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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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욱(1932년)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195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검사, 법무부 차관,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5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아들 이재환이 1987년 납북된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영욱은 1932년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나 마산상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1] 육군 법무관을 거쳐 검사로 임용되었으며, 여러 검찰청에서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법무부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검찰 행정에 대한 경험을 쌓았고,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다. 1981년에는 법무부 차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1]
뉴스
경향신문
1983-07-23
2. 생애
1985년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정계에 입문,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재임 중 아들 이재환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1년 북한으로부터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4] [5]
노무현 정부 시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일자, 2005년 제2시국선언 애국시민모임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비판하고, 200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겠다는 선언에 동참했다.[7]
2. 1. 검사 및 법무부 경력
이영욱은 1961년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로 임용된 후,[1] 1962년 부산지방검찰청과 광주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였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어려운 사건을 처리하여 유능한 수사검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법무부 인권과장, 검찰과장 등 참모 생활을 오래하여 검찰 행정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1976년 부산지방검찰청과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차장검사를 지냈으며, 1981년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대구지방검찰청과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하였다. 대구 금복주 사장 협박사건 수사를 총지휘하기도 했다. 1981년 법무부 차관에 임명되었고, 1983년 법무연수원장을 역임하였다.
2. 2. 법무부 차관 및 정치 입문
1932년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나 1952년 마산상업고등학교와 195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61년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에 임용되었으며,[1] 1962년 부산지방검찰청과 광주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일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어려운 사건을 처리해 유능한 수사검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법무부 인권과 과장, 검찰과 과장 등 참모 생활을 오래하여 검찰 행정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1976년 부산지방검찰청과 1980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차장검사를 지내다 1981년에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1981년과 1982년에 각각 대구지방검찰청과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하였다. 대구 금복주 사장 협박사건 수사를 총지휘했다. 1981년에는 법무부 차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1983년 임명된 법무연수원장을 마지막으로, 1985년 1월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공직에서 퇴임하고, 1985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을 하면서 민통련 해산에 대하여 논란이 있던 1986년 11월 2일에 "치안 책임자의 민통련 해산 경고는 이 단체의 활동으로 미루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3]
2. 3. 아들 납북 사건
1987년 7월, 미국 MIT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에 있던 아들 이재환(당시 24세)이 오스트리아 여행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었다.[4] 북한은 "자진 월북"을 주장했으나, 이영욱은 "아들이 월북할 이유가 없다"며 반박했다. 1988년 판문점 적십자회담에서 북한 기자로부터 "아들이 결혼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4] 아들 송환을 위해 노력했다.
이영욱은 대한적십자를 비롯한 국내외 단체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명단을 확인하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북한의 인권 유린 행위를 규탄하며 아들의 송환을 촉구했다.[5] 그러나 2001년 1월 15일, 북한 적십자회는 이재환(당시 39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5] 이영욱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아들이 인간이 살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5] 그는 아들의 납북 직후 "유럽의 자본주의 선진 모델을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자신이 유럽행을 권유했다고 밝혔다.[6]
2. 4. 정치 활동 및 사회 참여
이영욱은 1985년 1월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공직에서 퇴임하고, 같은 해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1986년 11월 2일 민통련 해산 논란에 대해 "치안 책임자의 민통련 해산 경고는 이 단체의 활동으로 미루어 당연한 조치"라고 발언했다.[3]
1987년 7월, 미국 MIT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에 있던 아들 이재환이 오스트리아 여행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영욱은 아들의 송환을 위해 대한적십자사를 비롯한 국내외 단체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노력했으나, 북한은 "자진 월북"이라고 주장했다.[4] 1999년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명단에서 아들의 이름을 확인한 후,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북한의 인권 유린 행위를 규탄하고 송환을 촉구했지만, 2001년 북한은 이재환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5] 이영욱은 아들이 납북된 직후 "유럽의 자본주의 선진 모델을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자신이 "유럽행을 권유했다"고 밝혔다.[6]
노무현 정부 시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일자, 이영욱은 2005년 10월 18일 제2시국선언 애국시민모임에 참여하여 "나라가 망하기 전에 대한민국 살리자"는 구호 아래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비판하고, 200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겠다는 선언에 동참했다.[7]
3. 경력
연도 직책 1962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1969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 ~1976년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부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1980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 1981년 4월 27일~1981년 12월 16일 제26대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1981년 12월 17일~1982년 6월 17일 제25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 1982년 6월 18일~1983년 7월 31일 제16대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1983년 8월 제9대 법무연수원 원장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4. 역대 선거 결과
참조
[2]
뉴스
경향신문
1981-12-17
[3]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6-11-12
[4]
뉴스
https://news.naver.c[...]
[5]
뉴스
https://news.naver.c[...]
[6]
뉴스
https://newslibrary.[...]
1987-08-12
[7]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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