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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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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경은 1916년 경성 출생으로, 대한민국의 극작가, 연극 연출가, 무대 미술 감독이다. 1937년 무대 미술가로 데뷔하여, 1940년대 초 현대극단 창립에 참여하며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이후 연극배우 활동을 은퇴하고 연극 감독, 연출, 희곡 극작에 집중했으며,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6년에는 자신이 집필한 소설을 영화화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1976년 삼일로 창고극장을 열어 연극인 발굴에 기여했다. 2006년 모든 분야에서 은퇴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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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 (극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원경
출생일1916년 2월 29일
사망일2010년 12월 3일 (94세)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종로구역 종로방 서린정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국적대한민국
직업극작가
연극 연출가
예술대학 연극 극문학 분야 교수
언어한국어
영어
일본어
본관진보
활동 기간1937년 3월 ~ 2006년 2월 28일
웹사이트kmdb 사람
경력
학력
작품 활동
장르극작 희곡 집필
소설 문학 집필
연극 연출 감독
연극 무대 미술 감독
영화 시나리오 각본 집필
번역 문학 집필
수상

2. 생애

(내용 없음)

2. 1. 초기 활동 (1916년 ~ 1945년)

1916년 2월 29일,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1937년 3월 중순,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상연된 연극 《햄릿》의 무대미술가로 참여하며 연극계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에는 잠시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의 《춘향전》 공연에서 무대장치를 담당하였다.

1940년에 완전히 귀국하여 유치진이 대표로 있던 극단 고협(古協)에 합류했다. 이곳에서 현진건 원작의 《무영탑》을 상연할 때 무대미술 등을 담당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41년에는 현대극장 창립에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무대 미술뿐만 아니라 코미디 연극의 배우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또한 흑룡강 극단과 조춘(早春)극단이 참여한 현대극장 제3회 공연의 무대장치도 담당했다.

1943년에는 희곡 《해적 프리헤이즈》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본의 아니게 일본어로 집필한 것에 대해 깊은 자책감을 느껴 1944년 잠시 연극계를 떠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이후 연극계 복귀를 준비하게 된다.

2. 2. 해방 이후 연극 활동 (1946년 ~ 1960년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연극계에 복귀하였다. 1949년 이후로는 연극배우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연극 감독, 연극 연출, 무대 미술, 희곡 극작 등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로 6개월간 재직하며 소설가 박완서 등을 가르쳤다. 1952년 한국 전쟁 중에는 신청년 악극단의 연극 《격분》을 연출하였다. 1953년 피난지였던 대구에서 악극 몇 편을 연출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극협의 기획담당을 맡다가 국립극장 대표 서항석의 제안으로 국립극단에 합류했다.

1954년에는 국립극단의 전신인 극단 민극 창립에 참여하여 창립 멤버로 활동했으며, 창단 기념 공연인 《파랑새》를 명동 시공관에서 연출했다. 1955년에는 직접 쓴 소설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를 발표하고, 국립극단의 연극 《수선화》를 연출했다. 이후 서라벌예대 연극학과 객원교수, 드라마센터 초빙교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대우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1956년에는 자신의 소설 《격퇴(우리는 이렇게 싸웠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제작에 참여하여, 이강천 감독이 연출하고 시나리오 각본 작가 이정선과 함께 공동으로 각본, 각색, 윤색 작업을 담당했다.

1960년에는 국립창극단의 《심청전》 연출을 맡았다.

2. 3. 후기 활동 및 은퇴 (1969년 ~ 2006년)

1969년 극본 《김대건 신부》와 《해결되지 않는...》을 창작하여 발표하였다. 1970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을 연출하였고, 1972년에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생들의 연극 《백의종군》 연출을 맡았다. 같은 해, 경영난으로 폐관 위기에 처한 에저토 창고극장을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객원교수를 잠시 지냈다. 1976년에는 삼일로 창고극장을 열고 극장장이 되었다. 삼일로 창고극장 대표로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연중무휴 공연을 지속하며 많은 연극인과 신인 극작가, 연출가를 발굴하고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하여 《빨강피터의 고백》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춘향전》 연출을 맡았으며, 1978년에는 드라마센터에서 《오델로》를 연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83년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학과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에는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 극단 발견의회가 기획한 《귀두혹상(鬼頭惑象)》의 연출을 맡았다.

2006년 극작가, 연극연출가, 연극무대미술감독 등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3. 수상 경력

4. 저서 및 논문

(내용 없음)

4. 1. 저서


  • 이원경 연극연출론 (현대미학사, 1997)
  • 불멸의 처 (평민사, 1999)
  • 이원경 연극화술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2003)

4. 2. 논문


  • 연극연출론, 1976
  • '한문권의 한국과 일본의 언어 및 TV방송 화술의 문제점들', ''한국연극'', 1998년 11월호

5. 평가 및 영향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 극장 외 공연을 폭넓게 제한하던 공연법 등의 개정을 위해 설득과 호소 등 꾸준한 노력을 통해 개정을 이끌어냈다. 이는 대학로 극장가가 형성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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