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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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사오적은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명의 매국노를 지칭한다.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을사오적에 해당하며, 이들은 조약 체결 이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행적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규정되며,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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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신협약은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일본의 통제하에 두고 주권 상실을 심화시켰으며, 불평등 조약이자 식민지화의 도구로 평가받는다. - 을사 보호 조약 관련자 - 정미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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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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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을사오적 (乙巳五賊) |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 |
을사오적 | |
명단 | 이지용 (李址鎔, 내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외부대신) 이근택 (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 (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 (權重顯, 농상공부대신) |
배경 | |
시대적 상황 |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강압적 외교 대신들의 친일 성향과 내부 분열 |
을사늑약 체결 과정 | |
일본의 압력 |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압박함. |
대신들의 찬반 논쟁 | 일부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 (예: 민영환, 조병세)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 |
조약 체결 |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
을사오적의 행적 | |
조약 체결 후 | 을사오적은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음. 친일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유지 |
국민들의 반응과 저항 | |
분노와 저항 |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 항거 의병 운동 확산 |
역사적 평가 | |
매국 행위 | 을사오적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민족 반역자로 평가 |
친일 잔재 청산 노력 | 해방 이후 반민특위를 통해 처벌 시도. |
관련 자료 | |
관련 서적 | F.A. 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F.A.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
같이 보기 | |
관련 인물 및 단체 | 을사늑약 고종 이토 히로부미 민영환 조병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
2. 을사오적 명단
(李完用)

(李根澤)

(李址鎔)

(朴齊純)
(權重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