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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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개는 삼국 시대 인물로, 전한의 옹치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유비 사후 촉한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며, 손권에게 투항하여 영창태수로 임명되었다. 옹개는 영창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제갈량의 남정 전에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획과 연합하여 촉에 반기를 드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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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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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옹개 |
간체자 | 雍闿 |
번체자 | 雍闓 |
병음 | Yōng Kǎi |
로마자 표기 | Yong Gae |
생애 | |
활동 시기 | 삼국 시대 |
소속 | |
세력 | 고정 |
가족 관계 | |
친척 | 옹치 |
2. 생애
옹개는 전한 옹치의 후손으로 여겨진다.[5]
유비 사후, 촉의 지배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태수 정앙을 살해하고 장예를 포박하였으며, 이엄의 설득에도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라며 반박했다. 이 반란은 인접 군으로 확산되었고, 주포나 고정도 이에 동조했다. 다만 영창군만은 여개의 지휘 아래 옹개에게 저항했다.[5]
옹개는 오에 복속했던 사섭을 통해 오에 귀속할 것을 청하고, 포로로 잡고 있던 장예를 오에 보냈다. 손권은 보즐의 중재를 받아들여 옹개를 영창태수로 임명했다.
옹개는 고정과 함께 영창군을 습격했지만, 여개가 영민을 규합하여 군의 경계를 막아 침공을 저지했다.[5] 제갈량은 이회, 마충에게 군세를 나누어 토벌하게 했지만, 옹개는 토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5]
2. 1. 촉한에 대한 반란
건안 말기, 교지 태수 사섭의 회유를 받아 손권에게 투항했다.[2][3] 익주 태수 정앙을 죽이고, 손권과 내통하여 후임 장예를 사로잡아 손권에게 압송했다.[4]유비가 사망한 후, 도호 이엄의 회유를 묵살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였다.[5] 동오에 투항하여 영창태수에 임명되었다.[5] 영창군의 오관연공조 여개와 부승 왕항이 옹개의 영창태수 부임을 저지하자, 여러 차례 격서를 보냈으나 여개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5] 이후 여개 등을 계속 압박하였으나, 굴복시키지는 못했다.[5]
2. 2. 최후
225년, 승상 제갈량이 남방의 반란을 토벌하려고 출진하려던 차에(제갈량의 남정),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5]3. 삼국지연의에서의 옹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건녕태수로 등장한다. 건흥 3년(225년), 남만왕 맹획과 연합하고 장가태수 고정, 월수태수 주포와 함께 촉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자신들에게 호응하지 않은 영창군을 공격하다가, 제갈량이 자신들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방향을 돌려 제갈량 군과 싸웠다. 제갈량의 이간계에 걸린 고정에게 살해당했다. 고정의 부하 악환에게 참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4. 평가
옹개는 자신의 세력과 이익을 위해 주군을 바꾸는 등 전형적인 난세 호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반란과 죽음은 당시 촉한 남부 지역의 불안정한 정세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현대에는 그의 생애가 난세 속에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와,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이었다는 비판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참조
[1]
서적
여개가 옹개의 격문에 답하는 글
[2]
서적
유요태사자사섭전
[3]
서적
장고제갈보전
[4]
서적
곽왕상장양비전
[5]
서적
황이여마왕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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