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바 마사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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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나바 마사쿠니는 1834년 니혼마츠 번에서 태어나 요도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막부 관료로서 교토 쇼시다이, 로주 등을 역임했다. 조슈 정벌과 도바-후시미 전투를 거치며 신정부에 공순하는 입장을 보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신토 정비에 힘썼다. 판적봉환으로 요도번 지사가 되었고, 폐번치현 이후에는 신토 사무국 관장을 역임하며 신토 발전에 기여했다.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887년 정사위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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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마사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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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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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자작 |
이름 | 이나바 마사쿠니 |
로마자 표기 | Inaba Masakuni |
가명 | 나가노스케(통칭) |
호 | 도카쿠(東閣) |
출생 | 1834년 7월 2일 |
사망 | 1898년 7월 15일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미나미아오야마의 아오야마 영원 |
국적 | 일본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나가토노카미, 종4위 하, 시종, 미노노카미, 민부대보, 정4위 |
막부 | 에도 막부 → 메이지 정부 |
번 | 야마시로요도번 번주 → 요도 번지사 |
가문 | |
씨족 | 단바씨 → 이나바씨 |
아버지 | 니와 나가토미 |
양아버지 | 이나바 마사요시 |
어머니 | 고미씨(五味氏)의 딸 |
배우자 | 정실: 사카이 다다아키의 딸 |
형제자매 | 니와 나가쿠니, 미즈노 가쓰토모, 구니히메, 마사히메 |
자녀 | 양자: 이나바 마사나오 |
요도 번주 | |
대수 | 12대 요도 번주 |
재임 기간 | 1848년 ~ 1871년 |
이전 | 이나바 마사요시 |
이후 | 해당 없음 |
2. 생애
이나바 마사쿠니는 1834년 무쓰국 니혼마쓰번주 니와 나가토미의 7남으로 태어났다. 후계자가 없었던 요도번주 이나바 마사요시의 양자가 되어 요도번을 상속받았다.[2]
이나바 가문 분가는 미노국에서 기원했으며, 간무 천황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마사쿠니는 1588년에 창설된 이나바 가문의 분가에 속했다. 이 분가는 이나바 마사나리의 후손이며, 마사나리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서 활약했다. 마사나리는 1619년 에치고국 이토이가와 번(25,000 ''코쿠'')을 하사받았고, 1627년에는 시모쓰케국 모오카 번(65,000 ''코쿠'')으로 영지가 이전되었다. 마사나리의 후손들은 1632년부터 1685년까지 사가미국 오다와라 번(105,000 ''코쿠''), 1685년부터 1701년까지 에치고국 다카타 번, 1701년부터 1723년까지 시모사국 사쿠라 번에 차례로 거주했다.[3]
마사쿠니의 상속자들과 이나바 마사나리의 다른 후손들은 1723년부터 1868년까지 야마시로국 요도 번(115,000 ''코쿠'')에 정착했다. 이 씨족의 수장은 메이지 시대에 "자작"으로 귀족이 되었다.[3]
마사쿠니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1863년 7월 26일부터 1864년 5월 16일까지 교토 쇼시다이를 역임했다.[1] 도바 후시미 전투 당시 그는 친 막부 세력의 요도 진입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삿초 동맹에 유리하게 전황을 기울게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자작이 되었으며, 신토 신관이자 정부 관료로 활동했다.
2. 1. 요도번 통치
요도 번에서는 전통적으로 죠다이가로 가문인 타나베 가문이 번정을 주도했다.[1] 마사쿠니 시대에는 타나베 곤다유(후의 우쿄)가 번정을 이끌었다.[1] 마사쿠니와 타나베 가문은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였는데, 마사쿠니는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반면 타나베 가문은 온건파였다.[1] 이러한 갈등은 번주 집무 수행 과정에서도 나타났으며, 당시 사료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1]2. 2. 막부 관료로서의 활동
이나바 가문 요도번은 키나이 지역을 통제하는 중요한 번이었기에, 이나바 마사쿠니는 막부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아이즈번・쿠와나 번과 사쓰마번이 동맹을 맺었을 무렵 교토쇼시다이에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과 정무를 담당했다.[1] 1863년 7월 26일부터 1864년 5월 16일까지 교토 쇼시다이를 지냈다. 이후 로주에 취임하여 막부의 핵심 정책 결정에 참여했으며, 정사총재(政事総裁) 직책을 맡아 에도 번저택에서 활동했다.막부에서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1차・2차 쵸슈 정벌에 요도번 병사를 파병하는 것을 결정했지만, 타나베 곤다유의 강경한 반대로 단념해야 했다. 좌막급진파였던 마사쿠니와 온건파였던 번 수뇌부의 대립은 표면화되어 갔다. 토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요도성에서 출병했지만, 후퇴하는 구 막부군의 입성을 거부했다. 번 수뇌부와 신정부의 밀약으로, 신정부에 항복한 것이었다. 죠다이가로 타나베 곤다유는 토바・후시미 전투 때에는 "에도에 체재"하고 있었다. 막부군의 입성을 거부한 것은 요도번 루스이역인 타나베의 동생 하루노스케 (治之助) (후에 막부군을 몇 명 넣었다는 이유로 할복)였다. 이때 에도에서 쇼군의 루스이정권 수뇌로 활동하던 마사쿠니는 자신의 번이 자신의 결정 없이 도쿠가와 가문에 반기를 드는 사태를 맞닥뜨리게 된 복잡한 입장에 처해, 게이오 4년 (1868년) 2월에 로주직을 사퇴, 조정의 상락 요청에 응하게 된다. 그러나, 미시마 역에서 비밀리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로부터 신정부에 대한 탄원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오다와라의 쇼타이지에서 근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후, 신정부의 허가로 마사쿠니는 교토로 보내졌으나, 윤4월 5일에 번에 있던 가신들의 일에 대한 공적으로 무마되었다.[5] 요도번은 그 후도 신정부에 대한 공순의 자세를 관철해, 마사쿠니 등 좌막급진파가 분열되는 일도 없었다.
2. 3. 조슈 정벌과 번 내부 갈등
마사쿠니는 에도 막부에서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제1차・제2차 조슈 정벌에 요도 번 병력을 파병하려 했다. 하지만 번정을 주도하던 타나베 곤다유의 강력한 반대로 파병을 단념해야 했다. 이는 좌막 급진파였던 마사쿠니와 온건파였던 번 수뇌부 간의 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었다.[5]2. 4. 도바-후시미 전투와 입장 변화
1868년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요도번은 막부군에 가담해 참전했지만, 패배 후 후퇴하는 막부군의 요도성 입성을 거부했다. 이는 번 수뇌부와 신정부 간의 밀약에 따른 것으로, 신정부에 대한 공순(恭順)을 의미했다.[5] 당시 에도에서 막부 수뇌부로 활동하던 이나바 마사쿠니는 자신의 번이 독단적으로 도쿠가와 가문에 반기를 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사쿠니는 로주직을 사임하고 조정의 상락(上洛) 요청에 응했으나, 미시마 역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정부에 대한 탄원서를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오다와라의 쇼타이지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5] 이후 신정부의 허가를 받아 교토로 이송되었으나, 번 내 가신들의 공적으로 처벌을 면했다.[5] 요도번은 이후에도 신정부에 대한 공순 자세를 유지했고, 마사쿠니를 비롯한 좌막 급진파가 분열되는 일은 없었다.2. 5. 메이지 시대 활동
1869년 판적봉환으로 요도번 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 히라타 가네타네에게 입문하여 신토에 심취했다. 미시마 신사 구지와 대교정(大教正) 등을 역임하며 메이지 초기 신토 정비 및 발전에 기여했다. 1875년 신토사무국(神道事務局)을 설립하고 관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신토사무국이 신토본국(神道本局)으로 개편되자 초대 관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요환야화(妖幻夜話)』, 『동각유초(東閣遺草)』 등이 있다.[1]3. 가계
후다이 이나바 씨족은 미노국에서 기원했다.[2] 이들은 고노 미치타카(1374년 사망)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3] 고노 미치타카는 간무 천황(736–805)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 마사쿠니는 1588년에 창설된 이나바 가문의 분가에 속했다.[2] 이 분가는 이나바 마사나리의 후손이며, 마사나리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서 활약했다.[3]
4. 관직 이력
- 1848년(가에이 원년) 11월 24일, 가독 상속.[1]
- 1848년(가에이 원년) 12월 18일, 종5위하 나가토노카미에 임명됨.[1]
- 1854년(안세이 원년) 10월 9일, 소샤반 취임. 이전에는 가리노마즈메.[1]
- 1863년(분큐 3년) 6월 11일, 교토쇼시다이로 이동.[1] 7월 4일, 종4위하로 승진하고, 시종으로 전임. 나가토노카미 겸임.[1]
- 1864년(겐지 원년) 4월 11일, 로주로 이동. 나가토노카미에서 미노노카미로 겸임이 바뀜. 11월 15일, 미노노카미에서 민부대보로 겸임 (같은 해 10월 13일, 로주상좌에 취임하면서 혼다 타다모토 (미노노카미)가 취임하면서 겸임 바뀜).[1]
- 1865년 (겐지 2년) 4월 11일, 로주 사임. 가리노마즈메가 됨.[1]
- 1866년(게이오 2년) 4월 13일, 로주 재임. 민부대보에서 미노노카미로 겸임 교체. (이미 혼다 타다모토가 로주 직위 해제했으므로, 옛 미노노카미에게 겸임). 10월 11일, 외국어용취급(外国御用取扱) 겸직.[1]
- 1867년 (게이오 3년) 5월 6일, 외국어용취급을 그만두고, 내국사무총재(内国事務総裁) 겸직.[1]
- 1868년 (게이오 4년) 1월 23일, 내국사무총재 겸 어역 사임. 2월 21일, 로주어역 사임.[1]
- 1869년(메이지 2년) 6월 18일, 요도번지사 취임.[1]
- 1871년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지번사 퇴임.[1]
- 1874년 (메이지 7년) 11월 ,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다이몬 진좌의 시바다이 신궁 사관 취임.[1]
- 1876년 (메이지 9년) 1월 , 신토대교원사무국 제3부관장 겸직.[1]
- 1878년 (메이지 11년) 5월 , 시바다이 신궁 사관 사임.[1]
- 1884년 (메이지 17년) 7월 8일, 자작 작위를 받음.[1]
- 1885년 (메이지 18년) , 신토사무국 초대 관장 취임.[1]
- 1886년 (메이지 19년) , 신토사무국에서 신토본국으로 개칭, 계속해서 관장을 맡음.[1]
5. 작위
6. 등장 작품
- 2001년 드라마 구라마 텐구 (금요엔터테인먼트) - 이시바시 렌지
참조
[1]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2008-04-11
[2]
서적
Ancien Japon
https://books.google[...]
1888
[3]
서적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4]
웹사이트
Inaba at Ancestry.com
http://www.ancestry.[...]
[5]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2011
[6]
간행물
官報
188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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