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교 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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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교 구산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 걸쳐 발전한 한국 불교의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초기 불교의 다섯 교종과 신라 말 선종의 아홉 산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삼국 시대에는 계율종, 열반종, 화엄종, 법성종, 법상종의 다섯 교종이 성립되었으며, 신라 말에는 당나라에서 선종이 유입되어 가지산문, 실상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사굴산문, 수미산문의 아홉 산문이 차례로 등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천태종이 창종되면서 교종의 다섯 종파와 선종의 조계종, 천태종을 아울러 오교양종 체제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교구산설의 성립 시기와 범위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 시대에는 불교가 왕실과 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는 국가의 통치 이념과 백성들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불교
2. 1. 오교(五敎)의 성립
삼국 시대의 불교는 왕실과 국가를 중심으로 성립 발전하였다. 국가 위주의 불교는 종파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쳐 삼국시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종파는 계율종(戒律宗)이었다.[1] 백제의 겸익과 신라의 자장이 대표적인 계율종 인물이었다.[1] 특히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으로서 신라불교를 총괄하였다.[1]
고구려에서는 말기에 보덕이 중심이 되어 도교의 불로장생사상을 척파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은 영원불멸의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는 열반종(涅槃宗)을 세웠다.[1]
삼국 통일 이후 의상(義湘: 625-702)에 의하여 화엄종(華嚴宗), 즉 원융종(圓融宗)이 개종(開宗)되었다.[1] 그는 중국 화엄의 대종장인 지엄에게 수학한 이후 귀국하여 영주시에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부석사는 화엄종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1]
입당유학을 하지 않고 학승으로 숭앙받은 원효(元曉: 617-686)는 분황사(芬皇寺)에서 법성종(法性宗)을 개창했다.[1] 법성종을 내세웠다고는 하나 원효는 화엄종을 비롯한 기타 어느 종에도 치우침이 없었다.[1] 그의 시호인 화정(和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일체를 화(和)로 통일시키려 했으므로("화쟁 사상") 그 종을 해동종(海東宗)이란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1]
또한 경덕왕(재위 742-765) 때는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중심 교학으로 연구 체계화한 법상종(法相宗)이 진표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서 개종되었다.[1] 진표는 미륵신앙이 강하였으며 미륵설계와 점찰법(占察法)으로 민간을 선도하였는데 대단한 교세를 이룩하였다.[1]
3. 신라 말 선종(禪宗)의 등장과 구산선문(九山禪門)
당나라에서 성행한 선종 불교가 남북국 시대 신라의 유학승에 의하여 도입되기 시작하였다.[4] 당시 중국에서는 6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선종이 남돈선(南頓禪)과 북점선(北漸禪)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하였다.[4]
신라에서는 7세기에 법랑(法朗: 생몰미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4조 도신(道信: 580-651)의 가르침을 받아 신행(神行: 704-779)에게 전하였다. 신행은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 북점선(혹은 北宗)의 신수(神秀: 606?-706)의 제자인 지공(志空)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지리산에서 교화하였다고 한다.[4] 신행선사의 법맥은 준범, 혜은선사로 이어졌고, 혜은선사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 도헌에게 법을 전하였다. 도헌은 제자 양부에게 법을 전하였으나, 양부의 제자인 정진대사 긍양은 당나라로 구법을 떠나 남종선 6조 혜능의 제자 중 청원행사의 제자인 곡산도연의 법맥을 이었다. 정진대사탑비에는 법계(法系)를 북종선이 아닌 남종선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를 법계의 변조로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정진대사 긍양 때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선종은 교종(敎宗) 중심의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구산을 형성하였다.
3. 1. 선종 구산(九山)의 성립
신라 선덕왕(재위 780-785) 때 도의(道義: 생몰미상)가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智藏: 735-814)에게 배우고 821년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교학(敎學)이 성하던 신라의 불교계에서는 선법을 마설(魔說)이라고 배척하여 환영받지 못하였다.[4]
이후 선종의 9산이 다음과 같이 성립되었다.[4][5]
1. 가지산문(迦智山門): 설악산에서 도의(道義: 생몰미상)의 법을 배운 손제자 체징(體澄: 804-880)이 837년에 당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중수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쳤다. (859년 개산. 860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보조선사탑비의 기록을 볼때 859년이 좀더 합리적일 것으로 보임). 도의선사의 제자로 염거화상이 있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에 주석하여 스승 도의의 선풍을 펼쳤다.
2.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洪陟: 생몰미상)이 당의 서당지장(智藏: 735-814)에게서 배워와(826) 남원의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열었다. (828년 개산)
3. 희양산문(曦陽山門): 도헌(道憲: 824-882)은 준범 혜은(慧隱)의 법맥을 받아와 문경의 봉암사(鳳岩寺)를 창건했고, 그 손제자인 정진대사 긍양이 희양산문을 열었다.(935년 개산)
4. 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787-868)은 당의(장경회휘)에게서 배워와 한때 지리산 실상사에 머무르다 혜목산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했다. 그 법을 제자 심희에게 전했다. 심희(審希: fl. 9세기)는 창원의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이 형성되었다. (900년경 개산)
5. 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 785-861)은 당의 (서당지장)에게서 배워와(839년 귀국) 한때 화순 쌍봉사에 머물르다 곡성의 대안사(태안사)(泰安寺)로 옮겨 동리산문이 형성되었다. (개산 847년, 동리산기실에 따르면 쌍봉사에 머무르다 847년 곡성 대안사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됨)
6.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은 당의 (마곡보철)에게서 배워와(845년 귀국) 보령의 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이 형성되었다. (개산 847년)
7. 사자산문(獅子山門): 도윤(道允: 798-868)은 당의 (남전보원)에게서 배워와(847년 귀국) 한때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제자 절중(折中)을 만났다. 이후 쌍봉사로 옮겼다. 제자 절중에 의해 영월의 흥령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이 형성되었다.(개산 882년경)
8.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 810-889)은 당의 (염관제안)에게서 배워와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이 형성되었다. 사굴산문은 도굴산문이라고도 한다.(개산 851년)
9. 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 869-936)은 당의 (운거도웅)에게서 배워와 고려초에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서 수미산문이 열려서 9산 선문이 정립되었다. (개산932년)
4. 고려시대 불교와 오교 양종(五敎兩宗)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교종과 선종이 발전하였다. 교종에는 5개의 종파가 있었는데, 이를 5교라고 불렀다. 5교는 계율종, 법상종, 법성종, 열반종, 원융종이었다.
4. 1. 오교 양종으로의 변천
고려 시대에 의천(1055-1101)이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중국에서는 교종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이 한국에서는 선종에 가까운 불교로 성립되었다.[6]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성립되면서 그 이전까지 유지되었던 5교 9산의 9산이 합쳐져 조계종이 되었다.[1] 그리하여 교종의 5교와 천태종, 조계종의 양종을 통칭하여 5교양종이라 하게 되었다.[1] 교종의 5교는 당시에 다음과 같이 이름이 바뀌었다.[6][7]5. 오교 구산설에 대한 이견
신라 시대에 오교 구산이 형성되었다는 견해는 1937년 김포광(金包光)이 〈오교양종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처음 주장한 이후 학계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8] 그러나 이 오교 구산설에 대해서는 학계의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8][12]
예를 들어, 명랑(明朗: fl. 668)에 의해 개창되어 계승된 신인종이 오교 구산에 포함되지 않아 신라 불교를 총칭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9] 또한, 진표가 법상종의 시조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10][11]
5교종(五敎宗)과 9산선문(九山禪門)이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지만, 중국처럼 뚜렷한 종지(宗旨)를 갖고 종파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12]
고려 숙종 6년(1101)에 찬(撰)한 개성 흥왕사(興王寺)의 대각화상 묘지(墓誌)에는 계율종(戒律宗) (남산종(南山宗)), 법상종(法相宗) (자은종(慈恩宗)), 열반종(涅槃宗) (중도종(中道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화엄종(華嚴宗)), 선적종(禪寂宗) (시흥종(始興宗), 조계종(曹溪宗)) 등 6종(宗)의 이름이 나타난다. 이는 대각국사 당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6종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신라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대각국사 이후 고려 말에는 천태종(天台宗)이 개창되면서 7종으로 변화했다. 6종 시대에는 5교 9산으로 통칭했으나, 7종 시대에는 5교양종(五敎兩宗)이라고 불렀다. 5교양종은 5교종과 양선종(兩禪宗)을 의미하며, 양선종은 조계종과 천태종을 가리킨다. 천태종은 중국에서 창종되어 교종의 하나였으나, 고려에서는 선종으로 취급되었다. 조계종은 지눌(知訥)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참조
[1]
서적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종파 > 한국불교의 종파〔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서적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선종 9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서적
한국사 > 중세 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무인시대의 문화 > 5교 양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서적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상 > 선종의 도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서적
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고려의 성립 > 호족의 문화 > 9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서적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의 불교〔서설〕 > 고려의 불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7]
서적
한국사 > 중세 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무인시대의 문화 > 5교 양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8]
서적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9]
서적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10]
서적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11]
웹사이트
법상종(法相宗)
https://terms.naver.[...]
2011-04-02
[12]
서적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고려시대의 불교 > 고려시대 불교의 종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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