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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카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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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세가와 카즈오는 일본의 배우로, 1908년 교토에서 태어나 가부키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1927년 데뷔, 수려한 외모와 검술 실력으로 시대극 스타로 인기를 얻었다. 1937년 토호로 이적 후 피습 사건을 겪었으며, 이후 다이에이 영화에서 젠가타 헤이지 시리즈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3년 은퇴 후에는 연극과 TV 드라마에서 활동했으며, 1984년 사망 후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영화 《지옥문》, 《겐지 이야기》, 《어느 배우의 복수》 등이 있으며, 1964년 NHK 대하 드라마 《아코 로시》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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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카즈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7년 하세가와 카즈오
1937년 하세가와 카즈오
본명하세가와 카즈오
다른 이름하야시 쵸마루
하야시 쵸지로
출생일1908년 2월 27일
출생지교토부기이군호리우치촌 자 롯쿠지조 (현재 교토시후시미구모모야마)
사망일1984년 4월 6일
사망지도쿄도미나토구니시신바시 (도쿄지케이카이 의과대학 부속병원)
국적알 수 없음
신장162 cm
직업배우
활동 기간1927년 - 1983년
경력
활동 내용1916년: 나카무라 간지로 문하에 들어감
1927년: 쇼치쿠 입사, 영화 데뷔
1937년: 도호로 이적
1947년: "열 명의 깃발 모임"을 결성하여 신도호를 창립
1950년: 다이에이에 입사
1955년: 도호 가부키 첫 공연
가족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장남: 하야시 시게나리
장녀: 하세가와 기시코
차녀: 하세가와 기요
수상
수상 내역블루 리본상


국민영예상
대표 작품
영화설지녂 변화
도주로의 사랑
제니가타 헤이지 체포일기 시리즈
지옥문
지카마쓰 이야기
텔레비전아코 낭인
관련 링크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장곡천일부
키네노트키네노트 "하세가와 카즈오" 항목

2. 생애

하세가와 카즈오는 교토의 양조 가문에서 태어나 5세에 가족이 운영하는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섰다.[2] 1918년 나카무라 간지로 1세의 제자가 되어 간사이 지방에서 가부키 공연을 했다.[2] 1927년 쇼치쿠에 입사하여 하야시 조지로라는 이름으로 영화 ''치고노 겐포''에 출연하며 데뷔했다.[2] 수려한 외모와 우아한 검술로 시대극 스타로 떠올랐고, 쇼치쿠에서 11년간 1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함께 했다.[2] 1935년 ''유키노조 변화''는 큰 흥행을 기록했다.[2]

1937년 토호로 이적했으나, 같은 해 11월 불량배들에게 얼굴을 베이는 사건을 겪었다.[3] 이 사건은 쇼치쿠의 보복으로 추정되기도 했다.[3] 이후 본명으로 예명을 바꾸고,[2] 리 코란과 ''백란의 노래''(1939), ''지나의 밤''(1940) 등 "중국 배경의 국가 정책 영화"를 포함한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4] 1950년 다이에이 영화로 이적하여 제니가타 헤이지 시리즈에 출연했고,[2] ''겐지 이야기''(1951), ''지옥문''(1953), ''십자가의 연인들''(1954) 등 여러 고전 영화에도 출연했다. 1957년 다이에이 이사로 임명되었다.[2]

1963년 ''어느 배우의 복수''에 출연하고,[2] 같은 해 다이에이를 떠나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했다. 1964년 NHK 대하 드라마 ''아코 로시''에서 주연을 맡았고,[2] 1974년 다카라즈카 가극단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연출했다.[2]

1983년 당뇨병 악화로 입원, 1984년 4월 6일 두개 내 농양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 사후 국민영예상이 수여되었다. 술을 못 마시고 단 것을 좋아해 만년에 당뇨병으로 고생했다.[2]

2. 1. 가부키 배우 시절 (1908년 ~ 1927년)

1908년 (메이지 41년) 2월 27일 교토부 기이군 호리우치촌(현재의 교토시 후시미구 모모야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숙부(어머니의 남동생)이자 가업인 양조장을 계승하고 오테자라는 연극 극장을 경영했던 하세가와 소타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오테자에 드나들며 연극을 보고 자랐다.

1913년 (다이쇼 2년), 나카무라 츠루노스케 일좌의 『스가와라 덴주 테나라이카가미 테라코야』에 감기로 쓰러진 아역 배우의 대역으로 스가 슈사이를 연기하며 무대 데뷔를 했다.[10][11] 이듬해 1914년 (다이쇼 3년), 간사이 가부키의 나카무라 후쿠엔의 제자가 되어[12], '''나카무라 카즈오'''를 칭했다. 전국을 순회하다 1917년 (다이쇼 6년), 후쿠엔 일좌와 함께 처음으로 도쿄로 올라가 아사쿠사 아즈마자에 출연, '''아라시 카츠오'''로 개명했다.[13]

1918년 (다이쇼 7년), 초대 나카무라 간지로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장남 하야시 쵸사부로에게 맡겨져, '''하야시 쵸마루'''를 칭했다.[13] 쵸마루는 온나가타로서 인기를 얻었고, 간지로로부터 친자식처럼 귀여움을 받았다.[9]

1926년 (다이쇼 15년), 오사카 쇼치쿠좌 개장 무대에 출연하고 있던 중, 관극을 온 오사카 쇼치쿠 사장 시라이 마츠지로와 2대 사네카와 엔쟈쿠에게 그 아름다운 용모를 인정받았다.

시대극 6대 스타 중 하세가와는 가장 젊었다. 원래 여행극단의 아역 출신으로, 오사카의 청년 가부키에서는 여성역을 했다. 하세가와는 쇼와 2년 영화계 입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활동 사진을 좋아했습니다. 반츠마를 좋아했고, 열네다섯 살 때였는데, 활동 사진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치카와 도도노스케가 나왔습니다. 도도노스케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이치카와 우타에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도도노스케는 여성 팬들에게서 칼싸움 스타로서는 이례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하세가와의 여성 인기는 이에 못지않았고, 능가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세가와는 문벌의 배경이 없었기에 출세의 전망이 없었고, 연극계에서 젊은 영화계로 뛰어든 것은 반도 츠마사부로, 이치카와 우타에몬, 가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간주로 등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화계는 가부키 세계에서는 "진흙 연극 (진흙 위에서 하는 연극)"이라고 불리며 경시되기도 했다.

: "영화는 재미있었다기보다는 실패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영화계 입문은, 그만두라고 한 쪽, 제대로 하라고 응원해 준 쪽이 반반이었습니다. 가끔 연극 분장실에 가면, 아, 흙 냄새가 난다, 라고 생각했더니 활동 배우가 왔다고, 그런 식으로 말했었습니다. 활동 배우, 흙 위에서 연극을 한다고, 땅바닥 배우라고 불렸었죠[23]"

2. 2. 영화계 진출과 톱스타 등극 (1927년 ~ 1937년)

1927년(쇼와 2년), 쇼치쿠 시모가모 촬영소에 입사하여 이누즈카 미노루 감독의 『어린이 검법』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2] 스승으로부터 받은 '''하야시 조지로'''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당시 시대극 영화 제작에 주력하던 쇼치쿠는 하야시를 기대되는 신인 스타로 보고 막대한 선전비를 들여 홍보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야시는 뛰어난 미모와 우아한 검술[2], 그리고 젊은 시대극 스타를 갈망하던 쇼치쿠의 전폭적인 홍보에 힘입어 순식간에 스타 배우로 떠올랐다.

같은 해, 주연 2번째 작품으로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의 『아가씨 키치사』에 출연했다. 이후 키누가사와는 다이에이 시대까지 약 50편의 작품에서 콤비를 이루었다. 쇼치쿠 시절에는 『도깨비 아자미』, 『두 개의 등불』, 『고이마의 긴페이』 등 키누가사 감독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미남 검객 스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35년 (쇼와 10년), 키누가사 감독의 『유키노조 변화』가 개봉되면서 조지로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작품에서 조지로는 3가지 역할(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여장 가부키 배우로 변신하는 검호 유키노조, 그를 돕는 의적 아쿠타로, 유키노조의 어머니)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주제가 "흐르는 눈물이 연극이라면..."도 유행했다.[14]

시대극 6대 스타 중 가장 젊었던 하세가와는 원래 여행극단의 아역 출신으로, 오사카의 청년 가부키에서는 여성역을 맡았다. 이치카와 우타에몬도 비슷한 경험을 언급한 바 있다. 도도노스케는 여성 팬들에게서 칼싸움 스타로서는 드물게 인기를 얻었지만, 하세가와의 여성 팬덤은 그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능가했다.

하세가와는 집안 배경이 없어 출세가 어려웠기에, 연극계에서 젊은 영화계로 뛰어든 것은 반도 츠마사부로, 이치카와 우타에몬, 가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간주로 등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화계는 가부키 세계에서 "진흙 연극"이라 불리며 무시당하기도 했다.

쇼치쿠 시절 하세가와(당시 하야시 조지로)는 『치고의 검법』으로 데뷔한 후, 미모로 인기를 얻어 미검사 스타로 불렸다. 여장 출신이라 여성 역할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전시 중에는 "군국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국민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미모는 평생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고, 시대극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8년 정월, 데뷔 10개월 만에 인사를 위해 상경했을 때, 도쿄역 앞에는 1만 명 이상의 팬(주로 여성)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몰려든 팬들은 눈사태처럼 밀려들어 엉키고, 수많은 깃발이 펄럭였으며, 흔들리는 손수건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보여주었다. 조지로의 촉촉한 눈빛은 "눈은 천 냥"이라고 불렸고,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시대극 스타가 여성의 아이돌이 된 것은 이치카와 모모노스케 이후 처음이었다. 데뷔 해에만 18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겨우 9일 뿐이었다. 노동기준법이 없던 시절이었다"라며 웃었다.[9]

여장 출신인 조지로는 여성 팬들의 인기에 부응하며 전국 여성층의 아이돌이 되었다. 챔버라 스타와는 다른 세계에서 조지로 붐이 일어났다. 여장 출신 이노키 사다노스케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지로를 지도했다. 야쿠자, 영주, 검사 등 어떤 역할을 맡아도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극장에서는 "조지로!", "내가 여기 있어!"와 같은 열광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고, 함께 출연한 여배우에게 협박장이 보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세가와의 액션은 "위를 보며 미소짓고, 칼싸움조차 요염하다"고 평가받았고, 촉촉한 눈빛은 "눈은 천 냥"이라고 불렸다. 다른 검호 스타와는 다른 하세가와의 액션은 "이치카와 우타에몬을 소작(所作事)이라고 한다면, '검극 리뷰'"라고 평가받았다.[9]

이누즈카 미노루와 함께 데뷔 시절 하세가와의 콤비로 "신인 삼인조"라 불린 츠부라야 에이지는 하세가와의 눈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세가와 군의 눈은 현재까지 정평이 나 있지만, 단순히 타고난 것만이 아니라, 눈을 다루는 법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조명에 가장 효과적인 위치, 얼굴 각도, 시선의 초점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은 그의 남다른 연구 성과이다."[24]

쇼와 초기, 활동 사진 배우는 흰 칠을 한 가부키 스타일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하세가와는 츠부라야와 함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음영 촬영법을 시도했다. 이는 당시 영화계에서 금기시되던 기법이었고, 츠부라야는 이 때문에 예산과 설비가 부족한 "B급 반"으로 좌천되었다.[25] 하세가와는 츠부라야에게 "카메라를 배웠다"고 말하며, 훗날 츠부라야와 함께 시도했던 다양한 촬영 기법을 그리워하고, 친분이 두터웠던 그를 추억했다.[26]

고쿠 히데오에 따르면, 베이는 장면에서 "손 업"을 가장 잘하는 검극 배우는 하세가와였다고 한다. 하세가와 주연 영화에서 베이는 상대의 손 업을 찍으려 할 때, 하세가와가 직접 "왁"하고 손 연기를 해 촬영을 도왔다고 한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하세가와의 화려한 액션에 대해 "하야시 조지로라는 사람은 여장이었지만, 영화에서 미검사 역으로 챔버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춤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21]

1937년, 하세가와는 쇼치쿠에서 토호로 이적을 결정했고, 폭한에게 얼굴을 베이는 테러 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하세가와는 이 사건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토호의 키누타 촬영소는 업계 최신 촬영 설비를 갖춘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하세가와는 상경할 때마다 이러한 기재들을 부러워하며 쇼치쿠 시모가모에도 새 카메라를 도입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세가와는 "배우에게 가장 큰 소망은 좋은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부키 세계의 금전적인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토호의 새로운 촬영 기재와 시스템, 매력적인 기획은 하세가와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적을 결심하게 했다.

그러나 이 결심은 쇼치쿠의 심기를 건드렸을 뿐 아니라 언론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신문들은 "은혜를 잊은 자"라며 일제히 하세가와를 비난했다. 그러던 중 하세가와는 "미남 배우의 생명"인 얼굴을 베였다.[23]

하야시 조지로를 쇼치쿠 시모가모 촬영소에서 빼낸 토호는 『겐쿠로 요시츠네』를 빨리 촬영하기 위해, 합병한 지 얼마 안 된 교토의 J.O.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쇼치쿠의 지역인 교토에서 촬영하는 것은 매우 자극적이었고, 토호는 조지로의 호위를 위해 지역 협객 사사이 일가를 배치했다. 그러나 이 호위가 오히려 테러 사건을 유발했다. 사건 다음 날부터 경찰은 불량 소년들을 잡아들였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 범인인 마스다 사부로라는 촬영소 출입 깡패 소년을 찾아낸 것은 마키노 마사히로였고, 실제로 얼굴을 벤 것은 마스다의 친척인 킨이라는 남자였다. 마키노는 마스다를 설득해 일주일의 유예를 주고 킨과 함께 우즈마사 경찰서에 출두시켰다. 그 사이 경찰의 범인 수색은 계속되었고,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당시 신흥 시네마 상무이사였던 나가타 마사카즈[27]도 있었다. 마키노에 따르면 이케나가 히로히사, 와타나베 구니오 감독, 호위를 맡았던 사사이조의 사사이 세이이치(마키노 마사히로의 의붓형)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사이는 마키노의 질문에 이 사건 배후에 스타를 둘러싼 영화사의 추악한 내막이 있음을 암시했다.

긴급 입원한 하야시 조지로는 자중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얼굴의 흉터를 성형하지 않았다. 법원은 "배우의 얼굴은 생명"이라며 실행범에게 2년이라는 이례적인 형기를 선고했다.[28]

2. 3. 도호 이적과 피습 사건, 그리고 재기 (1937년 ~ 1949년)

1937년(쇼와 12년), 쇼치쿠에서 도호로 이적하면서 "은혜를 잊은 자"라는 맹렬한 비난을 언론으로부터 받았다.[15] 이적 배경에는 하세가와가 최신 설비에 매료된 것과, 쇼치쿠의 처우에 분개한 어머니가 하세가와와 상의하지 않고 도호와의 계약서에 날인했다는 사정도 전해진다.[15] 당시 도호 촬영소 소장이었던 이마이 리스케는 이적 이유로 나카무라 간지로의 사망 후, 일가에 대한 쇼치쿠의 처사가 냉담했던 점을 들었으며, 월급이 쇼치쿠 시대보다 500JPY 싸진 것에 언급하며 금전적인 이유가 아님을 시사했다.[16]

같은 해 11월 12일, 『겐쿠로 요시츠네』(와타나베 구니오 감독) 촬영 중, 촬영소에서 숙소로 이동하던 중[17] "쇼치쿠에 은혜를 잊은 부도덕한 자"라는 명분으로, 촬영소 출입 불량 소년인 마스다 사부로와 카네라는 두 사람에게 습격당해 얼굴을 베여 왼쪽 뺨을 관통하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촬영 속행은 불가능해졌고, 영화는 중단되었다. "하야시 조지로 폭한에게 얼굴을 베이다!"라는 신문 기사에 교토는 발칵 뒤집혔고, 이 "미남 영화 스타의 수난"은 일본 전국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쇼치쿠의 의향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사건 후, 하세가와는 부상을 계기로 예명을 본명인 '''하세가와 카즈오'''로 바꾸고 싶다고 도호에 신청, 1938년(쇼와 13년) 3월 4일, 도호 본사가 이를 수리했다.[18] 이후 『후지주로의 사랑』(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으로 은막에 복귀했다. 독자적으로 고안한 메이크업으로 상처를 지우고, 재기 불능이라고까지 했던 역경을 이겨내고 당당히 미남 스타로 부활했다. 또한, 『쓰루하치 쓰루지로』 등에서는 야마다 이스즈와 콤비를 이루어 히트를 쳤다. 그 외, 이 향란과 공연한 『백란의 노래』(와타나베 구니오 감독), 『지나의 밤』(후시미 오사무 감독) 등 현대극에 출연했지만, 시대극에서는 이렇다 할 결정작은 적었다.[19]

1942년 (쇼와 17년), 연극의 실연을 위해 야마다 이스즈 등과 신연기좌를 결성했다.

1944년 (쇼와 19년), 소집되어 돗토리 연대에 입대했다. 후에 제대하여, 1945년 (쇼와 20년) 종전까지 위문 공연을 각지에서 했다.

1947년 (쇼와 22년), 도호 쟁의로 도호가 기능 정지되자, 하세가와는 조합 측에도 경영자 측에도 서지 않고, 오코치 덴지로, 후지타 스스무, 구로카와 야타로, 다카미네 히데코, 이리에 다카코, 하나이 란코, 야마다 이스즈, 하라 세츠코, 야마네 스즈코와 함께 "십인의 깃발회"를 결성하여 니치에이엔 도호 지부를 탈퇴하고, 3월 25일에 신도호의 설립에 참여했다.

1948년 (쇼와 23년), 신연기좌를 주식회사화하여 스스로 그 대표가 되었다. 영화 제작도 실시하여 『고바자메』, 『유령 새벽에 죽다』 등을 제작했다. 다음 해 1949년 (쇼와 24년), 신도호의 『제니가타 헤이지 포물록 평지 808정』(사에키 키요시 감독)에 주연하여, 하세가와의 특기인 제니가타 헤이지를 처음 연기했다.

2. 4. 다이에이 시대와 영화계 은퇴 (1950년 ~ 1963년)

1950년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에 중역으로 영입되었다.[2] 이듬해 1951년에 공개된 《제니가타 헤이지》 (모리 잇세이 감독)는 이후 《제니가타 헤이지 포물록》 시리즈로 이어져 다이에이에서 총 17편의 작품이 제작되었고, 회사를 대표하는 인기 시리즈 중 하나가 되었다.[19]

1953년에는 이스트만 컬러 첫 작품인 기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에 주연했다.[19] 이 작품은 칸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19]

1963년 《에도 무정》(니시야마 마사테루 감독)을 마지막으로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화계에서 은퇴했다.[19]

2. 5. 연극 및 TV 드라마 활동 (1964년 ~ 1984년)

영화계를 떠난 후, 하세가와 카즈오는 도호 가부키 등 연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64년(쇼와 39년) NHK 대하 드라마 《아코 로시》에서 오이시 쿠라노스케 역으로 주연을 맡아,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2] 1974년(쇼와 49년)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베르사유의 장미》 초연 연출을 맡아 큰 화제를 모았다.[2]

1955년(쇼와 30년) 7월부터 도호 가부키를 주재하여,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을 중심으로 신가부키자, 미소노자, 주니치 극장에서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 2회 정도 공연했으며, 2대 나카무라 센쟈쿠(4대 사카타 토쥬로),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6대 나카무라 우타에몬 등 호화로운 게스트가 출연하고, 화려한 레뷰 『춘하추동』 등을 공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1983년(쇼와 58년) 도호 가부키 정월 공연 『한시치 포물고』가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7]

다음은 하세가와 카즈오의 주요 연극 출연작이다.

연도제목극장배역
1962년남자의 화도오사카 신가부키좌카가 코가에몬
1982년토호 가부키 신춘 특별 공연·오이시 쿠라노스케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오이시 쿠라노스케


2. 6. 사망 (1984년)

1983년, 당뇨병 악화로 입원했다. 1984년 4월 6일, 두개 내 농양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였다. 사후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그는 술을 체질적으로 마시지 못했고, 단 것을 매우 좋아했기에 만년에 당뇨병 등의 만성병으로 고생했다.[2]

3. 주요 출연작

1953년 영화 《지옥문》에서 쿄 마치코(오른쪽)와


하세가와 카즈오는 1927년 쇼치쿠에 입사하여 영화 배우로 데뷔한 이후, 시대극 스타로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2] 1937년 토호로 이적했고, 1950년 다이에이 영화로 이적하여 인기 시리즈인 제니가타 헤이지에 출연했다.[2] 1964년에는 NHK 대하 드라마 ''아코 로시''의 주연을 맡는 등,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

3. 1. 영화

제니가타 헤이지(1951년)


하세가와 카즈오는 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다음은 그가 출연한 주요 영화들이다.

연도제목역할비고
1951겐지 이야기히카루 겐지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
1953지옥문엔도 모리토키누가사 테이노스케 감독
1954십자가의 연인들모헤이미조구치 겐지 감독
1963어느 배우의 복수나카무라 유키노조 / 야미타로이치카와 콘 감독, 300번째 영화
1951~1961제니가타 헤이지 시리즈제니가타 헤이지인기 시리즈



1950년 다이에이 영화로 이적한 하세가와는 인기 시리즈인 제니가타 헤이지에 계속 출연했다.[2] 그는 또한 요시무라 코자부로의 겐지 이야기(1951), 키누가사 테이노스케의 지옥문(1953), 미조구치 겐지의 십자가의 연인들(1954)을 포함한 많은 고전 영화에도 출연했다.[2] 1963년, 하세가와는 이치카와 콘이 감독한 어느 배우의 복수(유키노조 헨게의 새로운 버전)에 출연했다.[2]

3. 2. 드라마

1964년 NHK NHK 대하 드라마인 아코 로시에 출연했다.[30]

4. 수상

연도
1953년블루리본상 대중상[2]
1957년기쿠치 칸 상[2]
1965년자수포장[2]
1978년훈3등서보장[2]
1980년기쿠타 카즈오 연극상 연극대상
1981년마츠오 예능상 특별대상
1984년국민영예상 (사후 추증)[2]


5. 논란 및 비판

하세가와 카즈오는 1937년 토호로 이적한 후, 같은 해 11월 11일에 불량배들에게 공격받아 얼굴에 면도칼로 상처를 입었다. 역사학자 미야오 다이스케는 이를 두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하세가와(당시 예명 하야시 조지)의 배신에 대한 쇼치쿠의 보복 조치로 널리 추정되었다"라고 언급했다.[3] 하세가와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 본명인 하세가와 카즈오로 예명을 바꾸었다.[2] 이후 야마구치 요시코(이향란)와 함께 《백란의 노래》(1939), 《지나의 밤》(1940) 등 "국가 정책 영화"에 출연했다.[4]

5. 1. 일제강점기 선전 영화 출연

야마구치 요시코(이향란)와 함께 출연한 《백란의 노래》, 《지나의 밤》은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왜곡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4] 이들 영화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선전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하세가와 카즈오는 이러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 행위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5. 2. 피습 사건 배후 논란

1937년 11월 12일, 하세가와 카즈오는 영화 촬영소에서 숙소로 이동하던 중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17] 이들은 "쇼치쿠에 은혜를 잊은 부도덕한 자"라는 명분으로 하세가와를 공격했으며, 이 사건은 "미남 영화 스타의 수난"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소란을 일으켰다.[17]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하세가와의 이적에 불만을 품은 쇼치쿠의 의향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3] 당시 도호 촬영소 소장이었던 이마이 리스케는 하세가와가 쇼치쿠를 떠난 이유로 나카무라 간지로 사망 후 일가에 대한 쇼치쿠의 냉담한 처사를 언급하며, 금전적인 이유가 아님을 시사했다.[16] 하세가와가 최신 설비에 매료된 것과 쇼치쿠의 처우에 분개한 어머니가 하세가와와 상의 없이 도호와 계약을 맺은 것도 이적 배경으로 전해진다.[15]

역사가 미야오 다이스케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이 폭력적인 사건은 하야시(하세가와 카즈오)의 소위 배신에 대한 쇼치쿠의 보복 조치로 널리 추정되었다"라고 언급했다.[3]

6. 한국과의 관계

하세가와 카즈오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출연하거나, 조선인 배우와 함께 연기하는 등 한국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다. 특히, 리 코란과 함께 출연한 《백란의 노래》(白蘭の歌|백란의 노래일본어, 1939)와 《지나의 밤》(支那の夜|지나의 밤일본어, 1940)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미화하고, 조선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4] 이러한 영화에 출연한 하세가와 카즈오의 행적은 한국인들에게 비판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하세가와 카즈오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나 역사 인식을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영화 제작 환경 등을 고려할 때, 배우 개인의 선택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세가와 카즈오의 작품과 행적을 평가할 때는 이러한 복합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단순한 비난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jmdb.ne.j[...] 2009-05-29
[2] 웹사이트 Hasegawa Kazuo https://kotobank.jp/[...] Asahi Shinbun 2018-03-01
[3] 서적 The Aesthetics of Shadow: Lighting and Japanese Cinema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2013
[4] 서적 The Japanese Film: Art and Industr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2
[5] 웹사이트 大江山酒天童子 https://eiga.com/mov[...] 2021-07-19
[6] 웹사이트 長谷川一夫 http://www.kinenote.[...]
[7] 웹사이트 史上初の大調査 著名人100人が最後に頼った病院 あなたの病院選びは間違っていませんか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11-08-17
[8] 간행물 1955年増刊「日本映画大鑑・映画人篇」
[9] 간행물 『週刊サンケイ臨時増刊 大殺陣 チャンバラ映画特集』 サンケイ出版
[10] 서적 長谷川 1984
[11] 간행물 キネ旬 1979
[12] 간행물 『演劇界』第23巻、第7〜12号
[13] 서적 『舞台・銀幕六十年』 日本経済新聞社
[14] 서적 『あゝ活動大写真 グラフ日本映画史 戦前篇』 朝日新聞社
[15] 서적 『夢は大空を駆けめぐる 恩師・円谷英二伝』 角川書店
[16] 뉴스 今井東宝京都撮影所長、真相を明かす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7-11-11
[17] 뉴스 京都で襲われ、顔面を切られる 1937-11-13
[18] 뉴스 芸名を返上、本名の長谷川一夫に 1938-03-06
[19] 서적 『あゝ活動大写真 グラフ日本映画史 戦前篇』 朝日新聞社
[20] 서적 後援会長は三ツ澤正治(マルベル堂社長)。限定2000部で、作品年譜ほか多くの後援者・知人が寄稿。
[21] 서적 『週刊サンケイ臨時増刊 大殺陣 チャンバラ映画特集』 サンケイ出版
[22] 서적 『夢は大空を駆けめぐる 恩師・円谷英二伝』 角川書店
[23] 서적 『週刊サンケイ臨時増刊 大殺陣 チャンバラ映画特集』、長谷川一夫インタビュー「歩き続ける華麗な“花道”」 サンケイ出版
[24] 서적 『キネマ旬報日本映画作品大鑑』 1960-11
[25] 서적 『ひげとちょんまげ』 毎日新聞社
[26] 서적 『円谷英二 日本映画界に残した遺産』「デビューの仲間円谷英二」 小学館
[27] 문서 かつて千本組の侠客だった。
[28] 서적 『映画渡世・天の巻 マキノ雅弘自伝』 平凡社
[29] 서적 『日本映画の若き日々』 毎日新聞社
[30] 웹사이트 番組エピソード 大河ドラマ『赤穂浪士』 https://www2.nhk.or.[...]
[31] 뉴스 本当にあった俳優「顔切り事件」がモチーフ 『シャブ極道』監督最新作に称賛の嵐 https://www.cinemato[...] 2016-09-04
[32] 웹인용 長谷川一夫 http://www.jmdb.ne.j[...] 日本映画データベース 201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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