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와키 산 신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와키 산 신사는 오쿠니누시를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위치해 있다. 이 신사는 역사 시대 이전부터 이와키 산을 숭배하던 지역 에미시 부족의 신앙에서 기원했으며, 780년에 산 정상에 사당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800년에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가 재건했으며, 1091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에도 시대에는 쓰가루 번의 총 진수사로 번성했으나, 메이지 시대의 신불 분리 정책으로 신토 신사가 되었고,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신사 경내의 건물들은 에도 시대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닛코 도쇼구를 본떠 "오쿠 닛코"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화려한 조각이 특징이다. 현재 본전, 배전 등 많은 건물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칠일당 신진제와 오야마 산케이(신진제) 등의 제사가 열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오모리현의 신사 - 다카테루 신사
    다카테루 신사는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위치하며 쓰가루 가문 인물들을 모시는 신사로, 깃카와 신도의 영향으로 깃카와 가문 인물들도 합사되었고,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사찰 건물과 묘, 역사관과 다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히로사키시의 건축물 - 히로사키 대학
    히로사키 대학은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위치한 국립 종합대학으로, 1949년 5개교 통합 설립 후 7개 학부와 대학원을 운영하며 에너지, 환경, 식량 문제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히로사키시의 건축물 - NHK 히로사키 지국
    NHK 히로사키 지국은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위치한 NHK의 지역 지국으로, 1937년 라디오 방송국으로 개국하여 1988년 지국으로 격하되었으며 현재 NHK 갤러리와 날씨 카메라 등을 운영하며 지역 문화 향유 기회 제공 및 날씨 정보 전달 역할을 수행한다.
  • 아오모리현의 중요문화재 - 히로사키성
    히로사키성은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에 있는 일본의 성으로, 1590년 축성을 시작하여 1611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재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벚꽃 명소이자 히로사키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아오모리현의 중요문화재 - 사이쇼인
    사이쇼인은 1532년 창건되어 에도 시대 히로사키번의 영세 기원소이자 쓰가루 번 내 사찰을 통괄하는 승록소 역할을 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의 사찰로, 국가 중요 문화재인 오중탑을 비롯한 여러 가람이 경내에 있다.
이와키 산 신사
기본 정보
이와키야마 신사 배전
이와키야마 신사의 배전
종교신토
종류신사
모시는 신오쿠니누시
창건자알 수 없음
설립 연도780년
위치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 햐쿠자와
웹사이트알 수 없음
상세 정보
신사 격옛 국폐소사, 별표 신사
본전 양식삼간사 나가레즈쿠리 동기와 지붕
예제음력 8월 1일 (핫사쿠 마츠리)
위치 정보

2. 제신

이와키 산 신사의 주된 제신(祭神)은 顕国魂神|우츠시쿠니타마노카미jpn로, 이는 오쿠니누시를 가리킨다. 그 외에 다음 신들을 함께 모신다.[3]


  • 多都比姫神|타츠비히메노카미jpn (다츠히메 신)
  • 大山祇神|오호야마츠미노카미jpn (오오야마츠미)
  • 坂上刈田麿|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노미코토jpn (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
  • 宇賀能賣神|우카노메노미코토jpn (우카노메 신)
  • 大山咋神|오야마쿠이노카미jpn (오야마쿠이노카미)


이 신들을 모두 합쳐 이와키야마 오오카미(岩木山大神)라고 부른다.

3. 역사

이와키 산 신사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와키 산은 지역 에미시 부족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신사 전승에 따르면 780년에 산 정상에 처음 사당이 세워졌으며, 800년에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전해진다.[3] 이후 산기슭에 세워진 신사는 109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져 신곤 종파 사찰인 百沢寺|햐쿠타쿠지일본어로 발전하며 신불 습합의 시기를 거쳤다.[3] 이 시기 이와키 산의 봉우리들은 불교의 존상(尊像)들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1589년 이와키 산 분화로 소실되었으나[11], 에도 시대에 쓰가루번의 총 진수사로 여겨지며 쓰가루 타메노부를 시작으로 역대 번주들의 후원으로 재건되었다.[11][6] 메이지 시대에 들어 정부의 신불 분리 정책에 따라 불교 색채가 배제되고 신토 신사가 되었으며, 1873년에는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지정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다가 1946년 폐지되었다.[2][4] 오랜 기간 농업과 어업의 수호신이자 지역 주민들의 조령이 머무는 곳으로 숭배받아 왔다.[3]

3. 1. 기원

이와키 산 신사의 기원은 역사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와키 산은 고대 해당 지역 에미시 부족에게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보귀 11년(780년)에 이와키 산 정상에 처음으로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3]

엔랴쿠 19년(800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는 이와키 산 신의 가호로 동북 지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하여 산 정상의 사당을 재건했으며, 자신의 아버지인 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를 함께 모셨다고 전해진다. 이후 산기슭의 十腰内|토고시나이일본어 지역에 시타쿠미야(下居宮, 오리이노미야라고도 불림, 현재의 이와키야마 신사 겐키산 신사)가 건립되었고, 산 정상의 사당은 오쿠미야(奥宮)가 되었다.[3]

칸지 5년(1091년), 신의 계시에 따라 시타쿠미야는 토고시나이 지역에서 이와키 산 남동쪽 기슭의 햐쿠사와(百沢) 지역으로 이전되었고, '''햐쿠타쿠지'''(百沢寺|햐쿠타쿠지일본어)라는 이름의 신곤 종파 불교 사찰로 발전했다. 이것이 현재 이와키 산 신사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었다.[3] 당시 이와키 산의 세 주요 봉우리는 각각 아미타 여래, 약사여래, 관음보살과 동일시되었으며, 사찰은 '햐쿠타쿠지 이와키 산 삼소 대권현'이라 불리며 지역 영주들의 깊은 신앙을 받았다.[3]

텐쇼 17년(1589년)에 발생한 이와키 산의 분화로 당시의 햐쿠타쿠지는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게이초 8년(1603년) 츠가루 타메노부의 주도로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후 노부히라, 노부요시, 노부마사 등 츠가루 가문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본전, 오쿠몬(奥門), 미즈카키(瑞垣) 등이 차례로 재건되었다.[11][6] 이 시기 햐쿠타쿠지는 츠가루 번의 총 진수사(領内総鎮守)로 여겨졌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신불 분리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찰은 폐지되고, '츠가루 총 진수사 이와키 산 신사'로 개칭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国幣小社), 즉 국가에서 관리하는 3등급 신사 중 하나로 공식 지정되었으며, 이 지위는 1946년까지 유지되었다.[2][4]

3. 2.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와 재건

엔랴쿠 19년(800년),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는 이와키 산 신의 가호 덕분에 동북 지방 평정에 성공했다고 여겨 산 정상에 사전을 재건했다.[3]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도 함께 신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3] 이후 산기슭의 十腰内|토고시나이일본어 지역에는 시타쿠미야(下居宮, 오리이노미야라고도 불림, 현재의 겐키산 신사)가 세워졌고, 산 정상의 사전은 오쿠미야(奥宮)가 되었다.[3]

칸지 5년(1091년), 신의 계시에 따라 시타쿠미야는 十腰内|토고시나이일본어 지역에서 산 남동쪽 기슭의 百沢|햐쿠사와일본어 지역으로 옮겨졌고, '''百沢寺|햐쿠타쿠지일본어'''라는 이름의 진언종 불교 사찰로 발전했다. 이것이 현재 이와키 산 신사의 직접적인 전신이다.[3] 당시 이와키 산의 세 봉우리는 각각 아미타 여래, 약사여래, 관음보살과 동일시되었으며, 사찰은 '햐쿠타쿠지 이와키 산 삼소 대권현'으로 불리며 지역 영주들의 깊은 신앙을 받았다.[3]

텐쇼 17년(1589년) 이와키 산의 분화로 인해 당시의 햐쿠타쿠지는 완전히 소실되었다.[11][6] 그러나 게이초 8년(1603년), 츠가루 타메노부가 재건을 시작했으며, 이후 노부히라, 노부요시, 노부마사 등 츠가루 가문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본전, 奥門|오쿠몬일본어, 그리고 이를 둘러싼 瑞垣|미즈카키일본어 등이 차례로 재건되었다.[11][6] 이렇게 재건된 건물들은 시타쿠미야라고 불렸으며[6], 에도 시대에는 츠가루 번의 총 진수사(지역 전체를 수호하는 신사) 역할을 했다.

메이지 시대에 정부 주도로 신불 분리 정책이 시행되면서 햐쿠타쿠지는 사찰 기능을 잃고 '츠가루 총 진수사 이와키 산 신사'라는 이름의 신토 신사가 되었다.[4] 메이지 6년(1873년)에는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国幣小社), 즉 국가가 관리하는 주요 신사 중 하나로 지정되어 1946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2][4]

3. 3. 햐쿠타쿠지로의 발전과 신불 분리

칸지 5년(1091년), 신의 계시에 따라 산기슭의 시타쿠미야(下居宮)를 토고시나이(十腰内) 지역에서 이와키 산 동남쪽 기슭의 햐쿠사와(百沢) 지역으로 옮기고, 이를 '''햐쿠타쿠지'''(百沢寺일본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이와키 산 신사의 직접적인 전신이다.[3] 이 사찰은 신곤 종파 불교 사찰로 발전했으며[2], 이와키 산의 세 봉우리는 각각 아미타 여래, 약사여래, 관음보살과 동일시되었다.[2][3] 당시에는 진언종 햐쿠타쿠지 이와키 산 삼소 대권현(三所大権現)이라 불리며 지역 영주들의 깊은 신앙을 받았다.[3]

텐쇼 17년(1589년)에 이와키 산 분화로 햐쿠타쿠지는 전소되었으나[11], 게이초 8년(1603년) 츠가루 타메노부가 재건을 시작했다.[11][6] 이후 노부히라, 노부요시, 노부마사 등 츠가루 가문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본전, 오쿠몬(奥門), 미즈카키(瑞垣) 등이 차례로 재건되었다.[11][6] 이 건물들은 시타쿠미야(下居宮)라고도 불렸다.[6] 에도 시대에는 츠가루 번의 총 진수사(総鎮守社)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정부 주도로 강력하게 시행된 신불 분리 정책에 따라, 불교 사찰이었던 햐쿠타쿠지는 폐사되고 신토식 신사인 츠가루 총 진수사 이와키 산 신사로 개편되었다.[2][4] 메이지 6년(1873년)에는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国幣小社), 즉 국가 제사 등급 중 3등급에 해당하는 신사로 지정되었으며, 이 지위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6년까지 유지되었다.[2][4]

3. 4. 쓰가루 가문의 숭배와 근대

이와키 산 신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설에 따르면 780년(보귀 11년) 이와키 산 정상에 사당을 세운 것이 기원으로 여겨진다[3]. 800년(엔랴쿠 19년)에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가 동북 지방 평정에 도움을 준 이와키 산 신들의 가호에 감사하며 산 정상의 사당을 재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산기슭의 十腰内|토고시나이일본어 지역에 시타쿠미야(下居宮, 현재의 이와키야마 신사 겐키산 신사)가 건립되었고, 산 정상의 사당은 오쿠미야(奥宮)가 되었다[3]. 타무라마로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카노우에노 카리타마로도 함께 모셨다고 한다.

1091년(칸지 5년), 신의 계시에 따라 시타쿠미야는 十腰内|토고시나이일본어 지구에서 이와키 산 남동쪽 기슭의 햐쿠사와(百沢) 지구로 옮겨졌고, 이곳에 신곤 종파 불교 사찰인 百沢寺|햐쿠타쿠지일본어가 세워졌다. 이것이 현재 이와키 산 신사의 직접적인 전신이다[3]. 당시 이와키 산의 세 봉우리는 각각 아미타 여래, 약사여래, 관음보살과 동일시되었으며, 사찰은 '真言宗 百沢寺 岩木山 三所大権現|신곤슈 햐쿠타쿠지 이와키산 산쇼 다이곤겐일본어'이라 불리며 지역의 지토(地頭)와 영주들에게 널리 숭배받았다[3].

1589년(텐쇼 17년) 이와키 산의 분화로 당시의 百沢寺|햐쿠타쿠지일본어는 모두 불탔으나, 에도 시대에 들어 쓰가루번의 총 진수사(領内総鎮守)로 여겨지며 가문의 보호 아래 재건되었다. 1603년(게이초 8년) 쓰가루 타메노부가 재건을 시작하였고, 이후 쓰가루 노부히라, 쓰가루 노부요시, 쓰가루 노부마사 등 역대 번주들의 기부로 본전, 오쿠몬(奥門), 그리고 이를 둘러싼 미즈카키(瑞垣) 등이 차례로 재건되었다[11][6]. 이 건물들은 시타쿠미야(下居宮)라고 불렸다[6].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정부 주도의 신불 분리 정책에 따라 사찰 기능이 폐지되고, '쓰가루 총 진수사 이와키 산 신사'라는 이름의 신토 신사가 되었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국가 신도 체제 하에서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지정되어 국가 관리하의 신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 지위는 1946년까지 유지되었다[2][4].

4. 경내

이와키 산 신사의 경내 건물 대부분은 에도 시대 초기에 히로사키 번의 쓰가루 씨 후원으로 세워졌으며, 특히 겐로쿠 7년(1694년)에 집중적인 건립이 이루어졌다.[6] 본전, 배전, 안쪽 문(奥門|오쿠몬일본어), 누문(楼門|로몬일본어) 등 주요 건물은 화려한 목조각 장식이 특징인 요세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유명한 닛코 도쇼구에 빗대어 '奥日光|오쿠닛코일본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내의 주요 건물 중 본전, 배전, 안쪽 문, 미즈가키(瑞垣|미즈가키일본어), 중문, 누문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6][9][10][11][12], 사무소 건물은 아오모리현 지정 중요 문화재이다.[7][8]

4. 1. 중요 문화재

이와키 산 신사의 많은 건물은 에도 시대 초기에 히로사키 번의 쓰가루 씨 후원으로 건설되었으며, 특히 겐로쿠 7년(1694년)에 집중적인 건설이 이루어졌다. 2층 구조의 정문인 누문(료몬)은 간에이 5년(1628년)에 지어졌다. 본전, 폐전, 안쪽 문(오쿠노몬), 누문(료몬) 등은 장식적인 목각이 특징인 요세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때문에 유명한 닛코 도쇼구를 본따 "오쿠 닛코"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래 건물들은 국가 중요 문화재 또는 현(県)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 중요 문화재'''[6][9][10][11][12]

다음 건물들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겐로쿠 시대에 걸쳐 역대 히로사키번 번주가 건립하거나 기증한 것으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본전''':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가 건립하였다. 3칸사 나가레즈쿠리 양식이며, 구리 기와 지붕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옻칠을 하고 곳곳에 금박을 입혔으며, 조각에는 극채색을 칠하고 장식 금속구를 많이 사용하였다[6]. 지붕 정면에는 처마 당파풍과 치도리 파풍을 두었으며, 정면 처마 기둥에는 승천하는 용과 내려오는 용 조각이 장식된 화려한 건물이다[6].
  • '''안쪽 문 (오쿠노몬)''':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가 건립하였다. 돌출부 1칸, 보 1칸의 향배 당문 형식이며, 토치부키형 구리판 지붕이다[9]. 본전 앞에 위치하며, 검은 옻칠을 바탕으로 장식 금속구와 극채색 조각을 사용하는 등 본전과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였다[6].
  • '''미즈가키''':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가 건립하였다. 본전을 둘러싼 담장으로, 연자창이 설치되어 있고 창 위의 판자에는 새와 짐승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6]. 총 길이는 40칸이며, 토치부키 지붕이고 잠문이 포함되어 있다[10].
  • '''배전''': 간에이 17년(1640년)에 건립되었다. 돌출부 5칸, 보 5칸의 입모야 지붕 평입 구조이며, 토치부키형 구리판 지붕이다. 외부는 단청칠, 내부는 벵가라칠을 하였고, 치도리 파풍의 조각과 가마타는 극채색으로 칠해져 있다[11]. 원래 효쿠자와 사의 본당으로, 게이초 8년(1603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재건을 시작하여 쓰가루 노부히라 대에 완성되었다[11].
  • '''중문''':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가 건립하였다. 배전 앞에 세워진 기리가타(맞배지붕) 4각 문이며, 토치부키형 구리판 지붕이다. 기둥 등 주요 구조부는 검은 옻칠, 나무 끝 부분 등은 붉은 옻칠을 하였으며, 가마타와 란마는 극채색으로 칠해 본전, 안쪽 문과 공통된 기법을 보인다[6]. 과거 별당 사찰이었던 효쿠자와 사 대당(현 배전)의 문으로 건립되었다[12].
  • '''누문 (료몬)''': 간에이 5년(1628년),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가 효쿠자와 사의 산문으로 건립하였다[11]. 입모야 지붕이며 단청칠을 하였고, 토치부키형 구리판 지붕이다. 규모는 돌출부 16.6m, 보 7.98m, 높이 17.85m이다. 상층에는 원래 십일면관음과 오백나한상이 있었으나, 신불분리 정책으로 폐사될 때 사라지고 현재는 계단 아래에 수신상을 모시고 있다[11].


'''현(県) 중요 문화재'''

  • '''사무소''': 고카 2년(1845년)에 건립되었다. 입모야 지붕이며 짚으로 지붕을 이었다. 번주의 참배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다다미방 주변에 흙으로 된 툇마루가 있으며, '어좌의 방'이라 불리는 상단을 중심으로 '어차', '어선립' 등의 공간이 배열되어 있다. 현재는 사무소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 개조되었다[8][7].

4. 2. 아오모리현 지정 중요 보물


  • 사무소

:: 아오모리현 지정 중요 문화재[7]이다. 고카 2년(1845년)에 세워졌다. 입모야 양식의 지붕을 짚으로 이었다. 번주(藩主)의 참배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로, 다다미방 주변에 '흙 가장자리'가 둘러져 있다. '어좌(御座)의 방'이라 불리는 상단(上段)을 중심으로 '어차(御次)', '어선립(御膳立)' 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는 사무소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 구조가 변경되었다[8]

4. 3. 기타


  • 사무소
  • 현 지정 중요문화재[7]. 고카 2년(1845년) 건립. 입모야 지붕 구조이며, 지붕은 짚으로 이었다. 번주의 참배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다다미 방 주변에 흙바닥 복도(土間|도마일본어)가 있으며, '御座の間|고자노마일본어'(어좌의 방)라 불리는 상단(上段)을 중심으로 '御次|오쓰기일본어'(어차), '御膳立|고젠다테일본어'(어선립) 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는 사무소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 개조되었다[8].

  • 중요 문화재 지정 건물

아래의 건물들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겐로쿠 시대에 걸쳐 역대 히로사키번 번주가 건립하거나 기증한 것들이다. 누문, 배전, 그리고 본전, 안쪽 문(奥門|오쿠몬일본어), 미즈가키(瑞垣|미즈가키일본어), 중문을 포함한 4동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본전
  •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가 건립. 나가레즈쿠리 양식의 3칸 규모 신사이며, 구리판 지붕이다. 전면은 검은색 옻칠을 하고 곳곳에 금박을 입혔으며, 조각에는 다채로운 색을 칠하고 장식용 금속구를 많이 사용하였다[6]. 지붕 정면에는 가라하후(唐破風)와 치도리하후(千鳥破風)를 두었고, 정면 처마 기둥에는 승천하는 용과 내려오는 용 조각이 붙어 있는 등 호화로운 건물이다[6].
  • 안쪽 문 (奥門|오쿠몬일본어)
  •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노부마사가 건립. 정면 1칸, 측면 1칸의 고하이 가라몬(向唐門)이며, 토치부키(栩葺|도치부키일본어, 가문비나무 껍질)형 구리판 지붕이다[9]. 본전 앞에 위치하며, 검은색 옻칠을 주로 사용하고 장식용 금속구를 부착했으며, 조각에 다채로운 색을 칠하는 등 본전과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였다[6].
  • 미즈가키 (瑞垣|미즈가키일본어)
  •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노부마사가 건립. 본전 주위를 둘러싸는 울타리로, 렌지마도(連子窓|렌지마도일본어, 격자창)가 짜여 있고 창 위의 하메이타(嵌板|하메이타일본어, 널빤지)에는 새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6]. 전체 길이는 40칸(약 72m)이며, 토치부키(栩葺|도치부키일본어) 지붕이고 잠문(潜門|구구리몬일본어)이 포함되어 있다[10].
  • 배전
  • 간에이 17년(1640년) 건립.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입모야 지붕이며, 토치부키(栩葺|도치부키일본어)형 구리판 지붕이다. 외부는 붉은 옻칠(丹塗|니누리일본어), 내부는 벵갈라 칠을 하였고, 치도리하후(千鳥破風)의 조각과 구미모노는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져 있다[11]. 원래 햐쿠타쿠지(百沢寺)의 본당으로, 게이초 8년(1603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재건을 시작하여 쓰가루 노부요시 대에 완성되었다[11].
  • 중문
  • 겐로쿠 7년(1694년) 4대 번주 노부마사가 건립. 배전 앞에 세워진 기리즈마(맞배) 지붕의 사각문(四脚門|시캬쿠몬일본어)이며, 토치부키(栩葺|도치부키일본어)형 구리판 지붕이다. 기둥 등 축부(軸部|지쿠부일본어)는 검은색 옻칠, 기바나(木鼻|기바나일본어, 기둥 끝 장식), 소데키리(袖切|소데키리일본어, 소매 끝) 등은 붉은 옻칠을 하였고, 구미모노와 란마는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져 있어 본전, 안쪽 문과 공통된 기법을 보여준다[6]. 과거 별당 사찰이었던 햐쿠타쿠지 대당(현 배전)의 문으로 건립되었다[12].
  • 누문
  • 간에이 5년(1628년),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가 햐쿠타쿠지의 산문(山門|산몬일본어)으로 건립하였다[11]. 입모야 지붕이며, 붉은 옻칠(丹塗|니누리일본어)을 하고 토치부키(栩葺|도치부키일본어)형 구리판 지붕을 얹었다. 규모는 정면 16.6m, 측면 7.98m, 높이 17.85m이다. 상층에는 원래 십일면관음과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신불분리에 따른 폐사 때 사라지고, 계단 아래에 수신(水神) 상을 모시게 되었다[11].

5. 제사


  • '''칠일당 신진제''' - 선택 무형 민속 문화재

:: 이와키산 신사를 비롯하여 히로사키시 오니자와의 오니 신사, 히라카와시의 사루가 신사 등에서 행해지는 신사 행사이다.

:: 전국적으로 볼 수 있는 연초나 작은 정월에 행하는 풍작이나 날씨를 점치는 행사 중 하나이다. 이와키산 신사의 "칠일당제"를 기점으로 농사가 시작된다고 여겨져, 쓰가루 지방의 농업신으로서 많은 농가로부터 신앙을 받고 있다. 버드나무 가지나 우왕보인(牛王宝印)을 사용하여 "어류신사(御柳神事)", "어보인 신사(御宝印神事)", "삼박자 신사(三拍子神事)"를 통해 풍작과 가내 안전을 기원한다.[22][13]

  • '''오야마 산케이(신진제)''' - 중요 무형 민속 문화재

:: 중요 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야마가케(山がけ)"라고도 불린다. 쓰가루 지방 전역에서 이와키산 정상에 있는 오쿠미야(奥宮)를 목표로, 음력 7월 말일부터 마을이나 지구 등의 단위로 집단 등반하며 참배하는 제례이다.[20] 과거에는 남성만 등반이 허용되었으나, 메이지 5년(1872년) 이후 여성의 등반도 허용되었다.[14] 준비는 약 10일 전부터 시작되며, 정진결재(精進潔斎)[15]를 하고, 수 미터 높이의 고헤이(御幣)나 다섯 가지 색 또는 글씨를 쓴 노보리(幟) 등을 만들며, 공양용 떡을 준비한다.[16]

:: 음력 7월 말일이 되면 각 마을에서 원로를 선두로 고헤이·노보리 소지자, 하야시카타(囃子方, 악사)가 행렬을 이루어 피리·북 등의 등산 반주(하야시)에 맞춰 サイギサイギ、ドッコイサイギ、オヤマサハツダイ、コンゴウドウサ、イッツニナノハイ、ナムキンミョウチョウライ|사이기사이기, 돗코이사이기, 오야마사하츠다이, 콘고도우사, 이츠니나노하이, 남무금묘초라이jpn라는 구호를 외치며 이와키산 신사로 향한다. 신사에 도착하면 공물, 고헤이, 노보리 등을 봉납하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8월 1일의 어래영(御来迎, 해돋이)을 보기 위해 밤중에 루몬(楼門) 옆의 미소기바(禊場)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 등반을 시작한다.[20][16] 횃불을 들고 サイギ、サイギ……|사이기, 사이기……jpn를 외치며 약 8km의 거리를 4시간 정도 걸려 오른다. 도중에 보우즈코로바시(坊主コロバシ), 하나쿠쿠리(鼻くくり) 등의 험난한 곳을 지나고, 샤쿠조스이(錫杖清水)에서 몸을 정화하며, 타네마키나와시로(種蒔苗代)에서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산 정상에 도달하면 오쿠미야에 고헤이, 어신주(御神酒) 등을 봉납하고 8월 1일의 어래영을 맞이한다. 하산 후에는 등반의 무사함을 이와키산 신사에 보고하고, 바다라(バダラ) 춤을 추면서 귀가한다.[20][16]

:: 마을의 원로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어린 시절에 첫 등반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진다. 도중에 풍흉을 점치고, 오쿠미야 신전에서 크게 떠들거나, 하산할 때 오엽송 가지를 꺾어 돌아가는 등 옛 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수확에 대한 감사와 생업의 무사, 그리고 가내 안전을 기원하는 지역적 특색이 강한 신앙 행사이다.[20][16]

6. 문화재

구분명칭지정 연도비고
건조물이와키 산 신사 누문 부 동찰(棟札) 4매1908년 4월 23일[17]
이와키 산 신사 배전 부 동찰(棟札) 2매1908년 4월 23일[18]
이와키 산 신사 4동 (본전 부 동찰 3매[19], 오쿠몬(奧門)[9], 미즈가키(瑞垣) 부 동찰 1매[10])1971년 6월 22일
이와키 산 신사 중문1986년 1월 22일4동에 추가 지정[12]
이와키 산 신사 사무소2011년 8월 19일[8]
민속문화재이와키산 등반 행사1984년 1월 21일[20]
조각무악면(舞楽面) 3면1956년 5월 14일[23]
공예품낚시 등롱(釣燈籠)1956년 5월 14일[25]
일본도 명(銘) 소슈 주 쓰나히로(相州住綱広일본어)1956년 5월 14일[26]


  • '''무악면 3면''': 3면 모두 작풍으로 보아 가마쿠라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노송나무에 두꺼운 녹 방지 하도[24] 처리를 하고 검은 옻칠을 한 본격적인 기법으로 제작되었다.[23]
  • '''낚시 등롱''': 육각형의 낚시 등롱으로, 동판에 금을 도금한 금동 재질에 꽃문양이 투각되어 있다. 능(稜)이라 불리는 6개의 기둥 부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미카미 모리스케(三上師介)가 시주하고 하나와 군(鼻和郡) 오우라 고(大浦郷)의 사이쇼인(最勝院)・코신 법사(幸信法師)가 발원하여 에이쇼 14년(1517년) 8월에 봉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이쇼인은 후에 히로사키로 옮겨져 쓰가루(津軽) 영내 사찰 중 최상위 지위를 갖게 되는 사이쇼인이다.[25]
  • '''일본도 명(銘) 소슈 주 쓰나히로'''(相州住綱広일본어): 히로사키성 자료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에도 시대 초기 작품으로, 히로사키 번 2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의 명에 의해 제작되었다. 칼에는 앞면에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 뒷면에 "운재천봉무퇴(運在天逢武退)"라는 글자와 함께 양면에 둥근 끝 형태의 봉(棒)과 통(樋)이 새겨져 있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사용된, 칼날을 위로 하여 허리에 차는 다치 형식이며, 이 칼 역시 총은(総銀) 장식과 도공에 의해 쓰바(코등이)가 부착되어 있고, 주칠(朱塗) 은 히루마키(銀蛭巻)[27] 사야(칼집)의 다치 코시라에(拵え)[28]가 갖추어져 있다. 쓰나히로(綱広)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도공으로, 초대 쓰나히로는 오다와라성 성주였던 호조 가문에 고용되어 호조 우지쓰나로부터 '쓰나(綱)' 자를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26]

7. 교통


  • 동일본 여객철도(JR 동일본) 오우 본선 히로사키역 (중앙 출구) 또는 코난 버스 히로사키 버스 터미널에서 코난 버스 카레키행을 이용하여 약 40분 이동 후, 이와키산 신사 버스 정류소에서 하차한다.

참조

[1] 서적 Matsuri: The Festivals of Japan
[2] 논문 Whose Fuji?: Religion, Region, and State in the Fight for a National Symbol, http://museweb02-pub[...] 2008-Spring
[3] 웹사이트 「岩木山神社」青森県神社庁ホームページ http://www.aomori-ji[...]
[4] 웹사이트 岩木山神社の狛犬(18.06.15) - いいかも!!弘前 ~弘前シティプロモーションサイト~ http://www.city.hiro[...] 弘前市 2018-09-14
[5] 웹사이트 お山参詣について|岩木山観光協会|山で動く。山が動く。岩木山観光協会公式ウェブサイト http://www.iwakisan.[...] 岩木山観光協会 2018-09-14
[6] 웹사이트 岩木山神社本殿・奥門・瑞垣・中門 http://www.city.hiro[...] 弘前市役所文化財課 2022-07-14
[7] 문서 都道府県指定の有形文化財に相当
[8] 웹사이트 岩木山神社社務所 https://www.pref.aom[...] 青森県庁文化財保護課 2022-07-14
[9] 웹사이트 奥門 / 岩木山神社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10] 웹사이트 瑞垣 / 岩木山神社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11] 웹사이트 岩木山神社拝殿・楼門 / 国指定文化財 http://www.city.hiro[...] 弘前市役所文化財課 2022-07-14
[12] 웹사이트 中門 / 岩木山神社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13] 웹사이트 津軽の七日堂祭 http://www.city.hiro[...] 弘前市役所文化財課 2022-07-14
[14] 웹사이트 お山参詣図襖絵 http://www.city.hiro[...] 弘前市役所文化財課 2022-07-14
[15] 문서 酒や肉食を慎み身体を清め、けがれを避けること。
[16] 웹사이트 岩木山の登拝行事 http://www.city.hiro[...] 弘前市役所文化財課 2022-07-14
[17] 웹사이트 岩木山神社楼門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18] 웹사이트 岩木山神社拝殿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19] 웹사이트 本殿 / 岩木山神社 / 国宝・重要文化財(建造物)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20] 웹사이트 岩木山の登拝行事 / 重要無形民俗文化財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21] 문서 記録作成等の措置を講ずべき無形の民俗文化財
[22] 웹사이트 津軽の七日堂祭 / 記録作成等の措置を講ずべき無形の民俗文化財 https://kunishitei.b[...]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 文化庁 2022-07-14
[23] 웹사이트 舞楽面 https://www.pref.aom[...] 青森県庁文化財保護課 2022-07-14
[24] 문서 砥粉を水で練り生漆と混ぜたものが、漆錆(うるしさび)とよばれ下地に使われる。
[25] 웹사이트 釣燈籠 https://www.pref.aom[...] 青森県庁文化財保護課 2022-07-14
[26] 웹사이트 日本刀 銘相州住綱広 https://www.pref.aom[...] 青森県庁文化財保護課 2022-07-14
[27] 문서 柄や鞘などを、金属の薄板で螺旋状に巻くことを蛭巻(ひるまき)といい、補強と装飾を兼ねて用いられた。蛭巻太刀は武士に愛好された拵(こしらえ)の一種である。
[28] 문서 拵(こしらえ):日本刀の外装のこ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