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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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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충남은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코치, 감독으로 활동했다. 헤이안 고등학교, 류코쿠 대학을 거쳐 1966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2년 은퇴 후 코치로 전향하여 난카이 호크스,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동했으며,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1983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한국어 구사 문제로 인해 1년 만에 해임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광고 회사를 경영하며, 류코쿠 대학 야구부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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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남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야마모토 다다오
본명이충남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일본 교토부교토시나카교구
생년월일1944년 6월 28일 ()
신장175cm
체중71kg
투구
타석
수비 위치2루수
프로 입단 연도1966년
드래프트 순위1966년 2차 드래프트 2위
첫 출장1967년
마지막 경기1972년
선수 경력
고등학교헤이안 고등학교
대학교류코쿠 대학
프로 구단난카이 호크스 (1967년 ~ 1972년)
감독・코치 경력
코치난카이 호크스 (1973년 ~ 1977년)
한큐 브레이브스 2군 코치 (1978년 ~ 1979년)
한큐 브레이브스 1군 수비주루 코치 (1980년 ~ 1982년)
삼성 라이온스 1군 수석 코치 (1983년)
감독 대행삼성 라이온스 (1983년)
감독삼성 라이온스 (1983년)
대학교류코쿠 대학
일본어 표기
로마자 표기Tadao Yamamoto
가나やまもと ただお
한자山本忠男
한국어야마모토 다다오

2.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66년 NPB 제2차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한 이충남은, 큰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을 인정받아 1년차인 1967년유격수로 1군 공식전 11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0년에는 1군 공식전에서 개인 최다인 87경기에 출전하여 고바 타케시, 아오노 슈조와 2루수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71년에 사쿠라이 테루히데가 2루수 주전으로 정착하면서 출전 기회가 줄었다.

1972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이충남은 난카이에 남아 2군 수비·주루 코치(1973년·1974년), 2군 헤드 코치(1975년), 1군 코치(1976년·1977년)를 역임했다. 이는 포수 겸 감독이었던 노무라 가쓰야와 내야수 출신 1군 헤드 코치였던 돈 브레이저에게 지도를 받은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1977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가쓰야 감독 해임 소동이 벌어지자 구단은 이충남에게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그는 노무라와 함께 팀을 떠났다.

1978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2군 코치로 취임했으며,[1]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1군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다.[1] 이충남은 일본에서 데이터 야구의 원조로서 각 팀의 전력을 분석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2. 1. 학창 시절 및 난카이 호크스

헤이안 고등학교 3학년 때 봄의 선발, 여름의 선수권 대회에 4번 타자로 출전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류코쿠 대학에 진학하여 4번 타자 겸 3루수로 활약하며,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통산 77경기 273타수 63안타, 타율 .231, 4홈런을 기록했다. 1966년 제2차 지명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이충남일본어은 중학교 동급생으로 간사이 TV 출신 프리 아나운서 겸 종지원대학 객원 교수인 쿠와바라 세이헤이와 전 한신 타이거스 외야수 히야마 신지로의 숙모가 있다.[3]

헤이안 고등학교 진학 후, 3학년이던 1962년에 4번(혹은 5번) 타자 겸 3루수로 봄과 여름 연속으로 고시엔 구장 전국 대회에 출전하였다. 봄의 제3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1회전에서 니치다이산고등학교에게 패배했다(이 학교는 해당 대회에서 준우승). 여름의 제4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1회전에서도 사이조 고등학교의 이시카와 준 (릿쿄 대학→가네보) - 무라카미 공야 배터리에게 1-2로 아쉽게 패배했다.

졸업 후 진학한 류코쿠 대학에서도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 겸 3루수로 발탁되었다. 당시 팀이 가맹했던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는 팀의 1부 승격에 공헌하였다. 1966년 춘계 리그에서 긴키 대학, 추계 리그에서 간세이 가쿠인 대학과 우승을 다투었지만, 모두 2위에 그치며 첫 우승에는 실패했다. 재학 중 리그전 통산 7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31 (273타수 63안타), 4홈런을 기록했다. 동기로는 이노 마사시가 있다.

1966년 NPB 제2차 드래프트 회의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큰 체격임에도 베이스 1바퀴를 14초 2에 주파하는(수동 계측) 빠른 발을 인정받아, 1967년에는 유격수로 1군 공식전 11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1970년에는 1군 공식전에서 개인 최다인 87경기에 출전, 고바 타케시·아오노 슈조와 2루수 자리를 두고 경쟁했지만, 다음 해인 1971년에 사쿠라이 테루히데가 2루수 주전으로 정착하면서 출전 기회가 줄었다.

포수 겸 감독 노무라 가쓰야와 내야수 출신 1군 헤드 코치 돈 브레이저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1972년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 후에도 난카이에 남아 2군 수비·주루 코치(1973년·1974년), 2군 헤드 코치(1975년), 1군 코치(1976년·1977년)를 역임했다. 1977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감독 해임 소동이 일어나자 구단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무라와 함께 퇴단했다.

2. 2. 선수 시절 통산 기록

연도팀명타율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실희생타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실책
1967난카이0.214263028361021331000101702
19680.24029282526001922000102901
19690.25918272737100822000000500
19700.29387187174335110078218521210112237
19710.1965061567110001120000400411
19720.14819282714100530010000201
통산6시즌0.2522293613374985130101283010222161449412


3. 코치 경력

李忠南|이충남일본어은 현역 은퇴 후, 노무라 가쓰야와 돈 브레이저의 지도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코치 경력을 시작했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에서 2군 수비·주루 코치, 2군 헤드 코치, 1군 코치를 역임했다. 1977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가쓰야 감독 해임과 함께 난카이를 떠났다.[1]

1978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2군 코치로 부임했고,[1]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1군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다.[1]

1983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 시즌 중 서영무 감독이 건강 문제로 휴양하면서 감독 대행을 맡았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종합 성적 4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해임되었다. 그러나 난카이 시절 노무라 가쓰야와 돈 브레이저에게서 배운 데이터 분석 노하우를 팀에 전수하여, 이후 1984년부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1985년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광고 회사를 경영하며, 이발관 체인점의 광고를 담당하면서 간사이 TV 출신 아나운서 쿠와바라 세이헤이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기도 했다. 2015년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지도 자격을 인정받아,[2] 모교인 류코쿠 대학 야구부 코치를 맡았다.

3. 1. 난카이 호크스,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

李忠南|이충남일본어1973년부터 난카이 호크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 시즌 후,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해임 논란 때문에 난카이 구단으로부터 강한 잔류 요청을 받았으나 노무라 감독과 함께 퇴단했다.[3] 1978년부터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여 1979년까지 2군 코치[3], 1980년~1982년 동안 1군 수비 주루 코치[4]로 활약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데이터 야구의 원조로서 각 팀의 전력 분석으로 이름을 알렸다.

3. 2. 삼성 라이온즈 코치 및 감독 대행

OB 베어스에 밀려 원년 우승에 실패한 삼성 라이온즈는 그 책임을 물어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영무 감독의 오른팔이었던 임신근 투수코치를 해임하고, 이충남을 '''"수석 코치"'''라는 생소한 직위로 영입했다.[5] 서영무 감독은 이충남 수석 코치 영입을 자신에 대한 삼성 라이온즈 구단의 냉대라고 불만을 표시하여 1983년 시즌이 시작한 후 한 달 만에 건강상의 문제를 들어 전격 사임하였다. 이충남은 남은 기간 동안 감독 대행의 직위로 삼성 라이온즈를 지휘하였다. 비록 감독 대행이었지만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충남을 제2대 감독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를 전혀 못 하는 데다가,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배경으로 짧은 시간 내에 대한민국 선수들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여 팀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 리그 5위, 후기 리그 2위를 차지해 전체 4위의 성적으로 마감하여 1년 만에 해임되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삼성을 맡았지만, 그의 재임 하에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 수비가 안정화되었고 불모지나 다름없던 데이터 분석이라는 선진 야구 기법이 대한민국에 도입되어 이후 1984년1985년삼성 라이온즈의 전성기에 기여했다.

4. 삼성 라이온즈 감독 대행 이후

일본 귀국 후, 광고 회사를 경영하였다. 이발관(주식회사 마츠모토가 오사카부·효고현 내에서 전개하는 이발점 체인)의 광고를 취급한 인연으로, 2004년 6월에 간사이 TV를 정년 퇴직한 쿠와바라 세이헤이를 2018년까지 이발관의 "캠페인 보이"(간판 모델)로 기용했다[1]. 한편,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연수 제도를 통해 2015년 1월 30일자로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자격 회복 적성을 인정받았다[2]. 이에 따라, 일본 학생 야구 협회에 가맹하는 고등학교·대학 야구부에서 지도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모교인 류코쿠 대학 야구부에서 코치를 맡았다.

5. 평가 및 영향

이충남은 일본 프로 야구 선수 및 코치 출신으로,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난카이 호크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쌓은 경험은 훗날 대한민국 야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대행을 맡아 짧은 기간 동안 데이터 야구 분석 기법을 도입, 대한민국 야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노력은 1984년1985년 삼성 라이온즈 전성기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귀국 후에는 광고 회사를 경영했고, 2015년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자격 회복을 인정받아 모교인 류코쿠 대학 코치를 맡기도 했다.

5. 1. 한일 야구 교류

이충남은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1967년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72년 은퇴했다. 1973년부터 난카이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1977년 노무라 가쓰야 감독 해임 논란으로 퇴단했다. 1978년 한큐 브레이브스로 이적하여 1982년까지 코치로 활동하며, 데이터 야구의 원조로 불렸다.[3][4]

1983년 삼성 라이온즈OB 베어스에 밀려 원년 우승에 실패하자, 임신근 투수 코치를 해임하고 이충남을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해태 타이거즈 감독 물망에도 올랐으나 언어 문제로 무산되었다.[5] 서영무 감독 사임 후에는 감독 대행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지휘했다. 삼성 라이온즈 구단은 이충남을 제2대 감독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일본인과 다름없는 배경으로 선수들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해 팀 성적은 좋지 않았다. 1983년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 리그 5위, 후기 리그 2위, 전체 4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이충남은 1년 만에 해임되었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 수비가 안정화되었고, 데이터 야구 분석 기법이 대한민국에 도입되어 1984년1985년 삼성 라이온즈 전성기에 기여했다.

6. 가족 관계 및 기타

간사이 TV 출신 프리 아나운서 구와바라 쇼헤이와 히야마 신지로(前 한신 타이거스 외야수)의 숙모는 이충남의 중학교 동급생이다.[3]

7. 등번호

연도등번호
1967년 ~ 1972년26
1973년 ~ 1977년75
1978년 ~ 1982년70


참조

[1] 서적 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
[2] 웹사이트 学生野球資格回復に関する規則 第4条による認定者 https://www.student-[...] 日本学生野球協会
[3] 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 [영구보존판] 깨어나는 용자의 기억(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베이스 볼 매거진 사 2011
[4] 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 [영구보존판] 깨어나는 용자의 기억(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베이스 볼 매거진 사 2011
[5] 뉴스 三星(삼성) 助監督(조감독)에 재일동포 李忠男(이충남)씨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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