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개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시강원문학 등을 거쳤다. 명나라에 여러 번 다녀왔으며, 연안부사, 충청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조판서로 재직하며 윤원로를 탄핵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1558년 좌의정에서 면직되었으며, 1566년에 사망했다.
윤개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로 잠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복귀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윤원로의 전횡을 막기 위해 그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으며,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랐다. 1558년(명종 13)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평부원군에 봉해졌고, 1563년에는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566년(명종 21) 사망했다.[2]
2. 생애
2. 1. 관직 생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 기사관, 주서,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재직 중 기묘사화로 파직되었으나, 이조좌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시강원 문학으로 승진했다. 문학, 장령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세자를 보좌했다. 종사관, 질정관, 감교관을 거쳐 예조참의가 된 후 성절사와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안부사로 외직에 있다가 어전통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병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선위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했다. 공조참판을 거쳐 특진관이 되고, 형조참판으로 다시 특진관이 되었다.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윤원로가 전횡하자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유관, 우의정 성세창, 영중추부사 홍언필 등과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 보냈다. 예조판서로 있다가 판중추부사가 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다시 예조판서로 특진관을 겸했다.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2]
2. 2. 윤원로 탄핵
윤원로가 전횡을 일삼자 윤인경, 유관, 성세창, 홍언필 등과 함께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 보냈다.[2]
2. 3. 고위 관직 역임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으로 시작해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기묘사화로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이조좌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성절사와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연안부사, 어전통사, 충청도관찰사, 병조참의,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공조참판, 특진관, 형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예조판서가 되었을 때 영의정 윤인경 등과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냈다.[2]
이후 판중추부사가 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다시 예조판서로 특진관을 겸했다.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2]
1558년(명종 13) 양사의 청으로 좌의정에서 면직되고 영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563년(명종 18) 70세가 되자 치사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2]
2. 4. 말년
1558년(명종 13) 양사의 청으로 좌의정에서 면직되고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63년(명종 18) 70세가 되자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다.[2]
1566년(명종 21) 사망했다.[2]
참조
[1]
서적
국조방목
[2]
서적
명종실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