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페이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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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페이는 1980년대 후반 홍콩으로 이주하여 데뷔한 중국 출신 가수이다. 1990년대 초 예명 왕정문으로 활동하다가, 1994년부터 본명인 왕페이로 활동했다. 1990년대 홍콩 가요계를 평정하고 중화권 시장에 진출하여 '천후'로 자리매김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얼터너티브 음악을 시도하며 음악적 절정을 맞았다. 2000년대 초반 활동을 중단했다가 2005년 이후 복귀했다. 더우웨이, 리야펑과 결혼했으나 이혼했으며,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이며 중화권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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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페이 (가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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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왕페이 |
한자명 | 王菲 |
병음 | Wáng Fēi (표준어) |
월병 | Wong4 Fei1 (광동어) |
영문명 | Faye Wong |
예명 | 王靖雯 Shirley Wong 왕정문 |
본명 | 왕페이 |
출생일 | 1969년 8월 8일 |
출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국적 | 홍콩 |
가족 | 슬하 2녀 |
배우자 | 더우웨이(1996년~1999년) 리야펑(2005년~2013년 9월) |
장르 | 드림 팝 C-Pop J-Pop |
직업 | 가수/싱어송라이터 영화배우 |
종교 | 불교 |
활동 시기 | 1989년~현재 |
레이블 | Cinepoly EMI Sony Music Tai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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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왕페이는 1969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왕요우린은 석탄기사였고, 어머니 시아꾸이잉은 탄광문화공단의 소프라노였다.[1] 문화 혁명의 영향으로 15세 이전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시아린'으로 불렸으나, 이후 아버지의 성을 따라 '왕페이'로 불렸다.[1] 베이징의 둥즈먼(동직문) 중학교를 졸업하고, 샤먼대 생물학과에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홍콩 이민 결정으로 함께 홍콩으로 갔다.[1] 중학교 시절 왕페이는 덩리쥔의 노래를 번안한 《풍종나리래》, 《미인소저》, 《등려군고향정》 등의 앨범을 냈다.
1987년 홍콩으로 이주한 후,[1] 모델 일을 시작했고, 친구의 추천으로 홍콩 음악 교육가 따이쓰총에게 대중가요 창법을 배웠다. 1989년 아태금(?)유행곡 창작대회에 참가해 《잉시구구자》로 동상을 수상하고, Cinepoly에 가입하여 예명을 왕정문으로 지었다.[1] 같은 해, 첫 앨범 '왕징원'을 발매했다.[1]
1990년에는 2장의 앨범 《Everything》, 《You're the Only One》을 발매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고려했다.[1] 1992년 미국 유학 후 발표한 음반 'Coming Home'에서 영문명을 Faye로 바꾸고,[1] 나카시마 미유키의 〈용역수상적여인〉을 리메이크한 곡이 홍콩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94년부터는 본명인 왕페이(王菲)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
1994년에는 타이완에서 표준중국어 앨범 《미》와 《천공》을 발매하며 시장을 개척했다. 1995년 덩리쥔 사망 후, 그녀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앨범 《비미미지음》(菲靡靡之音)을 발표했다.
1996년 시네폴리(Cinepoly)에서 광둥어 곡 10곡을 녹음했지만, 임신과 결혼으로 홍보를 하지 못하고 계약이 만료되었다.[1] 1997년 시네폴리는 EP 앨범 《완구》와 《자편》을 발매했다.[1]
2. 1. 젊은 시절 (1969년 ~ 1988년)
왕페이는 1987년에 베이징에서 홍콩으로 이주했다.[1] 1989년 데뷔 당시에는 왕징원(왕정문, 王靖雯, 광둥어 발음: 웡칭만)이라는 중국어 예명과 Shirley Wong이라는 영문명을 사용했다.[1] 1992년 미국 유학 후 처음 발표한 음반 'Coming Home' 커버에서 영문명을 자신의 중국어 이름 발음과 같은 Faye로 바꾸었으며, 1994년부터는 중국어 이름도 가명을 버리고 본명인 왕페이(王菲)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2. 2. 데뷔와 초기 활동 (1989년 ~ 1991년)
왕페이의 조부 왕자오민은 베이징 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입법원 위원을 지냈다. 그녀의 부친 왕요우린은 석탄기사였고, 모친 시아꾸이잉은 탄광문화공단의 소프라노였다. 문화 혁명의 영향으로 15세 이전에는 모친의 성을 따라 '시아린'으로 불렸으나, 15세 이후 부친의 성을 따라 '왕페이'로 불렸다. 오빠는 왕이이다. 베이징의 둥즈먼(동직문) 중학교를 졸업하고, 샤먼대 생물학과에 합격했으나 부친의 홍콩 이민 결정으로 함께 홍콩으로 갔다. 중학교 시절 왕페이는 덩리쥔의 노래를 번안한 《풍종나리래》, 《미인소저》, 《등려군고향정》 등의 앨범을 냈다. 홍콩으로 온 후에는 모델 일을 시작했고, 친구의 추천으로 홍콩 음악 교육가 따이쓰총에게 대중가요 창법을 배웠다.1989년 아태금(?)유행곡 창작대회에 참가해 《잉시구구자》로 동상을 수상했다. 이후 공연에서 픽업되어 Cinepoly에 가입하고 당시 홍콩 분위기에 맞춰 예명을 왕정문으로 지었다. 같은 해, 첫 앨범 '왕징원'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전통적인 광둥어곡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으며, 《잉시구구자》도 수록되었다.
1990년에는 2장의 앨범 《Everything》, 《You're the Only One》을 발매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고려했다. 이 앨범들은 광둥어곡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서양화 경향을 보였으며, 많은 동서양의 R&B 곡들을 번안해 불렀다. 《You're the Only One》에는 일본 가수 EPO의 노래를 번안한 3곡과 다이애나 로스, 캐린 화이트 등 서양 여가수의 노래를 번안한 3곡이 수록되었다.
2. 3. 홍콩 가요계 평정 (1992년 ~ 1994년)
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영문명을 Shirley Wong에서 Faye Wong으로 바꾸었고, 중문 예명은 여전히 왕징원이었다. 1992년 네 번째 앨범 《Coming Home》을 냈고, 나카시마 미유키의 〈용역수상적여인〉(원제: ルージュ)을 리메이크한 곡이 홍콩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빠르게 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져주었다. 이 시기 의 음악은 여전히 홍콩식의 상업적인 유행음악 위주였으나, R&B와 몽환적인 창법(?)상의 기교가 점차 발전했다. 영어로 부른 〈Kisses in the Wind〉 역시 그녀가 매우 좋아하는 노래이다. 이 앨범은 당시 홍콩 음악계의 번안곡 위주의 관행을 따랐으며, 동서양의 여러 곡을 편곡해 불렀다. 이 앨범을 통해 는 홍콩에서 শীর্ষ급 여가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앨범 표지에서 그녀는 귀향을 깊이 생각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안쪽 페이지의 스타일은 고향 베이징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1993년, 는 광둥어 앨범 《집미불회》를 발표했다. 〈집미불회〉는 그녀가 직접 작사했고, 광둥어와 표준어 두 가지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이후 많은 팬들은 이 네 글자가 그녀의 성격을 진실하게 묘사한다고 여겼다. 또한 대부분의 콘서트에서 그녀는 이 노래를 엔딩곡으로 불렀다. 이 앨범의 곡 분위기는 이전 앨범과 큰 차이가 없었고, R&B 스타일의 해외 곡을 번안해 부르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몽환적인(?)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는 경향도 이어졌다. 앨범은 그녀의 이전 스타일을 따랐는데, 화장이 비교적 진하고 가죽옷과 치마를 입고 검정 스타킹을 신는 등의 모습이었다.
같은 해, 는 또 다른 광둥어 앨범 《십만개위십마》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가사에 자신의 생활에 대한 태도를 더 많이 표현하기 시작했고, 앨범 제작 과정에도 점차 참여하게 되었다. 〈유비비〉의 멜로디와 가사에서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미국 피아니스트 겸 가수 토리 에이머스의 〈Silent All These Years〉를 리메이크한 〈냉전〉은 주목할 만하다. 이 앨범에는 총 11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중 6곡은 나카시마 미유키의 〈약니진애아〉, 경찰악대(Police)의 〈Do Do Da Da〉 등 번안곡이다. 이 외에 영어로 된 곡 〈Do We Really Care〉도 불렀다. 는 앨범의 창작, 스타일, 표지 콘셉트 등 다양한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 특히 〈동심〉은 그녀가 처음으로 작사, 작곡한 곡이다. 이 앨범에서는 '자아'라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며, 이전 두 앨범에 비해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 앨범부터 는 홍콩 음악계에서 다른 음악을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2. 4. 중화권 시장 진출 (1994년 ~ 1996년)
1994년, 왕페이는 왕정문이라는 예명으로 타이완에서 표준중국어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앨범 《미》와 《천공》을 발매했다. 《미》의 음악은 여전히 전통적인 정서를 표현했으며, 타이틀곡인 《아원의》는 관현악과 현악 두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10여 년간 팬들의 마음속에 최고의 곡으로 꼽혔으며, 치친 등 중화권 가수가 번안하여 부르기도 했다. 처음으로 표준중국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 앨범에서 그녀의 곡 분위기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지원위니수저약》 등 모두 사랑 노래였다. 음반에는 홍콩에서 발매한 《집미불회》와 《냉전》의 중국어 버전 두 곡과 홍콩 영화 《천룡팔부》의 주제곡 《지유아자기》가 수록되어 있다. 표지와 속지에서 그녀는 짧은 머리에 참신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녀의 음악 인생에서 흔치 않은 모습이다.《천공》은 밝은 음색과 그녀의 가장 온화한 감성을 표현한 앨범으로, 그녀의 골수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두 앨범 모두 음악가 양명황이 감독했는데, 그는 얼마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면 왕페이의 발전과 현재 모습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통일되어 있으며, 《천공》(일반 버전과 언플러그드 버전)은 그녀의 대표곡이다. 팬들에게 사랑받은 또 다른 곡은 사랑 노래인 《기자》이다 (주화건이 이 노래의 다른 버전을 불렀다). 무반주로 시작하는 《긍지》와 음을 끌며 부르는 《천사》 역시 그녀의 감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곡들이다. 그녀와 더우웨이(두유)가 함께 작업한 《서언》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앨범의 스타일, 코걸이, 귀걸이, 헤어 스타일 등은 모두 그녀가 직접 담당했으며, 유럽과 아메리카의 히피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2. 5. 얼터너티브 음악의 절정 (1995년 ~ 1997년)
1994년, 타이완에서는 여전히 '왕정문'이라는 예명을 사용했지만, 홍콩에서는 중문명을 본명인 '왕페이'로 바꾸고, 두 장의 국어 음반과 맞물린 두 장의 광둥어 음반 《호사란상》과 《토호자기》를 냈다. 《호사란상》은 왕페이의 음악 사업의 전환점으로, 홍콩 대중가요 패턴을 버리고 대담하게 영국 음악적인 요소가 녹아들어 있는 음악을 시도했다. 음반 표지도 다른 스타일이고, 불완전한 한자가 가득했다. 그녀는 음반 중에 영국 그룹 콕토 트윈스의 노래를 번안해 불렀는데, 다량의 음악 강세 효과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당시 홍콩 음악계 스타일과는 현저히 달랐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조차도 콕토 트윈스의 음악은 비주류 음악이었다. 아일랜드 그룹 크랜베리스의 대표곡 《Dreams》를 번안한 《몽중인》은 영화 '중경삼림'의 주제곡 중 하나로, 보컬 돌로레스 오리오던의 매우 유명한 끌며 부르는 창법을 모방했다. (이 창법은 이후 그녀 자신만의 개성이 되었다.) 같은 음반 중의 《서언》과 이후 EMI 시기의 《최면》 등이 대표적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때부터 그녀가 다른 사람의 스타일을 베낀다고 비판하기 시작한다. 《서언》은 그녀와 그녀의 미래의 남편 - 베이징 가수 더우웨이(두유)가 함께 작업했는데, 왕페이가 가사를 쓰고 둘이 함께 곡을 만들었다. 같은 앨범에는 타이완 음악가 장우(장우)가 만든 《천여지》와《유희적종점》처럼 전통적인 정서를 표현한 노래도 수록되었다.《토호자기》는 1994년에 낸 마지막 앨범으로, 현실도피의 태도가 음반의 주요한 정서이다. 《호사란상》에 비해 영국 신기원모음악(?)의 주요 스타일이 더욱 진일보했으며, 그녀는 이번에 자신의 구속받기 싫어하는 개성을 전면적으로 구현했다. 《출로》는 느린 곡조로 말하듯이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끝부분에 끌며 부르는 창법을 쓰고 있고, 가사는 왕페이의 생활, 사랑, 인생에 대한 태도를 서술하고 있다. 그녀가 불교를 믿기 때문에, '출세'(불교에서 출가하다, 속세를 떠나다 등의 뜻을 가짐) 같은 인생 태도 역시 이번 앨범의 기조로 공고히 했다. 베이징의 음악인 장야둥(장아동)과 처음으로 함께 작업하여, 《표》라는 소리가 연하고 길게 끌리는 곡을 만들었다. 이후 그와 왕페이의 합작이 빈번히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녀의 음악 사업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애여통적변연》(《유다소애가이중래》의 광둥어곡)과《평범최랑만》(《최랑만적사》광둥어곡) 등 정서를 표현하는 곡도 수록되어 있다. The Sundays의 《위비작알》(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다) 같은 번안곡 역시 여전히 수록되어 있다. 앨범 표지의 가장 첫 번째 버전은 분홍색 바탕에 오직 중간에 '토호자기'라는 4개의 글자만 있다. 이 음반에서 그녀의 헤어 스타일은 《천공》때의 모양을 따르고 있고, 옷은 자유롭게 입고 있다.
2. 6. EMI 시대 (1997년 ~ 2001년)
왕페이는 1996년 시네폴리(Cinepoly)에서 광둥어 곡 10곡을 녹음했지만, 임신과 결혼으로 음반 홍보를 하지 못했고 계약도 만료되었다.[1] 시네폴리는 이 광둥어 앨범을 이미 내기로 했기 때문에, 1997년 이후부터 두 장의 EP 앨범과 두 장의 베스트 앨범을 계획하고 왕페이의 새 소속사인 EMI의 새 앨범에 대항하는 데 이용했다.[1]1997년 시네폴리는 두 장의 EP 앨범 《완구》와 《자편》을 발매했다.[1] 《완구》에 수록된 5곡의 광둥어 곡은 멜로풍의 《약정》 외에는 전부 비교적 특이하고 기이한 곡들이다.[1] 왕페이의 목소리는 큰 변화가 없고, 음악과 가사가 퇴폐적이고 무거운 《Di-Dar》와 비교해서 많이 유연하고 부드럽다.[1] 이 EP에서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곡은 《약정》과 《암용》뿐이다.[1] 이후 타이완 여가수 주혜가 《약정》을 표준어로 번안해 부른 이후 이 곡은 그녀의 유명곡 중 하나가 되었다.[1] EP 표지는 왕페이가 임신 중에 찍은 사진이며, 속지에는 가사가 없고 기타 선전 사진도 없다.[1]
《자편》에는 3곡의 광둥어 곡 및 이전의 댄스곡이 섞여있다.[1] 《수시》는 비록 EP에 들어 있지만, 《약정》과 같이 왕페이의 훌륭한 광둥어 멜로곡이다.[1] 《수호천사》는 홍콩 그룹 Beyond의 황가강이 만들고 편곡한 곡이다.[1] 《자편》은 매우 다른 종류의 음반이다.[1] EP 표지는 왕페이의 이전 사진이고, 속지에도 기타 다른 선전 사진이 없다.[1] 다른 두 곡의 광둥어 신곡은 시네폴리가 발매한 두 장의 베스트 앨범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비매품》의 《불득료》와 《Faye Best》의 《심경담전》이다.[1] 두 곡 다 스타일이 다른 종류로 치우쳐 있어서 크게 이목을 끌지 못했다.[1]
2. 7. 활동 중단과 복귀 (2005년 ~ 현재)
1995년 덩리쥔이 사망하자, 왕페이는 중학교 시절부터 그녀의 노래를 즐겨 불렀기 때문에 같은 해에 리메이크 앨범 《비미미지음》(菲靡靡之音)을 발표했다. 앨범 제목은 중국 대륙의 일부 사람들이 덩리쥔의 노래를 '별 의미 없는 음악'이라고 비난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13곡 모두 덩리쥔이 널리 사랑받은 곡으로, 왕페이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시 불렀다. 덩리쥔의 음색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라면, 왕페이의 목소리는 더 맑고 깨끗하며 아득하다. 덩리쥔의 대표곡 중 하나인 <단원인장구>(但願人長久)는 원래 쑤스(소식, 蘇軾, 호는 소동파(蘇東坡))의 유명한 시 《수조가두·명월기시유》(水調歌頭·明月幾時有)를 노래로 만든 것인데, 이 노래 역시 왕페이의 훌륭한 곡 중 하나이다.3. 사생활
3. 1. 더우웨이와의 결혼과 이혼
1996년, 임신한 왕페이는 홍콩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록 가수 더우웨이(竇唯)와 결혼했다. 당시 홍콩에서 이미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그녀였기에, 이른 아침 졸린 눈에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홍콩 매체에 찍힌 사진은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작사가 린시는 이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왕페이를 위해 《이쾌락(소이아쾌락)》이라는 노래를 썼다고 밝혔다.더우웨이는 왕페이의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왕페이가 베이징 음악계와 교류하며 음악적 변화를 꾀하게 된 것도 더우웨이의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은 《집미불회》, 《서언》 등의 곡을 함께 작업하며 음악적 협력을 시작했다. 더우웨이의 도움으로 왕페이는 편곡과 가사에서 과감하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이는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왕페이의 중국 대륙, 홍콩, 타이완 콘서트에서 더우웨이는 드럼 연주를 맡았다.[1]
1997년 1월 3일,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더우징퉁(竇靖童)이 태어났다. 더우징퉁은 '더우웨이와 왕정문(왕페이의 본명)의 아이'라는 뜻이다. 더우징퉁은 1999년 왕페이의 앨범 《지애맥생인》에서 "Come on, baby"라는 구절을 녹음하기도 했다.[1]
1999년, 두 사람은 이혼하며 중화권 연예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왕페이가 더우징퉁의 양육권을 갖게 되었다. 홍콩 매체가 더우웨이와 그의 연인 가오위안(高原)이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했고, 더우웨이는 가오위안이 자신의 연인이라고 밝혔다. 당시 중화권 매체와 연예계는 더우웨이의 불륜을 비난했지만, 더우웨이는 모든 것이 음모라고 주장했다. 왕페이는 이 사건에 대해 কোন মন্তব্য প্রকাশ করেননি. (어떠한 মন্তব্য도 하지 않았다.) 더우웨이 또한 더 이상 자세한 상황을 밝히지 않아, 진실은 여전히 불분명하다.[1]
4. 출연 작품
- 신패왕화: 예스마담 (2018년)
5. 기타
2000년 3월 왕페이는 앨범 판매량이 가장 높은 홍콩 여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000년 3월까지 20장의 앨범이 970만 장 판매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王菲离港时态度友善 天后的身份证不慎曝光啦!
http://www.haibao.co[...]
[2]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ajunews.c[...]
201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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