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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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카테리나 1세는 농민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러시아 제국의 첫 번째 여제이다. 본래 리보니아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되었으며, 1725년 표트르 1세 사후 근위대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2년 남짓한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1727년 사망했으며, 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러시아의 여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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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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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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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 |
러시아어 본명 | 마르타 사무일로브나 스카브론스카야 |
러시아어 개명 |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미하일로바 |
라트비아어 본명 | 마르타 스크라브론스카 |
출생일 | 1684년 4월 15일 |
사망일 | 1727년 5월 17일 |
사망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
매장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베드로-바울로 대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이전에는 루터교 및 로마 가톨릭교) |
통치 정보 | |
작위 | 러시아 여제 |
즉위 | 1725년 2월 8일 |
퇴위 | 1727년 5월 17일 |
대관식 | 1724년 5월 7일 (공동 통치자로 대관) |
전임자 | 표트르 1세 |
후임자 | 표트르 2세 |
배우자 | 표트르 1세 (1707년 결혼, 1725년 사별) |
자녀 | 안나 페트로브나 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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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왕가 | 로마노프 왕조 (결혼으로) |
가문 (출생) | 스카브론스키 가문 (1727년 창립) |
아버지 | 사무엘 스코브론스키 |
어머니 | 엘리자베트 모리츠 |
배우자 정보 | |
첫 번째 배우자 | 요한 크루세 (또는 요한 라베) (1702년 결혼, 1702년 사별) |
두 번째 배우자 | 표트르 1세 (1707년 결혼, 1725년 사별) |
황후 정보 | |
작위 | 러시아 황후 |
재위 기간 | 1712년 2월 9일 – 1725년 2월 8일 |
전임자 |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
후임자 | 예카테리나 2세 |
2. 생애
표트르 1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의 지배를 받던 야콥슈타트(Jakobstadt, 현재의 라트비아 예캅필스) 출신의 평범한 농민이었다. 대북방 전쟁 중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 표트르 1세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다.
1698년 표트르 1세는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황후를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했다. 1712년 예카테리나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 사후,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가 1718년 반란 가담 혐의로 사망하고 손자 표트르 2세도 어려 황제 근위대가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했다.[11]
1727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2년간 재위했으나,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두 딸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는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여제가 된다.
2. 1. 초기 생애 (농민 출신 ~ 황후 책봉)
예카테리나 1세는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의 지배를 받던 야콥슈타트(Jakobstadt, 현재의 라트비아 예캅필스) 출신의 평범한 농민이었다.[1] 본명은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Marta Helena Skowrońska)로, 1684년 4월 15일(구력 4월 5일)에 태어났다.마르타의 부모는 1689년경 비엔나 대역병으로 사망하여 다섯 자녀를 남겼다. 세 살 때 마르타는 이모에게 보내져 스웨덴 리보니아(현재 알룩스네, 라트비아)의 마리엔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이자 성경 번역가인 요한 에른스트 글뤼크에게서 자랐다.[4] 글뤼크의 집에서 하급 하인, 주방 하녀, 세탁부 등으로 일했으며,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해 평생 기능적 문맹 상태였다.
대북방 전쟁(1700~1721) 중 17세에 스웨덴 용기병 요한 크루제 또는 요한 라베와 결혼했으나, 8일 후 스웨덴 군대가 마리엔부르크에서 철수했다. 러시아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때 글뤼크 목사는 통역으로 일할 것을 제안했고, 원수 보리스 셰레메테프가 그를 모스크바로 데려갔다.
마르타는 셰레메테프의 집에서 일하다가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코프의 가정으로 옮겨졌다. 1703년, 멘시코프의 집을 방문하던 표트르 1세는 마르타를 만났고, 1704년까지 그녀는 황제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1703년경, 마르타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Yekaterina Alexeyevna)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5] 기록은 없지만,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1707년 10월 23일과 12월 1일 사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예카테리나는 1711년 표트르 1세와 함께 프루트 전역에 참여했고, 볼테르가 언급했듯이 표트르와 제국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압도적인 수의 터키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예카테리나는 보석을 사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대비지르 발타즈 메흐메트 파샤에게 뇌물을 주어 후퇴를 허락받았다.
표트르 1세는 예카테리나에게 공을 돌렸고, 1712년 2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대성당에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결혼식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칭호를 사용하여 차리나가 되었고, 그 기념으로 남편은 예카테리나 훈장을 제정했다.
2. 2. 황후 시절 (표트르 1세와의 관계)
기록은 없지만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1707년 10월 23일과 12월 1일 사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전해진다.[4] 171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표트르 1세는 예카테리나를 매우 귀여워했으며, 건장한 체격에 건강하고 활발한 성격의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의 분노 발작을 잘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12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것은 안나와 엘리자베타 두 딸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중년이 되자 과음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표트르 1세에게 미움을 받는 일도 많아졌다.
예카테리나는 1711년 표트르 1세와 함께 프루트 전역에 참여했다. 볼테르가 그의 책 ''표트르 대제''에서 언급했듯이,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와 그의 제국을 구했다. 압도적인 수의 투르크 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예카테리나는 항복하기 전에 그녀와 다른 여성들의 보석을 사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대비지르 발타즈 메흐메트 파샤에게 후퇴를 허락하도록 뇌물을 주자고 제안했다. 메흐메트는 뇌물 때문이든 무역과 외교적 고려 때문이든 후퇴를 허락했다.
어쨌든 표트르 1세는 예카테리나에게 공을 돌렸고, 1712년 2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대성당에서 그녀와 다시 공식적으로 결혼했다. 결혼식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칭호를 사용하여 차리나가 되었다. 그 기념으로 남편은 예카테리나 훈장을 제정했다.
1714년경 설계된 스트렐나에 있는 그들의 작은 목조 궁전에는 식물원이 있었다. 1716년 그녀는 그와 함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두 번째 사절단을 따라갔지만 베젤에서 출산을 위해 남았다. 그는 그녀를 파리로 데려가지 않았고, 그녀는 러시아 거주민 오시프 솔로비요프의 저택인 하를렘에 머물렀다.[6] 1724년 표트르는 예카테리나를 황후로 즉위시켰지만, 그 자신이 러시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남았다.
2. 3. 여제 즉위와 통치 (표트르 1세 사후 ~ 사망)
1725년 표트르 1세가 요로결석으로 서거했으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1718년 반란 가담 혐의로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손자 표트르 2세도 어려 황제 근위대가 황후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했다.[11]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었다.[7]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예카테리나는 "신흥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다. 정권 교체는 기득권 귀족들에게 유리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멘시코프 등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러시아 근위대는 예카테리나를 러시아 통치자로 선포했다. 표트르의 비서 마카로프와 페오판 프로코포비치는 예카테리나 즉위를 원하는 "신흥 세력"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멘시코프, 표트르 톨스토이, 그리고 최고 비밀 의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있었다.[11]
예카테리나는 폐위된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를 위협으로 여겨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했다.
예카테리나 1세의 통치는 2년 남짓으로, 1725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172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동맹을 맺은 정도의 업적이 있지만, 표트르 1세의 개혁을 계속하는 형태로 국정이 진행되었다.[11]
최고 비밀 의회는 한 정당에 권력을 집중시켜 행정부의 혁신이었다. 외교 문제에서 러시아는 예카테리나의 사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칼 프리드리히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 맞서 오스트리아-스페인 연맹에 가입했다.
예카테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카테리넨호프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새 수도에 최초의 다리를 건설했다. 그녀는 또한 예카테린궁이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츠르스코예 셀로 영지의 최초 왕족 소유주였다.[7]
예카테린부르크시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7] 그녀는 카드리오르그 궁전과 인접한 카드리오르그 공원, 탈린의 카드리오르그 지역의 이름을 지었다.
예카테리나는 군사비 지출을 줄이려 노력했고, 그 결과 농민에 대한 세금 감면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1727년 5월 17일, 예카테리나 1세는 폐농양(결핵)으로 43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매장되었다. 사망 전 그녀는 표트르 2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3. 자녀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표트르 페트로비치 | 1704년 | 유년기에 사망 | 요절 | |
파벨 페트로비치 | 1705년 | 유년기에 사망 | 요절 | |
예카테리나 페트로브나 | 1706년 | 1708년(2세) | 요절 | |
![]() | 안나 페트로브나 | 1708년 1월 27일 | 1728년 5월 15일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 표트르 3세의 어머니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1709년 12월 18일 | 1762년 1월 5일 | 후일 러시아 여제, 미혼 | |
마리아 페트로브나 | 1713년 3월 20일 | 1715년 5월 27일 | 요절 | |
마르가리타 페트로브나 | 1714년 9월 19일 | 1715년 6월 7일 | 요절 | |
표트르 페트로비치 | 1715년 11월 15일 | 1719년 4월 19일 | 요절 | |
파벨 페트로비치 | 1717년 1월 13일 | 1717년 1월 14일 | 요절 | |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 1718년 8월 31일 | 1725년 3월 15일 | 요절 | |
표트르 페트로비치 | 1723년 10월 7일 | 1723년 10월 7일 | 요절 | |
파벨 페트로비치 | 1724년 | 1724년 | 요절 |
예카테리나 1세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안나와 엘리자베타를 제외한 대부분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3. 1. 안나 페트로브나
안나 페트로브나는 1708년 1월 27일에 태어나 1728년 5월 15일에 사망했다.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했으며, 훗날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페터 울리히를 낳았다.
3. 2.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훗날 어머니 예카테리나 1세를 따라 러시아의 여제가 되었다. 다만 바로 뒤를 이은 것은 아니고, 중간에 몇 명의 황제들이 있었다.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후일 러시아 여제, 미혼 |
와 는 제거 대상 템플릿이다.
4. 평가 및 유산
예카테리나 1세는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이후 엘리자베트와 예카테리나 2세를 포함한 여성 군주 시대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 그녀는 표트르 1세의 러시아 근대화 정책을 계승했다.
표트르 대제 사망 당시 13만 명의 병력과 10만 명의 코사크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7] 그러나 군사비 지출은 러시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어 정부 연간 수입의 약 65%를 소비했다.[7] 예카테리나 1세는 국가가 평화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비 지출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재위 기간 대부분 예카테리나 1세는 조언자들에게 좌우되었지만, 군사비 감축 문제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7] 그 결과 농민에 대한 세금 감면으로 예카테리나 1세는 정의롭고 공정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최고 비밀 의회는 한 정당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 행정부의 혁신을 가져왔다. 외교 문제에서 러시아는 예카테리나의 사위인 홀슈타인 공작의 이익을 영국에 맞서 보호하기 위해 마지못해 오스트리아-스페인 연맹에 가입했다.
예카테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카테리넨호프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새 수도에 최초의 다리를 건설했다. 그녀는 또한 예카테린궁이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차르스코예 셀로 영지의 최초의 왕족 소유주였다. 예카테린부르크시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7]
카드리오르그 궁전 (Katharinentalde, "카테리나 계곡"이라는 뜻), 인접한 카드리오르그 공원, 그리고 나중에 에스토니아 탈린에 있는 카드리오르그 지역의 이름도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전반적으로 예카테리나의 정책은 합리적이고 신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겸손한 출신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의 차르들에 의해 국가 기밀로 여겨졌다.
5. 대중문화
Kristina Sabaliauskaitėlt의 소설 《피터의 황후》(Peter's Empress)의 주인공이다.[10]
6. 가계도
1613–1645
1645–1676
(섭정 1682)
(실질적 섭정 1689–1694)
(섭정 1682–1689)
1676–1682
1682–1696 공동 통치
1682–1696 공동 통치
1696–1725 단독 통치
1725–1727
1730–1740
(폐태자)
1741–1762
(섭정 1740–1741)
1727–1730
1762 폐위
1762–1796
1740–1741 폐위
1796–1801 암살
1801–1825
1825–1855
1855–1881 암살
1881–1894
1894–1917 제정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