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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후나바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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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카와·후나바시 전쟁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시기, 에도 막부 붕괴 후 구 막부 세력이 신정부에 저항하며 발생한 전투이다. 막부군은 이치카와와 후나바시에 병력을 배치했으나, 신정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했다. 전투 결과, 후나바시 대신궁이 소실되고,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신정부의 사후 처리와 지역 축제의 변화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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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후나바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전투 명칭이치카와·후나바시 전쟁
전쟁보신 전쟁
시기1868년 5월 24일 (게이오 4년 윤4월 3일)
장소시모사국 이치카와, 후나바시
결과신정부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신정부군
교전 1 소속오카야마번
사쓰마번
쓰번
사도와라번
교전 2구 막부군
교전 2 소속막부육군
막부해군
지휘관 및 병력
신정부군 지휘관(정보 없음)
구 막부군 지휘관에노모토 다케아키(해군)
오토리 게이스케(육군)
에바라 주자부로
신정부군 병력800명
구 막부군 병력2,000명
사상자
신정부군 사상자사망 20명
구 막부군 사상자사망 13명

2. 구 막부군의 에도 탈출

4월 11일(5월 3일) 에도성이 신정부에 함락되고,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미토번에서 칩거하게 되자 구 막부군 내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고 에도를 탈출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해군을 이끌고 다테야마로, 오토리 게이스케는 육군을 이끌고 이치카와로, 후쿠다 미치나오는 신식 보병대인 삿페이대를 이끌고 기사라즈로 향했다.[1]

2. 1. 삿페이대의 후나바시 집결과 신정부군의 대응

4월 11일 (5월 3일) 에도 성이 신정부에 넘어가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미토번에서 칩거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구 막부군 병사들 사이에서 에도를 탈출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해군을 이끌고 다테야마로, 오토리 게이스케는 육군을 이끌고 이치카와로, 후쿠다 미치나오는 신식 보병대인 삿페이대를 이끌고 기사라즈로 진입했다.

에도 성이 함락된 다음 날인 12일, 삿페이대 2,000명을 이끌고 기사라즈에 도착한 후쿠다는 오토리가 이치카와의 고우노다이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치카와 증원을 위해 에바라의 제1대대 병력 300명을 호케쿄 사에, 제2, 3대대 병력 600명을 후나바시 대신궁에 파견하여 본진으로 삼았다. 그러나 현장에는 막부군이 전혀 없었는데, 신센구미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가 오토리와 합류하여 나가레야마에서 국장 곤도 이사미가 신정부군에 붙잡힌 사실을 알게 된 오토리가 닛코 산에서 아이즈번과 연합하여 신정부군에 저항하는 작전으로 변경, 삿페이 대가 기사라즈에 도착한 12일에는 이미 전군이 이치카와를 떠나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리가 북쪽으로 도망친 사실을 들은 신정부군은 삿페이 대의 출현에 즉시 센주의 오카야마번을 통해 삿페이 대의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4월 25일부터 야와타에서 협상이 이뤄지고, 다음 날 삿페이대의 선봉 에바라에게 3일 이내에 무장을 해제할 것을 명령했다. 에바라는 오토리 부대와의 연계가 불가능한 이상 에도 탈환은 어렵다고 판단, 도쿠가와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무장 해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대 내 강경파의 압력으로 무장 해제는 실패했다.

신정부군은 이치카와·고우노다이에 가까운 구호 사에 본진을 두고, 교토쿠후쿠오카번 100명, 야와타에 오카야마 번 외 100명, 가마가야에 사도와라번 200명, 이치카와에는 아노쓰 번 400명 (일부 도쿠시마번 지원군 포함)을 배치했다. 4월 28일 군의에서 윤4월 1일까지 무장 해제에 응하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윤4월 2일 최후통고를 보냈지만 삿페이 대는 이를 거부했다. 에바라는 신정부군의 총공격이 가까워지자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한다.

3. 전투 경과

윤4월 3일 이른 아침, 삿페이대가 야와타의 오카야마 번 진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습당한 오카야마 번은 혼란에 빠졌고, 아노쓰 번의 원군도 이들을 돕지 못하고 대포 2문을 빼앗기는 등 패배했다. 이치카와에서는 127채의 가옥이 불타는 피해가 발생했다.[1] 그러나 마쓰도와 니주쿠 방면에서 온 증원군 덕분에 전황이 바뀌어 삿페이대는 후나바시로 철수해야 했다.

가마가야에 있던 사도와라 번 군은 오판으로 후나바시 방면으로 진군했고, 도중에 삿페이대 별동대와 마고메자와, 나쓰미, 가나스기, 교다 등지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이후 후나바시에 돌입했지만, 아군이 없다는 사실과 에바라가 신정부군을 격파했다는 오보에 당황했다.

사도와라 번 군은 단독으로 후나바시 대신궁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포격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후나바시 대신궁은 불타 무너졌다. 한편, 후쿠야마 번 병사들은 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아 후나바시로 진입하여 삿페이대를 협공, 패주시켰다. 삿페이대 잔당은 후나바시 거리에서 저항했으나, 사도와라 번 군이 불을 질러 큰 화재가 발생했다. 후나바시 3개 마을에서 814채가 소실되었지만,[1][2] 다음날 내린 비로 불길이 잡히면서 신정부군은 후나바시를 완전히 제압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신정부군 20명, 구 막부군 1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3. 1. 후나바시 대신궁 전투와 화재

윤4월 3일 이른 아침 오전 5시경, 삿페이대가 야와타의 오카야마 번 진지를 공격했다. 기습을 받은 오카야마 번 병사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아노쓰 번의 원군이 달려와 이치카와 방면에서 포격을 가했지만, 오카야마·아노쓰 번 군은 완전히 무너져 이치카와에서 대포 2문을 빼앗겼고, 후방의 구호사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틈에 이치카와 여관 거리가 불타 127채가 소실되었다.[1]

하지만, 정오경에 변고를 듣고 마쓰도 방면에서 오카야마 번의 증원이, 니주쿠 방면에서 아노쓰 번·사쓰마 번의 원군이 달려오면서 전황은 단숨에 바뀌어, 삿페이대는 야와타·나카야마를 포기하고 후나바시로 철수하려 했다.

한편, 가마가야에 있던 사도와라 번 군은 야와타 방면에서 난 포성을 아군인 오카야마·아노쓰 번이 삿페이대에 먼저 공격한 것으로 (실제와는 반대로) 착각하여 기노시타 가도에서 마고메자와를 경유하여 후나바시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도중, 사도와라 번 군이 오기를 기다리던 삿페이대의 별동대가 대기하고 있어, 마고메자와와 나쓰미(夏見)에서 충돌, 일부 병사는 우회를 시도, 가까운 가나스기(金杉, 나쓰미의 동쪽)랑 교다(行田, 나쓰미의 서쪽)에서도 충돌하였다. 삿페이대를 몰아낸 사도와라 번 군은 오후, 후나바시에 돌입했다.[1]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아군에게는 예상 밖이었다. 사도와라 번 군은 이미 아노쓰 번 군사 등이 후나바시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아군의 병사가 후나바시에 있지 않고 역으로 후나바시 대신궁의 본궁에는 에바라가 신정부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적이 갑자기 후나바시에 나타난 점에 대해 동요를 일으킨 것이다.

부득이 사도와라 번 군은 단독으로 공격을 결의, 후나바시 대신궁 서쪽에 대포를 설치, 별동대를 대신궁 남측과 북측에 배치하고 포격과 동시에 대신궁으로 공격을 가했다. 사도와라 번 군과 삿페이대는 대신궁 북측에 있는 ‘미야사카(宮坂)’에서 충돌하여 격렬한 전투가 펼쳐진 가운데 후나바시 대신궁이 포탄의 직격을 받아 화재가 났고,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당시, 교도쿠에서 나온 후쿠야마 번 병사는 사쓰마 번 원군의 힘을 빌려 후타마타(二俣)를 경유해 후나바시의 입구에 해당하는 가이진으로 진출, 나카야마와 후나바시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이를 모른 채 이치카와·나카야마 방면에서의 삿페이대는 협공을 당해 패주, 부상을 입은 대장 에바라 마저도 방치되었다. 더욱이 후나바시 거리에서 삿페이대의 잔당이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사도와라 번 군은 후나바시의 여관 거리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전의 대신궁 화재와 당시 계절로 인한 강풍이 겹쳐져 예상 이상의 대화재가 되었고, 후나바시를 구성하는 3마을에서 814채가 소실되었다.[1][2] 운이 좋게도 다음날 많이 내린 비의 영향으로 화재는 진화되었고, 신정부군은 후나바시의 완전한 제압에 성공했다. 공식 사료에 밝혀져 있는 사망자는 신정부군 20명, 구 막부군 13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치카와·후나바시 전투 이후, 신정부는 기사라즈에 있던 후쿠다와 삿페이 대의 주력을 패주시키고, 조자이번을 제외한 아와, 가즈사, 시모우사 번은 신정부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3]

4. 1. 인명 및 재산 피해

야나기하라 마에미츠가 이치카와에 들어가 피해 상황 등을 확인한 후, 이치카와 숙소에는 500냥, 마을 중심부가 모두 소실된 후나바시 숙소에는 3000냥을 하사하여 양 지역 주민이 신정부에 적의를 품지 않도록 배려했다.[3] 부상을 입고 현장에 남겨진 에하라 츄자부로는, 그 후 몰래 에도로 도망쳐 신정부 측에 투항하여, 새롭게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섬기며 시즈오카 번으로 내려가, 후에 "에하라 소로쿠"로 개명하여 정치가 · 교육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3]

1874년, 지바현령시바하라 와가 정부의 양해를 얻어, 지역 주민들이 (조적인) 구 막부군을 포함한 모든 전사자의 공양을 행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전까지 후나바시의 어촌에 전해져 내려오던 미코시와 야마가 모두 소실되어, 축제를 열 수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메이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이 되자 역병 유행과 해난 사고, 흉어 등의 재앙이 잇따라 발생하여, 축제 부흥의 기운이 일었다. 1900년 (메이지 33년), 어부와 주민들은 액막이, 해상의 안전, 풍어를 기원하며 후나바시 오진구 · 하치켄 신사에 미코시를 봉납하고, 축제를 부흥시켰다. 미코시와 동시에 바카멘 춤도 봉납되어, 후나바시 시의 전통 행사로 정착했다.[4][5][6][7][8]

4. 2. 신정부의 사후 처리

그 다음날, 신정부 특사인 야나기와라 사키미쓰가 이치카와에 도착해 피해 상황 등을 확인했다. 이치카와 측에는 금 500냥, 거리 중심부가 모두 소실된 후나바시에는 3000냥을 하사하여 양 지역 주민들이 신정부에 적대감을 품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 후, 신정부는 기사라즈에 있던 후쿠다와 삿페이 대의 주력을 패주시켰고, 조자이번을 제외한 아와, 가즈사, 시모우사 번은 신정부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부상을 입고 현지에 남겨진 에바라 주사부로는 비밀리에 에도로 도망쳐 신정부 측에 투항했다. 그는 새 도쿠가와 가 당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섬기고 시즈오카 번으로 내려갔으며, 후에 ‘에바라 소로쿠’로 개명하여 정치인·교육자로 이름을 남겼다[3]

1874년(메이지 7년), 지바현 장관 시바하라 야와라는 정부의 양해를 얻어 지역 주민이 (조적인) 구 막부군을 포함한 모든 전사자를 공양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 전쟁으로 후나바시 어촌에 전해져 오던 미코시와 야마가 모두 소실되어, 축제를 열 수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메이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 역병 유행, 해난 사고, 흉어 등의 재앙이 잇따르자 축제 부흥의 기운이 일었다. 1900년(메이지 33년), 어부와 주민들은 액막이, 해상 안전, 풍어를 기원하며 후나바시 오진구·하치켄 신사에 미코시를 봉납하고 축제를 부흥시켰다. 미코시와 동시에 바카멘 춤도 봉납되어, 후나바시 시의 전통 행사로 정착했다[4][5][6][7][8]

4. 3. 에바라 소로쿠(에바라 주사부로)

부상을 입고 현장에 남겨진 에바라 주사부로는, 그 후 몰래 에도로 도망쳐 신정부 측에 투항하여, 새롭게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섬기며 시즈오카 번으로 내려가, 후에 "에바라 소로쿠"로 개명하여 정치가 · 교육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3]

4. 4. 전사자 추모

메이지 7년(1874년) 지바 현령(지사) 시바하라 야와라는 정부의 양해를 얻어 지역 주민들이 (이전의 조적인) 구 막부군을 포함한 모든 전사자들의 공양을 하는 것을 허가했다.[3]

4. 5. 후나바시 지역 축제의 변화

이치카와·후나바시 전쟁으로 인해 그전까지 후나바시의 어촌에 전해져 내려오던 미코시와 야마가 모두 소실되어, 축제를 열 수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메이지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이 되자 역병 유행과 해난 사고, 흉어 등의 재앙이 잇따라 발생하여, 축제 부흥의 기운이 일었다. 1900년 (메이지 33년), 어부와 주민들은 액막이, 해상의 안전, 풍어를 기원하며 후나바시 오진구 · 하치켄 신사에 미코시를 봉납하고, 축제를 부흥시켰다. 미코시와 동시에 바카멘 춤도 봉납되어, 후나바시 시의 전통 행사로 정착했다.[4][5][6][7][8]

5. 관련 작품


  • 도고 다카시의 소설 『시모후사 이치카와 숙소의 싸움』 (『나는 굶주린 늑대가 된다』 실업의 일본사 문고 수록)

참조

[1] 웹사이트 戊辰市川・船橋戦争 https://www.lib.city[...] 2024-08-29
[2] 웹사이트 No.89 平成18年6月1日号 シリーズ・災害と闘う2 船橋戦争と谷津村栄次郎 https://www.city.nar[...] 2024-08-29
[3] 웹사이트 「市川・船橋戦争」隠れた歴史をたどる 旧幕軍に麻布中学創設者も https://www.asahi.co[...] 2024-08-29
[4] PDF 天海 「湊町ばか面踊り」 https://www.city.fun[...] 船橋市
[5] 웹사이트 千葉県船橋市で大爆笑!「ばか面おどり」の2023年「ふなばし市民まつり」は花火大会もあるよ! https://omatsurijapa[...] 2024-08-29
[6] 웹사이트 船橋の郷土芸能・ばか面おどり 市民まつりのハイライト 本町通りをパレードで喝采!!! 湊町さん12町会さん それぞれにお楽しみ https://funabashi.my[...]
[7] 웹사이트 船橋の郷土芸能『ばか面踊り』! https://ciao2.shinke[...] 2024-08-29
[8] PDF 郷土芸能 「ばか面おどり」 https://www.funaemon[...] 船橋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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