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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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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에 가입했으나, 미회수된 이탈리아 문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갈등을 겪으며 중립을 선언했다. 이후 연합국과의 런던 조약을 통해 참전을 결정하고, 1915년 5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군은 이손초 강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으나, 험준한 지형과 장비 부족, 열악한 지휘 등으로 인해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하며 위기를 겪었지만,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재정비에 성공했다.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승리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복했고, 이탈리아는 종전 후 승전국이 되었으나,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았던 영토를 제대로 얻지 못해 '불구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결과는 이탈리아 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고, 파시즘의 부상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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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이탈리아 전선
일부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다른 이름이탈리아어: Fronte italiano
독일어: Südwestfront
날짜1915년 5월 23일 – 1918년 11월 6일
장소동부 알프스 및 베네토 평원
결과이탈리아 승리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생제르맹 조약 (1919년)
트리아농 조약
교전 세력
연합국이탈리아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루마니아 군단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미국
중앙 강대국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지휘관
연합군 사령관루이지 카도르나
아르만도 디아스
루돌프 램버트
장 세자르 그라치아니}}
중앙 강대국 사령관프리드리히 대공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오토 폰 벨로
병력
연합국1915년: 최대 58개 사단
1917년: 3개 사단
1918년: 2개 사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918년: 5개 연대
루마니아 군단 1918년: 3개 연대
1918년: 1개 연대에 1,200명
중앙 강대국1915년: 최대 61개 사단
1917년: 5개 사단
사상자
연합국1,832,639명:
246,133명 사망
946,640명 부상
70,656명 실종
569,210명 포로
6,700명:
1,057명 사망
4,971명 부상
670명 실종/포로
2,872명:
480명 사망
(700명 간접 사망)
2,302명 부상
불명 포로
중앙 강대국1,386,327명:
155,350명 사망
560,863명 부상
175,041명 실종
477,024명 포로
불명
영토 변경
결과이탈리아가 트렌토, 볼차노, 트리에스테를 합병하고 인스브루크를 휴전까지 점령함
추가 정보
이탈리아에서의 명칭제4차 독립 전쟁
주요 전투제1차 이손초 전투
제2차 이손초 전투
제3차 이손초 전투
제4차 이손초 전투
제5차 이손초 전투
트렌티노 공세
제6차 이손초 전투
제7차 이손초 전투
제8차 이손초 전투
제9차 이손초 전투
제10차 이손초 전투
오르티가라 산 전투
제11차 이손초 전투
카포레토 전투
피아베 강 전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2. 배경

이탈리아 왕국은 리소르지멘토 과정에서 이탈리아인의 영토라고 여겨지는 국토 대부분을 자국에 편입시켰고, 1866년까지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등이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티롤, 트리에스테, 달마티아를 비롯한 지역은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으로 남게 되었고 미회수된 이탈리아라 불리며 양국 간 갈등의 큰 원인이 되었다. 1882년 독일과 함께 삼국 동맹을 체결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신뢰할 수 없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는 1902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 삼국동맹을 무효화시켰고, 1914년 7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구실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삼국동맹은 방어적 성격이며 오스트리아가 침략자라는 이유로 협조를 거부했다. 이탈리아는 협상국과 동맹국 양측을 상대로 동시 협상을 진행했다.

2. 1.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미회수된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은 리소르지멘토라는 통일 운동을 통해 이탈리아인의 영토라고 여겨지는 국토 대부분을 통합했다. 1866년까지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등이 이탈리아에 편입되었으나, 티롤, 트리에스테, 달마티아 등은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으로 남았고, 이는 '미회수된 이탈리아'라 불리며 양국 간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11] 1882년 독일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체결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는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이탈리아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리비아를 획득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독일이 오스만 제국을 동맹으로 여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가 발칸 전쟁으로 인해 복잡해지면서 이전의 삼국 동맹 파트너들로부터 이탈리아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2. 삼국 동맹과 이탈리아의 중립 선언

1882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을 체결했으나, '미회수된 이탈리아' 문제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주요 단계로 여겨진다. 오스만 제국의 약화는 이탈리아를 이전의 삼국 동맹 파트너들로부터 소외시켰는데, 독일은 오스만 제국을 동맹으로 여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는 이후 발칸 전쟁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이 전쟁은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이탈리아의 승리를 예상하여 일으켰다.[11]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안토니오 살란드라는 삼국 동맹이 방어적인 성격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세에 이탈리아가 참전할 의무는 없다고 판단하여 중립을 선언했다.[12]

2. 3. 런던 조약과 이탈리아의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살란드라삼국 동맹이 방어적 성격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탈리아의 참전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판단했다.[13] 그러나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동맹국이었음에도, 보스니아 위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미회수된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던 역사적 배경[11]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약화를 확인하고 영토 확장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연합국과 동맹국 양측은 이탈리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령 튀니지와 '미회수된 이탈리아' 일부 할양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탈리아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역
트렌티노와 남부 티롤
쾨스텐란트 전역 (헝가리령 피우메 포함)
북 달마티아와 차라, 세베니코, 달마티아 제도 대부분
카르니올라와 케른텐 지역의 상당 부분
도데카네스 제도 보장
알바니아의 블로러 항
알바니아의 이탈리아 보호령화
독일의 해외 식민제국 일부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의 일부 (오늘날 안탈리아 주의 일부)



1915년 4월 26일, 이탈리아는 연합국과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한 달 안에 협상국 편에 서서 참전하기로 약속했다.[14] 이 조약은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2세 황제와 협상국의 모든 조약을 공개할 때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4일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파기했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탈리아가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았던 조건들 중 상당수가 무효화되었고, 이는 불구의 승리라는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적 신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3. 이탈리아군의 참전과 초기 전투 (1915-1916)

1915년 런던 조약을 통해 삼국 동맹에서 탈퇴하고 협상국 측에 가담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미수복 이탈리아") 병합을 목표로 참전했다.

장군의 연설을 듣고 있는 이탈리아 병사들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참전하여, 느린 진격 속도, 부대 간 협조 미흡, 장비 및 탄약 부족 등의 문제를 보였다.[26] 특히 소총, 수류탄, 기관총 등 기본적인 장비조차 부족했고,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나폴레옹식' 정면 공격 전술을 고집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26]

이탈리아군은 이손초 강(소차 강)을 건너 고리치아 점령과 카르스트 고원 진입을 목표로 공세를 시작했다. 제1차 이손초 전투(1915년 6월 23일)에서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군보다 3배 많은 병력을 보유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7월 7일에 전투가 종료되었다.[26]

완전 행군 장비를 착용한 이탈리아 보병


오스트리아-헝가리 35cm 해군포 L/45 M. 16


이후 이탈리아군은 제2차 이손초 전투(1915년 7월 18일), 제3차 이손초 전투(1915년 10월 18일), 제4차 이손초 전투(1915년 11월 10일)를 계속했지만, 큰 성과 없이 무기 부족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

겨울 휴전 후, 이탈리아군은 1916년 3월 9일 제5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하여 사바티노 산을 점령했지만, 다른 공격은 격퇴당했다. 1916년 후반, 제6차 이손초 전투에서 고리치아를 점령하여 사기를 높였으나, 제7차, 제8차, 제9차 이손초 전투(9월 14일 ~ 11월 4일)는 양측 군대에 큰 피해만 주었다.

1916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트렌티노에서 이탈리아군을 포위하기 위한 트렌티노 공세(아시아고 전투)를 시작했으나 실패했다.[27]

1917년 10월, 브르시치 고개를 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보급로


1915년부터 돌로미테스 산맥에서는 산악전이 벌어졌다. 양측은 갱도를 건설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1916년 12월 13일 '하얀 금요일'에는 눈사태로 만 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했다.[26] 1916년 1월부터 1918년 3월 14일까지 양측은 총 34개의 갱도를 폭파했다.

이탈리아군의 갱도

3. 1. 이탈리아군의 준비 부족

이탈리아군은 수백만에 달하는 육해군을 동원했지만,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참전했다. 이들은 느린 진격 속도, 부대 간 협조 미흡, 장비 및 탄약 부족 등 신생국 군대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26]

특히, 1914년 8월 이탈리아군은 표준 카르카노 소총 750,000정만 보유하고 있었고, 수류탄은 전혀 없었다. 1915년 5월까지 군대는 소총당 900발의 탄약만을 조달할 수 있었으며, 에밀리오 데 보노는 "1915년 내내 참호에서 수류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기록했다.[23][24]

기관총 역시 부족했다. 1911년 602개 기관총 중대 창설 계획에 따라 1914년 8월까지 150개 중대만이 창설되었고, 1915년 5월 피아트-레벨리 모델 1914가 표준 기관총이 되었지만, 총 309개 중대, 618정만이 창설되어 계획의 절반에 불과했다. 반면, k.u.k 연대는 대대당 MG 07/12 "슈바르츠로제" 기관총 중대 4개를 보유하고 있었다.[25]

이러한 장비 부족은 훈련의 범위와 효율성을 제한했다. 또한, 새로 임명된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나폴레옹식' 정면 공격 전술을 고집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26]

대부분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군은 주요 수송 수단으로 말을 사용했지만, 험준한 알프스 지형에서 병력을 충분히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3. 2. 이손초 전투 (1915-1916)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이손초 강(소차 강)을 건너 고리치아 요새 도시를 점령하고 카르스트 고원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공세는 제1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했다.

1915년 6월 23일 시작된 제1차 이손초 전투 초기에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군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했지만, 북서부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고지대의 강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군이 고지대를 점령했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고지대를 오르며 어려운 공세를 펼쳐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강 너머로 크게 진격하지 못했고, 전투는 1915년 7월 7일에 종료되었다.[26]

전문적인 장교단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장비가 부족했던 이탈리아 부대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많은 병사들은 새로 임명된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을 혐오했다. 기존 장비와 탄약 부족은 전진 속도를 늦추었고, "나폴레옹식" 돌파에 대한 모든 기대를 좌절시켰다.[26] 당시 대부분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군은 주로 말을 수송에 사용했지만, 험준한 지형에서 병력을 충분히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다.

2주 후인 1915년 7월 18일, 이탈리아는 제2차 이손초 전투에서 더 많은 포병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참호선에 대한 또 다른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전선 북부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코바리드(카포레토) 상공의 바토그니차 산(Mount Batognica)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미래 전투에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이 격렬한 공세는 양측이 탄약이 소진되면서 교착 상태에 빠지며 끝났다.

이탈리아는 재정비하여 1200문의 중포를 새로 장비하고 1915년 10월 18일 제3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하여 또 다른 공격을 감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격퇴했고, 전투는 11월 4일에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이탈리아는 11월 10일에 제4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하여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양측 모두 더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는 중요한 참호를 점령했고, 전투는 12월 2일에 무기가 소진되어 종료되었지만, 산발적인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겨울 휴전 후, 이탈리아는 1916년 3월 9일 제5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바티노 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다른 모든 공격을 격퇴했고, 전투는 참호전에 부적합한 악천후 속에서 3월 16일에 종료되었다.

1916년 후반, 이손조 강을 따라 네 차례의 전투가 더 벌어졌다. 8월에 이탈리아군이 시작한 제6차 이손초 전투는 이전 공격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공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고리치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제7차, 제8차, 제9차 이손초 전투(9월 14일 ~ 11월 4일)는 이미 기진맥진한 양국 군대를 더욱 소모시키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1915년 5월부터 1917년 8월까지 이탈리아 병사들이 참여한 공세의 빈도는 석 달에 한 번꼴로 서부 전선의 군대가 요구한 것보다 높았다. 이탈리아군의 징계는 독일군, 프랑스군, 영국군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바위투성이 지형에서의 포격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부드러운 지형보다 발사된 포탄당 70%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17년 가을까지 이탈리아군은 전쟁 중 발생할 사망자의 대부분을 이미 기록했지만, 전쟁의 끝은 여전히 요원하게 느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생각은 달랐다. 8월 25일, 카를 황제는 카이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11차 전투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12차 전투에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사령관들과 용감한 병사들은 그러한 불행한 상황을 공세로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병력 면에서 필요한 자원이 없습니다."

3. 3. 아시아고 공세 (19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트렌티노에서 이탈리아군을 포위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 공세는 포 강까지 진출하여 이탈리아군의 제2, 3군단과 4군단을 갈라놓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16년 3월 11일, 15개 사단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트렌티노 공세(아시아고 전투)를 시작했으나,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대한 긴급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 현지 사령관은 방어 준비 대신 국지적 공세를 선택하여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급히 이동시켜야 했고, 동부 전선에서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면서 간신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27]

3. 4. 갱도를 이용한 산악전

1915년부터 험준한 돌로미테스 산맥에서 치열한 산악전이 벌어졌다. 양측 공병대는 병력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전투용 갱도를 건설했다. 이 갱도는 어느 정도의 방호와 보급 지원을 가능하게 했다. 돌로미테스 산맥에서의 굴삭 작업은 매우 높은 숙련도와 기술을 필요로 했다. 1916년 12월 13일, '하얀 금요일'에는 만 명이 넘는 병사가 돌로미테스 산맥의 눈사태로 사망했다.[26]

방호시설과 보호되는 수송로 건설 외에도,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사용했던 것처럼 갱도를 파서 무인지대를 통과해 적 진지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폭파시켜 참호전의 대치 상태를 타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16년 1월부터 1918년 3월 14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은 총 34개의 갱도를 폭파시켰다.

4. 독일군의 개입과 이탈리아군의 위기 (1917)

1917년 7월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독일군으로부터 대규모 증원을 받았다.[28] 독일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대 전술을 도입하도록 지원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연이은 공세의 미미한 성과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부대 내 항명과 폭동이 빈번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4. 1. 카포레토 전투

1917년 7월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마침내 독일군으로부터 대규모 증원을 받게 되었다.[28] 독일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돌격대 전술을 도입하게 하였고, 새로운 공세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반면에 이탈리아군은 연이은 공세의 보잘것없는 성과로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부대에서 항명과 폭동이 빈발해 무능력한 상태에 놓였다.

카포레토 전투와 이탈리아군의 퇴각. 1917년 9월-10월


1917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독일군은 12차 이손초 전투를 개시했다. 이 공세에는 막대한 양의 독가스가 포격에 이용되었고, 동맹국군의 충격 전술이 큰 효과를 발휘해 이탈리아군의 제1군과 제2군은 수십만의 사상자와 포로를 남긴 채 전투 첫날에만 19km을 후퇴해 탈리아멘토 강까지 이르렀고, 일주일동안 대후퇴를 지속해 11월 10일 이탈리아군은 훨씬 남쪽의 피아베 강에 방어선을 칠 수밖에 없었다.[29] 또한 회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놀란 영국과 프랑스는 수 개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했다. 이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전투로 손꼽힌다.

빠르고 깊숙이 진격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보급선을 벗어났고, 이 때문에 진격을 멈추고 재편성해야 했다. 베네치아 근처 피아베 강 방어선까지 밀린 이탈리아군은 이 시점까지 전쟁에서 6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4. 2. 이탈리아군의 재정비

카포레토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이탈리아군은 1917년 11월 6일부터 7일까지 연합국과 라팔로 회담을 열어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루이지 카도르나의 해임을 요구했고, 이탈리아는 이를 받아들여 아르만도 디아츠를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28][29] 또한, 베르사유에 연합국 최고회의를 설립하여 각국의 상황을 고려하며 통일된 전쟁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만도 디아츠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선을 재정비했다. 1917년 11월,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5개 사단과 6개 사단을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하여 전력 보강에 기여했다.[28][29] 연합국의 지원은 병력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가 항상 부족함을 겪던 석탄, 철강과 같은 전략 물자 공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28] 이러한 연합국의 지원에 힘입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세를 억제할 수 있었다.

5. 종전과 이탈리아의 승리 (1918)

1918년, 춘계 공세가 실패로 끝난 후,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카포레토 전투 승리 이후 점령지를 최대한 확보하려 했으나, 보급 문제로 진격을 멈춰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 근처 피아베 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편했고, 18세 소년들까지 징집하며 병력 손실을 메웠다.(''Ragazzi del '99'')[35] 1917년 11월, 영국과 프랑스 증원군이 도착했고, 연합국의 지원으로 이탈리아는 패배의 충격에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수뇌부는 종전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피아베 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고, 결국 빌라 주스티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5. 1. 피아베 강 전투

춘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카포레토 전투 승리 이후 점령지를 최대한 확보하려 했으나, 보급 문제로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해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 근처 피아베 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편했고, 18세 소년들까지 징집하며 병력 손실을 메웠다.(''Ragazzi del '99'')[35] 1917년 11월, 영국과 프랑스 증원군이 도착했고, 연합국의 전략 물자 지원으로 이탈리아는 패배의 충격에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수뇌부는 종전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아우구스트는 전선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협동 작전을 펼치도록 했으나, 산악 지형으로 인해 통신과 협조가 어려웠고, 전력 분산으로 양쪽 모두 강력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지휘관 간 불화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피아베 강 전투는 토날레 고개에서의 견제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탈리아군은 쉽게 반격했다. 스베토자르 보로에비치 장군은 피아베 강 도하를 명령했지만, 이탈리아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7월 10일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1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트렌티노 공격도 실패하여 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군은 공세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대처할 전력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1918년 춘계 공세를 위해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종전 방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장군들은 최종 공세 방식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두 군대가 산악 지대에서 통신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두 방향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결정했다.

피아베 강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Passo del Tonale|토날레 고개it 근처 기만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연합군은 쉽게 격퇴했다. 오스트리아군 탈영병이 제공한 정보 덕분에 이탈리아군은 2개 군을 오스트리아군의 공세 축으로 배치할 수 있었다.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대장의 공세는 초반에는 성공했으나, 보급선이 항공기에 폭격당하고 이탈리아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실패했다. 오스트리아군은 15만 명의 사상자와 2만 5천 명의 포로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으며, 전황은 크게 이탈리아 측으로 기울었다.

[35][36][37][38][39][40]


5. 2.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피아베 강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탈리아군은 즉각적인 반격을 주저했다. 아르만도 디아즈 대장은 서부 전선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고 자국 군대의 보충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렸다. 1918년 10월, 충분한 병력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디아즈는 피아베 강 건너편 비토리오 베네토를 목표로 하는 공세를 계획했다.

10월 23일, 이탈리아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본국에서의 휴전 움직임과 독립 운동 격화로 사기가 저하된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했다. 이탈리아군은 사칠레 부근의 전선 틈을 돌파하고 증원군을 투입하여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이 전투력을 상실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는 신호탄이었다. 10월 마지막 주, 프라하(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선언)와 자그레브(10월 29일 슬로베니아인·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 국가 독립)에서 제국을 구성하는 각 지역이 독립을 선언했다. 10월 29일,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이탈리아에 휴전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우디네, 트렌토를 점령했고, 해상 진격을 통해 트리에스테까지 점령했다. 10월 31일, 부다페스트에서 아스터 혁명이 일어나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었다. 독일에서는 1918년 11월 3일부터 1919년 8월 11일까지 독일 혁명이 일어나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5. 3.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파도바 근처 빌라 주스티에서 이탈리아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빌라 주스티 휴전협정).[43] 이 협정으로 30만 명의 오스트리아 군인이 항복했다. 휴전 협정은 다음 날인 11월 4일 오후 3시에 발효되었다.

이에 앞서 10월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각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10월 28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10월 29일에는 슬로베니아인·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 국가가 독립을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10월 29일 이탈리아에 휴전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군은 공세를 계속하여 우디네, 트렌토,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다. 10월 31일에는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독립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6. 전후 처리와 '불구의 승리'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했지만, 런던 조약에서 약속받았던 영토와 이권 상당수가 생제르맹 조약베르사유 조약에서 축소되거나 반영되지 않았다.[1] 대표적으로 북달마티아와 달마티아 제도는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귀속되었고, 이탈리아는 차라에 해군 기지를 얻는 데 그쳤다.[1] 또한, 수많은 참전 군인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막대한 전비를 부담해야 했던 경제 사정은 악화되었다.[1] 이탈리아의 승리는 허울만 좋은 불완전한 것이었다.[1] 이탈리아 전선의 전후 처리는 불구의 승리라는 오점을 남겼고, 이는 이후 파시즘 대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1]

이탈리아인들은 승전국들에 대해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고, 이는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져 공산당과 좌파 세력이 약진하는 결과를 낳았다.[1] 이에 위기감을 느낀 왕실과 자본가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 운동을 지지하게 되었다.[1]

7. 영향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했지만, 런던 협정에서 약속되었던 영토와 이권의 상당 부분이 셍제르맹 조약과 베르사유 조약에서 축소되거나 반영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북달마티아와 달마티아 제도는 이탈리아가 아닌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얻었으며, 이탈리아는 차라에 해군 기지를 얻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참전 군인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다시 얻지 못했고, 막대한 전비를 부담해야 했던 경제 사정은 악화되었다. 이탈리아의 승리는 허울만 좋은 불완전한 승리였으며, 이탈리아 전선의 전후 처리는 불구의 승리라는 오점을 남겨 이후 파시즘의 대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승전국들에 대해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고, 이는 사회적 혼란과 공산당 및 좌파 세력의 약진으로 이어졌다.[1] 이에 위기감을 느낀 왕실과 자본가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 운동을 지지하게 되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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