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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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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사오적은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명의 매국노를 지칭한다.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을사오적에 해당하며, 이들은 조약 체결 이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행적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규정되며,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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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개요
을사오적 (乙巳五賊)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
을사오적
명단이지용 (李址鎔, 내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외부대신)
이근택 (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 (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 (權重顯, 농상공부대신)
배경
시대적 상황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강압적 외교
대신들의 친일 성향과 내부 분열
을사늑약 체결 과정
일본의 압력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압박함.
대신들의 찬반 논쟁일부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대 (예: 민영환, 조병세)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
조약 체결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을사오적의 행적
조약 체결 후을사오적은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음.
친일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유지
국민들의 반응과 저항
분노와 저항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 항거
의병 운동 확산
역사적 평가
매국 행위을사오적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민족 반역자로 평가
친일 잔재 청산 노력해방 이후 반민특위를 통해 처벌 시도.
관련 자료
관련 서적F.A. 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F.A.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같이 보기
관련 인물 및 단체을사늑약
고종
이토 히로부미
민영환
조병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2. 을사오적 명단

(李完用)

1858년 ~ 1926년 (47세)학부대신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이근택
(李根澤)
1865년 ~ 1919년 (40세)군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지용
(李址鎔)
1870년 ~ 1928년 (35세)내부대신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박제순
(朴齊純)
1858년 ~ 1916년 (47세)외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권중현
(權重顯)
1854년 ~ 1934년 (51세)농상공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3. 을사조약 체결 과정과 배경

1905년 11월 17일,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고종은 대신들과 회의를 열었으나, 참정대신[4] 한규설과 외부대신 박제순 등은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고종의 지시로 결국 조약은 체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에 반대하며 우는 한규설에게 "일국의 재상된 자가, 여자처럼 울다니"라고 말했다고 한다.[5] 이완용은 고종의 뜻이라며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 이지용 등과 함께 외교 문서 작업을 진행했다. 탁지부대신[6] 민영기도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민영기와 박제순은 조약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전 군부대신 민영환[7]은 을사오적을 '매국노', '오국적'이라 칭하며 강하게 비판했고, 고종에게 조약 파기를 건의했으나 거부당하자 자결했다.

3. 1. 조약 체결에 대한 저항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이후,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암살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을사오적 암살단이 조직되었고, 1905년 이지용의 저택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07년 권중현이 피습당했고, 1909년 이완용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5]

한규설은 조약 체결에 반대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이완용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5]

4. 을사오적의 이후 행적과 평가

이완용은 학부대신, 이근택은 군부대신, 이지용은 내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권중현은 농상공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였다.[3] 조약 체결 당시 탁지부대신이었던 민영기[6]는 조약에 반대하였으나, 이후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받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 이왕직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오적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를 지속했다. 다음은 을사오적의 이후 행적을 정리한 표이다.

성명생몰연대당시 직위이후 경력
이완용1858년 ~ 1926년학부대신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이근택1865년 ~ 1919년군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지용1870년 ~ 1928년내부대신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박제순1858년 ~ 1916년외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권중현1854년 ~ 1934년농상공부대신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이후, 을사오적 암살단이 조직되어 1905년 이지용의 저택 방화, 1907년 권중현 피격, 1909년 이완용 피습 등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을사오적은 친일파(매국노)로 간주되며,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이들의 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반면교사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2] 서적 The Tragedy of Korea https://ia600208.us.[...] E.P. Dutton
[3] 문서 文部大臣のこと。
[4] 문서 議政府参政大臣の略。大韓帝国の首相。
[5] 문서 Harvnb|霞南小松緑|1934|loc=pp.171-175
[6] 문서 財務大臣のこと。
[7] 문서 閔妃の甥にあたる。
[8] 간행물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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