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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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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개는 삼국 시대 촉한의 인물로, 영창군 불위현 출신이다. 유비 사후 옹개가 오에 투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부승 왕항과 함께 옹개에 항거했다. 제갈량의 남정 이후 운남태수에 임명되었으나,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진수는 여개에 대해 절조를 지킨 인물로 평가했으며, 아들 여상은 진나라에서 남이교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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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여개 (呂凱)
계평 (季平)
출생지익주영창군 불위현
사망지익주운남군
사망 년도225년
직업관료
관직운남 태수
작위양천정후 (陽遷亭侯)
섬긴 군주소열제회제
가족
자녀여상 (呂祥)

2. 생애

여개는 군에 출사하여 오관연공조(五官掾功曹)가 되었다. 223년(장무 3년), 유비가 영안에서 죽자 옹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투항하고 영창태수가 되었다. 영창군은 익주군 서쪽에 위치하여 촉나라와 단절되었으나, 여개는 부승 왕항과 함께 관리와 백성을 통솔하고 군 경계를 폐쇄하여 옹개에 항거했다. 옹개가 여러 차례 격문을 보내 회유했으나, 여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선에게 복종할 것을 권하며 영창 땅을 지켰다.

225년(건흥 3년), 제갈량이 남정에 나섰을 때 옹개는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된 뒤였다. 제갈량은 남중에 도착하여 여개와 왕항의 공적을 칭찬하는 표를 올리고, 여개를 새로 설치된 운남군의 태수로 임명하고 양천정후에 봉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성도로 돌아간 후 남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여개는 이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아들 呂祥|여상중국어이 작위를 계승했고, 촉한 멸망 후 진나라에 출사하여 남이교위(南夷校尉)에 임명되었다. 여상의 자손은 대대로 영창태수를 역임했으며, 성한의 이웅에게 복속을 거부했다.[20] 진수는 여개를 "절조를 지켜 흔들림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여개는 익주영창군 불위현(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윈난성바오산시룽양구) 출신이다.[1] 그는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정치가 여불위와 같은 씨족 출신이라고 전해진다.[2] 진왕 정의 명에 따라 여불위와 그의 일족은 파촉 땅으로 유배되었다. 전한 무제 치세에 불위현이 설치되자 여씨는 그곳으로 이주하여 이민족에 대한 교화 정책을 수행했는데, 이것이 여개의 선조라고 전해진다.[20]

여개는 군에 출사하여 오관연공조가 되었다.

2. 2. 옹개의 반란과 저항

유비가 죽자, 옹개(雍闓)가 반란을 일으켜 에 투항하고 영창태수(永昌太守)가 되었다. 영창군은 익주군 서쪽에 있었고, 촉과는 단절된 상태였다. 여개는 왕항(王伉)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을 통솔하고, 군 경계를 폐쇄하여 옹개에 항거했으며, 옹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8] 왕항과 협력하여 군 경계를 폐쇄하고, 오에 의해 영창 태수로 임명된 옹개의 침공을 막았다. 옹개가 보낸 격문에 여러 차례 협박을 받았지만, 여개는 도리를 다하여 반론하고, 촉한의 유선에게 복속할 것을 오히려 옹개 등에게 권했다.[10] 여개의 위엄과 은혜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영창 땅을 지켜 절의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제갈량(諸葛亮)이 남정에 나섰을 때 옹개는 이미 고정(高定)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뒤였다.[12] 제갈량은 남쪽에 이르러 여개와 왕항을 칭찬하는 표를 올렸고,[13] 여개는 운남태수(雲南太守)에 임명되고 양천정후에 봉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족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14]

같은 해 봄 3월부터 가을에 걸쳐, 남중의 반란을 진압한 제갈량은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개명하고, 건녕군과 영창군의 일부를 분할하여 운남군을 신설했다.[21] 여개는 신설된 운남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양천정후에 봉해졌다.

제갈량이 성도로 귀환[22]한 후, 남만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여개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2. 3. 제갈량의 남정과 운남태수 임명

유비가 죽은 후, 옹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투항하고 영창태수가 되었다. 영창군은 익주군 서쪽에 있었고, 촉나라와는 단절된 상태였다. 여개는 부승 왕항과 함께 관리와 백성을 통솔하고, 군 경계를 폐쇄하여 옹개에 항거했다. 옹개가 글을 보내 여개를 회유했으나, 여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

225년 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정에 나섰을 때, 옹개는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뒤였다.[12] 제갈량은 남쪽에 이르러 여개와 왕항을 칭찬하는 표를 올렸고, 여개를 운남태수에 임명하고 양천정후에 봉했다.[14]

같은 해, 제갈량은 남중의 반란을 진압하고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개명했으며, 건녕군과 영창군의 일부를 분할하여 운남군을 신설했다.[21] 여개는 신설된 운남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양천정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제갈량이 성도로 귀환[22]한 후, 남만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여개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2. 4. 죽음과 유산

유비가 죽자, 옹개가 모반을 일으켜 에 투항하고 영창태수가 되었다. 영창군은 익주군 서쪽에 있으면서 도로가 옹색하고, 촉과는 단절되었으며, 태수가 바뀌었다. 여개는 부승 왕항과 함께 관리들과 백성들을 통솔하고, 군 경계를 폐쇄하여 옹개에 항거했으며, 옹개가 글을 보내 여개를 회유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24] 제갈량이 남정에 나서는 도중에 옹개는 이미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제갈량은 남쪽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개와 왕항을 칭찬하였고, 여개는 운남태수에 임명되고 양천정후에 봉해졌으나, 비주류 종족의 모반에 살해당했다.[24]

여개는 운남군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여상은 양천정후의 작위를 물려받았다.[16] 여상은 삼국 시대가 끝난 후 진(晉)나라에서 복무했으며 남이교위의 직책을 맡았다. 그의 아들과 후손들은 대대로 영창군의 태수를 역임했다.[17]

건흥 3년(225년), 촉한의 승상이었던 제갈량은 남정의 군을 일으켰지만, 그 이전에 옹개는 고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제갈량은 남중 땅에 도착하여 여개·왕항의 공적을 상주하여 칭찬했다. 같은 해 봄 3월부터 가을에 걸쳐, 남중의 반란을 진압한 제갈량은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개명하고, 건녕군과 영창군의 일부를 분할하여 운남군을 신설했다.[21] 여개는 신설된 운남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양천정후에 봉해졌다. 12월에 제갈량은 성도로 귀환[22]했으나, 남만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여개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아들 呂祥|여상중국어이 작위를 계승했다.

여상은 촉한이 멸망하자 에 출사하여 남이교위에 임명되었다. 자손은 대대로 영창태수가 되었으며, 성한의 무제 이웅이 영창군으로 진출해 왔을 때에는 복속을 거부했다고 한다.[20]

4세기에 성한의 건국자 이웅이 병력을 이끌고 녕주(현재의 윈난성구이저우성)를 침략했을 때, 여개의 후손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영창군의 백성들을 이끌고 침략자들에게 저항했다.[18]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여개에 대해 "절조를 지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장점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시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육개의 전기를 저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육개는 청렴결백한 길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황권, 이회, 마충, 왕평, 장니와 더불어 그들의 자질 덕분에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하여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19]

4. 삼국지연의

제갈량과 함께 남만을 정벌했으며 남만의 지리에 밝아 평만지장도(平蠻指掌圖)를 제갈량에게 올렸다.[1] 남만 정벌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왕항과 함께 영창군을 지켜낸 인물로 등장하며, 남만을 정벌하러 온 제갈량에게 "평만지장도"를 헌상한다.[1]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원전이 된 『삼국지평화』나 『화관색전』 등에서는 남정군과 적대하여 관색과 일기토를 벌였다.[1]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불위
아들상(祥)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Shu Ship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3] 서적 Sanguozhi vol. 43
[4] 서적 Sanguozhi vol. 43
[5] 서적 Sanguozhi vol. 43
[6] 서적 Sanguozhi vol. 43
[7] 서적 Sanguozhi vol. 43
[8] 서적 Sanguozhi vol. 43
[9] 서적 Sanguozhi vol. 43
[10] 서적 Sanguozhi vol. 43
[11] 서적 Sanguozhi vol. 43
[12] 서적 Sanguozhi vol. 43
[13] 서적 Sanguozhi vol. 43
[14] 서적 Sanguozhi vol. 43
[15] 서적 Sanguozhi vol. 43
[16] 서적 Sanguozhi vol. 43
[17] 서적 Shu Ship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8] 서적 Shu Ship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19] 서적 Sanguozhi vol. 43
[20] 서적 蜀世譜
[21] 문서 後主伝・諸葛亮伝
[22] 문서 後主伝
[23] 문서
[24] 서적 촉세보(蜀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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