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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일두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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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문일두귀는 4세기 동북아시아에 존재했던 우문부의 수령이다. 사료에 따라 우문걸득귀를 살해하고 수령이 되었다는 기록과 화친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그는 모용선비의 모용황, 모용황의 이복형 모용한, 후조와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전연의 공격으로 우문부가 멸망하고 사망했다. 묘호는 세종, 시호는 소무황제이다. 그의 아들 우문릉은 전연에서 벼슬을 하였고, 우문일두귀는 서위의 태사 우문태의 선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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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일두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호소무황제(昭武皇帝)
묘호세종(世宗)
생애
출생일불명
출생지불명
사망일불명
사망지불명
재위 기간? ~ 345년
추존 여부추존
작위북주 추존 황제
전임자 (수령)우문걸득귀
전임자 (추존 황제)헌후
후임자 (추존 황제)덕제
가족 관계
부친우문씨(宇文氏)
모친불명
배우자불명
자녀우문릉(宇文陵)
기타 정보
종교불명
가문우문씨(宇文氏)
왕조북주
관련 목록우문부 수령

2. 생애

우문일두귀는 우문부의 수장으로, 그의 생애는 전연, 후조 등과 얽힌 복잡한 관계 속에서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333년부터 344년까지 우문부를 다스렸다. 묘호는 세종(世宗)[15]이고, 시호는 소무황제(昭武皇帝)[16]이다.

333년, 우문걸득귀를 제거하고 우문부의 대인이 되었다. 이후 모용부모용황, 후조석호 등과 대립하거나 협력하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335년, 모용부의 봉혁이 우문별부의 섭야간을 기습하여 많은 재산을 빼앗았다. 섭야간은 봉혁을 추격하여 혼수에서 공격했지만, 오히려 격퇴당했다.

339년, 모용황의 아들 모용각모용패가 우문별부를 공격했다.

2. 1. 초기 집권과 전연과의 관계

333년, 우문일두귀는 우문부의 동부 수령이었는데, 그가 섬기던 우문걸득귀가 모용부의 모용황으로부터 독립하려 하자, 두려워하며 화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위서》에는 우문일두귀가 우문걸득귀를 살해하고 그 뒤를 이어 수령에 올라 독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

모용황의 이복형 모용한은 일찍이 우문부로 도망쳐 왔는데, 우문일두귀는 그를 꺼려 모용부로 돌려보냈다. 당시 사람들은 우문부를 두고 장수는 재능이 없고, 국가는 방위가 없으며, 군대는 부오가 없다고 평가했다.

335년 12월, 우문일두귀와 단부의 단료는 사신을 보내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을 만났으나, 모용황의 장군 장영의 매복 공격을 받아 우문일두귀의 병사 10명이 사망했다.[3]

336년, 단란이 군대를 이끌고 유성 서쪽에 진을 쳤고, 우문일두귀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안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모용황이 유성으로 진군하여 단란이 싸움 없이 후퇴하게 만들었고, 우문일두귀도 황이 안진에 도착하자 같은 행동을 했다.[4]

338년 3월, 단부가 멸망하자, 모용한은 우문부로 망명했다. 우문일두귀는 한때 모용한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점차 그의 재능을 시샘하게 되었다.

340년 2월, 모용한은 우문일두귀의 명마를 훔쳐 전연으로 귀환했다. 우문일두귀의 정예 병사 백여 기가 추격했지만, 모용한이 백 보 떨어진 곳에 칼을 세우고 그것을 단번에 쏘아 맞히는 것을 보고 추격을 멈췄다.

343년 우문일두귀는 국상 막천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전연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막천혼은 크고 작은 패전을 겪었다. 이로 인해 막천혼은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오고 나머지 군사들은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13]

2. 2. 모용인 지지와 갈등

333년 우문일두귀는 우문부의 수장이었던 우문걸득귀를 쫓아내거나 살해하고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모용부의 모용황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자, 우문일두귀는 화친을 요청했다. 모용황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떠나기 전에 자신의 영토와 우문일두귀의 영토 사이에 안진(安晉)과 유음(榆陰)이라는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다.[2]

그해 11월,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켜 요동군을 점령하자, 우문일두귀는 단부의 단료와 함께 모용인을 지지했다.[3] 335년 12월, 우문일두귀와 단료는 사신을 보내 모용인을 만났으나, 모용황의 장군 장영(張英)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우문일두귀의 병사 10명이 사망했고, 단료의 사신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모용황에게 끌려갔다.[3]

336년 초, 모용인은 모용황에게 살해되었다. 모용인이 죽은 직후, 단부와 우문부는 연합하여 모용황을 공격했다. 단료의 동생 단란은 군대를 이끌고 유성(현재 조양시 서남쪽) 서쪽에 진을 쳤고, 우문일두귀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안진을 공격했다. 모용황은 유성으로 진군하여 단란이 싸움 없이 후퇴하게 만들었고, 우문일두귀도 모용황이 안진에 도착하자 같은 행동을 했다. 모용황은 풍역에게 경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했고, 풍역은 그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 많은 장비와 식량을 빼앗았다.[4]

2. 3. 모용한과의 관계

333년, 우문일두귀는 우문부의 동부 수령이었는데, 그가 섬기던 우문걸득귀가 모용부의 모용황으로부터 독립하려 하자, 화친할 것을 주장했다.[15] 그러나 《위서》에는 우문일두귀가 우문걸득귀를 살해하고 수령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모용황의 이복형 모용한은 우문부로 도망쳐 왔는데, 우문일두귀는 그를 꺼려 모용부로 돌려보냈다. 당시 사람들은 우문부를 두고 장수는 재능이 없고, 국가는 방위가 없으며, 군대는 부오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후 모용한은 우문일두귀의 명마를 훔쳐 전연으로 귀환했다.[5][6]

343년, 우문일두귀는 국상 막천혼에게 전연을 공격하게 했으나, 막천혼은 패전을 거듭하고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왔다.[13]

344년, 전연은 우문일두귀를 공격하여 우문부의 근거지를 함락시켰다. 우문일두귀는 막북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14]

2. 4. 후조와의 관계

우문일두귀는 후조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연이 우문부를 공격했을 때 후조의 천왕 석호가 구원군을 보냈으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문부는 멸망했다.[14] 343년 8월에는 도망 중이던 단요의 동생 단란을 붙잡아 후조에 보내고, 준마 1만 필을 함께 헌상하는 등 일관되게 후조에 종속하며 공헌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13]

2. 5. 우문부의 멸망

343년 우문일두귀는 국상(國相) 막천혼(莫淺渾)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전연(前燕)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막천혼은 크고 작은 패전을 거듭했다.[7] 이로 인해 막천혼은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오고 나머지 군사들은 포로로 잡혔다.[7]

이듬해인 344년 모용황(慕容皝)이 이끄는 전연군은 우문부를 공격하여 우문부의 근거지를 함락시켰다. 우문일두귀는 막북(漠北)으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14] 이로 인해 우문부는 멸망하고 그 무리는 흩어졌다.

우문일두귀는 후조(後趙)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전연이 우문부를 공격하자 후조의 천왕(天王) 석호(石虎)가 지원군을 보냈으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문부는 멸망하였다. 그러나 《위서(魏書)》의 기록에 따르면 전연이 우문부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은 345년이며,[8] 우문일두귀는 막북으로 달아났다가 뒤에 고구려로 도주했고,[10] 모용황의 장수가 부락민 5천여 호를 창려로 옮김으로써 우문부는 멸망했다고 한다.

3. 후대

주서(周書)》에서는 우문일두귀의 이름을 우문사두귀(宇文俟豆歸)로 기재하고 그의 아들 우문릉(宇文陵)은 일찍이 전연에서 임관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현도공(玄菟公)에 봉해졌으며 북위(北魏)에 항복한 뒤 서위(西魏)의 태사(太師)를 지냈다 한다.[11]

우문일두귀는 최소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우문 부족 구성원들은 일두귀를 따라 고구려로 가거나, 전연에 항복했으며, 쿠모 시와 거란 지파는 현대의 커스커텅 기와 옹뉴드 기의 송모 지역으로 도망쳤다.[12] 우문릉은 항복하여 전연과 그 부활 국가인 후연에서 눈에 띄는 경력을 쌓았다. 그는 호군교위(護軍校尉)를 지냈으며, 현도군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나중에 북위에서 일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곳에서 살았다. 일두귀는 서위의 최고 지도자인 우문태와 557년 북주를 건국한 태의 다른 가족들의 직계 조상이었다.[12]

우문일두귀의 여섯 아들[11]

이름가계
우문릉(宇文陵)서위 태사(太師)
우문발발괴(宇文拔拔瑰)우문측(宇文測)과 우문현화(宇文顯和)의 선조
우문흘도(宇文紇闍)
우문목원(宇文目原)우문필(宇文弼)의 선조
우문사직(宇文俟直)
우문목진(宇文目陳)


참조

[1] 서적 Book of Zhou, Volume 1
[2]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3]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4]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5
[5]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6
[6]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7]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8] 서적 Book of Wei, Volume 103
[9]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7
[10] 서적 Book of Wei, Volume 103
[11] 서적 New Book of Tang, Volume 71
[12] 서적 Book of Zhou, Volume 1
[13] 서적 魏書
[14] 서적 魏書
[15] 논문 北魏<宇文悦墓志>初探 2020
[16] 서적 秦晋豫新出墓志搜佚三编 国家图书馆出版社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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