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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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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위종은 대한제국 시기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활동했다. 그는 이범진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후손으로, 1884년에 태어나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7개 국어에 능통한 실력으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으나,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이후 러시아로 귀화하여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여 적군에서 싸웠다. 1924년까지 소련 공산당 간부로 활동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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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위종
원어명李瑋鍾, Vladimir Sergeevich Li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
출생1886년 또는 1887년 (추정)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
배우자옐리자베타 노옐케 (Elizabeta Noelke), 독일계 러시아인 출신
자녀3녀
형제이기종 (형)
거주지대한제국 한성부, 독일 제국 베를린,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련 모스크바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사건)
관직 정보
직책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예하 서기관
임명 시 군주대한제국 고종 이형
임명 시 대통령에밀 루베 프랑스 대통령
임기 시작1902년 7월 18일
임기 종료1902년 9월 3일
직책 2독일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예하 참서관
임명 시 군주 2대한제국 고종 이형
임명 시 주석 2니콜라이 2세 러시아 군주
임기 시작 21902년 9월 3일
임기 종료 21902년 9월 6일
직책 3러시아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예하 3등 참서관
임명 시 군주 3대한제국 고종 이형
임명 시 주석 3니콜라이 2세 러시아 군주
임기 시작 31902년 9월 6일
임기 종료 31905년 9월 6일
군 복무 정보
소속대한제국 외교관 출신
복무 기간1911년 - 1924년
소속 군대러시아 제국 육군, 붉은 군대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이르쿠츠크 사건
계급Podporuchik (러시아 제국 육군 중위)
가족 관계
부모이범진(부)
친인척이경하 (조부), 이범윤(7촌 숙부)
기타 정보
훈장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2. 생애

이위종은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후손으로, 대한제국 주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범진은 반일 성향이 강했고 아관파천에 관여했으며, 일본의 견제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미국,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 공사로 발령받았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프랑스, 러시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고, 1902년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등용되었다.

1911년 아버지 이범진이 자결한 후,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0월 혁명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자 볼셰비키에 가담, 러시아 내전 중 적군에서 백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귀족 출신 아내 및 가족들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1924년까지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치타에서 공무원으로 활동했으나,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2. 1. 성장 배경 및 초기 활동

이위종은 1884년에 태어났다. 1907년 이준, 이상설과 함께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헤이그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는 7개 국어에 능통했다.[1] 그러나 당시 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일본 제국의 반대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기자 협회의 도움으로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150명의 기자들 앞에서 영어로 연설하며 일본의 한국 침략과 그 불법성을 알렸다.[1] 헤이그에서 이준을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1]

2. 2. 헤이그 특사 활동 (1907년)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준, 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3]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은 프랑스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3]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으나,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3] 다른 자료에서는 150명의 기자들 앞에서 영어로 연설했다고도 한다.

일본은 이들 3의사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위종과 이준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다.[3] 헤이그에서 이준의 죽음 이후, 이위종은 이상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 독립을 청원했다.[3]

2. 3. 러시아에서의 활동 (1907년 이후)

1911년 1월 13일 아버지 이범진이 망국의 슬픔으로 자결하자,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으로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ru)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해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러시아 제국 장교가 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장교로 참전하여 1916년 동부유럽전선에 배치되었다.[4]

1917년에 전사 통지서가 가족에게 배달되었으나, 후에 잘못된 통지였음이 밝혀졌다.[4] 2000년대에 발견되어 러시아 정부에 의해 공개된 이위종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1924년까지 생존해 있었다.[4]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이 서부 영토를 상실한 후, 이위종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붉은 군대)에 가담하여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백군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가족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적백내전이 끝난 1924년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치타 등지에서 소련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며, 1917년부터 1924년까지의 자신의 행적을 담은 자서전을 소련 공산당에 제출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4. 러시아 혁명 참여 (1917년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후,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붉은 군대(적군)의 일원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4] 이 과정에서 그는 귀족 출신 아내 및 가족들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알렉산드르 콜차크백군(반혁명군)에 맞서 이르쿠츠크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4]

적백내전이 종결된 후인 1924년까지 이위종은 크라스노야르스크치타 등지에서 소련 공산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4] 당시 이위종은 1917년부터 1924년까지의 자신의 행적이 담긴 자서전을 소련 공산당에 제출하였으나, 1924년 이후의 행적은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4]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이인달(李寅達)
조부이경하(李景夏, 1811년 ~ 1891년)
이범진(李範晋, 1853년 ~ 1911년)
이기종(李璣鍾)
부인엘리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 놀켄 (러시아 귀족 출신, 1906년 결혼)



1906년 러시아 귀족 출신 엘리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 놀켄과 결혼했다.[1]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1]

4. 수상 내역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평가 및 논란

이위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독립운동 헌신과 국제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 이상설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3]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일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3] 블라디보스토크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것도 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위종의 볼셰비키 가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선과 배치되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숙청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일부에서는 그의 행적을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술국치 이후 아버지 이범진이 자결하자,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으로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ru)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붉은 군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소련 공산당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5. 1. 긍정적 평가

이위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 이상설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 활동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그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여,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협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어로 연설,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였다.[3]

이후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11년에는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0월 혁명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으로 활동하였다. 이는 그의 국제주의적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5.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이위종의 러시아 혁명 참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선과 배치되는 행위로,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볼셰비키 가담은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여주지만, 스탈린 체제 하에서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이위종의 행적을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술국치 후 1911년 1월 13일, 아버지 이범진이 망국의 슬픔으로 자살하자 그 해에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 소속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러시아 제국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러시아 제국으로 귀화한 후에는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ru)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제1차 세계 대전에 러시아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1916년동부유럽전선에 발령받았다.[4] 1917년에 아내인 엘리자베타에게 전사통지서가 배달되었으나 나중에 잘못된 통지서로 밝혀졌다.[4]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러시아 제국이 서부 영토 대부분(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을 상실하자, 이위종은 모스크바로 갔다. 이후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에 가입, 붉은 군대에 가담해 싸웠다. 이때 가족들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적백내전 종결 후인 1924년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치타 등지에서 소련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6. 기타

이위종은 7개 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서 150명의 기자들 앞에서 일본 제국의 한국 침략과 그 불법성을 영어로 연설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네 조부는 한국 귀족 (My grandfather were a Korean aristocrat) http://newslibrary.n[...] Kyunghyang Shinmun 2018-06-10
[2] 문서 일명(一名)은 옐리자베타 놀켄, 독일계 러시아인 출신.
[3] 뉴스 103년 전 만국평화회의 닫힌 문 앞 울분 토하던 한국… 그 현장 잊어도 되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4] 뉴스인용 헤이그密使 李瑋鐘의 『마지막 삶』 확인 - 蘇 장교로 1차 大戰서 戰死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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