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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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였으나 조선에 귀화하여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 조선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592년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조선에 왔으나, 조선의 문화에 감명받아 항복하고 조총 기술을 전수하는 등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여진족 격퇴, 이괄의 난 진압 등에도 기여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과 싸우기도 했다. 그는 사후 녹동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대구 달성군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달성 한일 우호관이 건립되었다. 김충선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관련 연구와 저서,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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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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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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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야카 (沙也可) |
한국 이름 | 김충선 (金忠善) |
자 | 선지 (善之) |
호 | 모하당 (慕夏堂) |
생애 | |
출생 | 1571년 1월 28일 |
사망 | 1642년 10월 23일 |
사망 장소 | 경상도 대구도호부 상수남면 우록동 |
귀화 전 이름 | 사야카 (沙也可) |
활동 | |
소속 | 일본군 → 조선군 |
주군 | 가토 기요마사 → 선조 |
최종 계급 | 정2품 정헌대부 |
지휘 | 항왜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
가문 | |
씨족 | 우록 김씨 |
자녀 | 김경원 김우상 김경신 김경인 |
기타 정보 | |
일본어 표기 | 사야카 (沙也可) |
존경 대상 | 조선과 명나라의 문화 |
기타 이름 | 서아지 (徐牙之) 장춘점 (張春點) |
2. 생애
김충선(金忠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에 왔다가 동래성 상륙 다음 날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한 일본인이다.[14] 그는 항복하며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의 강화서를 보냈다.[15] 이후 선조는 권율, 한준겸의 건의로 사야카에게 김해 김씨 성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17][18]
귀화 후 김충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조선군과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울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또한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하여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19][20] 임진왜란 이후에는 북방 변경을 수비하며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고, 이괄의 난 때는 반란군을 진압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대구로 돌아갔다.[23]
김충선은 1600년 인동 장씨와 결혼하여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24] 1642년 사망하여 삼정산에 묻혔다.[23]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1992년 대구광역시 교외의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 1. 임진왜란과 귀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14] 조선에 왔던 사야카는 동래성 상륙 다음 날,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했다. 그는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의 강화서를 보냈다.[15] 이후 선조는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사야카에게 김해 김씨 성과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17][18]2017년 현재에도 김충선은 한국에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구광역시 교외의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992년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 1. 1. 귀화 후 전투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14]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 상륙 다음 날, 사야가는 박진에게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의 강화서를 보냈다.[15]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16] 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 당상(堂上)에 올랐다.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참전하여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종2품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이후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과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17] 하사받고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18]
귀화 후에는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사야가는 귀화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19]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20] 그 밖에도 이덕형, 정철, 류근, 권율, 조호익, 김성일,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김응서 등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과 서신을 교류했다.[21]
사야가의 활약은 그의 전기인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하당문집》에 따르면,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 부장으로서 부산에 상륙했지만, 조선의 문화를 사모하고 히데요시의 출병에 대의가 없다는 생각에서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에 항복했다. 사야가는 조총 기술을 조선에 전하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전후 공적을 기려 조선 왕으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아 (사성 김해 김씨, 우록 김씨) '''김충선'''으로 불리며 귀화인이 되었다.
2. 1. 2. 조선으로부터 받은 혜택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14] 조선에 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하였다. 항복 당시 박진에게 보낸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15]이후 조선군과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78회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항복한 왜장(倭將) 손시로(孫時老)[16]와 함께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무관 3품 당상관에 올랐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에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여 종2품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선조는 도원수(都元帥)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奏請)으로 김충선에게 김해 김씨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17] 정2품 자헌대부에 올렸다.[18] 김충선은 귀화 후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였으며,[19][20] 대구 근교의 우록에 토지를 하사받아 거주하였다.
2. 2. 임진왜란 이후 행적
임진왜란 이후 김충선은 야인(野人)들의 잦은 침입에 맞서 변방(邊方) 방어를 자청, 10년 동안 북방 변경을 수비하여 그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는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참수(斬首)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22]김충선의 활약은 그의 전기인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하당문집》에 따르면,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 부장으로서 부산에 상륙했지만, 조선의 문화를 사모하고 히데요시의 출병에 대의가 없다는 생각에서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에 항복하였다. 이후 조총 기술을 전수하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전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 왕으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고(사성 김해 김씨, 우록 김씨)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받아 귀화하였다. 그는 대구 근교의 우록에 토지를 하사받아 거주하였으며,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공을 세워 정이품의 위계까지 올랐다.
2017년 현재에도 한반도에서는 김충선을 영웅으로 여기고 있다. 대구 교외의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992년에는 한국에서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 2. 1. 병자호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김충선은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23]2. 2. 2. 사망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참수(斬首)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22]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1642년(인조 20년)에 사망했다. 사후 삼정산(三頂山)에 묻혔으며,[23] 그 뒤 녹동서원(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음)에 배향되었다. 1798년(정조 1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에 재건되었다.
2. 3. 가계
김충선은 1600년(선조)에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와 결혼하여 아들 다섯 명과 딸 한 명을 두었다.[24]
김충선의 후손들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녹동서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24]
3. 사후 추모
일본 기슈토쇼구에는 신사카 지로가 쓴 글 등을 새긴 김충선(사야카)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2] 이 기념비는 사야카를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NPO 법인 '와카야마 관광을 생각하는 백인 위원회' 주최)이 개최된 것을 기념하여 2010년에 건립되었다.[12]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김충선이 와카야마현 사이카슈 출신 스즈키 마고지로라는 설을 따랐기 때문이다.
3. 1. 녹동서원





김충선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서원이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우록리 585번지)에 있다.[1]
3. 2. 달성 한일 우호관
2012년 5월 3일,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김충선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일본과 한국의 교류 역사를 전시하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개관했다. 김충선은 사이카슈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인식하에, 이 시설의 2층 부분에는 사이카슈의 고향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개관식에는 와카야마 시장 오하시 켄이치를 비롯한 와카야마시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초청되어 참석했다.[12]4. 김충선의 기원과 관련된 연구
김충선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따르면, 김충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했으나, 조선의 문화를 사모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에 대의가 없다는 생각으로 부하들과 함께 조선에 항복했다고 한다.[8]
그러나 김충선이 실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잡가(사이카) 출신이라는 설, 울산성 전투와 순천성 전투에서 조선 측 사자로 강화 교섭에 나선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라는 설,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중신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모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반박 가능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4. 1. 잡가(사이카)설
시바 료타로는 1971년 기행문집 『가도를 간다 2권 한의 나라 기행』에서 김충선(사야카)이 일본 이름 "사에몬"의 음역이거나 "사이카(잡가)"가 아닐까 추리했다[8]. 칸자카 지로도 비슷한 근거로, 사야가를 잡가로 설정한 소설 『바다의 가야금 잡가 철포중이 간다』를 썼다.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에 "사에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장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일본으로 귀환했다. "사이카"의 경우, 잡가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고, 한때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철포대로 알려진 토호이며,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격받은 원한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야가가 3000명」을 「잡가중이 300명」으로 바꿔 말함으로써 간신히 현실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가한 잡가중은 반(反) 노부나가파와의 항쟁에서 패배한 친(親) 노부나가파이며, 후에 히데요시에게 보호받은 잡가 손일(잡가당 스즈키 씨 참조) 등의 일당이므로, 이 역시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4. 2.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설
울산성 전투와 순천성 전투에서 조선 측 사자로 강화 교섭에 등장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가 김충선(사야카)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9]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는 가토 기요마사의 옛 신하였고, 규슈의 아소 씨와 관계가 깊은 인물로 추측된다. 아소 씨는 히고의 호족이었지만, [잇키]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탄압받았고, 몇 년 후에는 반란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당주 아소 코레미츠가 기요마사에게 암살당한 것을 원망하여 투항했다는 설이다.4. 3.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설
마루야마 야스나리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4,000석의 영지를 받았던 중신인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무장을 거론한다.[10] 1592년에 함경도의 길주, 이어서 단천에 주둔했음이 확인되지만, 이듬해 2월 말에 가토 기요마사 군이 한성으로 철수한 이후 하라다 노부타네의 이름이 한동안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로 보아 단천에서 고립되어 농성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가문의 이름이 기록에 부활했을 때는 영지가 1/10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기요마사가 중신의 항복을 은폐하는 한편, 대폭적인 감봉 후에 하라다 가문을 남겨두었다고 본다.[11]하지만 하라다 노부타네가 1593년 이후 사라졌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다음 자료들이 남아있다.
- 분로쿠 2년 6월 길일・니시자에몬시로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가관장 사본|분로쿠 2년(1593년) 6월 길일・니시자에몬시로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가관장 사본일본어
- 분로쿠 4년 5월 길일・바바 헤이스케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관도장|분로쿠 4년(1595년) 5월 길일・바바 헤이스케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관도장일본어
- 분로쿠 5년 정월 길일・유키히로 로쿠인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관도 거장|분로쿠 5년(1596년) 정월 길일・유키히로 로쿠인 앞으로(하라다) 노부타네 관도 거장일본어
하라다는 1593년부터 1596년까지 가신에게 문서를 발급하고 있으므로 사라지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위의 3점의 문서의 존재로, 1593년 2월 이후에 하라다 노부타네가 항왜가 되어 조선 측에서 사망했다는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하라다는 수년 후인 1598년의 울산성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5. 저서
-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있다. 김충선의 6대손 김한조가 간행했다.[26]
- 이 책에 실려있는 〈행록〉은 첫째 아들 김경원(金敬元)이, 〈묘지〉는 첫째 손자(김경원의 첫째 아들) 김진명(金振鳴)이, 〈묘갈〉은 유비(兪柲)가, 〈전(傳)〉은 이의숙이 지었다. 〈전〉은 이의숙의 문집 《이재집》 권7에 실려있다.
- 참고로 《사성 김해 김씨 족보》의 서문은 서종급이 지었다.
6. 대중문화
- 2005년 에구미 타카유키의 소설 『사야카 - 의리에 산 항왜 장수 -』(키리하라 서점)는 김충선을 사이카 슈의 스즈키 마고지로로 보고 그린 장편 소설이다.
- 2005년 하승남・사경의 『사야카 한일・전국 시대 그림 두루마리』 전 3권(지츠교노니혼샤)이 출간되었다.
- 나카지 사토루의 『신 전국지』(역사 군상 신서)가 있다.
- 2011년 이토 준의 『검은 남풍의 바다 가토 기요마사 "분로쿠・게이초의 역" 이문』(PHP 연구소)이 출간되었다.
- 2017년 tvN 드라마 ''명불허전''에서 다케다 히로미츠가 연기했다.[4][5]
6.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Nokdong Seowon
http://www.daegutour[...]
2007-02-03
[2]
웹사이트
「沙也可」日韓国際シンポジウム: 一語一絵 過去ログ
http://wbs-ceo.sblo.[...]
[3]
논문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4]
웹사이트
Live up to Your Name - Cast (Korean Drama, 2017, 명불허전)
http://www.hancinema[...]
[5]
웹사이트
(ET-ENT 인터뷰) 배우 다케다 히로미츠(Takeda Hiromitsu)! 한국을 정말 사랑하는 아티스트
http://m.rpm9.com/ne[...]
RPM9 전자신문엔터테인먼트
[6]
웹사이트
【藤本欣也の韓国探訪】“降伏した倭人の里” 歴史の荒波にもまれた日本の武将、沙也可の子孫たち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08-27
[7]
웹사이트
降倭沙也可 〈1〉正体不明 謎の武将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04-04-03
[8]
웹사이트
降倭沙也可 〈1〉人物浮かばぬ姓名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04-04-10
[9]
웹사이트
降倭沙也可 〈3〉2武将が浮上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04-04-17
[10]
웹사이트
降倭沙也可 〈4〉朝鮮軍に投降?原田信種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04-05-01
[11]
웹사이트
降倭沙也可 〈5〉生き残りへ現実的な選択
http://kyushu.yomiur[...]
読売新聞
2004-05-08
[12]
웹사이트
沙也可こと金忠善将軍の顕彰碑、紀州東照宮に建立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10-12-09
[13]
보도자료
本市代表団による韓国訪問の結果報告について
http://www.city.waka[...]
和歌山市
2012-05-17
[14]
서적
녹촌지(鹿村誌)
[15]
서적
강화서(講和書)
1592-04-20
[16]
서적
선조실록 권 94, 선조 30년(1597년) 11월 22일(기유) 3번째 기사
[17]
서적
김성인, 김향의, 김귀순, 이귀명 행록
[18]
서적
행록 및 묘지
[19]
서적
상절도사서(上節度使書)
[20]
서적
답통제사이공순신서(答統制使李公舜臣書)
[21]
서적
서(書)
[22]
서적
환사패소(還賜牌疏)
[23]
서적
묘갈
[24]
웹사이트
이건 가토 기요마사 후손 사진이 아닌데…
https://www.khan.co.[...]
경향신문
2019-02-23
[25]
서적
행록
[26]
서적
모하당문집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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