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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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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조 공화국은 1868년 도쿠가와 막부가 멸망한 후, 이에 불만을 품은 구 막부 세력이 홋카이도에 세운 공화국이다.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중심으로, 에도를 탈출한 구 막부 세력은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하코다테를 점령하고 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을 모델로 한 공화제를 표방하고, 일본 최초의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구 막부 세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재정난으로 주민 수탈이 심해지고, 서양 열강의 지지를 받지 못해 결국 메이지 정부의 공격을 받아 1869년 5월 멸망했다. 비록 단명했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 과도기적 정권으로서, 근대 국가 수립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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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에조 공화국 문장
북이도 총독인
국호에조 공화국
일본어 국호蝦夷共和國
일본어 공식 국명蝦夷島政府
로마자 국호Ezo Kyōwakoku
역사
성립1869년 1월 27일
멸망1869년 6월 27일
건국 사건정부 수립
멸망 사건해체
위치
에조 위치
에조 공화국의 영역
정치
정치 체제대통령제 공화국, 사무라이 귀족 정치
국가 원수총재
초대 총재에노모토 다케아키
부총재마쓰다이라 타로
이전 및 이후
이전도쿠가와 막부
이후일본 제국
수도
수도하코다테
언어
공용어일본어, 아이누어
통화
통화삼화

2. 역사

보신 전쟁 말기, 메이지 정부에 패배한 구 에도 막부 세력의 일부가 홋카이도(당시 에조치)로 건너가 세운 단기간 존속했던 정권이다. 막부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주도하여 1868년 8월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 센다이 등지에서 오토리 게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등이 이끄는 구 막부군 잔존 세력 및 일부 프랑스 군사 고문단과 합류하여 에조치로 향했다. 같은 해 10월 에조치에 상륙하여 하코다테의 고료카쿠를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았다.

1868년 12월, 일본 최초로 선거(입찰 방식)를 통해 에노모토를 총재(総裁)로 선출하는 등 정부 조직을 갖추었으나, 투표권이 사관(士官) 이상의 군인들에게만 한정되어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6] 이들은 스스로를 '에조 공화국'이라 칭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하코다테를 방문했던 영국 공사관 서기관 프랜시스 오티웰 아담스가 이 정권을 "공화국(republic)"으로 지칭하면서[17] 이 명칭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으로 인정받기도 했으나,[17] 이는 외교적 수사에 가까웠으며, 국제 사회는 메이지 정부를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간주하였다.

재정난과 주력 군함 카이요마루의 침몰 등으로 군사력이 약화된 가운데, 1869년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토벌군과의 하코다테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결국 1869년 6월 27일,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 지도부가 고료카쿠에서 항복하면서 약 5개월 만에 멸망하였다.[9]

총재였던 에노모토는 반역죄로 투옥되었으나, 구로다 기요타카 등의 구명 운동 덕분에 1872년 석방되어 이후 메이지 정부 하에서 홋카이도 개척사 관료, 러시아 대사, 여러 내각대신 등을 역임하며 자작 지위까지 올랐다.[10] 그는 훗날 에조 공화국 시절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함께 했던 프랑스 군사 고문 쥘 브뤼네 등 일부는 프랑스로 귀국했고, 일부는 일본에 남아 민간인 신분으로 활동했다.

2. 1. 배경

에노모토 다케아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구 막부 세력들이 생겨났다. 에도 성은 신정부 측 사이고 다카모리와 구 막부 측 가쓰 가이슈의 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넘겨졌고,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시즈오카로 물러난 상태였다.

막부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녹봉이 대폭 삭감됨에 따라 일자리를 잃게 된 구 막부 신하들을 구제하고,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대비한 북방 개척 및 방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17] 그는 1868년 8월 19일 밤, 함대를 이끌고 에도시나가와 앞바다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17]

(왼쪽부터 오른쪽)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함대의 일부인 ''개천, 개양, 간린, 초영, 미카호'' 함선들은 출항 직전 시나가와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다.


에노모토 함대는 다음과 같은 8척으로 구성되었다.

구분함선명
군함개양환(기함), 개천환, 반룡환, 치요다가타환
운송선간린환, 신속환, 초영환, 미카호환



1868년 에조(홋카이도)로 이동하는 구 막부 군대


함대는 먼저 센다이에 들러 보신 전쟁의 하나인 아이즈 전쟁 등에서 패배한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막부 전습대,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신선조 잔존 부대, 창의대 등 구 막부군 패잔병들을 규합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쥘 브뤼네 등 일부 프랑스 장교들도 합류했다. 이로써 에노모토 휘하의 병력은 총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17] 에노모토는 오우에쓰 레판 동맹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주요 번들이 이미 신정부에 항복한 뒤라 실패했다.

1868년 10월 20일, 에노모토 군은 에조지(현 홋카이도) 남부의 와시노키에 상륙했다.[17] 상륙 후 불과 며칠 만에 하코다테에 있던 고료카쿠 요새를 점령하고 하코다테 부(府)를 장악했다.[17] 당시 신정부가 임명한 하코다테 부 지사 시미즈다니 키미나루는 아오모리로 도주했다. 에노모토 군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 12월 18일에는 마쓰마에 성을 함락시키고, 12월 28일에는 에사시까지 점령하며 연말까지 에조지 남부 일대를 통제 하에 두었다.

에노모토는 교토의 조정에 구 막부 신하들을 에조지에 이주시켜 개척에 종사하게 하는 동시에 북방 경비를 맡게 해달라고 다시 한번 청원했지만, 신정부는 이를 거부했다.[1][17] 에노모토는 왕정복고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당시 신정부가 사쓰마조슈 등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거짓된 왕정'이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거병을 정당화하려 했다.[17]

1868년 12월 15일, 에노모토 세력은 하코다테에서 에조지 전도(全島) 평정 축하 의식(蝦夷地全島平定祝賀祭)을 열고, 에노모토를 총재로 하는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17][16] 이는 사실상 신정부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정권 수립 시도였으며, 이후 '에조 공화국'으로 불리게 되는 정권의 시작이었다.

2. 2. 성립



에조 공화국은 1867년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소멸하자, 이에 반발한 구 막부 세력이 홋카이도(당시 에조치)에 세운 사실상의 정권이다. 막부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도쿠가와 요시노부시즈오카로 물러난 후, 구 막부 신하 보호와 북방 방어를 명분으로 1868년 8월 9일, 군함 카이요마루(開陽丸) 등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즈 전쟁 패잔병, 신선조, 쇼기대(彰義隊) 잔존 세력 등이 합류하였다. 에노모토 함대는 에조치로 향하여 마쓰마에 번을 공격했고, 당시 번주 마쓰마에 노리히로(松前徳広)의 급사 이후 마쓰마에 번 전역을 점령했다.

하코다테에 정청(政廳)을 설치한 이들은 스스로를 '에조 공화국'이라 칭하지는 않았으나, 1868년 11월 하코다테를 방문한 영국 공사관 서기관 프랜시스 오티웰 아담스(Francis Ottiwell Adams)가 하코다테 정청을 "공화국(republic)"으로 보고하면서 이 명칭이 알려지게 되었다. 아담스는 1874년 저서 ''History of Japan''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고,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th)는 저서 『미카도』에서 "홋카이도 공화국"으로 소개하기도 했다.[17] 그러나 정식 국가 설립은 아니었기에 "에조 도쿠가와 막부 무사대"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에노모토 등이 발표한 문서에는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없으며,[17] 프랑스어로 작성된 성명서에는 "도쿠가와 탈번 가신"(Les Kerais exiles de Toukugawa)이라는 서명을 사용했다.[19]

에조 공화국의 정부 청사, 고료가쿠. 이전에는 하코다테 부교(箱館奉行)의 사무소였다.


1868년 11월 4일, 에노모토 군이 하코다테를 점령하자 영국 군함 새틀라이트(Satellite)와 프랑스 군함 베누스(Venus)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명령으로 하코다테에 입항했다. 11월 8일, 에노모토는 영국·프랑스 영사 및 함장들과 회견했다. 회담 후 에노모토의 요청으로 영국·프랑스 함장은 각서를 전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내정 문제에 엄정 중립을 지킨다. 2. 교전 당사자로서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3.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으로는 인정한다.[17] 이 '사실상의 정권' 인정은 에노모토에게 호감을 가진 영국·프랑스 함장들이 본국 훈령 없이 내린 결정이라는 해석도 있으며, 외교적 수사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에노모토는 이를 국제법적 근거로 활용하려 시도했다. 당시 보신 전쟁에서 영국, 프랑스 등 6개국은 중립을 표방했기에, 에노모토 세력은 이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17]

1868년 12월 15일, 주요 직책을 결정하기 위한 입찰(선거)이 실시되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공직 선거로 평가받지만,[16] 투표권은 에노모토를 따라온 사관(士官) 이상의 군인들에게만 주어졌고(총 투표자 856명), 하코다테 주민들은 참여하지 못해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16] 당시 탈주군은 에노모토가 지도자였으나, 구 다이묘급 인사들도 참여하고 육군파(쇼기대, 소쇼기대 등 포함)와 해군파 등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어 통합이 필요했기 때문에 선거가 실시된 배경이 있다.[16] 투표 결과,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156표로 최다 득표를 얻었으나, 전체 투표수의 2할 미만으로 압도적 지지는 아니었다.[20]

'''주요 직책 선출 결과'''[20]
직책당선자득표수
총재 (総裁)에노모토 가마지로155표
부총재 (副総裁)마쓰다이라 다로126표
해군봉행 (海軍奉行)아라이 이쿠노스케73표
육군봉행 (陸軍奉行)오토리 케이스케89표



에조에 있는 프랑스 군사 고문과 그들의 일본 동맹군.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쥘 브뤼네, 마쓰다이라 다로를 향하고 있다.


1869년 1월 27일, 에조 공화국(Republic of Ezo) 수립이 공식 선포되었다.[2][3] 정부 조직은 미국 모델을 기반으로 했으나, 참정권은 사무라이 계급에 한정되었다.[4]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총재(総裁, 대통령 격), 마쓰다이라 다로가 부총재(副総裁, 부통령 격)로 선출되었으며, 아라이 이쿠노스케가 해군부교(海軍奉行, 해군대신), 오토리 케이스케가 육군부교(陸軍奉行, 육군대신)를 맡았다.[5] 에노모토는 왕정복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왕정일신은 황국의 행복이며 나 또한 희망하는 바"라고 하면서도 메이지 신정부가 "강번의 사의에서 나온 것"이라 비판했다.[17]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혈통을 지도자로 맞이하길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7] 하코다테 부교 나가이 나오유키를 통해 외교적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서구 열강은 매슈 페리 이후 개항을 이끈 메이지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6]

정권 수립 초기 자금은 에노모토가 1868년 초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급히 떠난 오사카 성에서 확보한 금화 18만 량(両)이었다.[7]

1868년 겨울부터 1869년까지 하코다테 남부 반도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으며, 중심지는 고료카쿠(五稜郭)라는 별 모양 요새였다. 육군은 프랑스-일본 연합 지휘 체제로 편성되어,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를 프랑스군 대위 쥘 브뤼네(Jules Brunet)가 보좌하였다. 군대는 4개의 여단으로 나뉘었고, 각 여단은 프랑스 장교(아르튀르 포르탕(Arthur Fortant), 장 마르랭(Jean Marlin), 안드레 카즈뇌브(André Cazeneuve), 프랑수아 부피에(François Bouffier))가 지휘하였다. 각 여단은 다시 2개의 대대로 나뉘었고, 대대는 4개의 중대로 나뉘었다.

브뤼네는 장교들에게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프랑스식 능력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익명의 프랑스 장교는 브뤼네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 적었다. "… 관습, 시정, 요새, 군대;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쳤다. 단순한 일본인들은 그가 뛰어난 기술로 조종하는 꼭두각시들이다… 그는 이 용감한 새로운 일본에서 진정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수행했다. 지도자의 선출과 능력주의 – 즉 출신이 아닌 능력에 의한 계급 결정 – 은 이 나라에 있어서 환상적인 일이며,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을 매우 잘 해낼 수 있었다…"[8]

2. 3. 멸망

에조 공화국은 기반 자체가 빈약하여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즉시 진압군을 파견하여 공격에 나섰다. 정부군과의 전쟁으로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에조 공화국은 매춘부에게까지 세금을 징수하고 관문을 설치해 통행세를 걷으려 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샀고, 일부 주민들은 은밀히 정부군을 돕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1868년 12월 28일, 주력 군함이었던 카이요마루가 풍랑으로 좌초되어 침몰하면서 해군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는 판매를 보류했던 최신 군함을 메이지 정부에 판매했고, 해군력에서 정부군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서양 열강들이 천황제를 채택한 메이지 정부를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면서 에조 공화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File:Naval_Battle_of_Hakodate.jpg|thumb||right||1869년 5월의 하코다테 전투; 전경에는 가스가(''Kasuga'')]호와 철갑선 고테쓰1869년 4월, 메이지 정부는 함대와 7,000명의 보병홋카이도로 파견했다. 정부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하코다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조 공화국의 마지막 거점인 고료카쿠 요새를 포위했다. 1869년 5월 11일 최후의 결전에서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에조 공화국은 저항 동력을 상실했다. 결국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1869년 6월 26일에 항복했으며, 다음 날인 6월 27일 고료카쿠는 사쓰마 번 출신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넘겨졌다.[9] 이로써 약 5개월간 존속했던 에조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해 9월 20일, 에조치홋카이도(北海道)로 공식 명명되었다.[9]

3. 정치



에조 공화국은 대정봉환 이후 에도 막부의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구 막부 세력을 규합하여 홋카이도(당시 에조치)에 세운 사실상의 정권이었다. 1868년, 에노모토는 막부 해군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하여 아이즈 등지에서 패한 구 막부군 잔존 세력과 합류한 뒤, 하코다테를 점령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11]

1868년 12월, 에노모토를 따르던 군인들(사관급 이상)의 투표를 통해 총재(대통령 격)를 선출하는 등 일본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부 조직 구성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선거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총재로, 마쓰다이라 타로가 부총재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득표 순서에 따라 주요 각료들이 임명되었다.[16][20] 하지만 이 선거는 참여 자격이 제한적이었고 현지 주민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아 완전한 공화제적 선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16]

에노모토는 에조 공화국 수립의 명분으로 구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을 위한 영지 확보와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한 북방 개척 및 방위를 내세웠다.[11] 그는 메이지 정부에 태정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 에조 지역을 도쿠가와 가문에 할양해 줄 것을 요청하며, 그럴 경우 북방 방위에 충실히 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11] 당시 에조(홋카이도)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지역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기에, 에조 공화국 수립은 분리 독립 시도라기보다는 일본의 정치 체제를 에조에 이식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12]

외교적으로는 보신 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1868년 11월,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lat)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17] 이는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한적인 외교적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결국 메이지 정부를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였고, 에조 공화국은 국제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고립되었다.[6]

내부적으로 에조 공화국은 구 막부 세력의 임시 정권이라는 성격상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메이지 정부와의 전쟁으로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과도한 세금 징수와 통행세 부과 등을 시도하면서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핵심 전력이었던 군함 가이요마루가 좌초되어 침몰하고,[17] 메이지 정부가 최신 군함을 도입하면서 해군력에서도 열세에 놓이는 등 군사적으로도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에조 공화국은 1869년 5월, 하코다테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고료카쿠에서 항복함으로써 약 5개월 만에 소멸하였다. 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반역죄로 투옥되었으나 이후 사면되어 메이지 정부 하에서 외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자작 지위까지 받았다. 그는 훗날 에조 공화국 시절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렸다고 전해진다.

3. 1. 정치 체제



1869년 1월 27일, 독립적인 "에조 공화국"(Republic of Ezo)이 선포되었다.[2][3] 정부 구조는 미국을 모델로 삼았지만, 참정권은 사무라이 계급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되었다.[4]

공개 투표 방식으로 치러진 선거를 통해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소사이"(総裁, 총재 또는 대통령)로, 마쓰다이라 다로(松平太郎)가 부소사이(副総裁, 부총재 또는 부통령)로 선출되었다. 아라이 이쿠노스케(荒井郁之助) 해군부교(海軍奉行, 해군대신)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육군부교(陸軍奉行, 육군대신) 등 일부 각료는 군대의 투표로 선출되기도 했다.[5] 이는 다이묘(大名) 중심의 봉건제가 일반적이던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으나, 투표권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16]

1868년 12월 15일에는 주요 직책을 결정하기 위한 입찰(入札, 사실상의 공직 선거)이 실시되었다.[16] 이 선거는 구 막부 출신 인사들 간의 복잡한 주종 관계와 파벌(육군파, 해군파 및 그 하위 그룹) 문제를 조정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코다테 주민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고, 구 막부군 내에서도 사관급 이상 약 3분의 1 정도만 참여하여 완전한 공화제적 선거라고 보기는 어렵다.[16] 총 투표수 856표 중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156표로 최다 득표를 했으나, 득표율은 20% 미만이었고 파벌별로 표가 나뉘는 양상을 보였다.[20]

에조 공화국 주요 직책 및 인물[22]
직책인물
총재에노모토 다케아키
부총재마쓰다이라 다로
해군봉행 (해군대신)아라이 이쿠노스케
육군봉행 (육군대신)오토리 케이스케
육군봉행 겸임히지카타 도시조
하코다테 부교나가이 나오유키
마쓰마에 부교히토미 카츠타로
에사시 부교마쓰오카 시로지로, 고스기 마사노신
개척봉행사와 타로자에몬
회계봉행에노모토 미치아키, 가와무라 로쿠시로



에조 공화국 지도자들. 앉아있는 오른쪽 인물이 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


에노모토 다케아키, 총재


아라이 이쿠노스케, 해군 사령관.


히지카타 도시조, 신센구미 사령관.


에노모토는 에조 공화국 수립이 도쿠가와 가문을 위한 영지 확보와 일본 전체의 북방 방위를 위한 에조 개발이라는 목적을 가진다고 주장했다.[11] 그는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쓰마나 조슈 등 특정 번의 주도로 이루어진 신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17][11] 당시 홋카이도(에조)는 일본 본토와 다른 지역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므로, 공화국 수립은 분리 독립보다는 일본의 정치 체제를 에조에 도입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12]

에조 공화국 지도부는 공식 문서에서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17] 이 명칭은 영국 공사관 서기관 프랜시스 오티웰 아담스(Francis Ottiwell Adams)가 1868년 11월 에노모토와 면담 후 하코다테 정부를 "republic"으로 칭한 것에서 유래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19] 에조 공화국 측은 공식적으로 "도쿠가와 탈번 가신"(Les Kerais exiles de Toukugawa프랑스어)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19]

보신 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한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신뢰를 얻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17] 국제법교전단체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868년 11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사실상의 정부(De facto)"로 인정받는 데는 성공했다.[17] 이는 나가이 나오유키 등이 하코다테 주재 외국 영사 및 군함 함장들과 교섭하여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불안정한 분리 독립 세력보다는 메이지 정부와의 협력을 선호하여 에조 공화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6]

프랑스 군사 고문단, 특히 쥘 브뤼네(Jules Brunet) 대위는 군사 조직뿐 아니라 정치 운영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브뤼네는 프랑스식 능력주의 사상을 강조하며 공화국 운영 전반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8] 군대는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 휘하에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4개 여단으로 편성되는 등 프랑스-일본 연합 지휘 체계를 갖추었다.

3. 2. 주요 인물



1869년 1월 27일 에조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2][3] 이 선거는 사무라이 계급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졌고 공개 투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다이묘 중심의 봉건제가 일반적이던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선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4] 이 선거와 군대의 추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정부 요직을 맡았다.

  •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총재(総裁). 선거를 통해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구 에도 막부 해군 부총재 출신으로, 하코다테 전쟁 당시 막부 함대를 이끌고 홋카이도로 건너와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그는 도쿠가와 씨족을 위한 홋카이도 개척과 북방 영토 방어를 공화국 수립의 명분으로 내세웠다.[11] 또한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오사카 성에서 확보한 18만 량(両)의 금화는 공화국의 초기 재정에 기여했다.[7]
  • 마쓰다이라 다로(松平太郎): 부총재(副総裁). 에노모토와 함께 선거로 선출되었다.
  • 아라이 이쿠노스케(荒井郁之助): 해군봉행(海軍奉行). 군대에 의해 선출되었다.[5]
  •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육군봉행(陸軍奉行). 군대에 의해 선출되었으며,[5] 육군 총사령관을 맡아 군대를 지휘했다.
  •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歳三): 육군봉행 겸임. 신센구미 부장 출신으로 막부 말기 교토 치안 유지에 앞장섰던 인물이며, 에조 공화국에서는 육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 나가이 나오유키(永井尚志): 하코다테 부교(箱館奉行). 외국 공사관들과 접촉하며 에조 공화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 쥘 브뤼네(Jules Brunet): 프랑스 육군 대위 출신의 군사 고문.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보신 전쟁에서 막부 측을 지원하기 위해 잔류, 에조 공화국 군대의 조직과 훈련, 작전 지휘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오토리 케이스케 총사령관을 보좌하며 프랑스 장교(아르튀르 포르탕(Arthur Fortant), 장 마르랭(Jean Marlin), 안드레 카즈뇌브(André Cazeneuve), 프랑수아 부피에(François Bouffier))들이 각 여단을 지휘하는 프랑스-일본 연합 사령부 체제를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브뤼네는 프랑스 혁명의 능력주의 사상을 강조하며 공화국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이 외에도 '입찰'이라 불린 선거 결과를 참고하여 여러 봉행 및 직책이 임명되었다.[22] 주요 직책과 담당 인물은 다음과 같다.

직책주요 인물
총재에노모토 다케아키
부총재마쓰다이라 다로
해군봉행아라이 이쿠노스케
육군봉행오토리 케이스케
육군봉행 겸임히지카타 도시조
하코다테 봉행나가이 나오유키
마쓰마에 봉행히토미 카츠타로(人見勝太郎)
에사시 봉행마쓰오카 시로지로(松岡四郎次郎), 고스기 마사노신(小杉雅之進)
개척봉행사와 타로자에몬(澤太郎左衛門)
회계봉행에노모토 미치아키(榎本道章), 가와무라 로쿠시로(川村錄四郎)
해군두마쓰오카 이와키치(松岡磐吉), 코가 겐고(甲賀源吾)
보병두혼다 코우시치로(本多幸七郎), 후루야 사쿠자에몬(古屋佐久左衛門)


3. 3. 외교 관계

보신 전쟁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프로이센, 이탈리아 6개국은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17] 에노모토가 이끄는 구막부군은 국제 사회의 중립을 유지하고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17] 이들은 국제법상 교전 당사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17] 1868년 11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는 ‘사실상의 정부’(De Facto|데 팍토lat)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17]

구막부군이 홋카이도 와시노키에 상륙한 후, 밀정 고시바 쵸우노스케(小芝長之助) 등은 하코다테에 체류 중인 각국 영사에게 프랑스어로 작성된 탈주군 성명서를 전달했다. 이 성명서에는 "도쿠가와 탈번 가신"(Les Kerais exiles de Toukugawafra)이라는 서명이 사용되었다.[19]

1868년 11월 4일, 에노모토 부대가 하코다테를 점령하자 영국 군함 새틀라이트(Satellite)와 프랑스 군함 베누스(Venus)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명령에 따라 영국 공사관 서기관 프랜시스 오티웰 아담스(Francis Ottiwell Adams)를 동반하고 하코다테에 입항했다. 에노모토 측의 벤텐다이바 포대가 환영 예포를 발사했으나, 영국과 프랑스 군함은 이를 무시했다. 다음 날인 11월 5일, 현지 영국·프랑스 영사와 양 함장은 회동하여 에노모토 부대에 대해 초기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외교 경험이 풍부한 하코다테 부교 나가이 나오유키(永井尚志)는 영국·프랑스 측에 좋은 인상을 주었다. 회동 중 에노모토 함대의 기함 가이요마루(開陽丸)가 21발의 예포를 발사하자, 이를 본 미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영사는 영국·프랑스 함선 대신 카이요마루를 방문하기도 했다.

11월 8일, 에노모토는 영국·프랑스 영사 및 함장과 직접 회견했다. 영국·프랑스 측의 입장은 엄격했으나, 에노모토는 공법상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 에노모토의 요청에 따라 영국·프랑스 함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서를 전달했다.[17]

# 우리는 이 내정 문제에 관해 엄정 중립의 입장을 취한다.

# 교전 당사자로서의 특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 ‘사실상의 정부’(Authorities De Facto)로서는 인정한다.

이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에조 정권을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했지만, 이는 메이지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외교적 수사에 가까웠으며, 교전 당사자로서의 지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서양 열강들도 메이지 정부를 일본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에조 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한편, 에노모토 등은 스스로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17] '공화국'이라는 명칭은 1868년 11월 에노모토와 면담했던 영국 서기관 프랜시스 오티웰 아담스가 1874년 저서 ''History of Japan''에서 하코다테 정청을 "republic"으로 처음 소개하면서 퍼지게 되었다.[17] 윌리엄 그리피스 역시 저서 『미카도』에서 "홋카이도 공화국"으로 언급했다.[17]

4. 군사



에조 공화국의 군사력은 대정봉환 이후 에도 막부의 해체에 반발한 구 막부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에도 성 무혈 개성 이후, 해군 부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구 막부 세력 규합과 북방 방어를 명분으로 1868년 8월, 기함 카이요마루 등 8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즈 전쟁에서 패한 전습대, 신선조, 창의대 등의 잔존 세력이 합류하면서 군사적 기반이 마련되었다.[5] 이들은 홋카이도(당시 에조치)로 건너가 마쓰마에 번을 점령하고 하코다테에 거점을 마련했다.

에조 공화국 군대는 하코다테의 고료카쿠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육군은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 휘하에 프랑스-일본 합동 사령부 체제로 편성되었으며, 특히 프랑스 군사 고문단 출신 쥘 브뤼네 대위 등 프랑스 장교들이 군 편제와 훈련에 관여했다. 해군은 아라이 이쿠노스케가 이끌었으나, 주력함 카이요마루가 1868년 12월 좌초되어 침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초기에는 마쓰마에 번을 점령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기반 자체가 취약했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주력함 카이요마루의 손실과 신정부 측의 최신 군함 도입으로 해군력에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서구 열강들이 메이지 유신 정부를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면서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빠졌다.

결국 1869년 4월, 신정부군이 대규모 병력을 홋카이도에 파병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하코다테 전투에서 에조 공화국 군대는 패배를 거듭했고, 1869년 5월 17일,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지도부가 고료카쿠에서 항복하면서 에조 공화국은 약 5개월 만에 소멸했다.[9]

4. 1. 군사 조직

1868년에서 1869년 겨울 동안, 하코다테 남부 반도 주변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고, 중심에는 고료각(五稜郭) 요새가 있었다. 육군은 프랑스-일본 합동 사령부 체제로 편성되었으며,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를 프랑스의 쥘 브뤼네(Jules Brunet) 대위가 보좌하였다. 군대는 4개의 여단으로 나뉘었고, 각 여단은 프랑스 장교(아르튀르 포르탕(Arthur Fortant), 장 마르랭(Jean Marlin), 안드레 카즈뇌브(André Cazeneuve), 프랑수아 부피에(François Bouffier))가 지휘하였다. 각 여단은 다시 2개의 대대로 나뉘었고, 대대는 4개의 중대로 나뉘었다.

브뤼네는 모든 장교들에게 서명한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프랑스 사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익명의 프랑스 장교는 브뤼네가 관습, 시정, 요새, 군대 등 모든 것을 장악했으며, 일본인들은 그의 꼭두각시와 같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브뤼네가 능력주의에 기반한 지도자 선출 등 프랑스 혁명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8]

구막부군은 육군과 해군으로 나뉘었으며, 조직 체계는 다음과 같다. '열사만(レジマン)'은 프랑스어 연대(Régiment|레지망프랑스어)를 음역한 것이다.

'''육군'''

육군봉행은 오토리 케이스케, 육군봉행납은 히지카타 도시조가 맡았다.

조직지휘관예하 부대 및 구성
제1열사만제1대대: 다키가와 미치타로 (4개 소대, 전습사관대, 소장의대, 카미키대)
제2대대: 이바 야스로 (7개 소대, 유격대, 신선조, 장의대)
제2열사만혼다 코우시치로제1대대: 오카와 마사지로 (4개 소대, 전습보병대)
제2대대: 마츠오카 시로지로 (5개 소대, 일연대)
제3열사만제1대대: 카스가 사에몬 (4개 소대, 카스가대)
제2대대: 호시 준타로 (4개 소대, 액병대)
제4열사만고야 사쿠자에몬제1대대: 나가이 가쿠신사이 (5개 소대, 충봉대)
제2대대: 아마노 신타로 (5개 소대, 충봉대)
포병대세키 히로에몬
공병대코가네 타츠노스케, 기자와 유시로
기계방미야 시게이치노스케
병원걸이다카마츠 류운



'''해군'''

해군봉행은 아라이 이쿠노스케가 맡았다.

함선함장최후
개양(카이요마루)사와 타로자에몬1868년 11월 에사시 앞바다에서 좌초 후 침몰
회천(가이텐마루)코가 겐고 (후임: 네즈 세이키치)1869년 5월 하코다테 항에서 자침
제2회천오가사와라 켄조1869년 3월 쿠누토 항에서 자침
반룡(반류마루)마츠오카 이와키치1869년 5월 하코다테 항에서 자침
치요다가타모리모토 히로사쿠1869년 4월 하코다테 항에서 좌초
신속니시카와 신조1868년 11월 에사시 앞바다에서 침몰
수송선타에환, 나가쿠지라환, 봉황환, 나가사키환, 미가호환, 회춘환



군대의 장비는 통일되지 않았으며, 부대에 따라 양복, 갑옷 등 다양하게 착용했다. 앙리 니콜과 함께 탈주하여 브뤼네에 합류한 외제느 콜라슈는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추방될 때까지 일본옷을 입고 있었다.

4. 2. 주요 전투

[[File:Naval_Battle_of_Hakodate.jpg|thumb||right||1869년 5월의 하코다테 전투; 전경에는 가스가(''Kasuga'')]호와 철갑선 고테쓰신정부군은 빠르게 일본 본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고, 1869년 4월 함대와 7,000명의 보병 부대를 홋카이도로 파병했다. 신정부군은 신속하게 진격하여 하코다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료카쿠 요새를 포위했다. 결국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1869년 6월 26일에 항복했고, 고료카쿠는 다음 날인 6월 27일에 사쓰마 번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넘겨졌다.[9] 이로써 에조 공화국은 멸망했다. 구로다는 에노모토의 저항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처형을 막아주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9월 20일, 섬의 이름은 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로 바뀌었다.[9]
전투 중 인도주의적 노력에조 공화국 측은 국제적 승인과 중립 유지를 위해 서구식 통치와 군사 제도를 중시했으며, 제네바 협약(1864년) 정신에 따른 인도주의적 노력을 기울였다.[17] 에노모토의 홋카이도 상륙 후, 하코다테시립병원에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야전병원이 설치되었다. 병원 운영 책임자였던 다카마쓰 료운은 신정부군 부상자 6명을 먼저 치료했으며(1명 사망), 5명은 본토로 돌려보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적십자 활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3] 이 병원은 에조 공화국 상륙부터 1869년 8월 하순까지 약 1,340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17] 그러나 이러한 인도주의 정신이 전군에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하여, 신정부군의 진격 과정에서 병원 본원은 보호받았지만 고류지 분원에서는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17] 참고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한 것은 1886년 6월이었다.[17]
관련 인물들의 이후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짧은 수감 생활 후 1872년에 석방되어 홋카이도 개척사의 관리로 임명되었고, 이후 러시아 대사 및 메이지 정부의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다.[10]

에조 공화국을 지원했던 프랑스 군사 고문단 중 일부 부상자들은 1869년 6월 9일 프랑스 선박 ''Coëtlogon''호를 타고 하코다테를 떠나 요코하마로 이송되었다. 지도자였던 쥘 브뤼네는 1869년 9월 프랑스로 귀국하여 잠시 군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1870년 2월 복직하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아서 포르탕, 장 마린, 프랑수아 부피에 등 일부는 1871년 민간인 신분으로 일본에 돌아와 오사카의 군사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4. 3. 프랑스 군사 고문단

1867년부터 요코하마의 오오타 진야에서 막부 전습대의 훈련을 담당했던 프랑스 군사 고문단 소속 인원 중 일부가 프랑스군 복무를 이탈하여 에조 공화국에 합류했다. 포병대위 쥘 브뤼네를 포함한 5명의 군 이탈자와 해군에서 탈영한 2명, 그리고 군 경력이 있던 요코하마 거주 민간인 3명을 합쳐 총 10명의 프랑스인이 에조 공화국 편에 섰다.

이들은 에조 공화국 군대의 조직과 훈련, 전투 지휘에 깊이 관여했다. 육군은 프랑스-일본 합동 사령부 체제로 편성되었으며, 총사령관 오토리 케이스케를 프랑스 대위 쥘 브뤼네가 보좌하였다. 군대는 4개의 여단으로 나뉘었고, 각 여단은 프랑스 장교(아르튀르 포르탱, 장 마르랭, 앙드레 카즈뇌브, 프랑수아 부피에)가 지휘했다. 각 여단은 다시 2개의 대대로, 대대는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 해군 탈영자 2명과 전직 수병 1명은 미야코만 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프랑스 군인들과의 의사소통은 요코하마 불어 전습소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타지마 키타로 등이 통역을 맡았다.

쥘 브뤼네는 에조 공화국 군사 조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모든 장교들에게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프랑스식 사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익명의 프랑스 장교는 당시 상황에 대해 "… 관습, 시정, 요새, 군대;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쳤다. 단순한 일본인들은 그가 뛰어난 기술로 조종하는 꼭두각시들이다… 그는 이 용감한 새로운 일본에서 진정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수행했다. 지도자의 선출과 능력주의 – 즉 출신이 아닌 능력에 의한 계급 결정 – 은 이 나라에 있어서 환상적인 일이며,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을 매우 잘 해낼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다.[8]

오토리 케이스케는 자신의 기록인 '남가기행'에서 브뤼네를 “아직 나이가 젊지만 성격이 총명하다”고 평가했으며, 카즈뇌브에 대해서는 “매우 용감하며 마쓰 전진군 때에도 여러 번 기지를 발휘했다”고 호의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에조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1869년 4월, 신정부의 제국군이 홋카이도에 상륙하여 하코다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료각 요새를 포위했다. 에조 공화국이 패망하기 직전인 6월 9일, 부상당한 프랑스 동맹군 일부는 프랑스 선박 ''Coëtlogon''호를 타고 하코다테를 떠나 요코하마로 향했으며, 카즈뇌브는 현지 해군 병원에 입원했다. 다른 프랑스 군인들도 고료각 함락 전에 하코다테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군함으로 탈출했다.

쥘 브뤼네는 1869년 9월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프랑스군에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경미한 처벌을 받고 1870년 2월 대위로 복직하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1871년에는 아르튀르 포르탱, 장 마르랭, 프랑수아 부피에가 민간인 신분으로 일본으로 돌아와 오사카의 군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5. 경제

에조 공화국은 기반 자체가 취약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신정부군과의 전쟁으로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매춘부에게까지 세금을 징수하고 관문을 설치해 통행세를 받는 등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려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사 결국 이들이 신정부군을 돕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1869년 에조 공화국 정부는 재정 확보를 위해 무역상 리하르트 가르트너(Richard Gaertnerde)와 토지 약 1000ha(300만 평)을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했다.[25] 하지만 이 계약은 에조 공화국 붕괴 후 메이지 정부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1870년에 해제되었다(가르트너 사건).[25]

5. 1. 재정 상황

구막부군의 재정은 매우 좋지 않았으며, 미리 준비했던 군자금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이에 자금 조달을 책임졌던 회계봉행(会計奉行) 에노모토 다카아키(榎本道章)와 부총재(副総裁) 마쓰다이라 다로는 에조 공화국 내에서 통용될 신화폐를 주조하여 발행했다. 이 화폐는 훗날 ‘탈주금(脱走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재정 확보를 위해 에조 공화국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縁日|엔니치일본어(장날)에 열리는 노점을 돌며 자릿세를 걷거나, 도박장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寺銭|지센일본어(사찰세)을 징수하기도 했다. 심지어 매춘부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등 무리한 징수를 강행했다.

더 나아가 하코다테 만(箱館湾)에서 오오모리하마(大森浜)에 이르는 지역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이치노키 관문(一本木関門)(현재 하코다테시(函館市) 와카마쓰정)이라는 관문을 만들어 그곳을 지나는 여자아이와 어린아이에게까지 통행세를 걷었다. 이러한 과도한 세금 징수는 주민들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24]

5. 2. 주민 수탈

구막부군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미리 준비했던 군자금마저 부족해졌다. 이에 자금 조달을 담당했던 회계봉행 에노모토 다카아키와 부총재 마쓰다이라 다로는 에조 공화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신화폐를 주조하여 발행했는데, 이는 훗날 ‘탈주금(脱走金)’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장날(縁日|엔니치일본어) 노점을 대상으로 장소 사용료를 징수하고, 도박장을 묵인하는 대가로 이른바 사찰세(寺銭|데라센일본어)를 거두었으며, 매춘부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등 무리한 재정 확보에 나섰다. 심지어 하코다테 만에서 오오모리하마(大森浜)까지 울타리를 치고, 현재의 하코다테시 와카마쓰정에 해당하는 一本木|이치노키일본어 지역에 이치노키 관문(一本木関門)을 설치하여, 이곳을 통행하는 여자아이와 어린아이에게까지 통행세를 징수함으로써 주민들의 큰 반감을 샀다.[24]

6. 평가



에조 공화국은 에도 막부 붕괴 후 구 막부 세력이 홋카이도(당시 에조치)에 세운 단명 정권으로, 그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건국 초기, 하코다테를 방문한 영국과 프랑스 군함의 함장들은 에조 공화국을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영어)'으로 인정한다는 각서를 보냈다. 이는 당시 함장들이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껴 본국의 훈령을 무시하고 작성한 것으로, 국제법상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려웠다. 에노모토는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결국 메이지 정부를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에조 공화국의 지도자 에노모토 다케아키메이지 천황의 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도쿠가와 가문의 재기를 돕고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한 북방 방어 및 에조 개발을 목적으로 정권 수립의 명분을 내세웠다.[11] 그는 다이죠칸(太政官, ''Dajōkan'')에 보낸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농민과 상인들은 괴롭힘을 받지 않고, 두려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며 우리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일부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국의 이 부분이 우리의 전 주군인 도쿠가와 가메노스케에게 하사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 우리는 북쪽 관문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11]

이러한 관점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에조치가 일본 본토와는 다른 지역으로 인식되었던 점을 들어, 에조 공화국 설립이 일본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라는 정치 체제를 에조치에 '도입'하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12]

한편, 에조 공화국은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였다. 제네바 협약의 정신에 따라 다카마쓰 료운의 주도로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치료하는 야전병원(하코다테 병원)을 운영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적십자 활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23][17] 이 병원에서는 약 1,340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다.[17] 그러나 이러한 정신이 전쟁 중 혼란 속에서 항상 지켜지지는 못했으며,[17]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한 것은 에조 공화국 멸망 후인 1886년이었다.[17]

비록 일본 최초의 공화제적 선거 시도(긍정적 평가 참조)나 인도주의적 노력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에조 공화국은 구 막부 세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취약한 기반, 재정난, 현지 주민과의 갈등(부정적 평가 참조) 등으로 인해 결국 메이지 정부에 의해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총재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항복 후 사면되어 메이지 정부의 고위 관료로 활동했지만, 스스로 에조 공화국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렸다.

6. 1. 긍정적 평가

에조 공화국은 지도부 선출 방식으로 입찰(선거)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공직 선거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68년 12월 15일에 실시된 이 선거는,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중심으로 한 구 막부 세력 내 다양한 파벌(다이묘급 인사, 육군파, 해군파, 쇼기대 등)을 통합하고 지도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졌다.[16]

선거는 사관 이상의 자들만 참여했으며, 이는 구 막부 탈주군 총원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하코다테 주민은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공화제적 선거라고 보기는 어렵다.[16] 총 856표 중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156표로 최다 득표를 했으나, 득표율은 20% 미만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으며, 각 파벌별로 표가 나뉜 양상을 보였다.[20]

총재 선거의 주요 후보별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입찰" 결과를 참고하여 주요 직책이 결정되었으며,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총재로 선출되었다.[22] 선거 결과가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려 했다는 점 자체는 근대적인 정치 체제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22]

직책이름
총재에노모토 다케아키
부총재마쓰다이라 다로
해군봉행아라이 이쿠노스케
육군봉행오토리 케이스케
육해 재판관타케나카 시게타다, 이마이 신로
육군봉행 겸임히지카타 토시조
하코다테 봉행나가이 나오유키
마쓰마에 봉행히토미 카츠타로
에사시 봉행마쓰오카 시로지로, 고스기 마사요시
개척봉행사와 타로자에몬
회계봉행에노모토 미치아키, 가와무라 로쿠시로
해군두마쓰오카 이와키치
해군두 겸임코가 겐고, 네즈 세키치, 오가사와라 켄조, 후루카와 세쓰조, 아사바 코지로
보병두혼다 코우시치로, 후루야 사쿠자에몬
보병두 겸임타키가와 미치타로, 이바 하치로, 오가와 마사지로, 마쓰오카 시로지로, 카스가 사에몬, 호시 준타로, 아마노 신타로, 나가이 소신사이
포병두 겸임세키 히로에몬, 나카지마 사부로스케
공병두 겸임요시자와 유시로, 코스게 다쓰노스케
기계두 겸임미야 시게이치노스케, 시부사와 나리이치로


6. 2. 부정적 평가

에조 공화국의 주요 직책 선출은 "입찰"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득표 결과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아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22] 실제 권력은 에노모토 다케아키, 마쓰다이라 다로 등 구 막부 세력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구 막부군의 재정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회계봉행 에노모토 미치아키와 부총재 마쓰다이라 다로 주도로 신화폐를 발행했다. 이 화폐는 후에 “탈주금(脱走金)”이라 불리며 악평을 받았다. 재정 확보를 위해 장날 노점에서 장소 사용료를 걷거나, 도박장을 묵인하는 대가로 사찰세(寺銭)를 징수했으며, 심지어 매춘부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했다. 나아가 하코다테항에서 오오모리하마(大森浜)까지 울타리를 치고 이치노키 관문(一本木関門)을 설치하여, 이곳을 지나는 여자아이와 어린아이에게까지 통행세를 징수하는 등 무리한 수탈을 감행하여 주민들의 큰 반감을 샀다.[24] 이러한 주민 수탈과 내부적 한계는 에조 공화국이 단기간에 붕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Hillsborough
[2] 웹사이트 「蝦夷共和国の顛末」 https://www.cis.fuku[...] 福岡大学情報基盤センター 2021-01-24
[3] 웹사이트 『函館市史』通説編2 4編1章2節3 http://archives.c.fu[...] 2021-01-24
[4] 서적 A Ramble Round the World, 1871: Japan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13-05-23
[5] 서적 Origins of the Modern Japanese State https://books.google[...] Pantheon Books 2021-08-05
[6] 웹사이트 From the Edo Period to Meiji Restoration in Japan https://courses.lume[...]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논문 First Japanese Envoy Enomoto Takeaki (1836-1908) and Russia
[11] 서적
[12] 서적
[13] 웹사이트 Republic of Ezo (Japan) https://www.crwflags[...] 2024-11-23
[14] 서적 幻の北海道共和国 https://iss.ndl.go.j[...] 講談社
[15] 서적 北海道共和国と怪外人スネル https://iss.ndl.go.j[...]
[16] 웹사이트 『函館市史』通説編2 4編1章2節3 http://archives.c.fu[...] 2021-01-24
[17] 웹사이트 「蝦夷共和国の顛末」 https://www.cis.fuku[...] 福岡大学情報基盤センター 2021-01-24
[18] 웹사이트 箱館戦争(はこだてせんそう)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4-17
[19] 웹사이트 函館市史デジタル版 通説編第2巻第4編 「脱走軍の外交」 http://archives.c.fu[...] 2020-03-22
[20] 웹사이트 役員選挙と蝦夷地領有宣言式 http://archives.c.fu[...]
[21] 문서 第11代長岡藩主。箱館には来ていないが票を得た。
[22] 서적
[23] 웹사이트 高松凌雲 http://www.zaidan-ha[...] 公益財団法人 函館市文化・スポーツ振興財団 2021-01-24
[24] 웹사이트 脱走軍支配下の箱館 https://web.archive.[...]
[25] 웹사이트 「イザベラ・バードの道」を現代に活かす 第3回 (開発こうほう 2012年4月号) https://www.hkk.or.j[...] 北海道開発協会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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