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바사나비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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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스 바사나비추스는 1851년 콩그레스 폴란드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자, 의사, 작가, 그리고 활동가이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성장했으며,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불가리아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리투아니아 신문 창간을 구상했고, 1883년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신문 "아우슈라"를 창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7년에는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를 설립하여 리투아니아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립 선언을 주도했다. 바사나비추스는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 형성 및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민속학 자료 수집에도 기여했다. 그는 1927년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과 거리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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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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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요나스 바사나비추스 |
출생일 | 1851년 11월 23일 |
출생지 | 오즈코볼레, 폴란드 회의국 |
사망일 | 1927년 2월 16일 |
사망지 | 빌노, 폴란드 |
안장지 | 라소스 묘지 |
국적 | 리투아니아 |
시민권 | 러시아 제국 불가리아 공국 제2 폴란드 공화국 |
모교 | 모스크바 제국 대학교 (1879년) |
직업 | 의사 |
배우자 | 가브리엘라 엘레오노라 모흘 |
부 | 유라스 바사나비추스 (1826–1879) |
모 | 마레 비르슈토니우테 (1826–1890) |
친척 | 형제 빈차스 바사나비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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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 |
알려진 업적 | 아우슈라 발행인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 창립자 리투아니아 독립법 서명자 |
2. 초기 생애와 교육
요나스 바사나비추스는 1851년 러시아 제국의 속국인 콩그레스 폴란드 오즈카발리아이 마을에서 리투아니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출산 과정의 합병증으로 인해 맏아들인 그를 사제로 교육하겠다고 약속했다. 부모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역 아이들을 위한 가정교사를 지원했고, 바사나비추스는 그곳에서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과 더불어 제단 봉사자로서의 봉사를 배웠다. 또한 룩샤이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1879년 봄, 바사나비추스는 모스크바 의학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빌카비슈키스와 알렉소타스에서 잠시 환자를 진료했다. 개인 병원을 설립하려 했으나, 불가리아 공국의 롬 팔란카 병원장 제안을 받고 불가리아로 갔다. 1880년 1월 말 롬 팔란카에 도착한 그는 낡은 병원 시설을 개선하고 외래 진료를 개설하여 환자 수를 크게 늘렸다.[1] 그는 의료 연구 논문과 페트코 카라벨로프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정치 논문을 쓰고,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언론에 기고하며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1]
1883년, 바사나비추스는 프라하에서 리투아니아 최초의 신문인 아우슈라(Aušra, 새벽)를 창간했다. 아우슈라는 리투아니아어로 발행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고취와 문화 부흥을 목표로 했다. 러시아 제국의 탄압으로 인해 아우슈라는 동프로이센에서 비밀리에 인쇄되어 책 밀수업자를 통해 리투아니아로 밀반입되었다. 아우슈라는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의 시작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바사나비추스는 이 신문을 통해 리투아니아인들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아우슈라 편집권을 요나스 슬리우파스에게 넘겨준 후에도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러일 전쟁의 혼란기에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가 해제되자, 바사나비추스는 이를 기회로 삼아 1905년 5월 불가리아를 떠나 8월에 빌뉴스로 돌아왔다.[1] 귀국 즉시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에 참여하여 빌뉴스 대세임 조직을 주도했다.[1] 빌니우스 지노스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15명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1] 1905년 11월에는 조직위원회를 대표하여 러시아 제국 총리 세르게이 비테에게 리투아니아 자치를 요구하는 메모를 작성했다.[1]
당시 폴란드어는 귀족과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더 권위 있는 언어로 여겨졌고, 러시아어는 국가 행정에, 리투아니아어는 농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1863년 1월 봉기 이후, 차르 당국은 폴란드어와 문화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러시아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바사나비추스는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었다. 1865년 첫 입학 시험에서는 실패했지만 1년 후에는 성공했다.
바사나비추스는 지역 언덕 요새와 부모로부터 리투아니아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그의 부모는 지역 노래, 전설, 이야기를 소중히 여겼다. 김나지움에서 그는 리투아니아 역사의 고전 작가들(마치에이 스트리코프스키, 알렉산데르 구아니니, 얀 드우고슈, 마르친 크로머)과 친해지고, 리투아니아 민요를 연구했으며,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의 고전 시 ''계절'',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콘라트 발렌로드'', 브와디스와프 시로콤라의 ''마르기에르'', 유제프 이그나치 크라셰프스키의 역사 소설을 읽었다. 그는 1883년 ''아우슈라''에 글을 기고하면서 아담 미츠키에비치, L. 콘드라타비치우스, J. I. 크라셰프스키 등 폴란드 낭만주의 작가들이 리투아니아 출신이거나 리투아니아를 주제로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를 읽은 후 종교에서 멀어졌다. 1873년 졸업 후, 부모를 설득하여 세이니 사제 신학교 대신 모스크바 대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바사나비추스는 처음에는 역사와 언어학을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지만, 두 학기 후 모스크바 의학 아카데미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콩그레스 폴란드 출신 리투아니아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10개의 장학금 중 하나(연간 360RUB)를 받았다. 그는 개인 과외를 하여 수입을 보충했지만, 열악한 생활 환경은 그의 건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사나비추스는 학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리투아니아의 발전을 주시하며, 리투아니아 유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루먄체프와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대공 케스투티스에 대한 연구를 쓰고자 했다. 그는 보통 여름을 리투아니아에서 보내며 민요, 동화, 수수께끼를 수집했다.
3. 불가리아에서의 의료 활동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불가리아 공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가 자유주의 정치인들을 탄압하자, 바사나비추스는 1882년 5월 불가리아를 떠나 프라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최초의 리투아니아어 신문인 아우슈라 창간을 주도했다. 아우슈라는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프라하에서 바사나비추스는 보헤미아 출신 독일인 가브리엘라 엘레오노라 몰과 1884년 5월 결혼 후, 정치 상황이 개선된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롬 팔란카에서의 삶은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부상자 치료, 발진티푸스 유행, 1887년 암살 시도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1889년 아내 몰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바사나비추스는 큰 슬픔에 빠졌다.
1891년 불가리아 시민권을 취득한 바사나비추스는 바르나로 이주하여 건강 문제로 1893년 공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의료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심부정맥, 신경쇠약 등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지만, 의학 및 민족지학 연구와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898년 불가리아 문학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민주당 소속 바르나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4. '아우슈라' 창간과 민족 부흥 운동
5. 리투아니아 귀환과 독립 운동
1905년 12월 4일부터 5일까지 빌뉴스에서 열린 빌뉴스 대세임에는 2,000명 이상의 참가자가 모였고, 바사나비추스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격렬한 논의 끝에 세임은 차르 정부를 리투아니아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선언하고 리투아니아 자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세금 미납, 파업 조직 등 수동적이고 평화적인 저항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 비록 자치는 즉각 달성되지 못했지만, 빌뉴스 대세임은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1]
바사나비추스는 빌뉴스 대세임에서 얻은 동력을 바탕으로 리투아니아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인 리투아니아 민족 민주당(Tautiškoji lietuvių demokratų partijalt)을 창설했다.[1] 이후 차르 당국의 조사와 감시를 피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곧 돌아와 러시아 제국 국가 두마 선거 운동, 리투아니아 언론 기고, 가톨릭 교회 내 리투아니아어 사용 옹호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1] 특히 교회 내 언어 문제는 바사나비추스에게 중요했는데, 빌뉴스 주교 에두아르트 폰 데어 로프가 추방되자 교황 비오 10세에게 대표단을 조직하여 리투아니아인 주교 임명을 설득하려 노력했다.[1] 이 과정에서 폴란드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1] 1907년 1월에는 리투아니아 예술 협회가 주최한 리투아니아 예술 첫 번째 전시회 위원장을 맡았다.[1]
5. 1.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 설립
1907년 4월 7일, 바사나비추스는 리투아니아의 역사와 언어 연구를 위한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1] 그는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협회는 그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1] 바사나비추스는 협회와 거의 동일시될 정도로 깊이 관여했다.[1] 협회는 바사나비추스가 편집한 학술지 ''Lietuvių tauta''(리투아니아 민족)를 발행하고, 도서관, 기록 보관소, 박물관을 설립했다.[1] 협회는 차르 정부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정부는 협회의 활동을 감시하고 제한했다.[1] 바사나비추스는 협회의 공식 본부인 국민의 집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으나, 협회는 부지를 매입할 충분한 자금을 모았지만 건물을 짓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1] 협회와 바사나비추스는 젊은 학자들로부터 너무 구식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기독교 성직자들은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며 비난했지만, 리투아니아 학문의 새로운 기준과 수준을 세웠다.[1]
협회는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가장 눈에 띄는 두 전시는 1908년 ''아우슈라'' 창간 25주년 기념, 1914년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 종료 10주년 기념이었다.[1] 협회는 리투아니아 교과서를 출판하고 싶었지만, 책을 쓸 유능한 저자를 찾을 수 없었다.[1] 또한 리투아니아 백과사전을 출판할 계획이었지만, 편집상의 분쟁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1] 협회는 리투아니아어를 표준화하기 위해 요나스 야블론스키스, 카지미에라스 부가, 유오자스 발치코니스, 유르기스 슐라펠리스 4명을 위원으로 임명했다.[1] 격렬한 논쟁 끝에 야블론스키스가 최고의 언어학자로 부상했고, 그의 리투아니아어 구문론 책은 1911년 협회에서 출판되었다.[1] 협회는 게디미나스 언덕에 급수탑을 건설하여 역사적인 빌뉴스 상성 유적을 더 훼손하려는 도시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바사나비추스는 이 문제를 청원하기 위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1]
6. 제1차 세계 대전과 독립 선언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바사나비추스는 빌뉴스에 남아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를 지키고 문화 활동을 이어갔다.[1] 그는 독일 점령 하에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1]
7. 독립 이후의 삶과 유산
요나스 바사나비추스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빌뉴스에서 여러 차례 정권 교체로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문화 활동에 전념했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권과 협력하여 역사 박물관 수리 자금을 확보했고, 폴란드 점령 후에는 폴란드 관리들의 감시와 제약 속에서도 강연, 리투아니아 학교 지원, 문화 연구를 계속했다.[1]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 개교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1]
1920년 5월, 바사나비추스는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카우나스로 갔고, 명예로운 손님으로 환영받았다.[1] 1920년 7월, 소련이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에 따라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이관했지만, 10월에 폴란드가 다시 점령했다.[1] 폴란드 당국은 리투아니아 과학 협회 회원 자격을 폴란드 거주자로 제한했고, 바사나비추스는 체포를 두려워하면서도 빌뉴스에 남아 리투아니아의 주장을 대변했다.[1]
1924년, 바사나비추스는 리투아니아에서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의 75번째 생일 기념행사가 카우나스에서 열렸다.[1] 1927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 9주년 기념일에 바사나비추스는 방광 및 폐 감염으로 사망했다.[1] 리투아니아 정부는 5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장례식에 대표단을 보냈으며, 그는 라소스 묘지에 안장되었다.[1]
7. 1. 유산
바사나비추스는 방대한 양의 민속 자료를 수집하여 리투아니아 민속학 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생전에 노래, 동화, 수수께끼 등 리투아니아 민속과 관련된 14권의 책을 출판했다.[1] 1993년부터 2004년까지 민속학자 레오나르다스 사우카와 코스타스 알렉시나스는 바사나비추스가 수집한 약 7,000개의 민속 작품을 정리하여 15권의 ''요나스 바사나비추스 민속 도서관''을 출판했다.그의 저술과 활동은 리투아니아 민족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하는 등 리투아니아 독립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리투아니아와 불가리아의 여러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바르나(불가리아)의 한 거리는 그의 업적을 기려 'Dr. 바사노비치 거리(ул. Д-р Иван Басановичbg)'로 명명되었다. 바르나의 파나규리슈테 거리에 있는 기념 동판은 바사나비추스 전 거주지의 위치를 표시한다. 2013년 12월에는 프라하 비노흐라디의 앙글리츠카 15번지에 기념 동판이 공개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고 큰 여름 휴양지인 팔랑가에 있는 요노 바사나비추스 거리는 1924년에 팔랑가를 직접 방문한 요나스 바사나비추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요나스 바사나비추스 박사의 흉상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록펠러 공원에 있는 클리블랜드 문화 정원 내 리투아니아 문화 정원의 가장 낮은 층에 위치해 있다. 1936년에 헌정된 이 흉상은 리투아니아 정부의 기증품이었다. 이 흉상은 리투아니아의 국가 정체성을 옹호한 저명한 리투아니아 조각가 요나스 지카라스가 제작한 원본의 복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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