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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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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법은 고대 로마 시대에 제정된 여러 법률들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기원전 90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동맹 도시에 부여하는 법안을 시작으로,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당 취득, 농지 분배 관련 법률이 제정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로마 상류층의 도덕성 향상과 인구 증가를 위해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일련의 법률들이 제정되었으며, 간통을 처벌하고 정치 부패를 방지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율리우스법은 시대에 따라 개정되었으며, 울피아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도 관련 내용이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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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법

2.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의 율리우스법

율리우스 카이사르집정관으로 재임하면서 로마 사회의 개혁을 위해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 '''부당 취득에 관한 법률(기원전 59년):''' 총독의 권한 남용을 막고 재정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률이다. 총독이 속주에서 받을 수 있는 선물 수를 제한하고, 재정 장부의 균형을 맞추도록 의무화했다.[3]
  • '''농지법(기원전 59년):''' 도시 빈민과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에게 공공 토지를 분배하는 법률이다. 카토 (소 카토)를 비롯한 원로원의 반대가 있었지만, 제1차 삼두정치의 지원을 통해 민회에서 통과되었다.[2]

2. 1. 라틴 시민과 동맹에 주어지는 시민권 관련 법률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중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 충성하는 이탈리아 동맹 도시들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1] 이 법의 주된 목적은 로마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지 않은 동맹 도시들이 계속 로마에 충성하도록 하고, 이탈리아 도시들이 전쟁을 지속하려는 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12]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각 이탈리아 공동체가 로마 시민권을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하고, 새로운 시민들을 위해 부족회에 8개 정도의 새로운 부족을 설립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무기를 들지 않았거나 단기간 내에 무기를 내려놓는 도시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시민권 부여는 로마 시민의 수를 거의 세 배로 늘리고,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공화국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2. 부당 취득에 관한 법률 (기원전 59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집정관으로 재임하던 기원전 59년에 통과시킨 법으로, 총독이 속주에서 받을 수 있는 ‘증여물’의 수를 제한하고, 총독이 속주를 떠나기 전에 재정 장부의 균형을 맞춰야 했다.[3] 이 법은 100개 이상의 조항을 담은 대규모 입법으로, 여러 지방의 부정을 다루고 집행 절차와 위반 시 처벌을 규정했다.

이 법은 특히 다음 내용을 포함했다.[4]

  • 총독이 지방 재무부와 도시에서 가져갈 수 있는 금액의 한도를 설정
  • 총독이 상세한 재정 보고서를 작성하여 봉인하고 두 지방 도시에 보관하며, 세 번째 사본을 로마로 보내도록 요구
  • 총독이 선박, 곡물, 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
  • 총독이 후임자가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지방에 머물도록 요구
  • 원로원 또는 민중의 동의 없이 총독이 전쟁을 선포하거나 다른 왕국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
  • 공무에 종사하는 모든 관리에게 법의 집행 범위를 확대
  • 재판 절차, 증인, 배심원 투표 절차 등에 대한 세부 사항을 확립


이 법은 상설 법원, 원로원, 공공 계약(특히 공공 사업 및 곡물 관련) 등 모든 종류의 공적 행위에 대한 규정도 확대했다. 또한 원로원의 선박 소유를 금지했다.

카이사르는 에퀴테스에게 적용되는 반부패 입법이라는 "정치적 핫이슈"에서 벗어나 "신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토와 폼페이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인물들이 이와 유사한 법안을 통과시키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동맹과 협력하여 배심원단(원로원, 에퀴테스, 재무관 민중 트리부누스)의 투표를 별도로 기록하는 법안을 도입했는데, 이는 "개별 평결의 비밀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간접적인 책임을 부여"했다.

이 법은 거의 반대 없이 통과되었으며, "카이사르의 동시대인들로부터 높은 칭찬"을 받았다. 카토를 포함한 많은 원로원이 이 법에 기여했으며, 카토는 지방 도시의 갈취에 대한 몇 가지 규정을 추가하도록 제안했을 수 있다. 이 법은 수세기 동안 "로마의 지방 행정법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

2. 3. 농지법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두 개의 농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들은 서로 관련된 법안으로, 각각 ''렉스 율리아 아그라리아''(lex Julia agraria)와 ''렉스 율리아 데 아그로 캄파노''(lex Julia de agro Campano)였다.[2] 첫 번째 법안은 도시 빈민과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에게 공공 토지(기존 토지와 자발적 매도자로부터 구매한 토지)를 분배하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 법안은 캄파니아의 공공 토지를 추가로 분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 법안 통과는 순탄치 않았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시작하며 이 법안을 제출했지만, 즉시 필리버스터로 카토 (소 카토)의 반대에 직면했다. 원로원에서 통과가 막히자, 카이사르는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그는 자신의 공동 집정관이자 정치적 반대자였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에게 법안에 대한 토론을 제안했고, 비불루스가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으면서도 무의미하고 완고하게 반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비불루스는 "여러분 모두가 원하더라도 올해에는 이 법을 통과시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카이사르는 당시 제1차 삼두정치라는 비밀 동맹을 통해 협력하고 있던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인 폼페이우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아 법안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비불루스는 대신 법안 표결이 예정된 날마다 불길한 징조를 선언하는 방해 전술을 사용했다. 어느 날, 그는 그러한 징조를 선언하려다 정치적 동맹인 카토와 함께 폭도(거의 확실히 카이사르와 그의 동맹자들이 조직한)의 공격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불길한 징조에 대한 발표가 없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민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법안에 원로원 의원들이 법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하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카토와 그의 동맹인 마르쿠스 파보니우스는 키케로의 중재가 있기 전까지 거부했지만, 키케로는 카토가 선서하고 망명하는 것보다 로마에 남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카토의 동맹자들의 방해 전술에 직면하여, 카이사르는 재분배 대상 공공 토지를 확대하는 법안을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회에 상정했다.

2. 4. 식민시 법률 (기원전 45년)

헤라클레아 법전에 따르면, 식민시 법률(Lex Iulia Municipalis)은 이탈리아 식민 도시들에 대한 규제들을 정했다.[6] 이 법은 이탈리아의 자치 도시들에 대한 규정을 제정했을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법의 책임자인지에 대한 문제는 "격렬하게 논쟁" 중이다.[6]

3.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율리우스법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여러 율리우스법을 제정했다. 기원전 18-17년에 시행된 율리우스법은 로마 상류층의 윤리 수준을 높이고 이들의 수를 늘리며, 혼인을 장려하고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시도였다.[13] 또한 이 법률들은 간통을 사적 및 공적 범죄로 규정하였다.[7]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율리우스 법률은 결혼을 장려하고 독신자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 명의 아들을 낳은 사람에게 높은 존경을 표하는 '세 아들 법'을 제정했다.[13][8] 결혼 적령기의 독신자와 젊은 과부, 홀아비는 재산을 상속받거나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3. 1. 윤리 제정법 (기원전 18–17년)

아우구스투스 치세인 기원전 18-17년에 제정된 율리우스법들은 로마 상류층의 윤리 수준을 높이고, 혼인을 장려하며, 출산을 통해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Lex Julia de maritandis ordinibus'')[13][7] 또한 이 법률들은 간통을 사적 및 공적 범죄로 규정하였다.(''Lex Julia de adulteriis'')[7]

인구 증가를 위해 율리우스 법률은 결혼에 대한 유인책을 제공하고, 독신자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 아들을 낳은 이에게 높은 존경을 표하는 '세 아들 법'을 제정했다.[13][8] 결혼 적령기의 독신자, 젊은 과부 및 홀아비는 재산을 상속받거나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기원전 18년의 ''율리아 법(Lex Julia de ambitu)''은 정치적 공직을 얻기 위한 뇌물 행위를 처벌했다.[14] 기원전 17년의 ''율리아 법(Lex Julia de adulteriis coercendis)''은 간통을 저지른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하고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는 등 간통을 추방으로 처벌했다.[9] 아버지는 간통한 딸과 그 상대방을 죽일 수 있었고,[9] 남편은 특정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죽일 수 있었으며, 간통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9]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그녀의 맏딸 율리아에게 이 법을 적용해야 했다.[9]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법이 실제로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친족에게 더 엄격했다는 비난을 덧붙였다.(''연대기'' III 24)[9] 서기 5년의 ''율리아 법(Lex Julia de vicesima hereditatum)''은 유언에 의한 상속에 5%의 세금을 부과했으며, 가까운 친족은 면제했다.[14]

3. 1. 1. 불법 선거에 관한 법률 (기원전 18년)

Lex Iulia de Ambitula (기원전 18년)는 공직을 뇌물로 얻는 것을 처벌하여 정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한 법률이다.[14]

3. 1. 2. 정식적 혼인에 관한 법률 (기원전 18년)

Lex Iulia de Maritandis Ordinibusla은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사회의 계층 간 혼인을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13] 이 법은 로마의 축첩의 간접적 기초로 여겨지며,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때 재규정된다.

인구 증가를 위해, 율리우스 법률은 결혼에 대한 유인책을 제공하고 독신자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 아들을 낳은 이에게 높은 존경심을 부여하는 '세 아들 법'을 반포했다.[13] 결혼 적령기의 독신자 및 젊은 과부와 홀아비는 재산을 상속받거나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3. 1. 3. 간통의 억압에 관한 법률 (기원전 17년)

기원전 17년에 제정된 율리우스 간통법(Lex Iulia de Adulteriis Coercendis)은 간통을 사적 및 공적 범죄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처벌하여 가정의 안정을 도모했다.[14] 이 법에 따라 간통을 저지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되었고, 재산의 일부가 몰수되었다.[14] 아버지는 간통한 딸과 그 상대방을 죽일 수 있었고,[15] 남편은 특정한 상황에서 간통 상대를 죽일 수 있었으며, 간통을 저지른 아내와는 반드시 이혼해야 했다.[15]

이 법은 간통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처벌 대상에 포함시켜 성적 평등을 일정 부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우구스투스 본인도 자신의 딸 율리아(판다테리아섬으로 추방)와 딸의 장녀에게 이 법률을 적용해야 했다.[15]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실제 요구된 법률보다 자신의 집안에 더 엄격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편년사'' III 24).[15]

3. 1. 4. 상속세에 관한 법률 (서기 5년)

Lex Iulia de vicesima hereditatumla (서기 5년)은 유언에 의한 상속 재산에 5%의 상속세를 부과하는 법률이다. 가까운 친족에게는 상속세가 면제되었다.[14] 이 법은 국가 재정 확충에 기여하였다.

3. 1. 5. 파피우스 포페이우스법 (서기 9년)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법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파피우스 포페이우스법은 결혼을 장려하고 강화하려는 법률이었다. 이 법은 또한 합법적인 혼인 관계에서 출산을 장려하고, 독신자들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13]

4. 율리우스법의 개정

율리우스법은 이후 로마 황제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정되고 보완되었다. 이러한 개정 내용은 후대의 법전과 법률서에 기록되어 전해진다.[1][2]

4. 1. 울피아누스 (3세기)

울피아누스는 그의 저서에서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법의 내용을 언급했다. 율리우스법 조항에 따르면, 원로원 의원과 그 후손은 무대에 오르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런 직업을 가졌던 자유민 여성과 결혼할 수 없었다.[1] 자유민은 매춘부나 포주, 포주에게서 해방된 여성, 간통을 저지른 여성, 공법을 어겨 유죄 판결을 받은 자, 무대에 오르는 직업을 가진 자와 결혼할 수 없었다.[1]

4. 2. 유스티니아누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학제요를 편찬하면서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을 수정하여, 다른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모욕한 자뿐만 아니라 남성 간 성관계를 맺은 자들도 사형으로 처벌하도록 하였다. (법학제요 4, 18, 2-3)[1]

율리우스법은 또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처녀를 범하거나 존경받는 미망인을 유혹하는 범죄도 처벌하였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높은 지위에 있을 경우에는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고, 낮은 지위에 있을 경우에는 신체 처벌이나 추방형을 내렸다. (학설휘찬 4, 4, 37)[2]

참조

[1] 서적 The storm before the storm: the beginning of the end of the Roman Republic PublicAffairs
[2] 기타
[3] 기타
[4] 기타
[5] 기타
[6] 서적 Caesar: life of a colossus Yale University Press 2006
[7] 서적 The Women of the Caesars https://en.wikisourc[...] 1911
[8] 서적 The Romans: From Village to Empire: A History of Rome from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Western Empire
[9] 서적 Ancient civilizations: the illustrated guide to belief, mythology, and art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10] 웹사이트 Digesta Iustiniani : Liber 48 ( Mommsen & Krueger ) https://droitromain.[...] 2023-04-24
[11] 서적 The storm before the storm : the beginning of the end of the Roman Republic https://archive.org/[...] PublicAffairs
[12] 서적 A History of Earliest Italy, Routledge Revivals 2014
[13] 서적 The Romans: From Village to Empire: A History of Rome from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Western Empire
[14] 웹인용 The Julian marriage laws http://www.unrv.com/[...] Unrv.com 2010-11-29
[15] 서적 Ancient civilizations: the illustrated guide to belief, mythology, and art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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