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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와라 하루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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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타와라 하루키요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1567년에 오타와라 츠나키요의 아들로 태어나, 1590년 오타와라 씨의 가독을 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공을 세워 영지를 늘렸고, 오사카 전투에도 참전했다. 1625년에 종5위하에 서임되었으며, 1631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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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와라 하루키요
기본 정보
씨명오타와라 씨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에이로쿠 10년 ( 1567년 )
사망간에이 8년 2월 5일 ( 1631년 3월 7일 )
계명탈승원전인국영금대거사
묘소도치기현오타와라시 산노테 고신지
관위종5위하・우병위、비젠수
막부에도 막부
주군나스 스케하루도쿠가와 히데타다 → 이에미쓰
시모쓰케오타와라번 번주
씨족오타와라 씨
부모아버지:오타와라 쓰나키요、어머니:가쿠다 겐자에몬 딸
형제하루키요、마스키요、가쓰마사、다다타메、가쓰키요、노리키요、후쿠하라 스케히로 정실、오제키 기요마스 정실、이오노 스케토모 실
배우자정실:나스 스케사다의 딸
자녀마사키요、스케키요、후쿠하라 스케모리 실、오타와라 노부키요 실、오타와라 마사쓰구 실、오카모토 요시마사 실
특기 사항오타와라 하루키요의 4녀에 대해, 오카모토 요시야스 실이라는 설이 있지만, 요시야스 실은 간에이 19년(1642년)에 62세로 사망했기 때문에, 생년을 역산하면 덴쇼 9년(1581년)이 되어, 오타와라 하루키요가 15세 때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그는 형이어야 할 오타와라 마사키요의 생년인 게이초 17년(1612년)을 크게 웃돌기 때문에, 정합성이 맞지 않다.
한편, 오타와라 씨의 계도에는, 하루키요의 4녀는 요시야스의 아들인 오카모토 요시마사 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오카모토 씨 계보에서도 요시마사 실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키요의 딸을 요시야스 실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이다.
관위 정보
관위종5위하
직책우병위
수령국비젠수

2. 생애

에이로쿠 10년(1567년), 오타와라 츠나키요의 아들로 태어났다. 덴쇼 13년(1585년) 우스바가하라 전투에 아버지 및 동생 마스키요와 함께 참전하여 첫 출진하였다. 덴쇼 18년(1590년) 오타와라 씨의 가독을 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을 일으키자 스루가국누마즈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였는데, 이때 동생 마스키요가 이미 히데요시와 알현을 마친 상태였다. 주군이었던 나스 스케하루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른 나스 7기의 여러 씨족도 감봉 처분을 받는 상황에서, 오타와라 씨는 7,100석의 영지를 안도받았다. 또한 히데요시로부터 비젠 국 카츠미츠, 무네미츠 두 제작의 태도를 하사받아 비젠노카미를 칭했다.

오다와라 함락 후, 항복한 나리타 우지나가의 오시성 접수 임무를 아사노 나가마사에 소속되어 수행했다. 하루키요는 늦은 참전으로 영지를 몰수당한 나스 씨의 재흥을 위해 히데요시에게 진사하였고, 그 결과 나스 스케카게는 5,000석을 하사받아 나스 씨는 작게나마 영주로서 부활할 수 있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나고야 성까지 출진했지만,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영지 상황을 첩보하여 보고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무쓰국 경계의 성곽 수조 임무를 맡았고,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경계 왕래 금지 명령도 받았다. 또한 미나가와 다카쓰네・핫토리 마사시게 등이 원군으로 오타와라 성에 들어와 장통 대포 10정이 배치되었다.[1]

1600년 7월 24일,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남진 시에는 오타와라 성에 농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한 후, 시모쓰케 모리타에 800석을 추가로 받아 7,900석이 되었다. 1601년에는 오타와라 성에 주어졌던 대포 3정을 그대로 받았다.[1]

1602년에는 개역된 소마 요시타네의 거성인 소마 나카무라 성 수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12월 25일 시모쓰케 하가군・나스군, 무쓰 이와키군에 4,5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2,400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어 오타와라 번을 세웠다.[1]

1614년 9월 사토미 다다요시가 개역되었을 때 다테야마 성을 접수하고, 오사카 겨울 전투와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617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상경에 근시하였고, 슨푸 성의 성번을 맡았다. 1622년 모가미 요시야스가 개역되었을 때 야마가타 성에 들어가 수비를 맡았다.

1623년 히데타다의 상경에 수행했고, 1625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1627년 무쓰 니혼마쓰 성의 성번을 맡았다.

1631년 에도에서 6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가독은 장남 마사키요가 이었다.

2. 1. 오타와라 씨의 독립

에이로쿠 10년(1567년), 오타와라 츠나키요의 아들로 태어났다. 덴쇼 13년(1585년), 나스 스케하루와 우츠노미야 쿠니츠나의 싸움인 우스바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츠나키요, 동생 마스키요와 함께 참전한 것이 첫 출진이었다.

덴쇼 18년(1590년) 오타와라 씨의 가독을 이었다. 같은 해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기 위해 스루가국누마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했을 때, 동생 마스키요가 이미 히데요시와 알현을 마친 상태였다. 주군 나스 스케하루가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른 나스 7기의 여러 씨족도 감봉 처분을 받는 가문이 나오는 가운데, 오타와라 씨는 7,100석의 영지를 안도받았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비젠 국 카츠미츠, 무네미츠 두 제작의 태도를 하사받아 비젠노카미를 칭했다.

오다와라 함락 후, 항복한 나리타 우지나가의 오시성 접수 임무를 아사노 나가마사에 소속되어 수행했다. 전쟁 후, 하루키요는 늦게 참전한 죄로 영지를 몰수당한 나스 씨의 재흥을 위해 스케하루의 아들 스케카게(후지오마루)를 데리고 오슈 평정 도중 오타와라 성에 착진한 히데요시에게 진사했다. 그 덕분인지 스케카게는 새롭게 히데요시로부터 5,000석을 하사받아 나스 씨는 작게나마 영주로서 부활할 수 있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 분로쿠의 역 때에는 나고야 성까지 출진했지만, 도항은 하지 않았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오타와라 하루키요는 동군에 속해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영지 상황을 첩보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 같은 해 6월, 이시카와 시게쓰구・나이토 타다키요 등을 봉행으로 하여 잡병 1,000명 이상을 오타와라 성으로 맞아 무쓰국 경계의 성곽 수조 임무를 맡았다. 이때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경계 왕래 금지 명령도 받았다. 같은 달, 미나가와 다카쓰네・핫토리 마사시게 등이 원군으로 오타와라 성에 들어와 장통 대포 10정이 배치되었다.[1]

1600년 7월 24일, 오제키 스케마스・이오노 스케노부 등과 함께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남진 시에는 오타와라 성에 농성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에야스로부터 마사쓰네의 태도와 금 100냥, 히데타다로부터 금 장식이 붙은 나가후네 모로미쓰의 칼을 받았다. 8월 25일에는 이에야스로부터 서신을 통해 가게카츠가 병력을 낼 경우 신속하게 보고할 것을 명받았다.[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한 후, 시모쓰케 모리타에 800석을 추가로 받아 7,900석이 되었다. 1601년 7월, 핫토리 마사시게가 오타와라 성을 떠날 때 우에스기 방비를 위해 반입된 도쿠가와 군의 대포 10정 중 3정이 그대로 오타와라 성에 주어졌다.[1]

1602년 7월,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속해 개역된 무쓰의 소마 요시타네의 거성인 소마 나카무라 성 수비에 동생 마스키요와 함께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25일, 시모쓰케 하가군・나스군, 무쓰 이와키군에 4,5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2,400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어 오타와라 번을 세웠다.[1]

2. 3. 에도 시대

1614년(게이초 19년) 9월에 아와 국의 사토미 다다요시가 개역되었을 때 일족과 함께 다테야마 성을 접수하여, 동성의 수위로서 잠시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겨울부터의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으로 혼다 마사노부에 속해 참전했고, 다음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도 혼다 마사노부에 속해 싸워 적의 목 70개를 베었다.

1617년(겐나 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상경에 근시하여, 교토에서 돌아온 후 8월부터 12월까지 슨푸 성의 성번을 맡았다. 1622년(겐나 8년) 데와 국의 모가미 요시야스가 개역되었을 때도 동생 마스요시와 함께 같은 해 9월부터 10월까지 야마가타 성에 들어가 수비를 맡았다.

1623년(겐나 9년)에도 히데타다의 상경에 수행했다. 1625년(간에이 2년)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1627년(간에이 4년) 3월 사카이 나오쓰구와 함께 무쓰 니혼마쓰 성의 성번을 맡았다.

1631년(간에이 8년), 에도에서 병사했다. 향년 65세. 가독은 장남 마사키요가 이었다.

3. 가계

구 분내 용
아버지오타와라 쓰나키요
어머니스미타 겐자에몬의 딸
정실나스 스케사다의 딸
자녀


참조

[1] 서적 大田原家譜 2021-04-01
[2] 서적 寛永諸家系図伝 2021-04-01
[3] 문서 大田原晴清의 四女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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