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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가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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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가키산성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 당시 호조 씨를 압박하기 위해 축성한 산성이다. 오다와라성 서쪽 3km 지점의 가사카케야마 언덕에 위치하여 오다와라의 방어 시설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며, 80일 넘게 비밀리에 건설되어 호조 측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석벽이 붕괴되었고, 1959년 북곡륜과 출곡륜을 제외한 부분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이시가키산성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하야카와역 등에서 접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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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가키산성
기본 정보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의 우물과 석벽
원어 이름 (일본어)石垣山一夜城
위치오다와라, 가나가와현, 일본
종류산성
소유도요토미 씨
상태유적
건축 시기1590년
건축가도요토미 히데요시
재료석벽
파괴 시기1590년
과거 사령관도요토미 히데요시
사건오다와라 전투 (1590년)
지정일본 국가 지정 사적
성곽 정보
별칭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 (石垣山一夜城)
혼마루 터와 천수대 터 (오른쪽 뒤)
성 이름이시가키야마 성 (石垣山城)
위치 (현)가나가와현
구조제곽식 산성
천수 구조존재헤이세이 원년 (1989년)부터 진행된 오다와라시의 조사에서 많은 기와와 초석이 출토되었다
건축가도요토미 히데요시
건축 연도덴쇼 18년 (1590년)
개축없음
성주도요토미 씨
폐성 연도덴쇼 18년 (1590년)
유구석벽, 해자, 호리키리, 우물
문화재 지정국가 지정 사적

2. 역사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고호조씨를 압박하기 위해 이 성을 건설했다.[4][5][6] 성은 오다와라성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이시가키산(당시 가사카케야마) 정상 부근(해발 261.9m)에 위치했으며, 이는 오다와라성의 모든 방어 시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9] 성의 규모는 동서 270m, 남북 550m에 달했다.[9]

히데요시는 야마나카성, 하치오지성고호조씨의 지성(支城)들을 함락시킨 후, 본거지인 오다와라성 공략을 위해 대군으로 성을 포위했다. 원래 오다와라 호조씨의 지성이 있던 이 산을 점령한 히데요시는 1590년 4월부터 성 축조를 시작했다. 약 3~4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불과 80일 만인 6월 26일에 완공되었다고 전해진다(『오다와라 호조기』에는 4월 1일 착공 기록).[9] 성곽 연구자 도가와 아쓰시는 성의 구조가 이후 히데요시의 명으로 축조된 히젠국 나고야성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구로다 요시타카가 설계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축성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심리전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이 완성될 때까지 오다와라성에서 보이지 않도록 위장하고, 완공 후 주변의 나무들을 하룻밤 사이에 베어내 마치 성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9][6][5] 이는 오다와라성 수비 병력의 사기를 꺾기 위한 의도였으며, 이 일화로 인해 '하룻밤 만에 지은 성'이라는 의미의 일야성(一夜城)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9] (다만, 실제로는 거리가 가까워 축성 과정이 오다와라성에서 보였거나 의도적으로 노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시가키산성은 임시 요새로 계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벽과 망루(야구라)를 갖춘 본격적인 근세 성곽의 형태를 띠었다. 특히 간토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 전체를 석벽으로 쌓은 성으로 여겨진다.[10][11][9] 천수대 터가 남아 있어 천수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누야마성이나 마루오카성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이 성에 주둔하며 다회를 열거나 천황의 칙사를 맞이하는 등 정치적 활동의 장소로 활용했다. 무쓰국의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을 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히데요시가 칼을 맡기고 무방비 상태로 진중을 안내했다는 일화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으로의 이봉을 제안했다는 '간토노 도모쇼벤(関東の連れ小便)' 설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성이 완공되고 약 10일 후인 7월 5일, 호조 우지나오오다와라성을 나와 항복했다.[9]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는 덴쇼 19년(1591년)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오다와라 함락 이후에도 성의 일부 건설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12] 그러나 전쟁 이후 성은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6][5]

1923년 (다이쇼 12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석벽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우물 구루와의 석벽은 지진을 견뎌내어 현재까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1959년 (쇼와 34년)에는 북쪽 구루와와 데마루 구루와를 제외한 성터 영역이 국가 사적 '이시가키 산'으로 지정되었고,[9] 2006년(헤이세이 18년)에는 사적 범위가 추가 지정되었다.[9] 1990년(헤이세이 2년)에는 이시가키 산 일야성 역사공원으로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으며,[9] 2017년(헤이세이 29년)에는 속 일본 100명성(126번)으로 선정되었다.[7]

3. 구조

이시가키산성은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성 공략을 위해 축성한 성이다. 성은 해발 261.9m의 이시가키산 정상부에 위치하며[9], 석벽과 망루를 갖춘 본격적인 근세 성곽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간토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 전체를 석벽으로 쌓아 올린 총석벽(総石垣) 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건축사적 의미를 지닌다.[10][11][9] 약 3~4만 명이 동원되어 단 80일 만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의 중심부에는 천수대 터가 남아 있어 과거 천수각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실제 건립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성의 석벽 대부분이 크게 파손되었으나, 우물 구역(井戸曲輪, 이도 구루와)의 석벽은 지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시가키산성은 195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9], 1990년에는 이시가키산 일야성 역사공원(石垣山一夜城歴史公園)으로 정비되어 현재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9]

3. 1. 특징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호조 씨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을 공략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상대를 압박할 목적으로 이 성을 건설했다.[4][5][6][9] 성은 오다와라성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가사카케야마(현 이시가키산) 언덕에 위치하며, 해발 261.9m의 천수대를 정점으로 동서 270m, 남북 550m 규모로 지어졌다.[9] 이곳은 오다와라성의 모든 방어 시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축성 과정과 관련된 일화이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성에서 공사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숲 속에 비밀리에 성을 짓고, 80여 일 만에 완공한 후 주변 나무들을 하룻밤 사이에 베어내 마치 갑자기 성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오다와라성 병사들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었으며[6][5], 이로 인해 '하룻밤 만에 지은 성'이라는 의미의 일야성(一夜城)이라는 별칭이 생겼다.[9] 실제로 성이 모습을 드러낸 지 9일(혹은 약 10일) 만인 7월 5일, 호조 우지나오는 오다와라성을 나와 항복했다.[6][5] 다만, 두 성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는 축성 과정이 오다와라성에서 보였거나, 히데요시가 의도적으로 공사 과정을 노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시가키산성은 석벽과 망루를 갖춘 본격적인 근세 성곽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간토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 전체를 석벽으로 쌓아 올린 총석벽(総石垣) 성으로 평가받는다.[10][11][9] 임시 요새로 계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석벽과 덴슈가 위치했을 중앙 보루를 갖추고 있었다.[6][5] 천수각의 존재 여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천수대 터가 남아 있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고층 천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건축 양식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이누야마성이나 마루오카성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 설계는 구로다 간베에가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이후 히데요시의 명으로 축조된 히젠국나고야성과 축성 방식 및 구조적 특징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축성에는 약 3~4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1590년 4월 초부터 시작하여 6월 하순까지 약 8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되었다.[9] 다인(茶人) 센노 리큐후루타 오리베에게 보낸 6월 20일 자 서한에는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이 언급되어 있으며, 6월 26일에 최종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9] 히데요시는 이 성에서 다회를 열거나 고요제이 천황의 칙사를 맞이하는 등 정치적, 외교적 활동의 장소로 활용했다.

오다와라 정벌 이후 성은 버려져 폐허가 되었고[6][5],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석벽 대부분이 크게 파손되었다. 그러나 우물 구역(이도 구루와)의 석벽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1959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9], 1990년에는 이시가키산 일야성 역사공원(石垣山一夜城歴史公園)으로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9] 2017년에는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7]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과정에서 덴쇼 19년(1591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오다와라성 함락 이후에도 성의 일부 공사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2]

이 성은 히데요시가 무쓰국의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와 처음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 히데요시가 칼을 맡기고 무방비 상태로 진중을 안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으로의 이봉(移封)을 명했다는 '간토의 오줌 누기(関東の連れ小便)' 설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3. 2. 설계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후호조 씨를 압박할 목적으로 이 성의 건설을 지시했다.[4][5][6] 성은 오다와라성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가사카케야마(현 이시가키산)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오다와라의 모든 방어 시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설계되었다.[9] 이시가키산성은 해발 261.9m의 천수대를 중심으로 동서 270m, 남북 550m 규모로 계획되었다.[9]

이 성은 석벽과 망루를 갖춘 본격적인 근세 성곽으로, 간토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 전체를 석벽으로 쌓은 '총석벽'(総石垣) 구조로 설계되었다.[10][11][9] 천수대 터가 남아 있으며 발굴 조사를 통해 고층 천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천수 건립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성곽 연구자 도가와 아쓰시는 성의 직사각형 구획과 해자 등이 이후 히데요시의 명으로 축조된 히젠국 나고야성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설계 담당자가 구로다 간베에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설계의 핵심 중 하나는 심리전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약 3~4만 명을 동원하여 1590년 4월부터 6월 하순까지 약 80일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9] 축성 기간에는 오다와라성에서 공사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위장하고, 완공 직후 주변 나무들을 일제히 베어내 마치 하룻밤 사이에 거대한 성이 나타난 것처럼 연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 이는 오다와라성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의도였으며, '일야성'(一夜城, 하룻밤 성)이라는 별칭의 유래가 되었다. 다만, 두 성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실제로는 축성 과정이 오다와라성에서 보였거나 의도적으로 노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성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호조 측 방어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9일 뒤인 7월 5일 호조 우지나오는 항복했다.[6][5] 헤이세이 원년(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는 덴쇼 19년(1591년)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오다와라 함락 이후에도 성의 일부 건설 작업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12] 그러나 성은 전략적 목적 달성 후 곧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6][5]

4. 관광

성터는 이시가키산성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4. 1. 교통

5.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豊臣秀吉ゆかりの城 https://www.kyosei-t[...] 日本の名城観光ガイド 2019-08-16
[2] 서적 室町戦国歴史紀行 講談社文庫
[3] 웹사이트 石垣山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12-25
[4] 웹사이트 石垣山一夜城 http://www.city.odaw[...] Odawara city official 2019-08-09
[5] 웹사이트 石垣山一夜城歴史公園 http://www.odawara-k[...] 小田原観光 2019-08-09
[6] 웹사이트 石垣山城 https://kojodan.jp/c[...] 攻城団 2019-08-09
[7] 웹사이트 続日本100名城 http://jokaku.jp/jap[...] 日本城郭協会 2019-07-25
[8] 문서 平成元年(1989年)から行われた小田原市の調査では多くの瓦や礎石が出土した
[9] PDF 史跡石垣山(石垣山一夜城)早川石丁場群関白沢支群 https://www.city.oda[...] 小田原市教育委員会 2022-11-28
[10] 문서 西曲輪東門、北曲輪、出曲輪などは石垣造りではない
[11] 문서 関東における石垣を多用した城として、[[新田金山城]]がある。
[12] 문서 史跡石垣山(石垣山一夜城)早川石丁場群関白沢支群 小田原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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