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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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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여빈은 1556년에 태어나 1631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고려 밀직부사 이의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관직에 나아가 대북파의 횡포에 맞서 상소를 올리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했으며, 저서로는 《취사문집》, 《문절공 이력록》, 《영주지》 등이 있다. 그는 만년에 영주 부석면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사후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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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자 이름李汝馪
출생지조선 경상도 봉화군 내성면 도촌리
사망지조선 경상도 순흥군 용암면 감곡리 인수정
(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사망 원인병사(노환)
국적조선
덕훈(德薰)
취사(炊沙), 감곡(鑑谷), 감계(鑑溪), 도촌(道村), 만취헌(晩翠軒), 감곡산인(鑑谷散人)
직업문신, 학자, 교육자, 의병장, 시인
분야성리학
배우자예안 김씨
자녀아들 이성화, 이성림, 이성재, 이성운, 딸 이씨, 딸 이씨
부모이효신(부)
전주이씨 부인(모)
친척처당숙 김륵, 사위 권람, 임지경, 증조부 이대근, 외고조부 서원군 이친
본관우계
참전임진왜란

2. 생애

이여빈은 1556년(명종 11년) 9월 11일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자전참봉을 지낸 이효신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이다. 고려 밀직부사 이의의 8대손으로, 증조부 이대근은 홍천현감을 지냈고, 할아버지 이당은 정략장군 충좌위부호군을 지냈다. 증조부 도촌 이수형은 1455년(세조 1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봉화군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1]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순정독실하였으며, 잦은 병을 앓았다. 진사 한우, 남계 허충길, 박승임 등에게서 수학하였다.[1] 특히 박승임의 문하에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585년에서 1586년에는 동생 이여암과 함께 영주 소수서원에서 수학하였다.[5] 학당 과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바로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업을 더 정진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9월 식년과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6] 그러나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켜 김개국 의병대장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활동 기록을 메모하여 용사록을 출간하였다.[6]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다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교전하였다.[6]

1605년(선조 38년) 3월 12일에 증광문과에 병과 19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어머니 전주이씨의 병간호를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0] 1606년(선조 39) 6월 23일 장흥군 벽사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10] 1년 만인 1607년 6월 23일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0년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정인홍, 이이첨 등의 전횡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13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그해 6월 5일 전은소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10]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자 그는 양선생변무소를 올려 이황이언적의 공적을 치하하며 이이첨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7년(광해군 9)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어 상경했다. 그해 6월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다시 정청에 올라가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6월 26일 인목대비 폐모가 옳지 못함을 상소, 7일 동안 합문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7월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으로 낙향, 영주안동 향교의 시독으로 활동했다.

1617년 7월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으로 낙향하여 영주안동 향교에서 시독으로 활동했다. 조정에서 학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풍군 부석면 감곡에 은거하며 김개국, 김륵 등 소수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다. 1618년(광해군 10) 가을,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어느 친지의 주선으로 다시 안동향교 제독관이 되고, 1620년 10월 상주향교 제독관이 되었다.[11]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는 모래로 불을 땐다, 뭔가를 해도 되지 않는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인수정에서 시문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624년 지역 유림들의 추천으로 이산서원 산장에 초빙되었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영주지 편찬 준비를 해두었다. 1625년(인조 3) 11월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그해 12월 24일 서문을 지었으나 생전에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외선조 김담의 행적과 사적을 수집하여 문절공 이력록을 남겼다.

1626년(인조 4) 4월 진주향교 제독관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영주, 풍기 등에서 의병이 창의하자 아들 성화, 성간, 성재 등을 창의소로 보내 의병에 가담하게 하였다. 1631년(인조 9) 질병으로 진주향교 제독직을 사임하고 영주 감곡으로 돌아왔다.

1631년(인조 9) 질병으로 진주향교 제독직을 사임하고 영주 감곡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9월 28일영천군 용암면 감곡리(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인수정 건너편 석양와 정침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12]

1670년(현종 11년) 가을, 영천의 지역 유림이 세운 감계서당에 망와 김영조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1696년(숙종 22)부터 도계서원 제향이 논의되어 1715년(숙종 41년) 9월 영주군 순흥의 도계서원에 제향되었다.[12]

2. 1. 가계와 출생

이여빈은 1556년 9월 11일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자전참봉을 지낸 이효신(李孝信)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이다. 고려 밀직부사 이의의 8대손으로, 증조부 이대근은 홍천현감을 지냈고, 할아버지 이당(李木+堂)은 정략장군 충좌위부호군을 지냈다. 증조부 도촌 이수형은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봉화군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1]

어머니 전주이씨는 효령대군 보의 5대손으로 고조부는 서원군 친이며 증조부는 덕은도정 이납(德恩都正 李蒳)이고 조부는 황려부정 이종이다. 외할아버지 이귀윤은 어모장군 부사직, 사정(司正) 등을 역임했다. 외가는 외할아버지 이귀윤이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에서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거촌(巨村)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하였다. 외할머니는 광산김씨로 습독관 김균(金筠)의 딸이다.[1]

이여빈의 가계[1]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효신(李孝信)1529년 출생, 1602년 사망
어머니전주 이씨(全州李氏)1529년 출생, 1611년 사망, 효령대군 후손
부인예안 김씨1558년 출생, 1618년 사망
외조부이귀윤(李貴胤)1493년 출생, 1539년 사망, 서원군 친의 증손
외조모광주 김씨1509년 출생, 1602년 사망, 습독관 김균(金筠)의 딸


2. 2. 유년기와 수학

이여빈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순정독실하였으며, 잦은 병을 앓았다. 진사 한우(韓佑), 남계 허충길(許忠吉), 소고 박승임(朴承任) 등에게서 수학하였다.[1] 특히 박승임의 문하에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행장에 의하면 처음에는 진사 한우에게서 배우다가 뒤에 남계 허충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에 통달하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첫 스승 한우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가르침을 받은 은혜가 매우 크지만 그 큰 은혜를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 병을 앓았는데, 훗날 장인 김욱(金勗)의 제문에 '어릴 때부터 많은 병을 앓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살펴 주신 은혜가 큰데, 애통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2]

1585년에서 1586년에는 동생 이여암과 함께 영주 소수서원에서 수학하였다.[5] 학당 과시(學堂課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바로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업을 더 정진하겠다며 공부에 힘썼다.

2. 3.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1591년(선조 24년) 9월 식년과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6] 그러나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켜 김개국 의병대장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활동 기록을 메모하여 용사록을 출간하였다.[6]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다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교전하였다.[6]

2. 4. 관직 생활과 대북 항쟁

1605년(선조 38년) 3월 12일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 19등으로 급제하였으나, 어머니 전주이씨의 병간호를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0] 1606년(선조 39) 6월 23일 장흥군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10] 1년 만인 1607년 6월 23일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0년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정인홍, 이이첨 등의 전횡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13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그해 6월 5일 친어머니와 친동생은 아니지만 계통상 어머니와 아우의 관계이니 의리상 이를 헤아릴 것을 간하는 전은소(全恩䟽)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10] 이때 처음 지은 상소문은 그의 조카 이성간(李成榦)이 필사하여 후대에 전했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그는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를 올려 이황이언적의 공적을 치하하며 이이첨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3년 6월 서소문에서 김제남의 사사 소식을 접하고 분개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탄식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어 상경했다. 그해 6월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다시 정청에 올라가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6월 26일 인목대비 폐모가 옳지 못함을 상소, 7일 동안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7월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으로 낙향, 영주와 안동 향교의 시독으로 활동했다.

2. 5. 은거와 학문 활동

1617년 7월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으로 낙향하여 영주와 안동 향교에서 시독(蓍讀)으로 활동했다. 조정에서 학관(學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풍군 부석면 감곡(鑑谷)에 은거하며 김개국, 김륵 등 소수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이후 그는 어렵게 살았는데,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에 의하면 나물밥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이마저도 어려울 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으나, 가난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10]

1618년(광해군 10) 가을,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어느 친지의 주선으로 다시 안동향교 제독관(提督官)이 되고, 1620년 10월 상주향교 제독관(尙州鄕校 提督官)이 되었다.[11]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는 모래로 불을 땐다, 뭔가를 해도 되지 않는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이는 모래로 불을 때 밥을 짓는다는 뜻의 취사작반(炊沙作飯)을 줄인 말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농담 삼아 "그대와 같은 고을 사람으로 출세하여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대는 글쎄 왜 침체한가"라고 묻자, 그는 "그 사람들은 그들대로 출세하고, 나는 나대로 침체하니 다 운명이고, 또 주변머리가 없는 탓이 아니겠나."라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들 하는 대로 적당히 따르면 될 일이지 왜 주변 타령인가" 라고 하면, 그는 대답을 않고 양심장(養心章)을 펼쳐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인수정에서 시문과 문인들 양성 외에, 가끔 봉화군 도촌리 사제(沙堤)의 명정암(冥酊巖)을 산책하곤 했다.

인수정에서 시문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624년 지역 유림들의 추천으로 이산서원 산장(山長)에 초빙되었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영주지 편찬 준비를 해두었다. 그의 활동을 지켜본 영주 사람 진사 박성범, 김여욱, 조관금이 후원하고, 생원 박안복, 유학 송상헌, 장룡우, 손회종 등이 사적 수집을 도와주었다. 1625년(인조 3) 11월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그해 12월 24일 서문을 지었으나 생전에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외선조 김담의 행적과 사적을 수집하여 문절공 이력록(履歷錄)을 남겼다. 후일 김담의 10대손 김방(金防+土)은 김담의 행장, 신도비명, 기문록과 그가 남긴 이력록 등을 바탕으로 김담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1626년(인조 4) 4월 진주향교 제독관(晉州鄕校 提督官)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영천, 풍기 등에서 의병이 창의하자 아들 성화(成樺),성간(成榦),성재(成材) 등을 창의소로 보내 의병에 가담하게 하였다. 1631년(인조 9년) 질병으로 진주향교 제독직을 사임하고 영주 감곡으로 돌아왔다.

2. 6. 사망과 사후 추숭

1631년(인조 9년) 질병으로 진주향교 제독직을 사임하고 영주 감곡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9월 28일영천군 용암면 감곡리(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인수정 건너편 석양와(夕陽窩) 정침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12]

1670년(현종 11년) 가을, 영천의 지역 유림이 세운 감계서당(鑑溪書堂)에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눌은 이광정이 행장을 짓고, 묘비명은 갈천 김희주가 지었다. 그의 문집 취사집은 셋째아들 서암 이성재가 처음 정리하여 처음 간행하였고, 뒤에 증손자 이기정(李基定)이 정리하여 다시 3권으로 간행하였다. 7대손 이시묵(李時默)이 재간행하면서 1824년(순조 24) 이인행(李仁行)의 서문을 받고, 이시검(李時儉), 이시탁(李時鐸) 등이 1831년에 유심춘(柳尋春) 등이 다시 서를 써주고, 그 해에 6권 3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경상도 순흥부 도강면 감곡리(현, 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분토동(粉土洞) 묘좌에 안장되었고, 1830년(순조 30년) 2월 4일 묘비가 세워졌으며, 묘비문은 가선대부 병조참판 문소(聞韶) 갈천 김희주(葛川 金熙周)가 지었다.

1696년(숙종 22)부터 도계서원 제향이 논의되어 1715년(숙종 41년) 9월 영주군 순흥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12] 사림은 1715년(숙종 41) 순흥도계서원에 배향하였는데, 그 상향문에 "힘은 무너져가는 기강을 붙들 수 있고 손으로는 달리는 번개를 잡을 수 있다. 사나운 범이 관문을 지키니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의로운 행동은 일성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그해 조정으로부터 불천위(不遷位)를 받았다.

3. 사상과 평가

그는 남계 허충길과 소고 박승임에게 배워, 남계로부터는 모재 김안국으로, 소고 박승임으로부터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5]

1613년 옥사 때 이이첨정인홍이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자, 6월 5일 전은소(全恩䟽)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1]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를 올려 이황이언적을 옹호하고 이이첨정인홍을 탄핵했다.[1] 영창대군 옥사 때에는 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무슨 역심을 품겠느냐며 영창대군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

1617년 광해군이 7서의 변을 계기로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친모자 관계는 아니지만 계통상 모자 관계이므로 폐모살제는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궐문 앞에서 일주일을 엎드려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1614년 11월 안동향교 제독관이 되었다.[10] 1615년 9월 이산서원(伊山書院) 이건에 참여, 이산서원이건봉안문(伊山書院移建奉安文)을 지었다. 1618년 가을, 다시 안동향교 제독관, 1620년 10월 상주향교 제독관이 되었다. 1624년 이산서원 산장에 초빙되었다. 1626년 4월 진주향교 제독관에 임명되었으나, 1631년 질병으로 사임하였다.[10]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힘써 영주지 편찬을 준비했으나, 생전에 간행되지는 못했다.

3. 1. 이황 학통 계승

그는 남계 허충길의 문하와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남계로부터는 모재 김안국으로, 소고 박승임으로부터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5]

3. 2. 강직한 절의와 비판 정신

1613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정인홍이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자, 그해 6월 5일 친어머니와 친동생은 아니지만 계통상 어머니와 아우의 관계이니 의리상 이를 헤아릴 것을 간하는 전은소(全恩䟽)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1] 이때 처음 지은 상소문은 그의 조카 이성간(李成榦)이 필사하여 후대에 전했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그는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를 올려 이황이언적의 공적을 치하하며 이이첨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1] 영창대군의 옥사 때에는 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무슨 역심을 품겠느냐며 영창대군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1]

그의 셋째 아들 이성재(李成材) 또한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 순흥지에 의하면 이여빈이 올린 상소는 승정원에서 반입이 저지되었다 한다. '공이 상중(喪中)에 은혜를 온전히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승정원에서 저지되고 말았다(公從草土中 上全恩疏 見阻喉司)'라고 기록되어 있다.[1]

1617년(광해군 10년) 봄, 광해군이 7서의 변을 계기로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하자, 비록 친 모자간은 아닐지라도 계통상 엄연한 모자간이므로 폐모살제의 부당성을 주장한 상소했다.[1]

"새재 도적 박응서의 공초에 자전(인목대비)과 영창대군이 관련된 양으로 되었음은 천고의 불행입니다. 예로부터 밝고 어진 임금이 많았으나 특히 요순을 대효로 일컬음은 그분들이 인륜의 변고에 처하였으나 우애의 도리를 극진히 했기 때문입니다. ..... 이제 영창대군은 겨우 여덟 살의 아기로 깊이 대내에 있으면서 어머니 곁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형편으로 바깥 일과 전혀 관련이 있을 수 없으리란 것을 사람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영창대군을 죄로 다스리기를 주장하는 것은 한갓 역모를 다스린다는 명분만을 알 뿐 전하를 불의와 패륜에 빠뜨린다는 중대한 허물은 생각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 전하의 효성은 선조께서 쓰고 부리시던 지팡이나 마필까지도 반드시 공경하여 보호 하셨거든, 하물며 평일 선왕께서 그토록 자애하시던 영창이 아니오이리까. 전하는 이미 영창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으니 힘써 여러 신하의 의논을 쫓아 그 명은 용서하심이 처변의 도리를 온전히 하고 공의와 사정에 함께 마땅함을 얻으심이 될까 하옵니다.

또 드리건대 여덟 살 아기(영창)는 함께 뿌리에 붙은 나무로 모후(인목대비)에게서 멀리 떼어 놓음은 어린 풀의 뿌리를 잘라 놓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린이(영창)가 놀라움과 근심으로 목숨을 잃음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자전(慈殿) 또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심이 될까 하옵니다. ..... 원하옵건대 전하는 종당 대순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시와 후세의 잘못을 경계하시고 골육이 단란하며 모자분(광해와 인목대비)의 사이가 처음 같게 하시면 지극한 화기를 부르심이며 태평을 이루심이 되어 전하의 덕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선왕의 하늘에 계신 넋이 반드시 기뻐 하실 것입니다. ....."[1]

그는 궐문 앞에서 일주일을 엎드려 간하였지만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3. 3. 향토사 연구와 지역사회 기여

1614년(광해군 6) 11월 친지의 주선으로 안동향교 제독관(安東鄕校 提督官)이 되었다.[10] 1615년(광해군 7) 9월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옮길 때 참여, 이산서원이건봉안문(伊山書院移建奉安文)을 지었다. 1618년(광해군 10) 가을, 친지의 주선으로 다시 안동향교 제독관이 되었고, 1620년 10월 상주향교 제독관이 되었다. 1624년 지역 유림들의 추천으로 이산서원 산장(山長)에 초빙되었다. 1626년(인조 4) 4월 진주향교 제독관에 임명되었으나, 1631년(인조 9) 질병으로 사임하였다.[10]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영주지 편찬 준비를 하였다. 영주 사람 진사 박성범, 김여욱, 조관금이 후원하고, 생원 박안복, 유학 송상헌, 장룡우, 손회종 등이 사적 수집을 도와주었다. 1625년(인조 3) 11월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 모임을 주관하여 심의하고, 12월 24일 서문을 지었으나 생전에 간행을 보지 못했다.

4. 저서 및 작품


  • 炊沙文集중국어

: 선교랑을 지낸 셋째 아들 이성재(李成材)가 정리하여 간행하였고, 1831년(순조 31) 증손 이기정(李基定)에 의해 재정리, 재간행되었다.[12]

  • 문절공 이력록(履歷錄)

: 외선조 김담의 행적과 사적을 수집한 책이다. 훗날 김담의 10대손 김방(金防+土)은 김담의 행장, 신도비명, 기문록과 이력록 등을 바탕으로 김담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 寧州誌중국어 (유고)

: 고향의 향토사 자료를 모아 영주지 편찬을 준비했으나[12],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 명정암 기문(酩酊巖 記文[13])

: 벽사도 찰방으로 근무하며 지은 시이다.

:: 나는 왜 매미처럼 높은 나무를 찾아 맑은 이슬을 마시며

::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 나대로 놀지 못할까

:: 나는 왜 지렁이 처럼도 못할까

:: 마른 흙이나 먹고 샘물이나 마셨으면

:: 인간 세상의 내음새 나는 것을 얻으려 않게 부끄러워라 썩고

:: 속된 선비로 옷과 밥에 얽매어

:: 속된 무리를 따라 꿈틀거려야 하니

:: 굽히기 싫은 나의 허리를 남 위해 굽혀야 하고

:: 꿇기 싫은 무릎을 남 위해 꿇으며

:: 낮추기 싫은 얼굴을 남 위해 낮추고

:: 숙이기 싫은 머리를 남 위해 숙여야 하며

:: 쥐꼬리 만한 녹봉에 중정의 덕에 좀슬리며

:: 하찮은 벼슬에 기걸한 성품도 굽혀야 하다니

:: 말솜씨는 본래 벼변찮은데 남이야 말재주 부리라 하고

:: 기색은 본시 천연한데 남에게 아첨하라 하네

소고 박승임 문하생들의 사우록을 짓기도 했다.

5. 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이당(李木+堂)정략장군 충좌위부호군
백부이효량(李孝良)
계부이효충(李孝忠)
아버지이효신(李孝信)1529년 9월 9일 - 1602년 1월 16일, 장사랑 기자전참봉
어머니전주이씨(全州李氏)1529년 12월 7일 - 1611년 8월 4일,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
이여형(李汝馨)
동생이여암(李汝馣)훈도
동생이여합(李汝香+合)훈도
동생이여필(李汝馝)
조카이성건(李成建)자는 자강(子强), 1585년 - ?, 1624년 생원, 이여필의 아들
조카며느리공주이씨이질의 딸, 이성건의 부인
동생이여온(李汝香+溫)
매제이신도(李信道)삼척교수(三陟敎授)
부인예안김씨1558년 5월 29일 - 1618년 윤 4월 4일, 문절공 무송헌 김담(撫松軒 金淡)의 후손
첫째 아들이성화(李成華)자는 자회(子晦), 호는 하천(河泉), 1582년 - ?, 생원
맏며느리함창 김씨부사 김구정(金九鼎)의 딸
둘째 아들이성림(李成林)자는 자무(子茂), 1585년 - 1654년, 선무랑
둘째 며느리단산 장씨(丹山張氏)생원 장진(張瑨)의 딸
셋째 아들이성재(李成材)호는 서암(西巖), 문인, 선교랑 역임
손녀이씨
손녀 사위강현선(姜顯先)본관은 진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역임
넷째 아들이성운(李成雲)자는 자장(子章), 을미(1595년?) - ?, 통덕랑 홍문관 교리
넷째 며느리공인 성산김씨김성택(金成澤)의 딸, 찬성 김현주(金玄柱)의 후손
이씨
사위권람(權欖)
이씨
사위임지경(任之敬)
처부김욱(金勗)1536년 ~ 1600년, 본관은 예안, 참봉
처삼촌 겸 처당숙김륵호는 백암, 김륵은 숙부의 양자로 갔으므로 그에게는 처삼촌이면서 처당숙이 된다.
외조부이귀윤(李貴胤)1493년 ~ 1539년 2월 3일, 효령대군의 후손, 어모장군 부사직 역임
외조모광산김씨1509년 ~ 1602년 2월 4일, 습독관 김균(金筠)의 딸
외삼촌이탁(李綽)1532년 ~ 1567년8월 23일
이모부변영순(邊永淳)
이모부이종도(李宗道)


6. 기타

이여빈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상소한 회퇴 변척소를 한강 정구가 내용을 첨삭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다.[14] 조임도는 박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여빈의 상소문을 직접 확인한 결과, 정구가 첨삭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14]

함안 출신 학자 간송 조임도는 이여빈의 상소문을 입수하여 읽고, 무민당 박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이 찰방(李察訪)의 종사(從祀)와 관계된 상소는 지난해 제가 직접 보고 물어보니, 한강(寒岡)이 첨삭했다는 설은 크게 허황된 것입니다. 이미 지은 뒤에 한 번 훑어봤을 따름이라고 하니, '필삭(筆削)' 두 글자는 무함에 가까우므로 제가 손수 지워 없애버렸습니다. 편지 쓸 종이를 마주하니 멍하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14]

참조

[1] 기타
[2] 기타
[3] 기타
[4] 기타
[5] 간행물 도촌견문록
[6] 기타
[7] 기타
[8] 간행물 죽계일기 권지 7 1605-03-12
[9] 간행물 죽계일기 권지 8 1606-06-23
[10] 간행물 계암일록 1616-11-18
[11] 간행물 계암일록 3권 1617-05-21
[12] 기타
[13] 기타
[14] 서적 간송속집 제3권 서간(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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