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성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성인은 임진왜란 때 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한 인물이다. 병자호란 때 북방 경비에 공을 세워 김성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광해군 때 관직에 제수되어 가선대부, 가의대부,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경상북도 청도군에 정착했으며, 후손들은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성인의 자손으로는 김귀성, 김흥발, 김득추, 김수태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 대종회를 결성하여 현재 약 4천 명 정도가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망명자 - 김충선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으로 참전했으나 조선에 귀순하여 공을 세웠고,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에 명분이 없다고 여겨 귀순했으며, 이후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워 김해 김씨 성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는 데 기여하는 등 조선의 안보에 공헌하였다.
  • 일본의 망명자 - 가타야마 센
    가타야마 센은 일본 노동 운동의 선구자로서, 기독교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을 형성하고 사회민주당 창당에 기여했으며, 코민테른 간부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한 인물이다.
  • 일본계 한국인 - 이방자
    이방자는 일본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어 이은과 결혼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장애인 복지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일본계 한국인 - 신중현
    신중현은 1957년 데뷔하여 한국 최초 록 밴드 결성, 펄 시스터즈, 김추자 음반 프로듀싱 등 한국 록 음악의 기반을 다지고 '미인', '아름다운 강산' 등 히트곡 발표와 다양한 장르 도입으로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록 음악가,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이다.
김성인
기본 정보
김성인
김성인
본관김해 김(金海 金氏)
자(字)명보(明甫)
호(號)동고(東皐)
생애
출생1564년
사망1636년
활동 분야조선 무신
관직
주요 관력훈련원 판관
경상도병마사
가족 관계
아버지김취문(金 Joachim)
어머니은진 송씨(恩津 宋氏)
배우자정부인 문화 유씨(貞夫人 文化 柳氏)
자녀4남
기타 정보
관련 인물사여모(沙汝某)

2. 임진왜란과 귀화

임진왜란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문록·경장 전투에서 김충선(사야가)과 함께 투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귀화 후 조선 조정에 기용되어 1620년(광해군 12년)에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고,[1] 이듬해인 1621년(광해군 13년)에는 변방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가의대부로 승진하며 광해군으로부터 김성인(金誠仁)이라는 이름과 자(字), 그리고 김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2][3] 이어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2][4]

3. 조선에서의 활동

임진왜란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한 김성인은 광해군 대에 변방 수비의 공으로 관직과 함께 이름, 자, 본관 등을 하사받았다.[1][2][3][4] 이후 병자호란 때에도 북방 경비에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당시 일본인 투항병 다수가 함경도 방면에 배치되었으며, 전쟁 후 이들은 그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김성인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경상북도 청도군에 정착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종회(함박김씨)를 결성했으며, 현재 약 4천 명의 후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 1. 관직 제수

임진왜란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한 후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

김성인 관직 제수 내역
연도관직비고
1620년(광해군 12년)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제수[1]
1621년(광해군 13년)가의대부변방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였으며, 광해군으로부터 성과 이름, 자, 본관을 하사받음[2][3]
1622년(광해군 14년)자헌대부승진[2][4]


3. 2. 하사받은 성명과 본관

임진왜란김충선과 함께 조선으로 귀화했다. 1621년(광해군 13년) 변방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가의대부로 승진하였고, 이때 광해군으로부터 성과 이름, 자, 본관을 하사받았다.[2][3] 이는 1620년(광해군 12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받고,[1] 1622년(광해군 14년) 자헌대부로 승진하는[2][4]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후손들은 그가 처음 조선에 들어올 때 정착했던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알려진 자손으로는 '''김귀성'''(金貴成)[5], '''김흥발'''(金興發)[6], '''김득추'''(金得秋)[7], '''김수태'''(金守泰)[8] 등이 있다.

4. 후손

김성인의 후손들은 그가 처음 조선에 들어온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2][3] 알려진 자손으로는 '''김귀성'''(金貴成)[5], '''김흥발'''(金興發)[6], '''김득추'''(金得秋)[7], '''김수태'''(金守泰)[8] 등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김성인의 후손들은 대종회(함박김씨)를 결성하였다. 현재 확인 가능한 김성인의 후손은 약 4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5. 정착

김성인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경상북도 청도군에 정착했다. 그의 자손들은 김성인이 처음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한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성인의 자손으로는 김귀성, 김흥발, 김득추, 김수태 등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김성인의 후손들은 함박김씨 대종회를 결성하였다. 현재 김성인의 모든 후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약 4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참조

[1] 문서 만력 48년(1620년) 사여모(沙汝某) 가선대부 임명 교지
[2] 서적 모하당문집(중간본) 권2, 부록, 金誠仁行錄
[3] 문서 천계 원년(1621년) 김성인(金誠仁) 가의대부 임명 교지
[4] 문서 천계 2년(1622년) 김성인 자헌대부 임명 교지
[5] 문서 천계 원년 김귀성 교지
[6] 문서 강희 15년 김흥발 무과 홍패 1676
[7] 웹사이트 https://www.yeongnam[...]
[8] 문서 가경 5년(1800년) 김수태 통정대부 임명 교지
[9] 문서 가경 15년(1810년) 김수태 가선대부 임명 교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