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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키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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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쓰키 가오루는 1888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혁명가 쑨원과 결혼했다. 1898년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쑨원을 처음 만나 1905년 결혼했으나, 쑨원은 딸 미야가와 후미코가 태어나기 전 일본을 떠났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 가오루는 이후 두 번 재혼했으며, 1955년 딸과 재회한 후 1970년 사망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정부는 쑨원과의 결혼을 인정했으며, 후미코의 손자는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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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키 가오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쓰키 가오루 {{circa}} 1900
오쓰키 가오루 1900
원어 이름大月 薰
일본어 이름大月 薰 (おおつき かおる)
로마자 표기Ōtsuki Kaoru
출생 이름해당 정보 없음
출생일1888년 8월 6일
출생지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사망일1970년 12월 21일
사망 장소일본, 도치기현
배우자쑨원 (1905년 결혼, 1906년 관계 정리)
슈지 미와 (이혼)
모토무네 사네카타
자녀미야가와 후미코 (딸), 모토노부 사네카타 (아들)
부모오쓰키 긴지 (아버지)
친척미야가와 도이치 (손자), 미야가와 쇼코 (증손녀)
직업극장 매표원
기타 정보
민족야마토 민족

2. 생애

오쓰키 가오루는 1888년 8월 6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1898년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에서 쑨원(孫文)을 처음 만났으며[1], 1905년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2] 당시 쑨원은 이미 본처 루무전과 결혼한 상태였다.

1906년 5월 12일 딸 후미코(富美子)를 낳았으나, 쑨원은 딸이 태어나기 전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딸을 만나지 못했다.[2]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가오루는 1911년 딸 후미코를 미야가와 가문에 입양 보냈다. 이후 두 차례 재혼하였는데, 첫 남편은 시즈오카 은행 사장의 동생인 三輪 秀司|미와 슈지일본어였고, 두 번째 남편은 도치기현 아시카가시 도코지(東光寺) 사찰의 승려인 實方 元心|사네카타 모토무네일본어였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实方 元信|사네카타 모토노부일본어와 딸을 두었다.[3]

1955년, 딸 후미코가 아들과 함께 도코지 사찰을 방문하면서 모녀는 재회하였다.[2] 가오루는 1970년 12월 21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과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가오루와 쑨원의 결혼을 인정했으며, 후미코의 손자는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받았다.[4]

2. 1. 만남과 결혼

1898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차이나타운에서 당시 10세였던 오쓰키 가오루는 중국인 망명객 신분으로 머물던 청나라의 혁명운동가 쑨원을 처음 만났다. 당시 오쓰키 가오루의 집은 1898년 요코하마 대화재로 불타 없어져, 지인이자 쑨원의 동향 친구이며 지원자였던 화교 온병신(溫炳臣)의 요코하마시 야마시타초 자택 2층에 잠시 피난해 있었다. 이때 1층에 살고 있던 쑨원과 알게 되었는데, 가오루가 실수로 꽃병을 넘어뜨린 것을 쑨원에게 사과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1][5][6]

1901년, 쑨원(당시 37세)은 가오루(당시 13세)의 아버지 오쓰키 긴지(大月金次)에게 딸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그러나 1년 뒤인 1902년, 쑨원은 다시 청혼했고, 이번에는 가오루의 아버지가 동의하거나[1] 혹은 쑨원이 가오루에게 직접 청혼하여[5] 약혼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903년 이후 쑨원이 혁명 활동을 위해 해외로 나가면서 두 사람의 연락은 뜸해졌다.[5] 1905년 쑨원이 다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요코하마시 니시구에 위치한 아사마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5] 당시 쑨원은 이미 본처인 루무전과 혼인한 상태였다.[2]

2. 2. 쑨원과의 이별과 이후의 삶

1906년 5월 12일, 오쓰키 가오루는 쑨원과의 사이에서 딸 후미코(富美子)를 낳았다. 하지만 쑨원은 딸이 태어나기 전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딸을 보러 돌아오지 않았다.[2] 쑨원으로부터의 연락과 경제적 지원이 끊기면서 가오루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7] 아버지 오쓰키 킨지(大月 金次)의 사업마저 불황을 겪자, 가오루는 요코하마 극장의 매표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왔다.[7]

결국 1911년, 가오루는 딸 후미코를 요코하마 시내의 어물상 미야가와 우메키치(宮川 梅吉) 집의 양녀로 보냈다. 당시 후미코는 호적상 가오루의 아버지 킨지의 넷째 딸, 즉 가오루의 여동생으로 신고되어 있었다.[7] 쑨원은 훗날 친구에게 "이름은 모르지만, 일본에 딸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7]

딸을 떠나보낸 후, 가오루는 두 번 재혼했다. 첫 번째 남편은 시즈오카 은행장의 동생인 三輪 秀司|미와 슈지일본어였으나 이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있는 도코지(東光寺) 사찰의 주지 스님인 實方 元心|사네카타 모토무네일본어였다.[3][7] 가오루는 사네카타 모토무네와의 사이에서 아들 实方 元信|사네카타 모토노부일본어와 딸 하나를 두었다.[3]

가오루는 오랜 세월이 흐른 1955년, 딸 후미코가 자신의 아들(가오루의 외손자)과 함께 도코지를 방문하면서 비로소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2][7] 후미코는 이때 자신이 쑨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7]

가오루는 1970년 12월 21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과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모두 가오루와 쑨원의 결혼을 인정했으며, 후미코의 아들이자 가오루의 외손자인 미야가와 토이치(宮川 東一)는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4] 미야가와 토이치는 2008년 『일본에 남겨진 쑨원의 딸과 손자』(日本に残された孫文の娘と孫)라는 책을 출판했다.[8]

2. 3. 딸과의 재회와 죽음

후미코1955년 자신이 쑨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머니 오쓰키 가오루가 재혼하여 살고 있던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의 도코지(東光寺) 사찰을 장남과 함께 방문하여 가오루와 재회하였다.[2][7]

이후 가오루는 1970년 12월 21일 일본 도쿄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

3. 쑨원과의 관계에 대한 평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과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모두 오쓰키 가오루와 쑨원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4] 이러한 관계 인정의 한 예로, 딸 후미코의 손자는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받았다.[4]

3. 1.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남편 (사실혼/측실)쑨원1905년 요코하마에서 결혼.[2] 당시 쑨원은 첫 부인 루무전과 혼인 상태였다.
딸 (쑨원과의 사이)미야가와 후미코|宮川 冨美子일본어1906년 5월 12일 출생.[2] 쑨원은 딸 출생 전 중국으로 떠났으며, 이후 만나지 못했다.[2] 재정적 어려움으로 1911년 미야가와 가문에 입양되었고, 1955년 어머니와 재회했다.[2]
첫 번째 남편 (재혼)미와 슈지|三輪 秀司일본어시즈오카 은행 사장 미와 신고로|三輪 新五郎일본어의 동생.[3]
두 번째 남편 (재혼)사네카타 모토무네|實方 元心일본어도치기현 아시카가시 도코지 사찰의 승려.[3]
아들 (사네카타 모토무네와의 사이)사네카타 모토노부|实方 元信일본어[3]
딸 (사네카타 모토무네와의 사이)-이름 미상.[3]


3. 2. 관련 인물


  • 쑨원: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1898년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당시 10세였던 오쓰키 가오루를 처음 만났다.[1] 1901년 쑨원은 가오루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요청했으나 나이 차이(쑨원 37세, 가오루 13세)로 거절당했다. 1년 후 다시 청혼하여 승낙을 받았고, 1905년 요코하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 당시 쑨원은 본처 루무전과 혼인 상태였다. 쑨원은 가오루가 딸 후미코를 낳기 전인 1906년 중국으로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2]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정부 모두 오쓰키 가오루와의 결혼을 인정했다.[4]
  • 후미코: 오쓰키 가오루와 쑨원 사이에서 1906년 5월 12일에 태어난 딸.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으며, 어머니 가오루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1911년 미야가와 가문에 입양되었다. 1955년 도코지 사찰에서 어머니 가오루와 재회했다.[2] 후미코의 손자는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받았다.[4]
  • 미야가와 가문: 후미코를 입양한 가문이다.[2]
  • 三輪 秀司|미와 슈지일본어: 오쓰키 가오루의 두 번째 남편. 시즈오카 은행 사장 三輪 新五郎|미와 신고로일본어의 남동생이다.[3]
  • 實方 元心|사네카타 모토무네일본어: 오쓰키 가오루의 세 번째 남편.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위치한 도코지 사찰의 불교 승려이다.[3]
  • 实方 元信|사네카타 모토노부일본어: 오쓰키 가오루와 사네카타 모토무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3]

참조

[1] 웹사이트 大月薰錄音帶 揭孫文百年密婚 https://www.youtube.[...] 民視新聞
[2] 웹사이트 Japan-Revolution https://www.asiasent[...] 2022-01-31
[3] 웹사이트 谁为孙中山与日本妻子代写和翻译情书 https://cn.nikkei.co[...] 2018-08-31
[4] 뉴스 http://news.sina.com[...] 新浪网 2022-12-02
[5] 논문 孫文研究 2010
[6] 서적 孫文を支えた横浜華僑 温炳臣・恵臣兄弟 八坂書房 2009-03
[7] 뉴스 孫文が愛した日本人妻、求婚時は14歳―日本 https://www.excite.c[...] レコードチャイナ 2009-03-02
[8] 웹사이트 孫文の孫は日本にいた!日本在住の孫・宮川東一が自身の半生を語る https://www.cinemato[...]
[9] 간행물 孫文記念館館報2015年1月 http://sonbun.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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