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한 파리키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파리키다는 독일 왕 루돌프 1세의 손자이자 루돌프 2세의 아들로, 삼촌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상속 문제로 불만을 품고 암살을 계획했다. 1308년 알브레히트 1세를 살해한 후, 제국 추방령을 받고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며, 그의 암살은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에서 '암흑의 날'로 기억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세기 합스부르크가 - 노이베르크 조약
    노이베르크 조약은 1379년 오스트리아 공국 분할을 위해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가 체결한 조약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을 알브레히트계와 레오폴트계로 분열시켰다.
  • 14세기 합스부르크가 - 루돌프 1세 (보헤미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루돌프 1세는 독일 왕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로, 1306년부터 1307년까지 보헤미아 왕으로 재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짧고 혼란스러운 통치를 마쳤으며, 그의 죽음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헤미아 왕위 획득 시도를 좌절시키고 왕국 내 혼란을 야기했다.
  • 1310년대 사망 - 라몬 류이
    라몬 류이는 마요르카 왕국 출신의 철학자, 신학자, 선교사, 작가로서, 종교 간 대화를 추구하며 '아르스'라는 논리 체계를 개발하고 저술 및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영향을 미쳐 현대에 재평가되고 복자로 시성되었다.
  • 1310년대 사망 - 두초
    두초 디 부오닌세냐는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한 이탈리아 시에나파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루첼라이 마돈나》와 《마에스타》 등의 대표작을 남기며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요한 파리키다
기본 정보
요한 파리키다의 초상화, 안톤 보이스 작,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인물 정보
본명요한 폰 슈바벤
출생1290년경
사망1312년/1313년 12월 13일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오스트리아 공 루돌프 2세
어머니아그네스 폰 베멘

2. 생애

요한 파리키다는 독일 왕 루돌프 1세의 차남인 아버지 루돌프 2세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의 딸 아그네스 사이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1290년 전후에 태어났다.[2] 그는 어린 시절을 보헤미아 궁정과 합스부르크가슈바벤 영토인 브루크에서 보냈다.

아버지 루돌프 2세가 1283년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형 알브레히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통치권을 넘겨주면서 요한은 상속권을 박탈당했다고 여겼다.[4] 성인이 된 요한은 로마 왕이 된 백부 알브레히트 1세에게 약속된 상속 재산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땅 없는 공작"(Hertzog Anlant|헤르초크 안란트de)이라 조롱받았다. 알브레히트 1세는 1306년 자신의 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왕위에 앉히며 요한의 상속권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에 깊은 원한을 품은 요한은 몇몇 슈바벤 귀족들과 공모하여 1308년 5월 1일, 로이스 강을 건너던 알브레히트 1세를 습격하여 살해했다.[5] 이 사건으로 요한은 '파리키다'(Parricida|파리키다la, 존속 살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암살 후 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들의 복수를 피해 도망쳤으며, 새로 선출된 헨리 7세에 의해 제국 추방령을 받았다. 그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며, 이탈리아 피사의 수도원에 숨어 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7][2]

요한 파리키다의 비극적인 삶과 존속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후대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리드리히 쉴러는 그의 희곡 빌헬름 텔(1804)에서 도망자가 된 요한을 등장시켜 그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질문을 던졌다.[9] 또한 아네테 폰 드로스테휠스호프의 시 《탈의 백작》(Der Graf von Thal|데어 그라프 폰 탈de, 1838), 요한 네포무크 포글(Johann Nepomuk Vogl)의 시를 바탕으로 카를 뢰베가 작곡한 발라드 《피사의 수도승》(Der Mönch zu Pisa|데어 묀히 추 피사de, 1846) 등 여러 문학 및 음악 작품에서 그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아우구스트 고틀립 마이스너의 《슈바비아의 요한》(Johann von Schwaben|요한 폰 슈바벤de, 1770)과 율리우스 그로세의 동명 희곡(1870) 역시 그의 삶을 극화한 작품이다.

2. 1. 어린 시절과 상속 문제

요한은 독일 왕 루돌프 1세의 차남인 아버지 루돌프 2세가 사망한 1290년 전후에 태어났다.[2] 그의 어머니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의 딸 아그네스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헤미아 궁정과 합스부르크가슈바벤 영토인 브루크에서 보냈다. 15세가 될 때까지 백부인 알브레히트 1세 아래에서 양육되었으며,[2] 1294년 문서에서는 명목상 공작으로 언급되었다.

요한의 상속 문제는 할아버지 루돌프 1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돌프 1세는 1282년 아들 루돌프 2세와 알브레히트 1세를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그러나 1283년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알브레히트 1세가 단독 오스트리아 공작이 되었고, 아버지 루돌프 2세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 조약에서는 루돌프 2세와 그의 후계자에게 보상으로 금전 또는 토지 인도가 약속되었으나[4], 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요한은 자신의 상속권을 부당하게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성년이 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백부 알브레히트 1세에게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아버지에게 약속된 재산과 전 오스트리아의 슈바벤 영토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1세는 1298년 나사우의 아돌프를 상대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로마 왕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1세는 요한의 정당한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했으며, 심지어 1306년에는 자신의 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왕위에 앉히며 조카의 상속권을 명백히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은 "땅 없는 공작"(Hertzog Anlantde)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고, 백부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는 훗날 비극적인 사건의 씨앗이 되었다.

2. 2. 알브레히트 1세 암살

알베르트 1세 암살, ''95명의 영주 오스트리아 연대기'', 14세기


요한의 아버지 루돌프 2세는 1283년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형인 알브레히트 1세를 위해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합스부르크 공작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로 인해 요한은 자신이 상속권을 박탈당했다고 느꼈다.[4] 루돌프 2세와 그 후계자에게는 대가로 금전 또는 토지 인도가 약속되었으나[4], 요한이 성년이 되어 1298년 로마 왕으로 선출된 삼촌 알브레히트 1세에게 가문 재산의 일부를 요구했을 때 그의 바람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아버지에게 수여된 전 오스트리아의 슈바벤 영토에서도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요한은 15세가 될 때까지 백부 알브레히트 1세 아래에서 양육되었고, 15세가 된 후 여러 차례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유산은 반환되지 않았다.

1306년, 알브레히트 1세는 자신의 아들 루돌프 3세 공작을 보헤미아 왕위에 앉힘으로써 조카 요한의 상속권을 더욱 명확히 부인했다. 이에 "땅 없는 공작"(Hertzog Anlantde)으로 조롱받던 요한은 백부의 약속 불이행에 원한을 품고, 슈바벤 귀족 출신의 동료들과 함께 알브레히트 1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308년 4월 30일 저녁, 알브레히트가 빈터투어에서 개최한 합스부르크 가문 연회에 초대받은 요한은 삼촌이 건넨 꽃 화환을 거부하며 "꽃으로 얼버무려지지 않겠다"고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다음 날인 5월 1일, 알브레히트 왕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빈디쉬 근처 로이스 강을 건너다 수행원들과 떨어졌을 때, 요한과 그의 공모자들이 즉시 공격했다. 요한이 먼저 칼을 휘둘러 삼촌의 두개골을 갈랐고, 이어서 다른 공모자들이 알브레히트를 찔러 살해했다.[5]

암살 이후 요한은 알브레히트의 아들들의 복수를 피해 알프스 산중으로 도망쳐 행방불명되었다.[7] 같은 해, 선제후들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백작 헨리 7세를 알브레히트의 후계자로 선출했고, 그는 요한을 제국 추방령(Reichsachtde)에 처했다. 요한의 이후 행방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탈리아로 도피하여 피사의 수도원에 은신했으며, 1313년 그곳에서 황제 헨리 7세가 그를 방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2][7]

한편, 알브레히트의 아내 엘리자베트와 두 딸 안나와 아그네스는 암살범들을 엄하게 추궁했으며[3], 추궁은 암살범의 가족에게까지 미쳐 대부분이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6]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알브레히트의 아들 미남 프리드리히가 패배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1438년 알베르트 2세가 선출될 때까지 독일 왕위를 되찾지 못했다.

요한이 알브레히트 1세를 암살한 5월 1일은 합스부르크 역사상 "암흑의 날"로 불린다.[8] 이 사건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기피되었고[3], 18세기 카를 6세 대에 알브레히트 1세를 조상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가 단절될 때까지 일족 중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5]

2. 3. 도피와 최후

알브레히트 1세 암살 후, 요한은 알브레히트의 아들들의 복수를 피해 도망쳤다.[5] 그 시점부터 그의 행방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7], 알프스 산중으로 사라졌다고도 전해진다.[7]

같은 해인 1308년, 선제후들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를 새로운 로마 왕으로 선출했고, 하인리히 7세는 요한에게 제국 추방령(Reichsachtde)을 선고했다. 요한은 이탈리아로 도피하여 피사의 한 수도원에 은신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7] 또한 1313년에는 황제가 된 하인리히 7세가 직접 피사의 수도원을 방문하여 요한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 그러나 그 이후 그의 행방이나 최후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합스부르크 가문에 미친 영향

요한의 할아버지 루돌프 1세는 1282년에 자신의 아들인 루돌프 2세와 알브레히트 1세를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1283년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형 알브레히트 1세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 공작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동생 루돌프 2세와 그의 후계자에게는 그 대가로 금전이나 영지를 받기로 약속되었다[4]. 요한은 아버지 루돌프 2세가 사망한 1290년 무렵 태어나 보헤미아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2]. 그는 15세가 될 때까지 백부인 알브레히트 1세의 보호 아래 자랐으며,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아버지가 상속받아야 할 재산 역시 알브레히트 1세가 관리했다. 성년이 된 요한은 알브레히트 1세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백부 알브레히트 1세 암살을 모의했다. 1308년 5월 1일, 로이스강을 건너던 알브레히트 1세가 수행원들과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요한 일행이 습격했다. 요한이 먼저 칼을 휘둘렀고, 이어 공모자들이 달려들어 알브레히트 1세를 살해했다[5]. 알브레히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트와 딸 안나, 아그네스는 암살범들에게 혹독한 복수를 감행했으며[3], 그 여파는 암살범들의 가족에게까지 미쳐 대부분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6]. 요한은 알프스 산중으로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다[7]. 그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지만, 훗날 피사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되어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감시를 받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다[7][2].

요한 파리키다의 알브레히트 1세 암살 사건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건이 일어난 5월 1일은 합스부르크 역사에서 "암흑의 날"로 기억된다[8]. 이 사건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기피되었으며[3], 18세기에 알브레히트 1세의 직계 후손인 카를 6세를 마지막으로 남계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가문 내 누구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5].

4. 가계도


  • '''할아버지:''' 독일의 루돌프 1세 (1218년경–1291년)
  •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2세 (1270년–1290년)
  • '''어머니:''' 보헤미아의 아그네스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의 딸)
  • '''본인:''' '''요한 파리키다''' (1290년경–1312년/1313년)
  • '''백부:''' 독일의 알베르트 1세 (1255년–1308년) - 라인펠덴 조약(1283년)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지위를 계승했으며,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함.
  • '''사촌''' (알베르트 1세의 아들들):
  • * 보헤미아의 루돌프 1세 (1281년–1307년)
  • * 미남 프리드리히 (1289년경–1330년)
  • *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 (1290년–1326년)
  • *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 (1298년–1358년)
  • * 하인리히 (1299년–1327년)
  • * 오토, 오스트리아 공작 (1301년–1339년)


참조

[1] 문서 Act V, scene 2
[2] 웹사이트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John of Swabia https://en.wikisourc[...] 2014-01-01
[3]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4] 서적 オーストリア史
[5]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6]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7]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8]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9] 문서 Act V, scene 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