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가키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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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나가키 히로시는 일본의 영화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이다.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여 경력을 시작했으며, 1928년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사무라이 영화, 시대극,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으며, 특히 《무법자 마쓰의 일생》(1943, 1958), 《미야모토 무사시》(1954), 《일본 탄생》(1959)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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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가키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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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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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나가키 코지로 |
다른 이름 | 도메이 히로시 가지와라 킨파치 (공동 명의) 후지키 유미 |
출생지 | 일본, 도쿄시 혼고구 고마고메 센다기마치 (현재의 도쿄도 분쿄구 센다기 1초메) |
사망지 | 일본, 도쿄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
활동 기간 | 1923년 – 1979년 |
수상 | 아카데미 공로상 (1956년, 미야모토 무사시) 황금사자상 (1958년, 무법마츠의 일생) |
저명한 가족 | 도메이 지로(실제 아버지) 반도 미기우에몬(사촌 형) |
경력 | |
1922년 | 닛카쓰 무코지마 촬영소 입사 |
1926년 | 반도 츠마사부로 프로덕션 입사 |
1928년 | 가타오카 치에조 프로덕션 입사, 감독 데뷔 |
1934년 | 나루타키구미 결성 |
1935년 | 닛카쓰 교토 촬영소 입사 |
1955년 | 『미야모토 무사시』, 아카데미상 명예상 수상 |
1958년 | 『무법마츠의 일생』,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
주요 작품 |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
수상 | 황금사자상 (1958년, 무법마츠의 일생) |
신체 정보 | |
신장 | 알 수 없음 |
혈액형 | 알 수 없음 |
기타 | |
공식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2. 경력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인 아버지 토메이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토메이 히로시'''라는 예명으로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8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함께 순회 공연을 다녔으며, 독학으로 읽고 쓰는 것을 익혔다. 소설가, 극작가를 목표로 할 정도의 독서가였다. 아사쿠사 긴류칸의 오페라 팬이었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쇼치쿠 가마타 영화의 팬이었다. 1923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밤』 등에서 스크린에서 부자(父子) 출연을 했다. 그 해 『여자와 해적』(이토 다이스케 감독)을 보고 시대극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토 영화 연구소에 참가하여 시나리오를 배웠다. 1926년, 아버지가 출연하는 『닛린』(이토 다이스케 감독)에서 서드 조감독을 맡았다.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그룹의 다른 멤버들처럼, 이나가키는 유쾌하고 지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했다.[2]
1933년에는 미무라 신타로, 야마나카 사다오, 타키자와 에이스케, 야히로 후지 등 교토의 나루타키에 살던 젊은 영화인들과 영화사의 벽을 넘어선 각본 집단 나루타키조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카지와라 킨파치의 합동 필명으로 야마나카 감독의 『단게 사젠 여화 백만 냥의 항아리』, 『카와치야마 무네토시』, 타키자와 감독의 『태합기』,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각각 히트를 기록했다.
1935년, 닛카쓰 교토 촬영소에 입사하여 야마나카 사다오와 공동으로 나카자토 가이잔 원작의 『다이보사쓰 고개』를 연출했다. 젠신자가 유닛으로 출연한 『고타비 센야』 등을 감독했다. 1938년 야마나카 사다오가 전사하자 친구들과 "야마나카회"를 결성했다. 1940년에는 가타오카 지에조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 3부작, 1941년에는 『바다를 건너는 제례』,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의 『에도 최후의 날』 등 시대극 대작과 화제작을 제작했다.
1943년에는 이타미 만사쿠가 각본을 쓴 『무법자 마쓰의 일생』을 감독했다. 이 작품은 전쟁 전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평가받았지만, 인력거꾼 무법자 마쓰가 군인의 미망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시국에 맞지 않아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1944년, 닛카·중화 합작 영화 『늑대의 봉화는 상해에 뜬다』(다이에이・중화영화)를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으로 제작했다. 상하이에서 8개월에 걸친 로케를 진행한 역작이었지만, 일본도 상하이도 공습으로 관람할 여유는 없었다고 한다. 1945년 종전 후에는 『마지막 攘夷당』으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도요코 영화의 제1작인 현대극 『마음은 달과 같고』를 감독했다.[6]
1950년부터는 주로 도호에서 활약했다. 같은 해부터 촬영한 『사사키 코지로』 3부작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역에 미후네 도시로를 기용하여 호평을 받았다.[7] 1954년에 제작한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미후네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아카데미상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또한 1958년에는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무법자 마츠의 일생』에도 미후네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때 본국에 "토리마시타 나키마시타(울고 웃었습니다)"라는 전보를 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도호의 대작 및 시대극 노선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여겨졌으며, 1959년에 미후네 출연, 츠부라야 에이지 특촬의 도호 1000편 기념 영화 『일본 탄생』을, 1962년에 도호 30주년 기념 영화 『충신장』을 제작하여 각각 흥행에 성공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연극 활동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인 아버지 토메이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토메이 히로시'''라는 예명으로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8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함께 순회 공연을 다녔으며, 독학으로 읽고 쓰는 것을 익혔다. 소설가, 극작가를 목표로 할 정도의 독서가였다. 아사쿠사 긴류칸의 오페라 팬이었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쇼치쿠 가마타 영화의 팬이었다. 1923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밤』 등에서 스크린에서 부자(父子) 출연을 했다. 그 해 『여자와 해적』(이토 다이스케 감독)을 보고 시대극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토 영화 연구소에 참가하여 시나리오를 배웠다. 1926년, 아버지가 출연하는 『닛린』(이토 다이스케 감독)에서 서드 조감독을 맡았다.2. 2. 영화계 입문 및 조감독 시절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나가키는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그룹의 다른 멤버들처럼, 이나가키는 유쾌하고 지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했다.[2]2. 3. 반도 츠마사부로 프로덕션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나가키 히로시는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반도 츠마사부로 프로덕션이 유니버설 픽처스와 제휴하여 현대극 제작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츠마 프로에서 월급 150엔의 간부 배우가 되었다. 당시 조감독이던 에가와 우레오와 알게 되어, 에가와의 각본으로 제작된 영화 『9번 창고』에서 주연을 맡았다. 에가와의 첫 번째 감독 작품인 『밤의 괴신사』에서도 조연으로 출연했다.2. 4. 가타오카 지에조 프로덕션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1]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2]1927년, 반츠마 프로를 떠나 시모가모의 쇼치쿠 교토 촬영소에 입사했다. 월급 25엔의 조감독이 되었다. 키누가사 사테이의 3rd 조감독을 거쳐, 1928년 이토의 소개로 이타미 만사쿠와 함께 카타오카 치에조 프로덕션의 창설에 참여했다. 같은 해 치에조 주연, 이타미 각본의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고, 이후 『방탕 삼매』, 『겐지 코조』, 『그림책 무사 수행』, 『겐로쿠 13년』과 같은 치에조 주연의 명랑하고 쾌활한 시대극을 다수 제작, 이타미와 함께 치에조 프로의 두 기둥으로 불렸다. 『그림책 무사 수행』이나 『겐로쿠 13년』과 같은 작품은, 병약했던 이타미를 대신하여 감독을 담당했다.
1931년, 닛카츠가 부결한 『눈꺼풀의 어머니』의 기획을 아쉬워하여, 원작자 하세가와 신에게 치에조의 이름을 사칭하여 영화화 허락을 얻어, 치에조를 화나게 했지만, 목숨을 걸고 기획을 통과시켜, 치에 프로와 닛카츠의 계약 갱신 첫 작품으로 완성, 영화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 작품이 실패하면 다른 일로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는 이나가키는, 이 작품으로 확실히 방침을 정하고, 감독을 평생의 일로 결정했다고 한다.
치에 프로에서는 그 외에 『한 자루 칼 도효입성』, 시모자와 칸 원작 『야타로 삿갓』 등의 도보물도 많이 제작하여 호평을 받았고, 후에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그룹의 다른 멤버들처럼, 이나가키는 유쾌하고 지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했다.[2]
2. 5. 나루타키조 결성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나가키는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1933년에는 미무라 신타로, 야마나카 사다오, 타키자와 에이스케, 야히로 후지 등 교토의 나루타키에 살던 젊은 영화인들과 영화사의 벽을 넘어선 각본 집단 나루타키조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카지와라 킨파치의 합동 필명으로 야마나카 감독의 『단게 사젠 여화 백만 냥의 항아리』, 『카와치야마 무네토시』, 타키자와 감독의 『태합기』,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각각 히트를 기록했다.2. 6. 닛카쓰 복귀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나가키는 1922년 배우로 닛카쓰에 입사했다.[1] 1935년, 닛카쓰 교토 촬영소에 입사하여 야마나카 사다오와 공동으로 나카자토 가이잔 원작의 『다이보사쓰 고개』를 연출했다. 젠신자가 유닛으로 출연한 『고타비 센야』 등을 감독했다. 1938년 야마나카 사다오가 전사하자 친구들과 "야마나카회"를 결성했다. 1940년에는 가타오카 지에조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 3부작, 1941년에는 『바다를 건너는 제례』,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의 『에도 최후의 날』 등 시대극 대작과 화제작을 제작했다.1943년에는 이타미 만사쿠가 각본을 쓴 『무법자 마쓰의 일생』을 감독했다. 이 작품은 전쟁 전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평가받았지만, 인력거꾼 무법자 마쓰가 군인의 미망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시국에 맞지 않아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1944년, 닛카·중화 합작 영화 『늑대의 봉화는 상해에 뜬다』(다이에이・중화영화)를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으로 제작했다. 상하이에서 8개월에 걸친 로케를 진행한 역작이었지만, 일본도 상하이도 공습으로 관람할 여유는 없었다고 한다. 1945년 종전 후에는 『마지막 攘夷당』으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도요코 영화의 제1작인 현대극 『마음은 달과 같고』를 감독했다.[6]
2. 7. 태평양 전쟁 전후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그룹의 다른 멤버들처럼, 이나가키는 유쾌하고 지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했다.[2] 이나가키는 이후 다이에이, 도호로 옮겨 대규모 예산의 컬러 영화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섬세한 작품들을 제작했다.[2] 그는 또한 많은 영화를 제작했으며 수십 편의 각본을 썼다. 그는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2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3]2. 8. 도호 시절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이나가키는 이후 도호로 옮겨 대규모 예산의 컬러 영화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섬세한 작품들을 제작했다.[2] 그는 또한 많은 영화를 제작했으며 수십 편의 각본을 썼다. 그는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2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3]1950년부터는 주로 도호에서 활약했다. 같은 해부터 촬영한 『사사키 코지로』 3부작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역에 미후네 도시로를 기용하여 호평을 받았다.[7] 1954년에 제작한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미후네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아카데미상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또한 1958년에는 자신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무법자 마츠의 일생』에도 미후네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때 본국에 "토리마시타 나키마시타(울고 웃었습니다)"라는 전보를 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도호의 대작 및 시대극 노선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여겨졌으며, 1959년에 미후네 출연, 츠부라야 에이지 특촬의 도호 1000편 기념 영화 『일본 탄생』을, 1962년에 도호 30주년 기념 영화 『충신장』을 제작하여 각각 흥행에 성공했다.
2. 9. 만년
도쿄에서 신파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이나가키 히로시는 7세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고, 1922년 닛카쓰 촬영소에 배우로 입사하였다.[1] 감독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가타오카 지에조의 지에조 프로덕션에 합류하여 1928년 ''천하태평기''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닛카쓰로 돌아온 그는 시대극을 계속 제작했고, "긴파치 카지와라"라는 가명으로 공동으로 각본을 쓴 야마나카 사다오 및 야히로 후지와 같은 젊은 영화 제작자들의 나리타키 그룹에 참여했다.[2] 그룹의 다른 멤버들처럼, 이나가키는 유쾌하고 지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했다.[2] 이나가키는 이후 다이에이, 도호로 옮겨 대규모 예산의 컬러 영화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섬세한 작품들을 제작했다.[2] 그는 또한 많은 영화를 제작했으며 수십 편의 각본을 썼다. 그는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2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3]3. 작품 세계
이나가키 히로시는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는 사무라이 영화, 시대극, 드라마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1943년작 《무호마츠의 일생》과 1958년작 《무호마츠의 일생》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59년에는 《일본탄생》을 통해 역사적 서사를 다루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훈도시 의사》(1960년), 《추신구라》(1962년) 등을 연출하며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이어갔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1943년 《무호마츠의 일생》을 제작하였고, 1954년에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감독했다. 1958년에는 《무호마츠의 일생》을 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본탄생》을 감독했다. 1960년에는 《훈도시 의사》, 1962년에는 《추신구라》를 감독했다.
그의 초기작으로는 《천하태평기》(1928년), 《방랑삼매》(1928년), 이타미 만사쿠를 대신하여 감독한 《속만화지옥 제2편》(1928년), 《그림책 무사 수행》(1929년), 《눈꺼풀의 어머니》(1931년), 《일본도 도효 입성》(1931년), 《겐로쿠 13년》 (1931년), 《야타로 갓파 거래의 권·독보의 권》(1932년), 《시대의 교아》(1932년)등이 있다.
1930년대에는 《후지의 흰 눈》(1935년), 야마나카 사다오와 공동 감독한 《세키노 야탓페》(1935년), 《대보살 고개 제1편 갑원일도류의 권》(1935년), 《대보살 고개 스즈카 산의 권·미부 시마바라의 권》(1936년), 《출세 태합기》(1938년), 《지옥의 벌레》(1938년), 《존왕 촌서숙》(1939년), 마키노 마사히로와 공동 감독한 《가사토 세이엔》(1939년)등을 감독하였다.
1940년대에는 닛카츠판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인 《미야모토 무사시 초분의 사람들》(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영달의 문》(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검심일로》(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1942년)와 《바다를 건너는 제례》(1941년), 《에도 최후의 날》(1941년), 일화 합작 영화인 《늑대 연기는 상하이에 오르다》(1944년), 《손을 잡는 아이들》(1948년), 《잊혀진 아이들》(1949년)을 감독하였다.
1950년대에는 《나는 보디가드》(1950년), 《사사키 코지로》(1950년), 《번개 풀》(1951년), 《전국 무뢰》(1952년), 《오마츠리 한지로》(1953년), 도호판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인 《미야모토 무사시》(1954년), 《속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1955년), 《결투 간류지마》(1956년), 《야규 무예장》 시리즈인 《야규 무예장》(1957년), 《야규 무예장 쌍룡비검》(1958년), 《무법송의 일생》(1958년), 《어떤 검호의 생애》(1959년)등을 감독하였다.
1960년대에는 《일본 탄생》(1959년), 《훈도시 의사》(1960년), 《오사카 성 이야기》(1961년), 《겐과 부동명왕》(1961년), 《노도적 바람 속을 달리다》(1961년), 《충신장 꽃의 권·눈의 권》(1962년), 《두부집의 타츠》(1962년), 《비검》(1963년), 《사혼마도 대용권》(1964년), 《난폭한 고에몬》(1966년), 《가라쿠타》(1966년), 《사사키 코지로》(1967년), 《풍림화산》(1969년)를 감독했다. 1970년에는 《매복》을 감독하였다.
3. 1. 주제 및 스타일
이나가키 히로시는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는 사무라이 영화, 시대극, 드라마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1943년작 《무호마츠의 일생》과 1958년작 《무호마츠의 일생》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59년에는 《일본탄생》을 통해 역사적 서사를 다루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훈도시 의사》(1960년), 《추신구라》(1962년) 등을 연출하며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이어갔다.3. 2. 대표작
이나가키 히로시는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1943년 《무호마츠의 일생》을 제작하였고, 1954년에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감독했다. 1958년에는 《무호마츠의 일생》을 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본탄생》을 감독했다. 1960년에는 《훈도시 의사》, 1962년에는 《추신구라》를 감독했다.그의 초기작으로는 《천하태평기》(1928년), 《방랑삼매》(1928년), 이타미 만사쿠를 대신하여 감독한 《속만화지옥 제2편》(1928년), 《그림책 무사 수행》(1929년), 《눈꺼풀의 어머니》(1931년), 《일본도 도효 입성》(1931년), 《겐로쿠 13년》 (1931년), 《야타로 갓파 거래의 권·독보의 권》(1932년), 《시대의 교아》(1932년)등이 있다.
1930년대에는 《후지의 흰 눈》(1935년), 야마나카 사다오와 공동 감독한 《세키노 야탓페》(1935년), 《대보살 고개 제1편 갑원일도류의 권》(1935년), 《대보살 고개 스즈카 산의 권·미부 시마바라의 권》(1936년), 《출세 태합기》(1938년), 《지옥의 벌레》(1938년), 《존왕 촌서숙》(1939년), 마키노 마사히로와 공동 감독한 《가사토 세이엔》(1939년)등을 감독하였다.
1940년대에는 닛카츠판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인 《미야모토 무사시 초분의 사람들》(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영달의 문》(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검심일로》(1940년),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1942년)와 《바다를 건너는 제례》(1941년), 《에도 최후의 날》(1941년), 일화 합작 영화인 《늑대 연기는 상하이에 오르다》(1944년), 《손을 잡는 아이들》(1948년), 《잊혀진 아이들》(1949년)을 감독하였다.
1950년대에는 《나는 보디가드》(1950년), 《사사키 코지로》(1950년), 《번개 풀》(1951년), 《전국 무뢰》(1952년), 《오마츠리 한지로》(1953년), 도호판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인 《미야모토 무사시》(1954년), 《속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1955년), 《결투 간류지마》(1956년), 《야규 무예장》 시리즈인 《야규 무예장》(1957년), 《야규 무예장 쌍룡비검》(1958년), 《무법송의 일생》(1958년), 《어떤 검호의 생애》(1959년)등을 감독하였다.
1960년대에는 《일본 탄생》(1959년), 《훈도시 의사》(1960년), 《오사카 성 이야기》(1961년), 《겐과 부동명왕》(1961년), 《노도적 바람 속을 달리다》(1961년), 《충신장 꽃의 권·눈의 권》(1962년), 《두부집의 타츠》(1962년), 《비검》(1963년), 《사혼마도 대용권》(1964년), 《난폭한 고에몬》(1966년), 《가라쿠타》(1966년), 《사사키 코지로》(1967년), 《풍림화산》(1969년)를 감독했다. 1970년에는 《매복》을 감독하였다.
4. 평가 및 영향
이나가키 히로시의 영화 《무호마쓰의 일생》(《인력거꾼》, 1943)은 1989년 일본 평론가와 영화 제작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역대 일본 영화 8위로 선정되었다.[4] 컬러 리메이크작인 《인력거꾼(1958)은 그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 《사무라이 1: 미야모토 무사시(1954)는 명예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5. 일화
별명은 "이나칸"(이나가키 감독의 약자)이다. 1943년의 이나의 칸타로/『이나의 칸타로』일본어(타키자와 에이스케 감독)에서 하세가와 카즈오가 연기한 주인공 "이노의 칸타로"는 이 "이나칸"을 본뜬 가상의 인물이지만, 영화 공개 후 이나에는 "칸타로 탄생의 땅"이라고 칭하는 토지가 생겨 기념비까지 세워졌다.[8] 뿐만 아니라 "칸타로 떡"이나 "칸타로 차조밥"이 명물이 되었고, "칸타로 허리 걸터앉는 돌" 같은 것도 있어, 실제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사실 칸타로의 창작자는 미무라 신타로이다.[9]
다이에이의 나가타 마사카즈 사장은 이나가키와 마찬가지로 키가 작고, 로이드 안경에 콜먼 턱수염을 하고 있어서 나가타가 신참 시절에는 이나가키와 자주 혼동되었다. "자네가 얼굴은 더 팔렸군. 하지만 지켜보게. 곧 자네가 나로 오해받게 만들어 주겠어"라고 나가타에게 자주 들었다고 한다. 가끔 턱수염을 면도하기도 했는데, 주변에서는 항상 놀랐고, 나루세 미키오는 "자네는 변장이 가능하니 좋겠어"라며 놀렸다고 한다.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의 쿠로다 요시유키는 친척에 해당한다. "특수 촬영 영화"가 토호의 주특기라고 불리던 시대에, 쿠로다가 특수 촬영 감독을 맡은 『대마신(1966년)이 완성되었을 때, 자신이 토호에 적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호 녀석들, 깜짝 놀라겠지"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10]
이나가키는 『일륜』에서 조감독이 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포지션은 "서드"였다.[11] 쿠로다는 "일본의 촬영소에서 조감독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된 사람은 이나카키뿐"이라고 말했다.[12]
술에 관해서는 조금씩 마시는 "쪼끔 술"이었다고 한다.[13]
츠치야 요시오는 존경하는 영화감독으로 이나가키를 "선글라스에 턱수염을 한 멋쟁이 남자"라고 부르며 "영락없는 활동가다운 쾌활한 거물"이라고 평했다. 촬영소에서는 "구로사와 일가"라고 불린 구로사와 아키라의 구로사와 조에 대해, 이나가키 조는 "이나가키 일가"라고 불렸고, 구로사와의 "천황"에 대해 이나가키는 "거장"과 나란히 칭해졌다. 촬영 현장은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웠으며, 연기 지도로 유머가 섞이기도 하여 구로사와 조와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츠치야가 "거장"이라고 부르면, 상냥한 성격의 이나가키는 "뭔가"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여배우의 연기를 반드시 본방 직후에 "몇 점"이라고 채점했다. 또한 왠지 항상 츠치야에게만 "반츠마(반도 쓰마사부로)에게 지지 않도록 해"라고 바로 반츠마를 언급했다고 한다.[14]
6. 작품 목록
- 《무호마츠의 일생》 (1943년)
- 《미야모토 무사시》 (1954년)
- 《무호마츠의 일생》 (1958년)
- 《일본탄생》 (1959년)
- 《훈도시 의사》 (1960년)
- 《추신구라》 (1962년)
- 천하태평기 (1928년)
- 방랑삼매 (1928년)
- 속만화지옥 제2편 (1928년) ※병상에 누운 이타미 만사쿠를 대신하여 감독
- 그림책 무사 수행 (1929년)
- 눈꺼풀의 어머니 (1931년)
- 일본도 도효 입성 (1931년)
- 겐로쿠 13년 (1931년)
- 야타로 갓파 거래의 권·독보의 권 (1932년)
- 시대의 교아 (1932년)
- 후지의 흰 눈 (1935년)
- 세키노 야탓페 (1935년) ※야마나카 사다오와 공동 감독
- 대보살 고개 제1편 갑원일도류의 권 (1935년)
- 대보살 고개 스즈카 산의 권·미부 시마바라의 권 (1936년)
- 출세 태합기 (1938년)
- 지옥의 벌레 (1938년)
- 존왕 촌서숙 (1939년)
- 가사토 세이엔 (1939년) ※마키노 마사히로와 공동 감독
-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 ※닛카츠판
- *미야모토 무사시 초분의 사람들 (1940년)
- *미야모토 무사시 영달의 문 (1940년)
- *미야모토 무사시 검심일로 (1940년)
-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 (1942년)
- 바다를 건너는 제례 (1941년)
- 에도 최후의 날 (1941년)
- 무법송의 일생 (1943년)
- 늑대 연기는 상하이에 오르다 (1944년) ※일화 합작 영화
- 손을 잡는 아이들 (1948년)
- 잊혀진 아이들 (1949년)
- 나는 보디가드 (1950년)
- 사사키 코지로 (1950년)
- 번개 풀 (1951년)
- 전국 무뢰 (1952년)
- 오마츠리 한지로 (1953년)
- 미야모토 무사시 시리즈 ※도호판
- *미야모토 무사시 (1954년)
- *속 미야모토 무사시 이치조지 결투 (1955년)
- *결투 간류지마 (1956년)
- 야규 무예장 시리즈
- *야규 무예장 (1957년)
- *야규 무예장 쌍룡비검 (1958년)
- 무법송의 일생 (1958년)
- 어떤 검호의 생애 (1959년)
- 일본 탄생 (1959년)
- 훈도시 의사 (1960년)
- 오사카 성 이야기 (1961년)
- 겐과 부동명왕 (1961년)
- 노도적 바람 속을 달리다 (1961년)
- 충신장 꽃의 권·눈의 권 (1962년)
- 두부집의 타츠 (1962년)
- 비검 (1963년 8월 31일, 도호)
- 사혼마도 대용권 (1964년)
- 난폭한 고에몬 (1966년)
- 가라쿠타 (1966년)
- 사사키 코지로 (1967년)
- 풍림화산 (1969년)
- 매복 (1970년)
6. 1. 감독
이나가키 히로시는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1943년 《무호마츠의 일생》, 1954년 《미야모토 무사시》, 1959년 《일본탄생》, 1960년 《훈도시 의사》, 1962년 《추신구라》 등을 감독했다. 1928년에는 《덴카 타이헤이키》(天下太平記)와 《호로 잔마이》(放浪三昧)를 감독했다. 1958년에 감독한 《무호마츠의 일생》은 1943년에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1950년대에는 《무사도 삼부작》을 감독했는데, 《무사도 1: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1954), 《무사도 2: 이치조지 절의 결투(続宮本武蔵 一乗寺の決闘 Zoku Miyamoto Musashi: Ichijōji no kettō)》(1955), 《무사도 3: 간류지마의 결투(決闘巌流島 Kettō Ganryūjima)》(1956)로 구성된다.
그 외에도 《고용 검객(戦国無頼 Sengoku burai)》(1952), 《고독한 여정(旅路 Tabiji)》(1955), 《아라시(嵐)》(1956), 《야규 비전서(柳生武芸帳 Yagyū Bugeichō)》(1957), 《야규 비전서 2부(柳生武芸帳 双龍秘剣 Yagyū Bugeichō–Sōryū hiken)》(1958), 《어떤 검호의 생애(或る剣豪の生涯 Aru kengō no shōgai)》(1959), 《오사카성 이야기(大阪城物語 Ōsaka-jō monogatari)》(1961), 《비밀의 검(秘剣 Hiken)》(1963), 《와류(Shikonmado - Dai tatsumaki)》(1964), 《사사키 코지로—전편: 풍운 오사카성 후편: 결투 간류지마》(Sasaki Kojiro—Zenpen: Fuun Osaka-jo Kohen: Ketto Ganryushima)》(1967), 《무사의 깃발(風林火山 Fūrin Kazan)》(1969), 《매복(待ち伏せ)》(1970) 등을 감독했다.
6. 2. 각본
이나가키 히로시는 1943년 《무호마츠의 일생》의 각본을 썼으며, 1954년에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각본을 썼다. 1958년에는 《무호마츠의 일생》을 썼으며, 1959년에는 《일본탄생》의 각본을 썼다. 1960년에는 《훈도시 의사》, 1962년에는 《추신구라》의 각본을 썼다.6. 3. 프로듀서
이나가키 히로시는 영화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1943년 《무호마츠의 일생》을 시작으로, 1954년 《미야모토 무사시》, 1958년 《무호마츠의 일생》, 1959년 《일본탄생》, 1960년 《훈도시 의사》, 1962년 《추신구라》, 1969년 《신선조》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참조
[1]
웹사이트
Inagaki Hiroshi
http://kotobank.jp/w[...]
Kōdahsha
2011-11-15
[2]
웹사이트
Hiroshi Inagaki Retrospective at his Centenary
https://web.archive.[...]
National Film Center
2011-11-15
[3]
웹사이트
The Second Father – Hiroshi Inagaki's Rickshaw Man
https://offscreen.co[...]
[4]
서적
Nihon eiga besuto 150
Bungei Shunjū
[5]
서적
The Toho Studios Story: A History and Complete Filmography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08-05-16
[6]
서적
映画渡世・地の巻 マキノ雅弘伝
平凡社
[7]
뉴스
迫力にみつ 佐々木小次郎
朝日新聞
1951-10-26
[8]
간행물
大殺陣 チャンバラ映画特集
サンケイ出版
[9]
서적
ひげとちょんまげ
毎日新聞社
[10]
서적
大映特撮コレクション 大魔神
徳間書店
[11]
문서
チーフ助監督はカチンコを持たされるが、サードはほぼ雑用係である
[12]
서적
大魔神逆襲DVD
大映ビデオ
[13]
서적
私の映画人生60年 キャメラマン一代
PHP研究所
[14]
서적
黒澤さ〜ん!
新潮社
[15]
서적
東宝特撮映画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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