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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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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전충은 당나라 말기, 오대 십국 시대 후량의 초대 황제이다. 황소의 난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당나라에 귀순하여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당나라 실권을 장악하고 소종을 살해한 뒤,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907년 후량을 건국했다. 그는 변주를 수도로 삼았으나, 말년에는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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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주온 (양 태조)
주온 (양 태조)
주황(朱晃)
원래 이름주온(朱溫), 주전충(朱全忠)
묘호태조(太祖)
시호신무원성효황제(神武元聖孝皇帝)
생애
출생일852년 12월 5일
출생지당나라 송주 당산현 (현재의 안후이성 쑤저우시 탕산현)
사망일912년 7월 18일 (59세)
사망지카이펑
능묘선릉(宣陵, 현재의 허난성 이촨현)
가족
부친주성(朱誠)
모친왕씨(王氏)
황후원정장황후(元貞張皇后) 장혜(張惠, 추존)
정치
재위 기간907년 6월 1일 ~ 912년 7월 18일
즉위개평 원년(907년) 음력 4월 18일
전임자(후량 건국)
후임자폐제 주우규(朱友珪)
연호개평(開平): 907년 ~ 910년
건화(乾化): 911년 ~ 912년
관직
양왕901년 2월 1일 ~ 907년 6월 1일
동평군왕889년 ~ 901년
기타 정보
묘호 (한자)太祖
시호 (한자)神武元聖孝皇帝

2. 생애

주전충(朱全忠)의 본명은 주온(朱溫)으로, 송주 탕산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5] 그는 농사일보다 무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형 주존(朱存)과 함께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에 가담하여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9][2]

황소군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882년경 전세가 불리해지자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당 조정은 그의 귀순을 환영하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선무군 절도사로 임명하여 변주(현 개봉)를 다스리게 했다.[10] 이후 주전충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경쟁자인 이극용과의 세력 다툼에서 점차 우위를 점하며 당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권력을 강화한 주전충은 904년 소종을 시해하고 어린 애제를 황제로 내세웠으며[31], 905년에는 백마의 화를 일으켜 당나라의 주요 귀족 관료들을 대거 숙청했다.[31] 마침내 907년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후량을 건국하고 황제(태조)가 되어 이름을 주황(朱晃)으로 고쳤다. 이로써 289년간 이어져 온 당나라는 멸망하고 오대 십국 시대가 시작되었다.[4]

후량의 황제가 된 후, 그는 이존욱과의 경쟁에서 군사적으로 열세를 보였으며, 말년에는 잔혹한 통치와 방탕한 사생활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32][34] 특히 후계자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을 겪던 중, 912년 셋째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34]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당나라 말기의 혼란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1. 초기 생애와 황소의 난 가담

대중 6년(852년), 주온(朱溫)은 송주 탕산현 우구리(午溝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성(朱誠)은 오경을 가르치는 유학자였으나, 주온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5] 이로 인해 집안 형편은 어려워졌고, 어머니 왕씨(王氏)는 주온과 그의 두 형 주전욱(朱全昱, 또는 주권유), 주존(朱存)을 데리고 친척인 소현의 부호 유숭(劉崇, 십국 시대 북한의 창건자 유민과는 동명이인)의 집에서 소작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주온에게는 여동생도 있었는데, 하읍현(下邑)의 원경초(袁敬初)와 결혼했다.[6][7]

주온은 농사일 같은 평범한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예에 빠져 독학으로 봉술과 권법 실력을 키웠다. 성격이 거칠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건달 주삼'(주씨 집안 셋째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인 유숭은 이런 주온을 탐탁지 않게 여겨 자주 매질했지만, 유숭의 어머니는 주온의 가능성을 보고 그를 감싸주었다고 전해진다.[2][8]

건부 4년(877년)경,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주온은 둘째 형 주존과 함께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에 가담했다.[9] 주존은 이후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주온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2][5] 황소가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大齊)를 세웠으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여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주온은 황소 밑에서 독립적인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인근 동주(同州, 현재 섬서성 위난시)를 점령하여 방어 사령관이 되었다.[8]

중화 2년(882년)경, 황소의 세력이 장안 주변으로 고립되자, 주온은 정세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황소가 감시를 위해 파견한 군사 감독관 연실(嚴實)을 암살한 후,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현재 산서성 운성시) 왕중영(王重榮)에게 투항했다. 시기적절한 그의 귀순을 당 희종은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좌금오위(左金吾衛) 대장군 겸 하중행영초토부사(河中行營招討副使)의 관직과 함께 '온 마음으로 충성하라'는 의미의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10] 이때부터 그는 '''주전충'''(朱全忠)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당나라의 장수로서 황소군 토벌에 나서게 된다.

2. 2. 당나라 귀순과 황소의 난 진압

주온은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형 주존과 함께 황소의 군대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냈다.[10] (주존은 도중에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명 원년(880년) 황소군이 장안을 함락시킨 후, 주온은 황소군의 동남 방면 선봉을 맡아 남양을 함락시키는 등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황소는 처음부터 인망이 있던 주온을 경계하고 있었고, 주온 역시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주온은 하중 절도사 왕중영의 군대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고 황소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황소군의 좌군사 맹개에게 묵살당했다.[10] 또한 황소군 내부에 형세가 불리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온은 측근들과 상의하여 황소를 배반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왕중영이 보낸 밀사를 계기로 그와 내통하게 된 주온은, 황소가 파견한 감군사 엄실을 죽이고 왕중영에게 투항했다. 당시 지방으로 피난 가 있던 희종은 주온의 투항 소식을 듣고 "이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진다.[10]

이후 주온은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이극용 등 다른 제후군과 함께 황소군을 장안에서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884년 봄에는 이극용과 연합하여 황소의 장군들을 격파하고 진주(陳州, 현 주마뎬) 포위를 풀게 만들었다.[10] 거듭된 패배 끝에 황소는 동쪽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그해 여름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16] 황소의 최종적인 패배 과정에서 여러 반란군 지휘관들이 주온에게 항복하면서 그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17]

이러한 전공으로 당나라 조정은 주온에게 좌금오위(左金吾衛)대장군·하중행영초토부사(河中行營招討副使)의 지위를 내리고, 변주(汴州, 현 허난성 카이펑)를 거점으로 하는 선무군(宣武軍) 절도사로 임명했다.[10] 또한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로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이후 '''주전충'''(朱全忠)으로 불리게 되었다.[10]

선무군 절도사로 임명된 주전충은 석 달이 넘어서야 비앙(汴)에 도착했는데, 이는 자신의 핵심 부하들을 데려가는 문제에 대한 협상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0] 그는 80여 명의 핵심 군사 수행원을 포함한 수백 명의 병력만을 데리고 부임했으며, 이들은 초기 선무군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대표적인 인물로는 龐師古중국어 등이 있다.[11] 주전충은 기존 선무군의 조직(주지사 경비대와 주력 야전군)을 유지하면서도, 丁會중국어,[6] 胡真|호진중국어[12] 등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고, 특히 朱珍중국어에게 군대의 선발, 훈련, 재편성을 맡겨 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14] 또한 장안 탈환전 당시 사타족 기병의 위력을 목격하고 자신의 기병 부대 창설을 명령했으며, 초기 지휘는 방사고에게 맡겼다.[15]

2. 3. 권력 장악과 당나라 멸망

주전충은 절도사로 승진한 후, 황소의 난 진압 과정에서 협력했던 이극용과 당 조정 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주전충은 당나라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당시 당나라는 장안 일대만을 겨우 유지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고, 각지에서는 절도사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황소의 난 진압 당시, 주전충은 이극용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성대한 연회를 열고 겸손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성격이 곧았던 이극용은 주전충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주전충의 환대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주전충이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음에도 이극용은 "조정을 위해 도적을 토벌했을 뿐 감사할 일이 없다. 게다가 황소는 그대의 원래 군주 아니었나. 아마 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라며 비꼬았다. 주전충은 분노를 참으며 대접했지만, 이극용과 그의 부하들이 만취하자 군대를 동원해 습격했다. 이극용은 부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탈출했고, 이 사건으로 주전충과 이극용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10][16]

문덕 원년(888년), 하양(河陽)에서 옛 황소군 출신인 이한지와 장전의가 대립하자, 이한지는 이극용에게, 장전의는 주전충에게 각각 구원을 요청했다.[35] 주전충은 부하 정회(丁會), 갈종주(葛從周), 우존절(牛存節) 등을 파견하여 이극용의 군대를 격파했다.[36] 또한 이극용이 자신의 동생 이극수(李克脩)를 의심하여 죽게 만들고 대신 보낸 다른 동생 이극공(李克恭)이 민심을 잃자, 로주(潞州)에서 이탈한 병사들을 주전충이 흡수하기도 했다.[37] 군사적 능력에서는 이극용에게 뒤처졌지만, 주전충은 지략과 정략, 모략을 통해 이극용을 점차 압박하며 당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901년, 주전충은 당나라로부터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천유 원년(904년) 1월, 주전충은 소종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의 근거지인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양자인 주유공(朱友恭)과 사숙종(氏叔琮)에게 명하여 소종을 시해하도록 하고, 나중에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31]

소종 사후, 주전충은 소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13세의 애제를 황제로 내세우고 선양을 준비했다.[31] 그의 맏형 주전욱은 "주삼(朱三)아, 네가 천자가 되려 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따져보면 황소의 무리였던 너를 도와주신 폐하의 은혜에 보답은커녕, 삼백 년의 사직을 찬탈하려 하다니 이 어리석은 자야"라며 꾸짖었다고 전해진다.

905년, 심복인 이진과 장현휘(蔣玄暉) 등의 건의에 따라, 주전충은 배추, 독고손, 최원, 왕부, 조숭 등 당나라 고위 관료 30여 명을 하급 지방관으로 좌천시킨 뒤, 부임지로 가던 중 백마역(白馬驛)에서 모두 처형하고 시신을 황하에 던져버렸다. 이 사건은 '백마의 화'라고 불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귀족 제도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평가받는다.[31]

902년 당시 주전충이 중원을 장악하고 이마전이 북서부를 지배하던 상황


907년, 주전충은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양(梁)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조 후량을 열었다. 이로써 289년간 지속된 당나라는 멸망했다.[4]

2. 4. 후량 건국과 통치

907년 3월, 당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양(梁)'''으로 정하고 후량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당나라는 멸망하였다. 주전충은 후량의 초대 황제(태조)에 즉위하며 이름을 '전충(全忠)'에서 '''주황(朱晃)'''으로 개명하였다. 폐위된 애제는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되었으나, 908년 조주(曹州)에서 독살당했다.[4] 주황은 변주(汴州)를 동도(東都)로, 낙양(洛陽)을 서도(西都)로 삼았으며, 이후 변주를 '개봉'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정했다. 그는 경상(景翔)을 최고 고문으로 삼아 국정을 운영했다.[4]

대부분의 옛 당나라 지역은 후량의 권위를 인정했으나, 이극용(진), 이무정(기), 양오(오), 왕건(전촉) 등은 복종하지 않고 당나라 연호 '천우(天祐)'를 계속 사용하거나 독자적인 황제를 칭했다. 유인공의 아들 유수광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후량에 명목상 복종했다.[4]

태조는 진을 제압하기 위해 908년 이극용 사후 혼란을 틈타 상당(上黨, 로주)을 공격했으나,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에게 크게 패배하고 후량군은 궤멸되었다.[4]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이 있다면 이아자(이존욱의 별명)와 같아야 할 텐데, 이극용이 죽지 않은 것과 같다. 내 아들들은 돼지나 개와 같다."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4] 이후 후량군은 진(晉)군의 공세에 점차 밀리게 되었다.

909년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양자 주유문을 박왕(博王)으로 봉해 개봉(달량)을 지키게 했다.[33] 같은 해, 유지준(劉知俊)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 등을 기에 넘겼으나 곧 진압되었다.[33] 911년에는 왕융의 조(趙, 성덕)와 왕추지의 의무(義武)를 제압하려다 실패하고, 박향 전투에서 이존욱이 이끄는 진/조/의무 연합군에게 대패했다.[33] 이 패배로 조와 의무는 진의 확고한 동맹이 되었다. 912년, 연을 세운 유수광을 구원하려 출병했으나 진군에게 속아 공황 상태로 도주하는 등 군사적으로 계속 실패했다.[34]

904년 정비 장부인이 사망한 후, 태조의 폭력적이고 방탕한 성향은 더욱 심해졌다.[32] 그는 지방에 봉해진 여러 아들의 아내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시중들게 하고 간통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양자 박왕 주유문의 아내 왕씨를 총애하여[34], 병세가 깊어지자 주유문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34]

912년, 태조는 병이 위중해지자 총애하던 양자 주유문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와 동시에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냉대받던[34] 친아들 영왕 주우규를 래주(萊州) 자사로 좌천시키려 했다. 당시 좌천은 곧 처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주우규는[34] 아버지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근위군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우규는 병상에 있던 태조를 찾아가 자신이 반란의 주모자임을 밝혔고, 태조는 "내가 어찌 너 같은 놈을 살려두었는가, 진작 죽였어야 했다"고 외친 후[34] 주우규에게 살해당했다. 향년 61세였다. 주우규는 아버지의 죽음을 주유문에게 뒤집어씌우고 황위를 찬탈했다.[34]

3. 백마의 화

904년 주전충은 소종을 살해하고 그의 아홉 번째 아들인 13세의 애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웠다. 이는 선양 형식을 통해 황제 자리를 빼앗으려는 준비 단계였다.

905년, 주전충의 심복인 이진과 장현휘 등은 아직 조정에 남아 있던 당나라 고위 관료들을 제거할 것을 건의했다. 주전충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이에 따라 백마역(白馬驛, 현 허난성 안양시 활현 부근)에서 당나라의 고위 관료 30여 명이 처형되었고, 그 시신은 황하에 버려졌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백마의 화라고 부른다.

백마의 화 희생자로 기록된 주요 인물
인물
배추
독고손
최원
왕부
조숭



백마의 화는 당나라의 오랜 문벌 귀족 세력을 뿌리 뽑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숙청으로 사족 중심의 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으며, 주전충은 907년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후량을 건국하는 데 방해가 될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주전충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보여준 잔혹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나라 귀족 시대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 가족 관계

'''조상'''


  • '''조부''': 주신(朱信), 사후 헌조(憲祖) 소무황제(昭武皇帝)로 추존됨
  • '''조모''': 소의황후(昭懿皇后) 유씨(劉氏)


'''부모'''

  • '''부친''': 주성(朱誠), 사후 열조(烈祖) 문목황제(文穆皇帝)로 추존됨. 송주 탕산현에서 오경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나, 주전충이 어릴 때 사망했다.[5][7]
  • '''모친''': 문혜황후(文惠皇后) 왕씨(王氏). 남편 사후 세 아들을 데리고 숙주 소현의 유숭(劉崇) 집에서 살았다.[7]


'''형제'''

  • 주전욱(朱全昱) (? ~ 916년), 광덕정왕(廣德靖王)
  • 주존(朱存) (? ~ 879년), 낭왕(朗王). 주전충과 함께 황소의 난에 가담했다가 전사했다.[2][5]


'''여동생'''

  • 이름 미상, 당산 근처 하읍현(下邑)의 원경초(袁敬初)와 결혼. 아들 원상선(袁象先)은 후량과 후당 시대의 중요한 장군이 되었다.[6]


'''처첩'''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국부인(國夫人)원정황후(元貞皇后)장혜(張惠)위국부인(魏國夫人), 현비(賢妃)857년 ~ 904년주전충의 정실. 907년 황후로 추존됨.
군군(郡君)무위군군(武威郡君)석씨(石氏)시언사(石彥辭)의 여동생.
소의(昭儀)진씨(陳氏)909년 비구니가 됨.
소용(昭容)이씨(李氏)
미인(美人)단씨(段氏)단응의 여동생.
궁인(宮人)주근(朱瑾)의 처였음.



'''자녀'''

주전충은 말년에 아들들의 아내들을 궁궐로 불러 시중들게 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양자 주우문의 아내 왕씨를 총애하여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는 아들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결국 차남 주우규가 반란을 일으켜 주전충을 살해하는 원인이 되었다.[34]

==== 아들 ====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침왕(郴王)주우유(朱友裕)870년? ~ 904년불명빈왕(彬王)후량 건국 전에 사망. 907년 추존됨.
2영왕(郢王)주우규(朱友珪)885년? ~ 913년불명912년 부황 주전충을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폐위됨 (후량 폐제).
3균왕(均王)주우정(朱友貞)
주전(朱瑱)
888년 ~ 923년원정황후 장혜후량 제3대 황제 (후량 말제).
4복왕(福王)주우장(朱友璋)? ~ ?불명
5하왕(賀王)주우옹(朱友雍)? ~ 923년불명
6건왕(建王)주우휘(朱友徽)? ~ 923년불명
7강왕(康王)주우경(朱友敬)
주우자(朱友孜)
? ~ 915년원정황후 장혜915년 형 주우정에게 처형됨.



==== 딸 ====

순서봉호(공주)이름생몰년도비고
1안양공주(安陽公主)불명? ~ 906년나소위의 아들 나정규(羅廷規)와 결혼.
2장락공주(長樂公主)불명? ~ ?조주(趙稠)의 아들 조암(趙巖)과 결혼.
3금화공주(金華公主)불명? ~ ?나정규(羅廷規)의 계처가 되었으나, 910년 비구니가 됨.
4보녕공주(普寧公主)불명? ~ ?왕용(王鎔)의 아들 왕소조(王昭祚)와 결혼.
5진녕공주(眞寧公主)불명? ~ ?



==== 양자 ====

봉호이름 (본명)생몰년도비고
박왕(博王)주우문(朱友文) (강근(康勤))? ~ 912년주전충이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주우규의 명령으로 주우정에게 살해됨.[34]
기왕(冀王)주우겸(朱友謙) (주간(朱簡))? ~ 926년후당 장종 때 이계린(李繼麟)으로 개명함.
주우공(朱友恭) (이언위(李彦威))? ~ 904년904년 처형되고 본명으로 복귀됨.
주우양(朱友讓) (이칠랑(李七郎))? ~ ?본명은 이양(李讓)이라고도 함.
주한빈(朱漢賓)872년? ~ 935년?전사한 장교 주원례(朱元禮)의 아들.


5. 평가

주전충은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을 군사력으로 수습하고 새로운 왕조인 후량을 개창한 인물이다. 그는 황소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나라 말기에 황소의 군대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나[2][5], 전세가 불리해지자 당나라에 투항하여 황소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당 희종으로부터 충성을 의미하는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10] 선무군 절도사에 임명되어 강력한 군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달리 행적은 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점차 당 조정을 압박하여 소종을 낙양으로 강제 천도시키고[30], 결국 904년 소종을 시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했다.[31] 이후 어린 애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우고,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되는 내시 세력과 조정의 고위 관료들을 대규모로 학살(백마역의 참변)하는 잔혹함을 보였다.[29][31] 이러한 숙청 과정은 그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을지 모르나, 후대에 큰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주전충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이무정, 이극용 등 당대의 경쟁 군벌들을 제압하거나 견제하며 세력을 넓혔고, 마침내 907년 애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건국했다.[4] 이는 당나라의 멸망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황소의 난과 같은 민중 봉기에 참여했던 초기 이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위해 기존 지배 질서에 편승하고 결국 황제가 된 그의 모습은 민중의 열망을 배신한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그의 부인 장씨가 사망한 후에는 폭력성과 방탕함이 더욱 심해졌다는 기록도 남아있다.[32]

결론적으로 주전충은 난세를 평정한 군사적 능력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배신과 극단적인 잔혹성, 폭력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그의 통치 방식은 후량 왕조가 단명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6. 대중 문화


  • 이치키 히데유키( 仁木英之|니키 히데유키일본어 )는 주전충의 생애를 다룬 소설 『주온( 朱温|슈온일본어 )』을 2009년 10월 7일 아사히 신문 출판( 朝日新聞出版|아사히 신분 슈판일본어 )에서 출간했다. 이 소설은 원래 학습연구사( 学習研究社|가쿠슈 켄큐샤일본어 )에서 발매된 『석양의 배( 夕陽の梨|세키요노 나시일본어 ) 오대 영웅전( 五代英雄伝|고다이 에이유덴일본어 )』의 제목을 바꾸고 1300매 분량을 추가하여 문고판으로 낸 것이다.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2]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1
[3]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7
[4]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6
[5]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新五代史/卷01
[6]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59
[7] 서적 The Structure of Power in North China during the Five Dynasties
[8]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4
[9] 서적
[10]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5
[11] 서적
[12]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16
[13]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12
[14]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19
[15] 서적
[16]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6
[17] 서적
[18] 서적 Outline of the History of the Chinese (中國人史綱)
[19]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14
[20]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7
[21] 서적
[22]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8
[23]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59
[24]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20
[25] 서적
[26]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0
[27]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1
[28]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2
[29]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3
[30]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4
[31]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5
[32]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新五代史/卷13
[33]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7
[34]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68
[35] 서적 資治通鑑
[36] 서적 朱全忠遣其將丁會・葛從周・牛存節將兵數萬救河陽。全忠表丁會為河陽留後,復以張全義為河南尹。
[37] 서적 李克用巡潞州,以供具不厚,怒昭義節度使李克脩,詬而笞之。克脩慚憤成疾,三月,薨。素樂李克脩之簡儉,且死非其罪,潞人憐之,由是將士離心。初,潞人叛孟氏,牙將安居受等召河東兵以取潞州。衆推居受為留後,附於朱全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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