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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가쓰키요 (18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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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1823년 2월 14일에 태어나 1889년 4월 6일에 사망한 일본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이다. 시라카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나가의 아들로 태어나, 빈츄마쓰야마 번주 이타쿠라 가쓰토미의 데릴사위가 된 후 가독을 상속받아 번주가 되었다. 번정 개혁과 막부 관료로 활동하며 로주를 역임했으나, 안세이 대옥과 보신 전쟁을 겪었다. 말년에는 특사로 사면되어 우에노 도쇼구의 신관을 지냈으며, 제86 국립은행 설립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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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가쓰키요 (1823년)
기본 정보
이타쿠라 가쓰키요
이름이타쿠라 가쓰키요
본명마쓰다이라 야스하치로 → 이타쿠라 가쓰키요
출생1823년 2월 14일
출생지에도, 일본
사망1889년 4월 6일
사망지도쿄, 일본
관직
빗추 마쓰야마 번 다이묘1849년 ~ 1869년
전임이타쿠라 가쓰쓰네
후임이타쿠라 가쓰스케
가문 정보
씨족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 이타쿠라 씨
아버지마쓰다이라 사다나가
어머니즈이신인
양아버지이타쿠라 가쓰쓰네
형제마쓰다이라 사다카즈, 이타쿠라 가쓰키요, 도키 요리유키, 마쓰다이라 지카노리
배우자정실: 이타쿠라 가쓰쓰네의 딸, 측실: 쓰루 (시모카와 씨)
자녀가쓰마사 (장남), 양자: 가쓰스케
생애 및 경력
에도시대에도 시대 후기
메이지 시대메이지 시대
유년명만노신
다른 이름마쓰다이라 야스하치로, 이타쿠라 가쓰키요
고잔, 쇼소
가명도쿠야마 시로자에몬, 시부이 교스케
관위종5위하 좌근위장감, 스와노카미, 종4위하 지종, 아와노카미, 이가노카미, 정4위
막부 관직에도 막부 소샤반 겸 지샤부교, 노주
주군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기타
묘소도쿄도분쿄구혼코마고메기치죠지
계명주코인덴 쇼시이 기토쿠 쇼소 다이코지

2. 생애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구와나 번의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에서 태어나 빈츄 마쓰야마 번의 영주였던 이타쿠라 가쓰쓰네에게 입양되었다. 야마다 호코쿠의 제자였던 이타쿠라는 영지의 행정과 재정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타쿠라는 막부 관료로, 1857년부터 1859년, 그리고 1861년부터 1862년까지 지샤부교를 역임했고, 1862년에는 로주가 되었다.[1]

이후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참모 장교로 활동했고, 에조 공화국에 합류하여 하코다테 전투에 참전했다. 짧은 기간 투옥되었다가 1870년대 초에 석방된 후, 우에노 공원의 도쇼구 신사의 신관이 되었다.

2. 1. 출생과 가문 상속 (1823년 ~ 1849년)

분세이 6년 1월 4일(1823년2월 14일),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무쓰 시라카와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나가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이름은 마쓰다이라 야쓰하치로(松平寧八郎)였으며, 나중에는 만노신(万之進)으로 불렸다.

덴포 13년(1842년), 빈츄마쓰야마 번주 이타쿠라 가쓰쓰네의 데릴사위가 되었고,[3] 가에이 2년 윤4월 6일(1849년5월 27일)에 양아버지의 은거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아 빈고 마쓰야마 번 5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2]

2. 2. 번정 개혁과 막부 관료 (1849년 ~ 1862년)

1857년(안세이 4년), 이타쿠라는 번정 개혁의 성과를 인정받아 막부로부터 소자반 겸 지샤부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안세이 대옥 당시 이이 나오스케의 강경책에 반대하여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1859년 파면되었다.[2] 이이 나오스케 사후인 1861년(분큐 원년)에 다시 소자반 겸 지샤부교로 복귀하였고, 다음 해인 1862년에는 로주로 승진하여 도젠지 사건에 대처하고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경에 동행하는 등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1]

2. 3. 로주 재임과 막말 정국 (1862년 ~ 1868년)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로주로 재임하면서, 혼란스러운 막말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62년 도젠지 사건에 대처하고,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경을 수행했다.[1] 나마무기 사건 배상 문제와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받은 조이 칙명 준수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한때 로주 직에서 파면되었지만, 1865년 로주로 재임명되었다. 제2차 조슈 정벌에서는 조슈 번에 대한 온건론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모치 사후에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로주 수좌 겸 회계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막정 개혁에 힘쓰는 한편, 1867년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가 건의한 대정봉환 실현에도 진력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전한 후, 요시노부와 함께 오사카에 머물렀고, 히메지 번주 로주 사카이 다다아쓰,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구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타카 등과 함께 가이요마루를 타고 에도로 퇴각했다.

2. 4. 보신 전쟁과 유배 (1868년 ~ 1872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오사카에 머물렀고, 사카이 다다아쓰,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마쓰다이라 사다타카 등과 함께 가이요마루를 타고 에도로 퇴각했다.[2]

신정부는 오카야마번에 긴노미하타를 전달하고 마쓰야마 번 토벌을 명령했다. 가쓰키요가 부재중인 마쓰야마는 곤경에 빠졌으나, 야마다 호코쿠는 번론을 일치시켜 마쓰야마 성을 넘겨주고, 가쓰키요 대신 가쓰스케를 새 당주로 맞이하여 신정부에 투항했다. 이로써 마쓰야마 번은 전화(戰禍)를 면하게 되었다.[5]

한편, 에도의 가쓰키요는 요시노부가 조적으로 낙인찍히자 1868년 1월 29일에 로주 직을 사임하고, 2월 19일에 핍색 처분을 받았다. 3월에는 시모쓰케 닛코산으로 옮겨졌으나,[4] 우쓰노미야 전쟁에서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구 막부군에 의해 해방되어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참모가 되었다.[2]

가쓰키요는 고료카쿠까지 전전하며 저항했으나, 호코쿠는 마쓰야마 번사를 하코다테로 파견하여 가쓰키요를 강제로 도쿄로 데려왔다.[2] 1869년 5월 25일, 귀경한 가쓰키요는 다음 날 자수했고, 8월 15일에 안나카번에 유배되어 종신 금고형을 받았다.[2] 이후 1872년 1월 6일, 특지로 사면되었다.[2]

2. 5. 석방과 만년 (1872년 ~ 1889년)

1872년 1월 6일, 특사로 사면되었다.[2] 석방 후, 가쓰키요는 야마다 호코쿠와 가쓰스케를 위로했고, 가쓰스케에게 자신이나 가신들에게 사양하여 가독을 가쓰마사에게 양보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1875년에는 다카하마에서 호코쿠와 재회했다.[5] 1876년에는 우에노 도쇼구의 신관이 되었다.[2] 또한, 가쓰스케와 미시마 츄슈, 가와다 교코[7]의 협력을 얻어 제86국립은행(현재의 주고쿠 은행)을 설립했다.

1889년 4월 6일, 도쿄의 사저에서 향년 66세로 사망했다.[2],[4]

3. 평가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성실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사욕이 없으며, 통찰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4] 가쓰 가이슈와는 신분을 초월한 친구였으며, 가쓰키요는 막부 요직에서 해임된 가이슈를 다시 불러들여 마지막 육군 총재로 기용했다.[5] 가이슈는 가쓰키요에 대해 "저런 시대(막말)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사다노부 공 이상의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불행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어니스트 새토우는 가쓰키요를 "호인(好人)이면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평했다.[8]

가쓰키요가 가장 신뢰했던 호코쿠는 흑선 내항 이후의 혼란을 보고, 이미 막부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5], 가쓰키요에게 우선 마쓰야마의 영민을 생각해주기를 진언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로 태어난 가쓰키요에게 막부(도쿠가와 쇼군 가문)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었다.[2]

3. 1. 긍정적 평가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성실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사욕이 없고 통찰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4] 번정 개혁을 통해 번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개선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가쓰 가이슈는 "저런 시대(막말)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사다노부 공 이상의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불행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어니스트 새토우는 "호인(好人)이면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평했다.[8]

3. 2. 부정적 평가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막부의 로주로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보신 전쟁에서 구 막부군에 가담하여 신정부군에 저항한 것은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2] 가쓰 가이슈는 "저런 시대(막말)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사다노부 공 이상의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불행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지만,[5] 이는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3. 종합적 평가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성실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사욕이 없고 통찰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4] 가쓰 가이슈는 "저런 시대(막말)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사다노부 공 이상의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운명이 불행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어니스트 새토우는 가쓰키요를 "호인(好人)이면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평했다.[8]

가쓰키요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손자로,[2] 흑선 내항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막부에 대한 충성을 꺾지 않았다. 가쓰키요가 가장 신뢰했던 호코쿠는 막부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쓰키요에게 영민을 먼저 생각하라고 진언했지만, 가쓰키요는 막부를 버릴 수 없었다.[5][2]

4. 가족 관계


  • 아버지: 마쓰다이라 사다나가(1791년 ~ 1838년)
  • 어머니: 즈이신인
  • 정실: 이타쿠라 가쓰쓰네의 딸
  • 측실: 오츠루노 카타
  • 아들: 이타쿠라 가쓰타케

5. 등장 작품

이타쿠라 가쓰키요가 등장하는 작품은 현재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서적 Select Documents on Japanese Foreign Policy, 1853–1868 1955
[2] 웹사이트 板倉勝静と幕末の備中松山藩|WEB歴史街道 https://shuchi.php.c[...] 2017-04-16
[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4] 참고문헌
[5] 뉴스 【日曜に書く】勝海舟、山田方谷起用 幕府に殉じた最後の老中板倉勝静 https://www.sankei.c[...] 2017-09-24
[6] 참고문헌
[7] 문서
[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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