紹修書院) |
![]() |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
제향 인물 | 안향 |
건립 연대 | 조선 중종 37년(1542년) |
다른 이름 | 백운동서원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주세붕 |
2. 역사
1542년 (중종 37) 주세붕이 안향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사우를 세우고, 1543년 (중종 38) 향교 건물을 옮겨 재실을 마련하면서 서원의 기본 골격이 갖춰졌다. 1545년 (인종 원년) 안축과 안보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1549년 (명종 4)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1550년 (명종 5) 명종으로부터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3]
이는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국가 공인을 받은 사학(私學)이 되었다. 소수서원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 좌의정이었던 정탁 등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1633년 (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 (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3] 조선 시대(1392~1910) 동안 한국 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소수서원은 원래 불교 사찰이었다가 사립 서원으로 바뀌었다.
2. 1. 건립 배경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한국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었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3] 이듬해 1543년(중종 38) 사우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4]주세붕은 주자의 《백록동 학규(白鹿洞 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에 안축과 안보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1546년(명종 원년)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이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1549년(명종 4)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그래서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하였다. 1550년(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2. 2. 백운동서원 시기 (1542년 ~ 1550년)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한국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었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3] 이듬해 1543년(중종 38) 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4]주세붕은 주자의 《백록동 학규》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 에 안축과 안보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이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0000m2)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1549년(명종 4)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그래서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하였다. 1550년(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2. 3. 소수서원 사액과 발전 (1550년 이후)
1549년(명종 4)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이황은 송나라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하였다. 1550년(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3]이는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은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황은 서원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2. 4. 서원 철폐령과 이후
1871년 (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3]3. 주요 시설
- 사주문(정문)
: 입구에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있다.
- 학구재·지락재
: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옥계천이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에 흐른다. 소수서원 강당 안에는 명종이 직접 새긴 ‘소수서원’ 현판이 있다.

3. 1. 강학 영역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장대석을 쌓아 만든 높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방에 좁은 쪽마루를 둘렀다. 기둥 윗부분은 창방으로 연결하고,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 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서는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나 된다.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다듬은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세워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동·서재는 서원의 기숙사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서재는 한 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강당 뒤편에는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가 있다. 동쪽에는 고려 말에 그린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대성지성 문선왕 전주도(국보 제485호)를 모신 문성공묘가 있다.
3. 2. 제향 영역
영주 소수서원에는 제향 영역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강학당 뒤편의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동쪽에 위치한 문성공묘가 이와 관련된 공간으로 여겨진다. 문성공묘에는 고려 말에 제작된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대성지성 문선왕 전주도(국보 제485호)가 보관되어 있다.
3. 3. 기타 시설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에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옥계천이 흐른다. 강당 뒤편에는 직방재,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가 있다. 동쪽에는 고려 말에 그린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과 대성지성 문선왕 전주도(국보 제485호)를 모신 문성묘가 있다. 소수서원 강당 안에는 명종이 직접 새긴 ‘소수서원’ 현판이 있다.
4.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였고, 2019년 7월 10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관련 문화 콘텐츠
참조
[1]
웹사이트
소수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https://terms.naver.[...]
이상해
2004-11-30
[2]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3]
웹사이트
숙수사지 [宿水寺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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