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귀스트 콩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귀스트 콩트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며, 앙리 드 생시몽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의 원리를 창안했다. 콩트는 《실증철학강의》를 통해 사회학을 체계화하고 실증주의를 주창했으며, 사회가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말년에는 인류교를 창시하여 종교적 사회 통합을 시도했다. 콩트의 사상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서로는 《실증철학강의》, 《실증정신론》, 《실증정치학 체계》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생시몽주의자 -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은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산업과 과학 기술 기반의 사회 개혁을 주장하며 산업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능력 있는 산업 계급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의 사상은 생시몽주의로 이어져 여러 사상과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증주의자 - 에밀 뒤르켐
    에밀 뒤르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사회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고 사회적 사실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구조 기능주의와 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증주의자 - 에른스트 마흐
    에른스트 마흐는 음속과 충격파 연구로 유명하며 뉴턴의 개념을 비판하고 마흐의 원리를 제시하여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물리학자이자 과학 철학자이다.
  • 구조기능주의 - 빌프레도 파레토
    빌프레도 파레토는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로, 로잔 학파를 이끌며 일반균형이론 발전과 후생경제학 개척에 기여했고, '파레토 효율성', '파레토 법칙' 등의 개념을 제시했으며, 《일반사회학 논고》에서 엘리트 순환 이론을 제시하며 사회학 발전에도 공헌했지만, 만년에 파시즘을 옹호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 구조기능주의 - 에밀 뒤르켐
    에밀 뒤르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사회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고 사회적 사실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구조 기능주의와 구조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귀스트 콩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귀스트 콩트
1849년의 콩트
본명이지도르 마리 오귀스트 프랑수아 자비에르 콩트
출생일1798년 1월 19일
출생지몽펠리에, 프랑스 제1공화국
사망일1857년 9월 5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제2제국
국적프랑스
로마자 표기Oguseuteu Konteu
교육
학력몽펠리에 대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개인사
배우자카롤린 마생 (1825년 결혼, 1842년 이혼)
철학적 정보
분야서양 철학, 프랑스 철학
시대19세기 철학
주요 관심사과학사, 과학철학, 사회구조론, 사회변동론
학파실증주의, 사회학
주요 사상이타주의
백과사전적 법칙
과학의 위계
세 단계의 법칙
실증주의 달력
인류교
사회학적 실증주의
영향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
볼테르
장자크 루소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니콜라 드 콩도르세
샤를 드 브로스
가스파르 몽주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마리 프랑수아 크사비에 비샤
조제프 드 메스트르
프란츠 요제프 갈
앙리 드 생시몽
장바티스트 세이
영향을 준 인물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앤서니 기든스
시미즈 이쿠타로를 비롯한 사회학자
인용문
인용문"예견하기 위해 관찰하고, 방지하기 위해 예견한다." ('Voir pour prévoir, prévoir pour prévenir.')

2. 생애

오귀스트 콩트는 1798년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성장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중퇴한 후, 앙리 드 생시몽과 교류하며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나, 사회 개혁에 대한 관점 차이로 결별했다. 콩트는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콩트는 1825년 카롤린 마생(Caroline Massin)과 결혼했으나 1842년 이혼했다. 1826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1827년에는 퐁 데 자르(Pont des Arts)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844년부터 클로틸드 드 보(Clotilde de Vaux)와 깊이 사랑했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이 사랑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콩트는 여성에 대한 관점은 밀과 달라 남녀 불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1857년 파리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798년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오귀스트 콩트가 태어났다.[1] 그는 프랑스 혁명 직후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이 계속되던 혼란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콩트의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왕당파였다.[8][9] 콩트는 몽펠리에에서 조프르 중등학교(Lycée Joffre)[7]몽펠리에 대학교(University of Montpellier)를 거쳐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입학했다. 그러나 1816년 학교 재편성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폐쇄되자,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콩트는 재입학을 요청하지 않았다.

콩트는 몽펠리에로 돌아온 후, 가톨릭 신자이자 군주주의자인 가족과의 갈등을 겪고 파리로 떠나 잡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첫 스승이자 프로테스탄트 목사였던 다니엘 앙콩트르(Daniel Encontre)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8][9]

2. 2. 생시몽과의 만남과 결별

앙리 드 생시몽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사회 개선에 대한 실질적인 행동을 중시하는 생시몽과 갈등을 겪고 결국 결별하였다.[40] 콩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생시몽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콩트는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며 사회학의 원리를 창안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그의 과학 통합 시도는 지나치게 야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학계에서 고립된 콩트는 후기 저작인 《실증정치체계》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인류교'를 주장하며 스스로 사제가 되었다. 이는 콩트가 생시몽의 유사 종교적 속성을 비난하며 결별했던 과거와는 대비되는 모순적인 모습이었다.[40]

2. 3. 실증철학 강의와 사회학 창시

콩트는 대표작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며 ‘사회학’의 원리를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모든 과학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야심 찬 것으로 여겨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학계에서 고립된 콩트는 후기 저작 《실증정치체계》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인류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사제가 되었다. 이는 실증주의를 종교의 대체물로 제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생시몽의 유사 종교적 속성을 비난하며 결별했던 과거와 대조적이었다.[11]

후년에 콩트는 실증주의 사회를 위한 인류 종교를 개발하여 전통적인 종교가 수행했던 응집력 있는 기능을 충족시키려 했다. 1849년에는 '실증주의 달력'이라는 달력 개혁을 제안하기도 했다. 가까운 동료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훌륭한 콩트"(『실증철학 강의』의 저자)와 "나쁜 콩트"(세속 종교적 '체계'의 저자)를 구별하기도 했다.[11] 콩트의 '체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출판과 함께 19세기 다양한 세속 인본주의(Secular Humanist) 단체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지 홀리오크(George Holyoake)와 리처드 콩그리브(Richard Congreve)와 같은 세속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지 엘리엇해리엇 마티노를 포함한 콩트의 영국 추종자들은 그의 체계의 완전한 암울한 면은 대부분 거부했지만, 인류 종교라는 생각과 "타인을 위해 살라"(vivre pour autrui)는 그의 명령을 좋아했으며, 여기서 "이타심(altruism)"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17]

포르투 알레그리의 실증주의 사원

2. 4. 개인적인 삶과 죽음

콩트는 1825년 카롤린 마생(Caroline Massin)과 결혼했지만, 1842년에 이혼했다. 콩트는 아내의 반복되는 부정과 낮은 수입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가정 문제에 시달렸다.[70] 마생은 여러 차례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했고, 콩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70] 두 사람은 결국 별거했지만, 콩트는 마생에게 계속 생활비를 지급했다.[74]

1826년, 콩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지만 치료 없이 퇴원했다. 그는 1827년 퐁 데 자르(Pont des Arts)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844년부터 콩트는 클로틸드 드 보(Clotilde de Vaux)와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첫 남편과 이혼하지 않아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46년 그녀가 죽은 후, 이 사랑은 준종교적인 것이 되었고, 콩트는 새로운 "인류애 종교"를 발전시켰다.

콩트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78] 밀은 콩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역연역법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79] 그러나 콩트는 여성관에 있어서는 밀과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남녀 불평등을 지지했다.[83]

오귀스트 콩트의 묘


콩트는 1857년 9월 5일 파리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묻혔다.[91] 그의 묘 주변에는 어머니 로잘리 보이에(Rosalie Boyer)와 클로틸드 드 보의 묘비가 있다.[91] 1841년부터 1857년까지 콩트가 살았던 아파트는 현재 오귀스트 콩트의 집(Maison d'Auguste Comte)으로 보존되어 있다.

3. 실증철학 강의

콩트의 대표 저서인 《실증철학강의(実証哲学講義)》(Cours de philosophie positive프랑스어, 1830년-1842년)는 콩트 사회학의 정수로, 그의 사회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콩트는 이 저작에서 사회학적 이론의 원칙, 실증주의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 사회 진보의 단계와 법칙, 사회학적인 연구 대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콩트는 1830년부터 1842년 사이에 출판된 『실증철학강의』에서 처음으로 실증주의의 인식론적 관점을 설명하였다. 1848년에는 『실증주의 개관』(A General View of Positivism)이 출판되었다. 『실증철학강의』의 처음 3권은 이미 존재하는 물리 과학(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을 주로 다루었지만, 나중 두 권에서는 사회과학을 강조하였다. 콩트는 과학에서 이론과 관찰의 순환적 의존성을 관찰하고 과학을 분류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과학철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11] 그는 자연철학과 과학을 명시적으로 구분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콩트는 사회 진화를 설명하면서, 사회가 일반적인 3단계 법칙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 단계를 거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3단계 법칙은 사회 진화론의 최초 이론 중 하나였다. 그는 "백과사전 법칙"이라는 또 다른 보편 법칙을 제시하고, 이러한 법칙들을 결합하여 무기 물리학(천문학, 지구과학, 화학)과 유기 물리학(생물학, ''사회 물리학''→''사회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의 체계적이고 계층적 분류를 개발하였다. 1838년, 콩트는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재창조하여 신조어로 도입하였다.[13] 이전에는 "사회 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아돌프 케틀레 등에 의해 흡수되었다.

콩트는 사회학을 모든 과학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과학으로 보았다. 이 과학은 다른 모든 과학을 포함하고 그들의 발견을 응집력 있는 전체로 통합하고 관련짓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학보다 더 위대한 일곱 번째 과학으로 "인류학, 또는 진정한 인간 과학을 [추상 과학의 대 계층에서] 마지막 단계로 간주했다."[14]

콩트의 실증철학은 이론, 실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소개한다. 해리엇 마티노의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1855년) 번역본 27쪽에서 "모든 이론은 관찰된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면, 사실은 어떤 이론의 안내 없이는 관찰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러한 안내 없이는 우리의 사실은 산만하고 무익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콩트의 관찰을 볼 수 있다.[16]

콩트의 사회 요소 상호 연결성 강조는 현대 기능주의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특정 요소들은 현재 편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모든 과학의 중심으로서 사회학에 대한 그의 비전은 실현되지 않았다.

결정에 대한 정량적이고 수학적인 기반 강조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이는 현대 실증주의, 현대 정량적 통계 분석, 사업 결정의 기초이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지속적인 순환적 관계 설명은 현대 사업 시스템의 전체 품질 관리(TQM)와 지속적 품질 개선에서 볼 수 있는데, 옹호자들은 계획-수행-점검-조치(PDCA, 쉬워트 사이클)의 4단계 순환을 통해 이론과 실천의 지속적인 순환을 설명한다. 콩트는 정량적 분석을 옹호했지만, 사회 현상 설명 능력의 한계를 보았다.

허버트 스펜서의 초기 사회학은 콩트에 대한 광범위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진화 생물학의 발전 이후에 스펜서는 사회 다윈주의적 용어로 이 학문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콩트의 명성은 부분적으로 1867년 『실증주의 평론』을 창간한 에밀 리트레에게 기인한다.

콩트의 과학 이론

3. 1. 사회학의 기본 전제

콩트는 사회 현상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11] 그는 사회를 어느 한 부분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유기적인 전체로 보았다.[11] 이러한 관점은 사회 요소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한 것으로, 현대 기능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콩트는 사회 진화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사회는 일반적인 3단계 법칙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 단계를 거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회 진화론의 최초 이론 중 하나였다.

그는 "백과사전 법칙"이라고 불리는 보편 법칙을 제시하고, 이러한 법칙들을 결합하여 무기 물리학(천문학, 지구과학 및 화학)과 유기 물리학(생물학 및 최초로 ''사회 물리학'', 나중에 ''사회학''으로 개명됨)을 포함한 모든 과학의 체계적이고 계층적 분류를 개발하였다.[13] 콩트는 이전에 "사회 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그는 사회학을 모든 과학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과학으로 보았는데, 이 과학은 다른 모든 과학을 포함하고 그들의 발견을 응집력 있는 전체로 통합하고 관련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3. 2. 사회학 이론

콩트는 아이작 뉴턴의 과학혁명에 영향을 받아 사회학을 자연 법칙에 종속된 과학으로 정립하려 했다. 그는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사회학적 이론 전개라고 생각했다. 이는 현대 사회학 방법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콩트는 단순히 사회적 사실들의 인과 관계를 연구하는 것을 넘어, 그 관계를 통해 사회의 궁극적인 속성을 이해하려 했다.[11]

콩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회학적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려 했으며, 이를 실증주의라 불렀다. 그는 조야한 경험주의를 비판하며 "모든 이론이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면, 모든 현상도 이론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실증주의는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이론과 법칙 발견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현실을 관찰하는 방법론이다.[16]

콩트는 사회학의 목적이 추상적인 이론적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학이 이론과학으로서 정립되면, 그 법칙들은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 조직과 변동에 관한 법칙이 새로운 사회 제도를 창출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3. 3. 연구 방법론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 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관찰, 실험, 비교, 역사적 분석이라는 네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22]

; 관찰

콩트는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이 단순한 경험적 관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론이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면, 모든 현상도 이론에 기초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이론적 뒷받침 없는 관찰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23] 즉, 관찰은 사회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법칙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실험

콩트는 사회학에서도 실험이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윤리적 문제로 인해 인위적인 실험은 어렵다고 인정했다. 대신 그는 "현상의 규칙적인 과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간섭받을 때" 발생하는 '자연적 실험'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사회적 일탈 현상(병리적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 비교와 역사적 분석

콩트는 다양한 사회들을 비교함으로써 각 사회의 작동 원리와 근본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역사적 분석은 현재와 과거 사회를 비교하는 것으로, 콩트의 '삼단계 법칙'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가진다. 콩트는 역사적 분석을 통해 사회 발전 단계를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의 특징을 설명했다.[24]

3. 4. 사회학의 구조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정학과 사회동학으로 구분했다. 콩트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으며, 생물학의 영향을 받아 사회학을 구성했다. 그는 "사회물리학에서 질서의 개념과 진보의 개념은 생물학의 조직 개념과 생명 개념처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개념들은 실로 과학적 견지에서 생물학으로부터 파생되었다"라고 말했다.[22]

콩트는 사회학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었다.

  • '''사회정학''': 사회 질서와 통합의 법칙을 연구한다.
  • '''사회동학''': 사회 진보와 변화의 법칙을 연구한다.

3. 4. 1. 사회정학

사회정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 간의 질서에 대한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콩트는 사회정학을 "사회의 전제조건에 관한 연구로 질서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조건'간의 조화에 관한 이론"이라고 정의했다.[22]

콩트는 사회의 '진정한' 구성 요소를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보았다. 그가 가족을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로 본 이유는 가족이 '사회 유기체의 다양한 특성들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이 개인의 이기심을 중화시키고 사회로 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인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인 구성 단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콩트의 사회정학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의 통합과 질서에 관련된 법칙, 조건에 관한 것이다. 콩트는 사회의 하부 구조들이 단순한 상태에서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경향은 사회 기능의 분리를 가져오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총합적, 일반적 정신'을 소멸, 제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의 각 기관들은 점점 더 전문화, 분화되지만, 동시에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통합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콩트는 사회적 기능의 분화가 불러오는 전문화가 오히려 사회 구조들 간의 상호 의존을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분업을 예로 들면, 분업을 통해 물건을 생산할 때 각 노동은 분리되고 전문화된다. 이러한 기능 분리는 각 분업 참가자들 간의 이질성을 강화시키지만 동시에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각 노동이 합쳐지지 않는 이상 개별 노동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콩트는 통합을 이루는 다른 두 가지에도 주목했다.

  • 각 부분 간의 교환과 통합을 유도하는 지배력과 권위의 집중
  • 구성원 간의 보편적 합의


콩트는 사회 구성원들 간에 언어종교 같은 공통된 지적 관념과 도덕성이 존재함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들이 사회 분화 현상을 상쇄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보았다. 콩트는 사회를 지배하는 역사적 지식 체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으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실증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지식 체계라고 보았다.

3. 4. 2. 사회동학

콩트는 사회 진보의 법칙을 연구하는 분야를 사회동학이라고 불렀다. 사회동학은 인간 문명의 주요 변동이 잇달아 일어나는 추상적 질서를 뜻하는 계승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콩트는 이러한 계승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3단계 지식, 사고 체계에 상응하는 사회 발전의 3단계 법칙을 정립했다. 3단계 법칙은 신학적·군사적 단계, 형이상학적·법적 단계, 실증적 단계로 이어진다.[22]

이러한 3단계 법칙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 각 단계는 진화적이다. 즉, 각 단계의 사회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각 단계의 조건들이 성숙해야 하며,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거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각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에는 전 단계의 요소들과 다음 단계의 요소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혼란을 일으킨다. 콩트는 발전 과정을 순탄하게 보지 않았으며, 중간 단계에서 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특히 자신이 살던 시기를 이러한 혼란의 시기로 인식했으며, 자신이 주창한 사회물리학의 임무가 이런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신학적 단계: 인간의 힘이 아닌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는 단계이다. 모든 현상은 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3]

2. 형이상학적 단계: 여러 현상은 본질이나 본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고 믿는 단계이다. 사물에는 그 속에 담긴 어떤 본질이 있고, 그것을 밝히는 연구를 통해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3. 실증적 단계: 진정으로 참다운 지식의 단계이다. 현상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에 따라 실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이다.

콩트는 사회 진보의 계기를 지식의 진보에서 찾았다. 그는 사회동학 확립에 튀르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달리 경제력보다는 지식의 진보가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지식 진보의 3단계에 따라서 사회 진보의 3단계 법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콩트는 지식의 진보만이 모든 진보의 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또 다른 계기는 바로 인구이다.

당시 인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맬서스 식의 인식이었다. 즉, '인구 증가는 인류의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는 인식으로, 인구 증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콩트는 반대로 인구 증가가 진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인구 증가가 분명히 자원 부족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원 부족이 인류에게 위기로 다가오기보다는 인간에게 ‘필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진보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의 진보와 함께 사회 내부적인 해결책인 생산성 발달(산업화로 인한 분업 확대가 대표적이다.)을 이룸으로써 인구 증가로 인한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3. 5. 지식 진보의 단계와 과학의 위계

콩트는 『실증철학강의』에서 지식의 3단계 법칙과 과학의 위계론을 주장했다. 이는 그가 창안한 '사회물리학'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콩트는 인간의 지식이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단계는 사회의 진보처럼 진화적으로 진행되며, 각 단계는 뛰어넘을 수 없고 다음 단계의 조건을 생성한다.[12]

콩트에 따르면 사회학은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의 최고 정점에 있는 학문이다. 그는 과학에는 위계가 있으며, 총체적인 과학은 하위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천문학이 가장 먼저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뒤를 잇는다. '사회물리학'은 생물 유기체 연구에 기반하여 사회적 유기체를 연구하므로 가장 마지막에 실증적 단계에 도달한다. 이는 사회물리학이 모든 과학 중 가장 총체적이며 모든 과학을 통합한다는 콩트의 생각을 보여준다.

콩트의 3단계 법칙은 사회 진화론의 최초 이론 중 하나였다.[12] 콩트는 사회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 (1) '''신학적''' 단계: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시대로, 사회적 위치와 제약이 신에게 언급되었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힘을 믿었다. 페티시즘이 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2) '''형이상학적''' 단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의 문제에 뿌리를 둔다. 어떤 인간 통치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권리''가 칭송받는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정당화했지만, 신성에 언급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추론하고 질문하기 시작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 (3) '''실증적''' 단계: 혁명과 나폴레옹의 실패 이후, 사람들은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실행할 수 있었다. 과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콩트는 칼 마르크스와 제러미 벤담과 유사했다.


콩트는 "백과사전 법칙"이라고 부른 또 다른 보편 법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법칙들을 결합하여 모든 과학의 체계적이고 계층적 분류를 개발했다. 무기 물리학(천문학, 지구과학, 화학)과 유기 물리학(생물학, ''사회 물리학''(후에 ''사회학''으로 개명))을 포함했다. 1780년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도입한 것과는 별개로, 콩트는 1838년 "사회학"을 재창조하고 신조어로서 용어를 도입했다.[13] 콩트는 이전에 "사회 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아돌프 케틀레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되었다.

콩트는 사회학을 모든 과학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과학으로 보았다. 이 과학은 다른 모든 과학을 포함하고 그들의 발견을 응집력 있는 전체로 통합하고 관련짓는 것이다. 그러나 콩트는 "인류학, 또는 진정한 인간 과학을 [추상 과학의 대 계층에서] 마지막 단계로 간주했다."[14]

– 콩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과학은 이론적 지식과 응용 지식으로 구성된다. 이론적 지식은 그의 연구 대상이 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일반적인 분야와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과 같은 세부적인 분야로 나뉜다. 주요 분야인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은 연구 범위와 이론적 도구의 복잡성에 따라 감소하는 순서로 배열할 수 있는데, 이는 조사 대상 현상의 복잡성 증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면 물리학에 대한 지식을 전제해야 하는데, 모든 화학 현상은 물리 현상보다 더 복잡하고, 물리 현상에 의존하며, 물리 현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분류된 과학은 나중에 제시된 과학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전되었다.

4. 인류교

콩트는 전통적인 종교가 수행했던 사회 통합 기능을 대신할 실증주의 사회를 위한 '인류교'를 만들었다.[11] 콩트는 "타인을 위해 살라"(vivre pour autrui)는 말로 이타심(altruism)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17]

콩트는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사상과 시대를 담은 『성찰록』을 썼다. 이 책에는 "인류, 진리, 정의, 자유, 조국"과 같은 구호가 담겨 있었고, "1793년 체제와 1816년 체제를 비교하여 프랑스 민중에게 호소한다"는 내용과 함께 "전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콩트, 1816년 6월"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성찰록』에서 콩트는 앙시앵 레짐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고 비판했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제1제정의 독재, 전쟁, 그리고 왕정 복고의 반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1793년은 프랑스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자코뱅파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1816년은 루이 18세가 망명에서 돌아왔지만, 왕정 복고 이후 남프랑스에서 정부의 대규모 탄압, 즉 "백색 테러"가 자행된 시대였다.[52]

170px]]

이러한 혼란 속에서 콩트는 프랑스 재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콩도르세,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를 연구하고 미국 헌법도 공부했다. 몽주라그랑주의 수학 및 수학사 업적을 연구하며 과학과 역사의 관계를 고찰하고 둘을 통합하려 했다. 특히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를 쓴 콩도르세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진보주의 역사 철학과 '사회 수학'이라는 학문적 시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53] 콩도르세의 사상은 콩트가 পরবর্তীতে 체계화하는 "3단계 법칙"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세기 초 앙리 드 생시몽의 초상


1816년 8월, 18세의 콩트는 비서를 구하던 생시몽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매달 300프랑을 받는 조건이었지만, 생시몽이 파산 상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 봉급을 받지 않고 수학 개인 교습을 하며 생시몽을 도왔다.[55]

생시몽은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 출신으로 혁명 전에는 부유했지만, 혁명의 격변 속에 몰락하여 콩트가 만났을 때는 이미 56세의 가난한 노인이었다. 16세에 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해 이름을 알렸고, 프랑스 혁명기에는 투기꾼으로 활동했지만, 투기를 위험하게 여긴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어 뤽상부르 궁전 감옥에 갇혔다. 지인과 친구들이 단두대형으로 처형되는 와중에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처형되어 석방된 후에도 프랑스 제1제정(나폴레옹 제정), 왕정 복고를 겪었다. 그는 계몽 사상이 주장하는 허황된 관념에 반감을 가졌고, 노년에도 열정적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반혁명"(합리주의에 기반한 "질서와 진보")을 바탕으로 과학, 산업, 정치 재편을 모색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이후, 생시몽은 를 비롯한 유망한 학자들과 살롱에서 교류하며, 이제는 무의미한 혁명이나 전쟁의 시대가 아니라 산업과 경제 발전의 시대라고 생각했다. 생시몽은 콩트에게 새로운 "아버지"가 되어, 과학적 방법에 의한 "사회 재조직" 사상을 전수했다.

고전파 경제학장바티스트 세


콩트는 발라에게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므로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하며, 기존의 가정적인 사상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8세기 계몽 사상과의 결별 선언이자, 철학에서 과학으로 전환점에 선 콩트의 평생 모토가 되었다.

콩트가 살았던 시대는 사회 과학과 사회주의의 여명기였다. 생시몽과 콩트의 사회학이 "반혁명" 입장에서 사회 질서와 구조를 연구한 반면, 로버트 오웬과 샤를 푸리에사회주의는 노동자 단결을 호소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차티스트 운동카를 마르크스공산주의는 다시 혁명을 목표로 했다. 콩트는 스승 생시몽과 함께 계급 투쟁이 아닌 "사회 재조직" 연구를 계속했다.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의 인류교 사원

5. 콩트 사상의 영향과 의의

오귀스트 콩트의 사상은 후대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콩트는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 학문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실증주의 철학은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에 기여했다. 특히,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등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

콩트는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실증철학'을 제시하고, 사회 재조직의 원리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인간 지식이 신학적,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실증적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으며, 과학적 지식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사회 개혁과 발전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콩트의 사상은 몇 가지 비판과 한계를 갖는다. 그는 과학에 대한 제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저서 외에는 읽지 말 것을 권유하는 등 닫힌 사고방식을 보이기도 했다.[80] 또한, 프란츠 요제프 갈의 골상학에 영향을 받아 남녀 불평등을 옹호하는 등[83]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5. 1. 사회학 및 기타 학문에 미친 영향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학, 철학, 과학사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회학의 창시자로서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등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콩트의 연구는 자아와 지식 생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성향과 무의식적인 담론이 지식 생산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의미하는 '반성성'(reflexivity)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4] 이는 현대 사회과학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예고하는 것이다.[34]

콩트는 방법론적 집단주의(거시적 방법)의 관점에서 인간을 사회적 단위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하려고 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미시적 방법)와 대조를 이룬다. 콩트의 입장은 밀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주어 역연역법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79]

20세기 이후, 사회학은 콩트가 구상한 종합화에 기반한 거시적인 시스템 이론과 사회적 행위 이론 등 미시 이론에 기반한 연구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콩트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학의 연구 방법은 개별 영역을 다루게 되면서 전문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이 진행됨에 따라 연구는 영역 사회학의 형태로 특수화·분화를 거치면서 발전하고 있다.

콩트는 "예견하기 위해 관찰하고, 예지하기 위해 예견한다"는 명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사상은 사회학에서 완결되는 정신의 역사 발전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학을 "실증철학"의 전체 체계를 집약하는 학문 영역으로 위치지었다. 콩트는 사회변동론(사회동역학)과 사회정역학을 사회학의 구성 요소로 제시하고, 양쪽 모두의 접근 방식을 연구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콩트는 실증주의 교육 및 교육 조직을 사회적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중시했다. 그는 스스로 공예 협회를 설립하여 일반 노동자를 위한 천문학 강의를 18년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5. 2. 비판과 한계

오귀스트 콩트의 사상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과 한계를 지닌다.

콩트는 『실증철학강의』에서 인간이 별의 화학적 조성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30년 후 분광학의 발달로 이는 틀린 예측으로 밝혀졌다.[31][32] 이는 과학에 대한 그의 제한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1865년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콩트는 방법론적 집단주의를 주장하며 개인의 심리보다는 사회적 단위를 중시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지점이었다. 콩트는 밀에게 자신의 저서 외에는 읽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80] 이는 그의 닫힌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기무라 이쿠타로(清水幾太郎)는 콩트가 레옹 발라스(Léon Walras)의 일반균형이론을 알았다면 정신 이상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평가했다.[81] 현대 사회학은 콩트의 기대와 달리 전문화, 특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갈의 초상


콩트는 프란츠 요제프 갈(Franz Joseph Gall)의 골상학에 영향을 받아 남녀 불평등을 옹호했다.[83] 그는 여성을 "아이와 같다"고 보았으며,[83] 이는 여성 해방론자인 존 스튜어트 밀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6. 주요 저서


  • '''사회 재조직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 계획''' (Prospectus des travaux scientifiques nécessaires pour réorganiser la société|사회 재조직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 계획프랑스어, 1822)
  •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실증철학 강의프랑스어, 1830년-1842년). 전 6권.
  • '''대중 천문학의 철학적 총론''' (Traité philosophique d'astronomie populaire|대중 천문학의 철학적 총론프랑스어, 1844년)
  • '''실증정신론''' (Discours sur l'esprit positif|실증정신론프랑스어, 1844년)
  • '''실증정치학 체계''' (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실증정치학 체계프랑스어, 1851년-1854년). 전 4권.
  • ''실증주의에 대한 일반적 관점'' (''실증주의 전반에 대한 강연'' 1848, 런던, 1856)[1]
  • J.H. Bridges (역), ''실증주의에 대한 일반적 관점'' (Trubner and Co., 1865,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9년 재발행)[2]
  • R. Congreve (역), ''실증적 종교의 교리문답'' (Kegan Paul, Trench, Trübner and Co., 1891,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9년 재발행)[3]
  • G. Lenzer와 함께, ''오귀스트 콩트와 실증주의: 필수 저술'' (Transaction Publishers, 1998).[4]
  • H. 마티노 (역),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 철학'' (전2권, Chapman, 1853,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9년 재발행)[5]
  • H.S. Jones (편), ''콩트: 초기 정치 저술''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1998)[6]
  • ''실증적 정치 체계'' (다양한 출판사)[7]
  •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Tome II'' (Bachelier, Paris, 1835)[8]
  • F. Ferré와 함께, ''실증철학 서론'' (Hackett Pub. Co., 1988).[9]
  • H. S. Jones와 함께, ''초기 정치 저술''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3).[10]
  • 이시카와 사무로 (역), 『실증철학(상하)』 (춘추사, 1931년)[11]
  • 히자와 켄이치 (역), 『사회재조직의 과학적 기초』 (이와나미 문고, 1937년)[12]
  • 타나베 토시토시 (역), 『실증적 정신론』 (이와나미 문고, 1938년)[13]
  • 카와데쇼보신샤 (1960년), 『세계대사상전집 [제2기] 제9 (사회·종교·과학사상편 제9(콩트·스펜서))』 (사회재조직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안(츠치야 붕고 역), 과학 및 과학자에 관한 철학적 고찰(츠치야 붕고 역), 실증적 정신론-질서와 진보(히자와 켄이치 역))[14]
  • 추오코론샤 (1970년), 『세계의 명저 36 콩트·스펜서』 (키리우 카즈오 역) (사회재조직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의 계획, 실증적 정신론, 사회정학과 사회역학)[15]
  • 스기모토 타카시 (역), 『사회학의 기원으로』 (하쿠스이샤, 2013년) (하쿠스이 i클래식스. 콩트 컬렉션)[16]
  • 스기모토 타카시 (역·해설), 『과학=종교라는 지평』 (하쿠스이샤, 2013년) (하쿠스이 i클래식스. 콩트 컬렉션)[17]
  • 田辺寿利, 『콩트 실증철학』 (이와나미쇼텐, 1935) (다이시소우분코)[18]
  • 혼다 기요하루, 『콩트 연구: 그 일생과 학설』 (코이시카와쇼보, 1949)[19]
  • 시미즈 이쿠타로, 『오귀스트 콩트: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978, 이와나미신쇼, 치쿠마가쿠게이분코, 2014)[20]
  • J. S. 밀 (저), 무라이 큐지 (역), 『콩트와 실증주의』 (모쿠타쿠샤 (시소우시 라이브러리), 1978)[21]

참조

[1] 백과사전 Comte, Auguste
[2] 웹사이트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plato.stanfor[...]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8
[3] 학술지 Sociology and the Social Sciences https://www.jstor.or[...] 1921
[4] 학술지 A Comtean Centenary http://dx.doi.org/10[...] 1922
[5] 웹사이트 Lecture 25: The Age of Ideologies (3): The World of Auguste Comte http://www.historygu[...]
[6] 웹사이트 altruism (n .) http://www.etymonlin[...] 2013-08-21
[7] 웹사이트 Rencontre avec Annie Petit "Auguste Comte" https://web.archive.[...] Montpellier Agglomeration 2007-10-19
[8] 서적 Contra Calvitius (English): A critical view of Calvinism https://books.google[...] Editions d Assailly
[9] 서적 Comte: The successor of Aristotle and st. Paul, a discourse https://books.google[...]
[10] 서적 Pickering (2006)
[11] 웹사이트 Stanford Encyclopaedia: Auguste Comte http://plato.stanfor[...]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12] 서적 Positivism and Sociology
[13] 서적 Des Manuscrits de Sieyès. 1773–1799 Champion
[14] 학술지 Four-Field Commentary 1992
[15] 웹사이트 BRAZIL: Order and Progress http://wais.stanford[...]
[16] 서적 The positive philosophy of Auguste Comte freely translated and condensed by Harriet Martineau AMS Press
[17] 문서
[18] 웹사이트 Auguste Comte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2003
[19] 서적 The Positive Philosophy of Auguste Comte London
[20] 서적 Auguste Comte and Positivism: The Essential Writings Harper & Row
[21] 웹사이트 Auguste Comte plato.stanford.edu/e[...] Stanford University 2018-05-08
[22] 웹사이트 Auguste Comte http://plato.stanfor[...] Stanford University 2016-04-28
[23] 백과사전 Auguste Comte Columbia Electronic Encyclopedia
[24] 서적 Auguste Comte and Positivism: The Essential Writings Transaction Publishers
[25] 웹사이트 Law of Three Stages: The Corner Stone of Auguste Comte's www.yourarticlelibra[...] Your Article Library 2014-12-01
[26] 문서 Auguste Comte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27] 웹사이트 Auguste Comte https://plato.stanfo[...] 2019-05-22
[28] 웹사이트 Auguste Comte https://www.britanni[...] 2019-05-22
[29] 서적 Auguste Comte and Positivism Harper and Row
[30] 서적 Auguste Comte and positivism : the essential writings Transaction Publishers
[31] 웹사이트 How do we know the composition of stars? http://spiff.rit.edu[...]
[32] 웹사이트 Comte on Astronomy https://web.archive.[...]
[33] 서적 Positive Polity Spottiswoode and Co.
[34] 학술지 Negotiating the swamp: the opportunity and challenge of reflexivity in research practice http://journals.sage[...] 2002-08
[35] 학술지 Reflexive discourse analysis: A methodology for the practice of reflexivity 2021-03
[36] 서적 世界史のための人名辞典 山川出版社 1991
[37] 서적 清水(1978)
[38] 서적 清水(1978)
[39] 서적 清水(1978)
[40] 서적 清水(1978)
[41] 서적 清水(1978)
[42] 서적 清水(1978)
[43] 서적 清水(1978)
[44] 서적 清水(1978)
[45] 서적 清水(1978)
[46] 서적 清水(1978)
[47] 서적 清水(1978)
[48] 서적 清水(1978)
[49] 서적 清水(1978)
[50] 서적 清水(1978)
[51] 서적 清水(1978)
[52] 서적 清水(1978)
[53] 서적 清水(1978)
[54] 서적 清水(1978)
[55] 서적 清水(1978)
[56] 서적 清水(1978)
[57] 서적 清水(1978)
[58] 서적 清水(1978)
[59] 서적 清水(1978)
[60] 서적 清水(1978)
[61] 서적 清水(1978)
[62] 서적 清水(1978)
[63] 서적 清水(1978)
[64] 서적 清水(1978)
[65] 서적 清水(1978)
[66] 서적 清水(1978)
[67] 서적 清水(1978)
[68] 서적 清水(1978)
[69] 서적 清水(1978)
[70] 서적 清水(1978)
[71] 서적 清水(1978)
[72] 서적 清水(1978)
[73] 서적 清水(1978)
[74] 서적 清水(1978)
[75] 서적 清水(1978)
[76] 서적 清水(1978)
[77] 서적 清水(1978)
[78] 서적 清水(1978)
[79] 서적 清水(1978)
[80] 서적 清水(1978)
[81] 서적 清水(1978)
[82] 서적 清水(1978)
[83] 서적 清水(1978)
[84] 서적 清水(1978)
[85] 서적 清水(1978)
[86] 서적 清水(1978)
[87] 서적 清水(1978)
[88] 서적 清水(1978)
[89] 서적 清水(1978)
[90] 서적 清水(1978)
[91] 서적 清水(1978)
[92] 웹사이트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https://terms.naver.[...] 고영복 2000-10-30
[93] 서적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 푸른나무 20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