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성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 위치한 성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고바야카와 도오히라의 거관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오모리 씨를 거쳐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에게 넘어갔으며, 호조 가문의 거성으로 간토 남부의 정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을 통해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고 일본 통일을 완수했다. 에도 시대에는 오쿠보 씨가 오다와라 번의 번청으로 사용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성내 건물은 파괴되었으나, 현재는 오다와라 성터 공원으로 정비되어 천수각 등이 복원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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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현의 성 - 이시가키산성 이시가키산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 포위 당시 지은 산성으로, 하룻밤 만에 완성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심리적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는 역사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호조 가문는 현재 천수 주변에 거택을 두고, 야하타 산을 배후에 두는 형태로 오다와라성을 축성했다. 호조 가문 이전에는 오모리 씨 가문이 이 지역을 지배했는데, 그들의 거택 역시 같은 위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조 우지야스가 성주였던 시기에는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등의 공격을 모두 격퇴하여 센고쿠 시대 굴지의 견고한 성으로 명성을 떨쳤다.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 성은 야하타 산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9km의 성루와 빈 해자로 오다와라 마을 전체를 감싸는 소가마에를 갖춘,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성곽이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다와라 성의 소가마에를 파괴했다. 이는 지방 성곽에 이처럼 대규모 소가마에를 두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오다와라 성터의 주요 성곽은 오쿠보 가문이 성주로 부임하면서 조성된 것이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해안에 3기의 포대가 건설되었다. 간토에서는 드물게 주요 부분이 모두 석벽으로 축조된 성이다. 현재와 같이 석벽으로 된 것은 1632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수리 이후의 모습이다. 2대 번주 오쿠보 다다치카 때에는 정쟁에 휘말려 영지가 몰수되기도 했다. 잠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은거할 장소로 고려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후 성주 대리를 두어 성을 관리하다가, 아베 가문, 이나바 가문을 거쳐 가문의 명예를 회복한 오쿠보 가문이 다시 성주로 부임했다. 오다와라번은 막부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곳으로, 하코네에 관문을 두었다. 오다와라 번은 오기노 야마나카 번을 지번으로 두었으며, 1633년과 1703년에는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1703년 지진으로 오다와라 성의 천수와 망루가 파괴되었고, 1706년 천수가 재건되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성내 건물과 구조물 대부분이 해체되었다.
2. 1. 중세
원래는 헤이안 시대 말기, 사가미 국의 호족 토히 씨 일족인 소바야카와 엔페이(소바야카와 씨의 조상으로 여겨짐)의 저택이었다고 여겨진다. 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에서 도히 가문이 실각하자, 오모리 씨가 이를 찬탈하였다.
1495년 (단, 이후라는 설도 있음), 이즈 국을 지배하는 이세 모리토키 (후에 호조 소운)이 오모리 후지요리로부터 성을 빼앗아, 이후, 후호조 씨 가문의 거성이 되었고, 간토 남부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호조 우지야스 시대에는 난공불락, 무적의 성이라 불리며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공격을 견뎌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우에스기 겐신이 에치고에서 침공하여, 오다와라성 전투가 벌어졌다. 1개월에 걸친 농성전 후, 우에스기 군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0일 정도의 포위였던 것으로 보인다.[10]
에이로쿠 12년(1569년) 10월 1일부터 4일(1569년 11월 9일부터 12일)에 걸쳐 다케다 신겐은 호조 영토에 침공하여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였다. 미쓰마세토게 전투에서 호조 측을 격퇴하였다.
1590년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마무리로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나오가 지휘하는 호조 씨와 전쟁을 벌였다.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 합전, 오다와라의 역 등)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압도적인 물자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 동시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관동 각지의 호조 씨의 지성을 각개격파했다. 3개월간의 농성전 끝에 거의 무혈로 성을 함락시켰다. 이 농성전에서 호조 측은 화의와 항전 지속을 두고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일화가 오다와라 평정이라는 말로 남아 있다.
이시가키야마 이치야조에서 바라본 오다와라성
2. 2. 근세
1590년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호조 가문의 거성인 오다와라 성을 공격했다. 간토에서 호조 가문과 적대시한 우쓰노미야, 사타케 가문 등도 히데요시의 편에 섰다. 오다와라 정벌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성을 포위 공격했고, 별동대로 호조 가문의 각 지성을 각개격파하여 고립시켰다. 3개월 뒤, 호조 가문은 항복했다. 이 공성전 동안 호조 가문은 “화의냐”, “항전이냐”를 두고 논쟁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일화는 오다와라 효조(小田原評定)라는 고사성어로 남았다. 이후 히데요시는 우쓰노미야 구니쓰나와 함께 시모쓰케 국 우쓰노미야로 군대를 이동시켜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한 도호쿠 지방 다이묘들의 처우를 결정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일본 전토의 통일을 완수하였다.[2]
전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의 영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어 간토로 전봉시켰다. 에도 성을 거처로 삼은 이에야스는 측근인 오쿠보 다다요에게 오다와라 성을 주었다. 이후, 17세기를 제외하고 메이지 시대까지 오쿠보 가문의 거성이자 오다와라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호조 가문 일족인 호조 우지모리는 가와치 국 사야바 번의 번주가 되어 호조 가문의 명맥을 이었다.[5]
2. 3. 근현대
1870년(메이지 3년)부터 1872년(메이지 5년)에 걸쳐 오다와라 성내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 매각되었고, 천수대에는 신사가 건립되었다. 1901년(메이지 34년) 성내에 황실 별장인 고요테이(御用邸)가 설치되었으나,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어 별장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1909년(메이지 42년)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았던 니노마루 단층 망루는 1935년(쇼와 9년) 스미 망루로 재건되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규모가 반으로 축소되었다.
1930년(쇼와 4년)부터 1931년(쇼와 5년)에 걸쳐 간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석벽을 다시 쌓았지만, 이전보다 낮게 쌓았다. 1950년(쇼와 25년)에는 지진으로 훼손된 천수대가 정비되었다.
그 후, 오다와라 성터는 오다와라 성터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1960년(쇼와 35년) 천수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되었다. 다만, 오다와라시의 요청에 따라 천수대 최상부에 난간이 설치되어 본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천수에서는 태평양과 히데요시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시가키 산성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 오다와라 시에서는 성의 중심부를 에도 시대 말기의 모습으로 재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1971년(쇼와 46년) 도키와기 문, 1997년(헤세 9년) 아카가네 문, 2009년(헤이세이 21년) 우마다시 문을 복원했다.
호조 가문의 거관은 현재 천수 주변에 있었고, 야하타 산을 배후에 두었다. 호조 가문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전에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오모리 가문의 거관도 그러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호조 우지야스가 성주로 있을 때는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센고쿠 시대 굴지의 견성이었다.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 성은 야하타 산으로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총연장 9km의 성루와 빈해자로 오다와라 마을 전체를 휘감은 소가마에를 가졌다.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성이었다.
1614년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스로 군을 이끌고 오다와라 성의 소가마에를 파괴하였다. 지방의 성곽에 이와 같은 대규모의 소가마에를 두는 것을 경계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오다와라 성터의 주요 성곽은 오쿠보 가문이 성주로 부임했을 때 조성된 것이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해안에 3기의 포대가 건설되었다. 간토에서는 드물게 주요부분은 모두 석벽으로 지어진 성이다. 현재와 같이 석벽으로 된 것은 1632년부터 시작된 대수리가 끝난 후의 일이다.
중세 시대의 오다와라 성은 혼마루를 하치만 산위에 조성하였고, 현재 오다와라 성의 혼마루 부근에 거관을 건립하였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종루를 설치하여 주변의 적을 경계하였다. 또, 마을 전체를 성루와 빈 해자를 조성하여 외성을 축조하였다. 이 외성은 후에 지어진 오사카 성의 외성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근세 오다와라 성은 오쿠보 다다요, 이나바 마사카쓰에 의해 개축되어, 현재의 오다와라 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혼마루를 중심에 그 동쪽에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둘렀고, 혼마루 서쪽에는 효부이와쿠루와, 남쪽에는 고미네쿠루와, 북쪽에는 오쿠라마이쿠루와를 두어 사방을 견고히 하였다. 그 외에도 니노마루 주변에 각각의 작은 구루와을 두어 방비하였고, 이 작은 구루와는 우마다시로 기능하였다. 혼마루에는 천수각과 마스가타를 갖춘 이중문을 설치하였고, 니노마루에는 거관 및 단층망루를 각각 설치하였다. 오다와라 성 전체에는 문이 13동, 망루가 8기 정도 세워졌다고 사료된다. 또, 에도 시대 말기에 해안 방비를 위해 포대를 조성하였다.
호조씨는 현재 천수각 주변에 저택을 두고, 뒤편에 있는 하치만산(현재 오다와라 고등학교가 있는 곳)을 핵심 방어 시설로 삼았다.
가장 큰 특징은 도요토미 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대한 외곽이다. 하치만산에서 해안까지 오다와라 마을 전체를 총연장 9킬로미터의 토루이와 공갈 해자로 둘러싼 것으로, 후대의 도요토미오사카성의 총구조를 능가했다. 게이쵸 19년(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스로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이 총구조를 철거했다.
근세에 오쿠보 다다요(오오쿠보 다다요시)와 이나바 마사카쓰(이나바 마사카츠)에 의해 개수된 부분이다. 현재의 오다와라 성터 공원 및 그 주변이다. 주요 부분 모두에 석벽(석축)을 사용한 총석축식 성이다. 본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겹쳐 쌓고, 본마루 서쪽에 병풍암 곡륜, 남쪽에 고미네 곡륜, 북쪽에 고쿠라베이 곡륜을 설치하여 4방향의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
평지부에 대한 덧성에 해당한다. 오모리씨(大森氏) 시대부터의 본래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이라고도 하지만, 다른 설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동쪽부터 순서대로 동곡륜(東曲輪), 본곡륜(本曲輪), 서곡륜(西曲輪), 후지와라 평(藤原平), 독에노키 평(毒榎平)이 이어지는 연곽식(連郭式) 구조이다.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은 중핵부가 니노마루(二の丸) 총호리(総堀), 산노마루(三の丸) 총호리, 소우구(総構) 호리에 의해 삼중으로 둘러싸인 구조이다.
중세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의 유구(遺構)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현존한다.
코미네(小峰)의 큰 호리키리(堀切), 토루이(土塁), 나카보리(中堀)
하치만야마(八幡山) 고곽(古郭) 동곽(東郭)
신사노마루(新三ノ丸) 토루이(土塁)
이나리모리(稲荷森)의 호리(堀)
고등학교 옆 포켓파크(ポケットパーク)의 토루이(土塁), 쇼지보리(障子堀) 흔적
오쿠보 신사(大久保神社) 부근의 남아있는 토루이(土塁)
오가네(お鐘)의 다이(台) 곡륜(曲輪) 부근에 우츠보리(空堀) 및 토루이(土塁)
하야카와구치(早川口) 부근에 이중 토루이(土塁)
코우다구치(幸田口) 및 렌죠인(蓮上院) 부근에 토루이(土塁)
4. 현대의 오다와라 성
메이지 정부는 봉건 시대의 모든 요새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오다와라 성의 건물들은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철거되었다.[3] 1893년, 옛 천수각의 돌 기초는 오쿠보 다이묘의 영혼을 기리는 신사인 오쿠보 신사의 기초가 되었다. 1901년, 옛 내곡과 제2곡 부지 안에 하야마 별궁인 오다와라 별궁이 건설되었다. 이 별궁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이 지진으로 성벽의 많은 돌 외벽이 무너졌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성벽의 수리가 이루어졌지만, 매우 부실하게 작업되었다. 1934년, 남아 있던 야구라 두 개(1923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던)가 반 크기로 복원되었다.
1938년, 성터는 국립 사적지로 선포되었으며,[3] 1959년, 그리고 추가적인 고고학적 조사를 바탕으로 1976년에 사적 보존 제한 구역이 확장되었다.
1950년, 간토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옛 천수각의 돌 기초가 수리되었고, 이 지역은 미술관, 향토 박물관, 시립 도서관, 놀이공원, 동물원을 포함한 오다와라 성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3층 5층짜리 천수각(최상층은 전망대)은 오다와라시가 시로 선포된 2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오다와라시 관광 당국의 주장으로 전망대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재건된 천수각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에도 시대 후기의 형태로 중앙 성곽 부지를 더 정확하게 복원하는 계획이 논의되어 왔다. 이 계획에 따라 1971년에 常磐木門|도키와기 문일본어, 1997년에 銅門|아카가네 문일본어, 2009년에 馬出門|우마다시 문일본어이 재건되었다. 성탑은 2015년 7월부터 2016년 4월까지 내진성을 개선하고 전시물을 현대화하기 위해 개조되었다. 오다와라시 정부는 재개관일에 모든 입장료를 구마모토시 정부에 기증하여 2016년 구마모토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구마모토 성 수리에 사용하였다.[4]
재건된 오다와라 성은 2006년 일본 성곽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5. 평가
호조 우지야스 시대에는 난공불락, 무적의 성이라 불리며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공격을 견뎌냈다.[5] 후호조씨는 다케다 신겐에게 오다와라성을 공격받은 것을 계기로 전례 없는 오다와라성의 대대적인 개수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시기와 공사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가장 큰 특징은 도요토미 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대한 외곽이다. 하치만산에서 해안까지 오다와라 마을 전체를 총연장 9km의 토루이와 공갈 해자로 둘러싼 것으로, 후대의 도요토미오사카성의 총구조를 능가했다.
오다와라성은 에도 시대를 통해 칸에이 10년(1633년)과 겐로쿠 16년(1703년) 두 차례나 대지진을 당했으며, 특히 겐로쿠 지진에서는 천수각과 누각 등이 붕괴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5]
6. 교통
- 도카이도 신칸센, JT JR 도카이도 선, OH 오다큐 오다와라 선 등 오다와라 역에서 도보 약 10분에서 15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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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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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les in Japan raise funds for quake-hit rival in Kum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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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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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城隣接の旧商工会館 市に寄贈の意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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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奈川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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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明応5年(1496年)7月24日に出されたと推定されている長尾能景宛山内上杉顕定書状によれば、相模に攻め込んだ顕定の軍が大森式部少輔・式部大輔(扇谷上杉朝昌)・三浦道寸・伊勢新九郎(盛時)入道弟弥次郎らが籠る要害を落とし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要害の具体的な名称は書かれていないものの文面全体の内容から小田原城である可能性が高く、しかも明応5年(1496年)の時点で大森氏と伊勢氏(北条氏)が共闘関係であったことが知られ、同年以前に両氏が城(小田原城)を奪い合う敵対関係になかったのは確実とみられている(佐藤博信「大森氏とその時代」『中世東国足利・北条氏の研究』岩田書院、2006年、P154-P157(原論文は『小田原市史』通史編原史・古代・中世(1998年)に所収))。
[8]
문서
佐藤博信は盛時が伊豆山権現から小田原城下の所領を没収した文亀元年(1501年)には既に盛時が小田原城を支配していたとして、城主の交替を1496年-1501年の間と推定する(前掲佐藤論文、2006年、P157-159)。
[9]
문서
前掲佐藤論文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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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牛の計」は津波? 小田原城奪取に新説/神奈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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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興天守閣の施工は松井建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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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で「みんなでお城をつくる会」設立-市民の手でつくる木造天守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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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城がリニューアル 初日入館料は熊本城修復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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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レ東「池の水」ついに38年ぶり小田原城の水抜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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緊急SOS!池の水ぜんぶ抜く大作戦 〜日本三大“池”だ!小田原城&善光寺&日比谷公園〜|池の水ぜんぶ抜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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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の丸地区で「謎の堀」が二つ発見 江戸古地図に未記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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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城で謎の堀見つかる、場内の「縄張り」解明する手掛かりか/小田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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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ナロ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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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小田原城跡八幡山古廓・総構保存管理計画策定報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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