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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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창단하여 2001년 KIA 타이거즈로 팀명이 변경되기 전까지 활동한 프로 야구단이다.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등 KBO 리그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응용 감독, 선동열, 이종범 등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으며, 방수원은 KBO 리그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한때 광주에서 홈 경기를 치르지 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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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
구단 정보 | |
구단 이름 | 해태 타이거즈 |
구단 이름 (영문) | Haitai Tigers |
구단명 | KIA 타이거즈 |
회사명 | 해태타이거즈 |
소속 리그 | 한국프로야구 |
가맹 단체 | 한국야구위원회 |
설립 연도 | 1982년 |
해체 연도 | 2001년 |
연고지 | 광주, 전남, 전북 |
이전 홈구장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1982년 ~ 2001년)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1982년 ~ 1989년) |
수용 인원 | 13,400명 |
영구 결번 | 18 선동열 7 이종범 |
구단주 | 이은경 (구단주 대행,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 대행) |
감독 | 김동엽 (1982년) 조창수 (1982년, 감독대행) 김응룡 (1983년 ~ 2000년) 김성한 (2001년) |
우승 기록 | |
리그 우승 횟수 | 6 |
리그 우승 | 1983전기·1988통합·1991·1993·1996·1997 |
한국시리즈 우승 횟수 | 9 |
한국시리즈 우승 | 1983·1986·1987·1988·1989·1991·1993·1996·1997 |
한국시리즈 출장 횟수 | 9 |
한국시리즈 출장 | 1983·1986·1987·1988·1989·1991·1993·1996·1997 |
플레이오프 횟수 | 4 |
플레이오프 | 1987·1989·1990·1992 |
준플레이오프 횟수 | 1 |
준플레이오프 | 1994 |
기타 정보 | |
마스코트 | 호랑이 |
2. 역사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15명의 선수로 창단되었다.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선수단으로, OB 베어스와 MBC 청룡에 이어 3번째였다. 선수 대부분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창단 초기, 감독과 코치진 간의 불화로 김동엽 감독이 사임하고 조창수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첫 시즌은 38승 42패, 4위로 마감했다. 김성한은 투타 겸업으로 10승(3선발승)-타점왕(69타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김봉연은 22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올랐다.
1983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로 이뤄진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과 동국대 감독으로 있던 김인식을 추가 영입해 코치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한편 김응용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 훈련 외 시간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 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그 결과, 해태는 시즌 전 중위권 전력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83년 6월 24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 차로 뒤진 가운데 6월 7일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 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이상윤이 20승(13선발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7선발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기 리그 우승을 MBC 청룡에 넘겨 주고, 55승 44패 1무, 최종 순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다. MBC 청룡과 맞붙었던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이상윤과 김용남, 주동식과 타선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등 'KKK포'의 활약 속에 4승 1무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다.
그러나 1984년은 연봉처우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서 전기 리그 4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5위로 추락했다. 그러나 5월 5일 광주무등구장에서 벌어진 삼미와의 경기에서 투수 방수원이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85년에도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문제가 생겨 전기 리그 3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3위에 그쳤다. 그러나 신인 외야수 이순철과 투수 선동열, 그리고 홈런왕과 최다 안타, MVP를 차지한 김성한의 활약으로 1986년 ~ 1989년 한국시리즈 4연패의 기틀을 쌓게 된다.
1986년 해태 타이거즈는 평균 자책점 2.86을 기록한 철벽 마운드와 김봉연, 김종모,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등의 맹활약으로 전·후기 리그 2위를 기록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였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투수 김정수의 맹활약으로 4승 1패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는 198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를 1번, 빙그레 이글스를 2번 누르고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각각 김정수, 김준환, 문희수, 박철우가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
1989년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하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그동안 유지해 온 전라북도 지역 연고권을 신생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에 양도하게 된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 및 신인 1차 지명 연고 지역도 호남 전 지역에서 광주직할시와 전라남도로 축소되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전주야구장에서 홈 경기를 분산 개최해 왔는데, 전주에서 거둔 통산 성적은 40승 1무 24패, 승률 0.623로 높았다. 특히 1987년에는 전국체전의 광주 개최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전주야구장으로 옮겨서 치렀는데, 해태 타이거즈는 OB 베어스를 전주에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있다.
1990년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패해 한국시리즈 5연패에 실패하나, 1991년 빙그레 이글스를 누르고 6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이 해 골든 글러브 수상자 10명 중 무려 6명(선동열, 장채근, 김성한, 한대화, 이호성, 이순철)의 골든 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며, 팀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1992년 선동열의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배하였으나, 1993년 괴물 신인 유격수 이종범의 등장과 다승왕 조계현을 비롯해 선동열, 이대진, 송유석, 이강철 등의 맹활약으로 81승 42패 3무의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하였다.
1994년 이종범이 0.393(역대 2위)의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게 패배하여 4위에 머물게 된다. 1995년에는 이종범과 이대진의 방위 복무로 인한 전력 공백으로 4위로 시즌을 마치고, KBO 규정에 따라 준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하여 시즌을 마친다.
1996년 선동열의 주니치 이적의 공백을 투수 임창용과 강태원이 메우며,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여덟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1997년에도 이종범, 이대진 등의 맹활약으로 아홉 번째 우승을 거머쥐어, 15년간 우승 9번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세우는데, 투수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종범이 주니치로 이적한 후 맞은 첫 시즌인 1998년에 해태는 시즌 5위를 기록했다. 1996년 2차 1순위로 지명한 좌타자 장성호(.312)를 발견한 데에 위안을 삼았다.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 하에 들어가 모기업 해태제과의 자금난이 심해지면서, 이는 2001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악재가 되었다. 이 여파로 쌍방울 레이더스처럼 몇몇 선수들이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1999년 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트레이드로 영입한 좌타자 양준혁과 홍현우, 트레이시 샌더스의 맹활약으로 팀 최다 홈런 기록(210개)을 경신하였으나, 마운드의 부진으로 통합 7위에 머물게 된다. 2000년에도 역시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6위에 머물렀고, 해태의 통산 우승 9회를 이룬 김응용 감독마저 2000 시즌을 마치고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면서 김성한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승격했다. 2001년 시즌 중반인 7월에 기아자동차가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을 인수했고, 동년 8월 1일부터 KIA 타이거즈로 팀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1. 창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15명의 선수로 창단되었다. 6개 구단 중 가장 적은 선수단으로, OB 베어스와 MBC 청룡에 이어 3번째였다. 선수 대부분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창단 초기, 감독과 코치진 간의 불화로 김동엽 감독이 사임하고 조창수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첫 시즌은 38승 42패, 4위로 마감했다. 김성한은 투타 겸업으로 10승(3선발승)-타점왕(69타점)이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김봉연은 22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올랐다.2. 2. 김응용 감독 시대 (1983년 ~ 2000년)
1983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로 이뤄진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과 동국대 감독으로 있던 김인식을 추가 영입해 코치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재일교포 선수인 김무종과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한편 김응용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 훈련 외 시간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 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그 결과, 해태는 시즌 전 중위권 전력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83년 6월 24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 차로 뒤진 가운데 6월 7일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 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이상윤이 20승(13선발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7선발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기 리그 우승을 MBC 청룡에 넘겨 주고, 55승 44패 1무, 최종 순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다. MBC 청룡과 맞붙었던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이상윤과 김용남, 주동식과 타선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등 'KKK포'의 활약 속에 4승 1무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다.
그러나 1984년은 연봉처우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서 전기 리그 4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5위로 추락했다. 그러나 5월 5일 광주무등구장에서 벌어진 삼미와의 경기에서 투수 방수원이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85년에도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문제가 생겨 전기 리그 3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3위에 그쳤다. 그러나 신인 외야수 이순철과 투수 선동열, 그리고 홈런왕과 최다 안타, MVP를 차지한 김성한의 활약으로 1986년 ~ 1989년 한국시리즈 4연패의 기틀을 쌓게 된다.
2. 2. 1. 첫 우승과 시련 (1983년 ~ 1985년)
1983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해태는 시즌 전 중위권 전력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83년 6월 24일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에서 전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상윤이 20승(13선발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7선발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후기 리그 우승을 MBC 청룡에 넘겨 주고, 55승 44패 1무, 최종 순위 2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한다. MBC 청룡과 맞붙었던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이상윤과 김용남, 주동식과 타선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등 'KKK포'의 활약 속에 4승 1무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다.그러나 1984년은 연봉처우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서 전기 리그 4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5위로 추락했다. 그러나 5월 5일 광주무등구장에서 벌어진 삼미와의 경기에서 투수 방수원이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85년에도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문제가 생겨 전기 리그 3위, 후기 리그 3위, 최종 순위 3위에 그쳤다. 그러나 신인 외야수 이순철과 투수 선동열, 그리고 홈런왕과 최다 안타, MVP를 차지한 김성한의 활약으로 1986년 ~ 1989년 한국시리즈 4연패의 기틀을 쌓게 된다.
2. 2. 2. 해태 왕조 (1986년 ~ 1997년)
1986년 해태 타이거즈는 평균 자책점 2.86을 기록한 철벽 마운드와 김봉연, 김종모,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등의 맹활약으로 전·후기 리그 2위를 기록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였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투수 김정수의 맹활약으로 4승 1패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다.이후 해태 타이거즈는 198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를 1번, 빙그레 이글스를 2번 누르고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각각 김정수, 김준환, 문희수, 박철우가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
1989년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하는 제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그동안 유지해 온 전라북도 지역 연고권을 신생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에 양도하게 된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 및 신인 1차 지명 연고 지역도 호남 전 지역에서 광주직할시와 전라남도로 축소되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전주야구장에서 홈 경기를 분산 개최해 왔는데, 전주에서 거둔 통산 성적은 40승 1무 24패, 승률 0.623로 높았다. 특히 1987년에는 전국체전의 광주 개최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전주야구장으로 옮겨서 치렀는데, 해태 타이거즈는 OB 베어스를 전주에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있다.
1990년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패해 한국시리즈 5연패에 실패하나, 1991년 빙그레 이글스를 누르고 6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이 해 골든 글러브 수상자 10명 중 무려 6명(선동열, 장채근, 김성한, 한대화, 이호성, 이순철)의 골든 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며, 팀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1992년 선동열의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배하였으나, 1993년 괴물 신인 유격수 이종범의 등장과 다승왕 조계현을 비롯해 선동열, 이대진, 송유석, 이강철 등의 맹활약으로 81승 42패 3무의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하였다.
1994년 이종범이 0.393(역대 2위)의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게 패배하여 4위에 머물게 된다. 1995년에는 이종범과 이대진의 방위 복무로 인한 전력 공백으로 4위로 시즌을 마치고, KBO 규정에 따라 준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하여 시즌을 마친다.
1996년 선동열의 주니치 이적의 공백을 투수 임창용과 강태원이 메우며,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승 2패로 여덟 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1997년에도 이종범, 이대진 등의 맹활약으로 아홉 번째 우승을 거머쥐어, 15년간 우승 9번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세우는데, 투수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거두었다.
2. 2. 3. 왕조의 쇠락 (1998년 ~ 2001년)
이종범이 주니치로 이적한 후 맞은 첫 시즌인 1998년에 해태는 시즌 5위를 기록했다. 1996년 2차 1순위로 지명한 좌타자 장성호(.312)를 발견한 데에 위안을 삼았다.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 하에 들어가 모기업 해태제과의 자금난이 심해지면서, 이는 2001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악재가 되었다. 이 여파로 쌍방울 레이더스처럼 몇몇 선수들이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1999년 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트레이드로 영입한 좌타자 양준혁과 홍현우, 트레이시 샌더스의 맹활약으로 팀 최다 홈런 기록(210개)을 경신하였으나, 마운드의 부진으로 통합 7위에 머물게 된다. 2000년에도 역시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6위에 머물렀고, 해태의 통산 우승 9회를 이룬 김응용 감독마저 2000 시즌을 마치고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면서 김성한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승격했다. 2001년 시즌 중반인 7월에 기아자동차가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을 인수했고, 동년 8월 1일부터 KIA 타이거즈로 팀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3. 5.18 민주화 운동과 홈경기 금지
5월 18일에 광주 연고 구단인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출범 이후 1982년부터 1999년까지 18년 동안 광주에서 경기를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3] 5·18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가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프로야구 경기를 하지 못하도록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1986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8년 5월 18일에 호남 지역에서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며칠 전에 신군부의 권유에 따라 다른 구장으로 경기 장소가 변경되었다.[3]
2000년부터 5월 18일에 광주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렸다.
4. 주요 선수
해태 타이거즈는 선동열, 이종범, 김성한, 이순철 등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이름 | 국적 | 포지션 | 년도 |
---|---|---|---|
강만식 | 투수 | 1982-1986 | |
강태원 | 투수 | 1989-2000 | |
김대현 | 투수 | 1986-1988 | |
김상진 | 투수 | 1996-1999 | |
김용남 | 투수 | 1982-1986 | |
김정수 | 투수 | 1986-1999 | |
문희수 | 투수 | 1984-1995 | |
선동열 | 투수 | 1985-1995 | |
송유석 | 투수 | 1987-1996 | |
신동수 | 투수 | 1986-1993 | |
이강철 | 투수 | 1989-1999 | |
이대진 | 투수 | 1993-2000 | |
이상윤 | 투수 | 1983-1988 | |
이원식 | 투수 | 1995-2000 | |
조계현 | 투수 | 1989-1997 | |
주동식 | 투수 | 1983-1984 | |
차동철 | 투수 | 1986-1989 | |
황기선 | 투수 | 1983-1985 | |
이름 | 국적 | 포지션 | 년도 |
---|---|---|---|
김봉연 | 내야수 | 1982-1988 | |
김성한 | 내야수 | 1982-1995 | |
김종국 | 내야수 | 1996-2000 | |
박철우 | 내야수 | 1987-1993 | |
백인호 | 내야수 | 1987-19921997-1999 | |
서정환 | 내야수 | 1983-1989 | |
윤재호 | 내야수 | 1989-1993 | |
이건열 | 내야수 | 1986-1997 | |
이종범 | 내야수 | 1993-1997 | |
이호준 | 내야수 | 1994-2000 | |
장성호 | 내야수 | 1996-2000 | |
장진범 | 내야수 | 1983-1987 | |
차영화 | 내야수 | 1982-1989 | |
한대화 | 내야수 | 1986-1993 | |
홍현우 | 내야수 | 1990-2000 | |
이름 | 국적 | 포지도 | 년도 |
---|---|---|---|
김일권 | 외야수 | 1982-1987 | |
김종모 | 외야수 | 1982-1992 | |
김준환 | 외야수 | 1982-1989 | |
김창희 | 외야수 | 1997-2000 | |
김평호 | 외야수 | 1986-1990 | |
동봉철 | 외야수 | 1996 | |
박재용 | 외야수 | 1994-1998 | |
양준혁 | 외야수 | 1999 | |
이순철 | 외야수 | 1985-1997 | |
이호성 | 외야수 | 1990-2000 | |
최훈재 | 외야수 | 1997-1998 | |
4. 1. 투수
4. 2. 타자
5. 역대 기록
wikitext
연도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득점 | 실점 | PW% | ERA | WHIP | OAVG | OOBP | AVG | OBP | SLG | OPS | 안타 | 홈런 | BB | 삼진 | 도루 | 병살 | |
---|---|---|---|---|---|---|---|---|---|---|---|---|---|---|---|---|---|---|---|---|---|---|---|---|
종합 | 정규 | |||||||||||||||||||||||
1982 | 4 | 4 | 80 | 38 | 0 | 42 | 0.475 | 374 | 388 | 0.491 | 3.79 | 1.40 | 0.262 | 0.341 | 0.261 | 0.328 | 0.408 | 0.736 | 696 | 84 | 235 | 296 | 155 | 59 |
1983 | 1 | 2 | 100 | 55 | 1 | 44 | 0.556 | 422 | 390 | 0.520 | 3.17 | 1.23 | 0.244 | 0.311 | 0.268 | 0.334 | 0.388 | 0.722 | 881 | 78 | 292 | 372 | 130 | 76 |
1984 | 5 | 5 | 100 | 43 | 3 | 54 | 0.443 | 369 | 398 | 0.481 | 3.16 | 1.24 | 0.249 | 0.312 | 0.248 | 0.317 | 0.365 | 0.682 | 822 | 76 | 313 | 496 | 87 | 87 |
1985 | 3 | 3 | 110 | 57 | 1 | 52 | 0.523 | 483 | 465 | 0.509 | 3.64 | 1.29 | 0.265 | 0.325 | 0.272 | 0.337 | 0.402 | 0.739 | 1009 | 99 | 348 | 386 | 130 | 85 |
1986 | 1 | 2 | 108 | 67 | 4 | 37 | 0.644 | 474 | 372 | 0.560 | 2.86 | 1.21 | 0.238 | 0.308 | 0.259 | 0.325 | 0.390 | 0.715 | 929 | 99 | 321 | 406 | 120 | 82 |
1987 | 1 | 2 | 108 | 55 | 5 | 48 | 0.534 | 393 | 401 | 0.495 | 3.16 | 1.26 | 0.244 | 0.319 | 0.252 | 0.321 | 0.360 | 0.681 | 910 | 71 | 335 | 379 | 90 | 96 |
1988 | 1 | 1 | 108 | 68 | 2 | 38 | 0.642 | 505 | 364 | 0.581 | 2.86 | 1.18 | 0.239 | 0.303 | 0.283 | 0.350 | 0.421 | 0.771 | 1019 | 112 | 345 | 382 | 136 | 97 |
1989 | 1 | 2 | 120 | 65 | 4 | 51 | 0.560 | 500 | 442 | 0.531 | 3.34 | 1.23 | 0.236 | 0.310 | 0.255 | 0.339 | 0.364 | 0.703 | 1011 | 90 | 470 | 508 | 111 | 111 |
1990 | 3 | 2 | 120 | 68 | 3 | 49 | 0.581 | 538 | 458 | 0.540 | 3.36 | 1.23 | 0.233 | 0.312 | 0.270 | 0.352 | 0.392 | 0.744 | 1066 | 87 | 466 | 544 | 101 | 100 |
1991 | 1 | 1 | 126 | 79 | 5 | 42 | 0.653 | 618 | 409 | 0.602 | 2.89 | 1.10 | 0.226 | 0.290 | 0.259 | 0.350 | 0.418 | 0.768 | 1069 | 144 | 516 | 588 | 152 | 102 |
1992 | 3 | 2 | 126 | 71 | 1 | 54 | 0.568 | 701 | 571 | 0.551 | 4.21 | 1.36 | 0.263 | 0.336 | 0.272 | 0.365 | 0.425 | 0.789 | 1139 | 138 | 559 | 656 | 134 | 114 |
1993 | 1 | 1 | 126 | 81 | 3 | 42 | 0.659 | 513 | 420 | 0.550 | 2.92 | 1.16 | 0.229 | 0.304 | 0.251 | 0.330 | 0.368 | 0.698 | 1030 | 95 | 452 | 606 | 161 | 107 |
1994 | 4 | 4 | 126 | 65 | 2 | 59 | 0.524 | 563 | 509 | 0.525 | 3.60 | 1.26 | 0.243 | 0.321 | 0.271 | 0.328 | 0.388 | 0.716 | 1153 | 93 | 333 | 583 | 164 | 76 |
1995 | 4 | 4 | 126 | 64 | 4 | 58 | 0.525 | 431 | 434 | 0.498 | 3.06 | 1.16 | 0.232 | 0.304 | 0.242 | 0.309 | 0.345 | 0.654 | 989 | 75 | 341 | 675 | 130 | 94 |
1996 | 1 | 1 | 126 | 73 | 2 | 51 | 0.589 | 554 | 441 | 0.557 | 3.14 | 1.16 | 0.231 | 0.304 | 0.245 | 0.329 | 0.366 | 0.695 | 1022 | 92 | 463 | 744 | 170 | 86 |
1997 | 1 | 1 | 126 | 75 | 1 | 50 | 0.600 | 616 | 510 | 0.547 | 3.65 | 1.22 | 0.239 | 0.317 | 0.258 | 0.340 | 0.408 | 0.748 | 1081 | 133 | 466 | 722 | 148 | 102 |
1998 | 5 | 5 | 126 | 61 | 1 | 64 | 0.488 | 489 | 531 | 0.479 | 3.91 | 1.27 | 0.257 | 0.324 | 0.258 | 0.325 | 0.376 | 0.701 | 1067 | 94 | 367 | 669 | 58 | 125 |
1999 | 7 | 7 | 132 | 60 | 3 | 69 | 0.465 | 765 | 743 | 0.507 | 5.21 | 1.48 | 0.280 | 0.357 | 0.278 | 0.362 | 0.466 | 0.828 | 1264 | 210 | 555 | 871 | 98 | 104 |
2000 | 6 | 6 | 133 | 57 | 4 | 72 | 0.442 | 588 | 728 | 0.447 | 4.95 | 1.48 | 0.276 | 0.354 | 0.252 | 0.333 | 0.363 | 0.696 | 1137 | 86 | 527 | 866 | 112 | 107 |
5. 1. 팀 기록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 1993년, 1996년, 1997년 통산 9회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82년부터 2001년까지 19시즌 동안 1202승 51무 976패를 기록했다.연도 | 팀명 | 순위 | 승 | 무 | 패 | 승률 | 포스트 시즌 | 수상 선수 | 감독 |
---|---|---|---|---|---|---|---|---|---|
1982 | 해태 | 전기 4위 후기 4위 | 38 | 0 | 42 | 0.475 | 김동엽조창수(감독대행) | ||
1983 | 전기 1위 후기 4위 | 55 | 1 | 44 | 0.556 | * 한국시리즈 : MBC 전 4-1 승 | 김응용 | ||
1984 | 전기 5위 후기 3위 | 43 | 3 | 54 | 0.443 | ||||
1985 | 전기 3위 후기 3위 | 57 | 1 | 52 | 0.523 | 김성한 (최) 이순철 (신) | |||
1986 | 전기 2위 후기 2위 | 67 | 4 | 37 | 0.644 | * 한국시리즈 : 삼성 전 4-1 승 | 선동열 (최) | ||
1987 | 전기 3위 후기 2위 | 55 | 5 | 48 | 0.532 | * 한국시리즈 : 삼성 전 4-0 승 | |||
1988 | 전기 1위 후기 1위 | 68 | 2 | 38 | 0.639 |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전 4-2 승 | 김성한 (최) | ||
1989 | 1위 | 65 | 4 | 51 | 0.558 |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전 4-1 승 | 선동열 (최) | ||
1990 | 3위 | 68 | 3 | 49 | 0.579 | * 플레이오프 : 삼성 전 0-3 패 | 선동열 (최) | ||
1991 | 1위 | 79 | 5 | 42 | 0.647 |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전 4-0 승 | |||
1992 | 3위 | 71 | 1 | 54 | 0.567 | * 플레이오프 : 롯데 전 2-3 패 | |||
1993 | 1위 | 81 | 3 | 42 | 0.655 | * 한국시리즈 : 삼성 전 4-2 승 | |||
1994 | 4위 | 65 | 2 | 59 | 0.524 | * 플레이오프 : 한화 전 0-2 패 | 이종범 (최) | ||
1995 | 4위 | 64 | 4 | 58 | 0.524 | ||||
1996 | 1위 | 73 | 2 | 51 | 0.587 | * 한국시리즈 : 현대 전 4-2 승 | |||
1997 | 1위 | 75 | 1 | 50 | 0.599 | * 한국시리즈 : LG 전 4-1 승 | |||
1998 | 5위 | 61 | 1 | 64 | 0.488 | ||||
1999 | 드림 4위 | 60 | 3 | 69 | 0.465 | ||||
2000 | 드림 4위 | 57 | 4 | 72 | 0.442 | ||||
해태 타이거즈 19시즌 | 1202 | 51 | 976 | 한국시리즈 우승 9회 |
연도 | 최종 결과 | 라운드 | 상대 | 결과 | |||
---|---|---|---|---|---|---|---|
승/패 | 승 | 무 | 패 | ||||
1983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MBC 청룡 | 승 | 4 | 1 | 0 |
1986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 | 승 | 4 | 0 | 1 |
1987 | 한국시리즈 우승 | 플레이오프 | OB 베어스 | 승 | 3 | 0 | 2 |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 | 승 | 4 | 0 | 0 | ||
1988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이글스 | 승 | 4 | 0 | 2 |
1989 | 한국시리즈 우승 | 플레이오프 | 태평양 돌핀스 | 승 | 3 | 0 | 0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이글스 | 승 | 4 | 0 | 1 | ||
1990 | 플레이오프 진출 | 플레이오프 | 삼성 라이온즈 | 패 | 0 | 0 | 3 |
1991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빙그레 이글스 | 승 | 4 | 0 | 0 |
1992 | 플레이오프 진출 | 플레이오프 | 롯데 자이언츠 | 패 | 2 | 0 | 3 |
1993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삼성 라이온즈 | 승 | 4 | 1 | 2 |
1994 | 준플레이오프 진출 | 준플레이오프 | 한화 이글스 | 패 | 0 | 0 | 2 |
1996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현대 유니콘스 | 승 | 4 | 0 | 2 |
1997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 LG 트윈스 | 승 | 4 | 0 | 1 |
5. 2. 개인 기록 (주요 기록)
방수원은 1984년 5월 5일 삼미를 상대로 프로 야구 최초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선동열은 1986년, 1987년, 1993년에 최초 및 최다 0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김성한은 투타 겸업으로 1982년 10승과 타점왕을 기록하였고, 1988년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을 달성했으며, 1989년에는 프로 야구 최초로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이종범은 1993년 단일 경기 최다 도루(6개), 1994년 단일 시즌 최다 안타(196개), 국내 출신 선수 최고 타율(0.393), 단일 시즌 최다 도루(84개)를 기록했고, 1997년에는 30-30 클럽에 가입했다. 이대진은 1998년 5월 12일 현대를 상대로 10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했다. 홍현우는 1999년에 2루수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했다.6. 역대 수상
해태 타이거즈는 KBO 리그에서 여러 차례 골든글러브, 최우수 선수(MVP), 신인왕을 배출하고, 개인 타이틀을 수상하였다.
;골든글러브
- 1982년: 차영화(2루수), 김준환(외야수)
- 1983년: 김종모(외야수)
- 1984년: 김종모(외야수)
- 1985년: 김성한(1루수), 이순철(외야수)
- 1986년: 선동열(투수), 김성한(1루수), 한대화(3루수), 김종모(외야수), 김봉연(지명타자)
- 1987년: 김성한(1루수), 한대화(3루수), 김종모(외야수)
- 1988년: 선동열(투수), 장채근(포수), 김성한(1루수), 한대화(3루수), 이순철(외야수)
- 1989년: 선동열(투수), 김성한(1루수), 한대화(3루수), 박철우(지명타자)
- 1990년: 선동열(투수), 한대화(3루수), 이호성(외야수)
- 1991년: 선동열(투수), 장채근(포수), 김성한(1루수), 한대화(3루수), 이순철(외야수), 이호성(외야수)
- 1992년: 장채근(포수), 이순철(외야수)
- 1993년: 선동열(투수), 이종범(유격수), 이순철(외야수)
- 1994년: 이종범(유격수)
- 1995년: 홍현우(3루수)
- 1996년: 홍현우(3루수), 이종범(유격수), 박재용(지명타자)
- 1997년: 이대진(투수), 홍현우(3루수), 이종범(유격수), 박재용(지명타자)
;MVP
- 1983년 김봉연(내야수)
- 1985년 김성한(내야수)
- 1986년 선동열(투수), 김성한(내야수)
- 1988년 김성한(내야수)
- 1989년 선동열(투수)
- 1990년 선동열(투수)
- 1994년 이종범(내야수)
;신인왕
;개인 타이틀
- 다승
- 1986년 선동열 24승
- 1989년 선동열 21승, 이강철 15선발승(공동)
- 1990년 선동열 22승
- 1991년 선동열 19승
- 1992년 이강철 17선발승(공동)
- 1993년 조계현 17승, 17선발승
- 1994년 조계현 18승, 18선발승(공동)
- 1997년 이대진 17선발승
- 평균자책점
- 1985년 선동열 1.70
- 1986년 선동열 0.99
- 1987년 선동열 0.89
- 1988년 선동열 1.21
- 1989년 선동열 1.17
- 1990년 선동열 1.13
- 1991년 선동열 1.55
- 1993년 선동열 0.78
- 1995년 조계현 1.71
- 탈삼진
- 1986년 선동열 214K
- 1988년 선동열 200K
- 1989년 선동열 198K
- 1990년 선동열 189K
- 1991년 선동열 210K
- 1992년 이강철 155K
- 1995년 이대진 163K
- 1998년 이대진 183K
- 득점
- 1982년 김봉연 55득점
- 1985년 이순철 67득점
- 1988년 이순철 81득점
- 1989년 김성한 93득점
- 1993년 이종범 85득점
- 1994년 이종범 113득점
- 1996년 이종범 94득점
- 1997년 이종범 112득점
- 도루
- 1982년 김일권 53도루
- 1983년 김일권 48도루
- 1984년 김일권 41도루
- 1986년 서정환 43도루
- 1988년 이순철 58도루
- 1991년 이순철 56도루
- 1992년 이순철 44도루
- 1994년 이종범 84도루
- 1996년 이종범 57도루
- 1997년 이종범 64도루
7. 영구 결번
참조
[1]
뉴스
"[M&A 그 이후]그 많던 와인 애호가는 어디 갔을까?"
https://news.naver.c[...]
이데일리
2017-10-01
[2]
문서
역대 최장 감독
[3]
뉴스
"[단독]신군부 “5월18일에는 광주서 프로야구 하지 마라”"
http://news.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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