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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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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찬은 후한 말, 삼국 시대 동오의 인물로, 손책과 손권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손책의 친척 손하 밑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하여, 곡아의 승, 장사 등을 거쳐 회계태수를 역임했다. 222년 동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산월 토벌에도 참여했다. 이후 둔기교위, 소부를 거쳐 태자태부까지 올랐으나, 손권의 후계 다툼에서 손화 편을 들다가 처형당했다. 진수는 오찬을 "어려운 시세 속에서 정의를 지키려다 몸을 망쳤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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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찬
본관호주, 절강성
사망 년도245년
사망 장소난징, 강소성
직업관리
공휴(孔休)
관직 정보
태자태부 (太子太傅)재임 시작 시기 불명, 245년 사망
소부 (少府)재임 기간 불명
둔기교위 (屯騎校尉)재임 기간 불명
소의중랑장 (昭義中郎將)재임 기간 불명
회계태수 (會稽太守)222년 임명, 이후 시기 불명
참군교위 (參軍校尉)재임 기간 불명
산음현 현령 (山陰縣 縣令)재임 기간 불명
거기장군 등록 (車騎將軍 登錄)209년 임명, 이후 시기 불명
섬긴 군주손권

2. 초기 생애 및 손책 휘하에서의 활동

손하(孫河)가 조정현(鳥程縣)의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벼슬을 하였다. 손하가 장군(將軍)이 되자 그를 추천하여 오찬은 곡아(曲阿)의 승(丞)으로 임명되었으며, 장사(長史)로 승진했다.[2]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직무 수행에 매우 유능하여 육손, 부정(卜靜) 등 오군 출신 다른 관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4]

손권(孫權)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자 오찬을 주부(主簿)로 삼았으며, 산음현(山陰縣)의 현령(縣令)으로 임명된 뒤 참군교위(參軍校尉)로 승진했다.[2]

3. 손권 휘하에서의 활동

오찬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은례(殷禮) 등과 함께 고소(顧邵)에게 평가받아 그의 친구가 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손하(孫河) 밑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손권(孫權)의 주부(主簿)를 거쳐 산음(山陰)의 영(令), 참군교위(參軍校尉), 둔기교위(屯騎校尉), 소부(少府)를 역임했다.[6][7][9][10]

243년 황태자(皇太子) 손화(孫和)의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으나, 손화와 손패(孫覇) 간의 후계 다툼(이궁의 변)에 휘말렸다. 오찬은 손권에게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며 손화를 지지하고, 손패와 양축(楊竺)을 멀리할 것을 진언했다. 또한 육손(陸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9][10]

그러나 손패와 양축의 반발과 참언으로 손권의 분노를 사, 육손과 후계자 관련 편지를 주고받은 일로 하옥되어 주살당했다. 진수(陳壽)는 "어려운 시세 속에서 정의를 지키려다 몸을 망쳤다. 슬픈 일이다"라고 평했다.

3. 1. 동구 전투 (222년)

222년, 오찬은 동구 전투에 참전하여 동오의 경쟁국인 조위에 맞섰다. 그는 오나라 장수 여범, 하제 등과 함께 조휴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당시 폭풍우가 몰아쳐서 연결 밧줄이 끊어지면서 오나라 배들이 서로 분리되었다. 일부 배들은 위나라 기지로 표류하여 적에게 포획되었고, 다른 배들은 뒤집혀 선원들이 물에 빠졌다.[1] 오찬과 황연(黃淵)은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더 큰 배 중 하나에 있었다. 배의 선원들은 과적 때문에 배가 침몰할까 봐 물에 빠진 생존자들의 탑승을 허용하지 않았고, 배에 오르려고 시도하는 생존자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오찬과 황연은 부하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생존자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이 과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명령을 따르기를 꺼리자 오찬은 "만약 배가 침몰하면 우리 모두 함께 죽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오찬과 황연은 100명 이상의 생존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1]

3. 2. 회계태수 및 산월 토벌

손하(孫河)가 조정현장(鳥程縣)으로 있을 당시 그의 밑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손하가 장군(將軍)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오찬은 곡아(曲阿)의 승(丞)으로 임명되었고, 장사(長史)로 승진했다. 손권(孫權)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자, 오찬을 주부(主簿)로 삼았으며, 산음(山陰)의 영(令)으로 임명된 뒤, 참군교위(參軍校尉)로 승진했다. 이후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동구 전투 이후, 오찬은 회계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소의중랑장(昭義中郎將)으로 임명되어 여대(呂岱)와 함께 산월(山越)을 토벌하였다.[9][10] 그는 은둔한 은자 사담(謝譚)을 등용하려 했으나, 사담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오찬은 "용은 움직임으로 신성한 힘을 드러내고, 봉황은 울음소리로 그 가치를 증명한다. 어찌 하늘 저 멀리 숨거나 바다 깊숙이 잠겨 있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오찬은 여대와 함께 반란군을 공격하여 율릉의 이환을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웠다.[9][10]

3. 3. 중앙 관직 역임

손하(孫河)가 오정현령(縣令)일 때 관료로 섬겼다. 손하가 장군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곡아현승(曲阿縣丞)에 임명되었고, 장사(長史)로 승진하여 뛰어난 치적을 쌓았다.[9][10] 이 일로 육손(陸遜)·복정(卜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성을 얻었다.

손권(孫權)이 차기장군(車騎將軍)이 되자 장군부에 초빙되어 주부(主簿)로 섬겼다. 이후 산음현령(山陰縣令)이 되었고, 참군교위(參軍校尉)로 승진했다.

황무(黃武) 원년(222년), 위의 대군을 맞아 여범(呂範)·하제(賀齊) 등과 함께 동구(洞口)로 출진하여 조휴(曹休) 군의 침공을 막았다(동구의 전투). 전투 중 폭풍으로 배의 밧줄이 끊어져 배가 적진으로 흘러가 붙잡히거나, 침몰하여 익사하는 자가 발생했다.

다른 배들이 전복을 두려워하며 구조 요청을 하는 사람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가운데, 오찬과 황연(黄淵)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했다. 오찬과 황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자가 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후 회계 태수(太守)가 되었다. 무위무관(無位無官)이었던 사담(謝譚)을 공조(功曹)로 초빙했지만 거절당하자, 용(應龍)이나 봉황에 비유하며 벼슬을 권했다.

지원병을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소의중랑장(昭義中郎將)에 임명되어 여대(呂岱)와 함께 산월(山越)을 토벌했다. 이후 둔기교위(屯騎校尉)·소부(少府)가 되었다.[9][10]

적오(赤烏) 6년(243년), 손화(孫和)의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감택(闞澤)·설종(薛綜)이 잇달아 사망했기 때문에 오찬이 후임이 되었다.

4. 이궁의 변과 죽음

243년 황태자(皇太子) 손화(孫和)의 교육을 맡은 감택(闞澤)과 설종(薛綜)이 차례로 사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1] 손권의 후계를 두고 손화와 그의 동생 손패(孫覇)가 다툼을 벌이자, 오찬은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며 손화를 지지하였다.[1] 오찬은 손패를 하구(夏口)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손패파의 핵심 인물인 양축(楊竺)을 쫓아낼 것을 주장하였고, 육손(陸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1]

하지만 손패와 양축의 반발을 샀고, 그들의 참언으로 손권의 분노를 사, 손화파의 고담(顧譚)과 고승(顧承)이 유배될 당시 오찬은 육손과 후계자에 관련된 편지를 주고받은 일로 하옥되어 주살당했다.[1]

5.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오찬과 주거를 평가하면서 "불행한 운명과 마주쳤지만 의로움 때문에 죽었다. 정말 안타깝다!"라고 기록했다.[13]

진수(陳壽)는 오찬에 대해 "어려운 시세 속에서 정의를 지키려다 몸을 망쳤다. 슬픈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anguozhi
[3]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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