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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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현은 당 고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로, 당나라 황족이다. 655년에 노왕에 봉해졌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통하여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와의 갈등으로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자결을 강요받아 생을 마감했으나, 예종이 복위한 후 장회태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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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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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장회태자 (諡號) |
휘 | 이현 (李賢) |
자 | 명윤 (明允) |
봉호 | 노왕 (潞王) (655년–662년) 패왕 (沛王) (662년–673년) 옹왕 (雍王) (673년–675년) |
시대 | 당나라 |
생일 | 655년 1월 29일 |
사망일 | 684년 3월 18일 |
아버지 | 당 고종 |
어머니 | 무측천 |
배우자 | 방씨 (房氏) (옹왕비) 장씨 (張氏) (양제) |
자녀 | 이광순 (李光順) (노왕) 이수례 이수의 (李守義) (비왕) 장순공주 (長順公主) |
생애 | |
즉위 | 태자 (675년–680년) |
이전 | 이홍 |
이후 | 당 중종 |
2. 가계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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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1. 이현 | 2. 당 고종 | 3. 측천무후 | 4. 당 태종 | 5. 장손황후 | 6. 무사확 | 7. 양씨 부인 | ||
조부모 | 8. 당 고조 | 9. 태목순성 황후 | 10. 장손성 | 11. 고씨 부인 | 12. 무화 | 13. 조씨 부인 | 14. 양다 | 15. | |
증조부모 | 16. 이병 (당 의 인공) | 17. 독고 부인 | 18. 두의 (신무공) | 19. 북주 상양공주 | 20. 장손사 | 21. | 22. 고경덕 혹은 고매 | 23. | |
고조부모 | 24. 무건 | 25. 송씨 부인 | 26. | 27. | 28. 양소 | 29. | 30. | 31. |
3. 생애
이현(李賢)은 655년 1월 29일에 고종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당시 총애를 받던 후궁 무씨(나중에는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궁궐 안에서는 그가 실제로 무씨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언니 무순(나중에는 한부인으로 책봉됨)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655년, 그의 어머니인 무씨가 고종 황제의 첫 번째 부인 왕황후를 폐위하고 황후가 된 같은 해에, 이현은 노왕에 봉해졌다. 656년에는 기주(대략 현대의 바오지, 산시 성)의 자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수도인 옹주(대략 현대의 시안, 산시 성)의 자사이자 유주(대략 현대의 베이징)의 도독을 겸임했다.
672년에는 영왕으로 작위가 바뀌었고, 양주(대략 현대의 우웨이, 간쑤 성)의 도독 직함을 받았지만, 장군과 옹주 자사도 계속 겸임했다. 이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674년에 다시 이현으로 바뀌었다.
3. 1. 초기 생애와 학문적 업적
고종 황제가 재상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이현은 ''상서'', ''예기'', ''논어''를 공부했고, 많은 고대 시들을 분명하게 기억했다고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우아했다고 전해진다. 5세에 노왕(潞王)에 봉해졌으며, 6세에 옹주 목(雍州牧)·기주 자사를 겸했다.[1] 11세에 패왕(沛王)·양주 도독·좌무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1] 이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관리 왕발을 측근으로 두었다.이 시기에 여러 왕자들이 닭싸움을 자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왕발은 ''주왕계문'' (檄周王雞文, 주왕은 이현의 형제 이현 (음이 다름), 후에 이철이라고 불림)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썼는데, 고종 황제가 이 글을 읽고 아들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화를 내며 왕발을 배왕부에서 내쫓았다.
676년(의봉 원년)에는 학자들과 함께 『후한서』의 주석을 완성했다.[1]
3. 2. 황태자 책봉과 측천무후와의 갈등
675년, 이현의 형 이홍 태자가 사망했는데,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이 죽음이 측천무후의 지시로 인한 독살이라고 여겼다.[1] 그해 7월 3일, 이현은 이홍을 대신하여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곧 정부의 많은 문제를 이현이 결정하도록 지시했지만, 황실 업무의 대부분은 측천무후가 처리했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어머니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이현은 훌륭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칭찬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 이현은 장대안 등 학자들을 이끌고 유송의 학자 범엽이 저술한 동한의 공식 역사인 후한서에 대한 주석을 썼다.한편, 이현과 측천무후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현은 자신이 측천무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측천무후는 이를 감지하고 문인들에게 '소양정범'(少陽正範, '소양'은 태자를 완곡하게 지칭하는 용어)과 '효자전'(孝子傳)이라는 두 작품을 쓰게 하여 이현에게 주었으며, 이현을 꾸짖는 여러 통의 편지를 써서 그를 더욱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측천무후는 이현의 정부 결정 권한을 박탈하고 이현의 이전 정책을 모두 변경했다. 또한, 고종과 측천무후가 신뢰하던 무당 명숭엄이 679년에 암살당하자, 측천무후는 이현을 의심했다. 명숭엄이 측천무후에게 "태자는 국가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영왕(이현의 동생 이철, 후의 중종)은 태종 (고종의 아버지)과 가장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고 말하고 "상왕(이현의 동생 이단, 후의 예종)이 가장 훌륭한 외모를 지녔다"는 등 여러 차례 발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음악과 여성을 좋아하기로도 유명했다. 측천무후는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시켜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관료 설원초 등이 이끄는 조사를 명령했다. 조사대가 태자의 마구간을 수색했을 때, 수백 벌의 검은 갑옷을 발견했고, 이를 쿠데타의 증거로 여겼다. 심문 후, 이현이 가장 아끼는 하인 조도생(趙道生)은 명숭엄 암살이 이현의 지시였다고 자백했다. 이현을 총애했던 고종은 그를 사면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측천무후는 거절했고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요청했다. 680년 9월 20일,[2] 고종은 이현을 폐위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켜 동쪽 수도 낙양 (고종과 측천무후가 오랫동안 거주했던 곳)에서 수도 장안으로 보내 그곳에 투옥했다. 그의 측근들은 처형되었고, 압수된 갑옷은 이현의 반역을 보여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이철이 그의 후임 태자로 책봉되었다.
3. 3. 폐위와 죽음
683년, 이현은 장안에서 파주(현재의 쓰촨성 바중시)로 이송되었다. 684년, 고종 황제가 사망한 후, 이철이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중종), 곧 황태후였던 무후에게 불복종하는 징후를 보여 폐위되었고, 이단이 대신 황제가 되었다(예종). 그러나 황태후 무씨는 섭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했다. 684년 봄, 무후는 장군 구신기를 파주로 보내 "전 황태자 이현의 집을 조사하여 외부의 공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이현을 죽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구신기는 파주에 도착하여 이현을 작은 방에 가두고 자결하도록 강요했다.조로 2년(680년), 무측천은 황태자와 대립한 명숭엄을 강도로 위장시켜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이를 명분으로 황태자의 저택을 수색하여 무기와 갑옷 수백 개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모반 혐의를 씌웠다. 고종은 이현을 용서하려 했지만, 무후는 "현은 모반을 꾀했으니, 그의 죄를 사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1] 영순 2년(683년), 이현은 파주로 유배되었다.[1]
문명 원년(684년)에 무후는 좌금오장군 구신기를 파주에 파견하여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구신기는 멋대로 현을 유폐시키고 자결하도록 강요했다. 구신기가 귀환하자, 무후는 그를 첩주 자사로 임명하고, 현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며 영왕에 봉했다.[1]
이현의 사망 소식이 낙양에 도착하자, 무후는 공개적으로 구신기를 비난하고 첩주의 지사로 강등시켰으며, 이현을 애도하고 영왕(雍王)의 시호를 추증했다. (구신기는 곧 낙양으로 소환되어 다시 장군이 되었다.) 705년 무후가 죽고 중종이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중종은 이현의 관을 장안으로 반환하여 고종 황제의 능 근처에 묻도록 했다. 710년 예종이 다시 황제가 된 후, 이현의 태자 칭호를 복원했다. 그 후 예종이 복위하자 황태자 지위를 회복시키고 "장회"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차남 李守禮|이수례중국어를 빈왕에 봉했다(장남 이광순은 앞서 주살되었고, 삼남 이수의도 병사했다).[1]
4. 사후
683년, 이현은 장안에서 파주(巴州, 대략 현재의 바중, 쓰촨성)로 이송되었다. 684년, 고종 황제가 죽은 후, 이철(李哲)은 중종으로 즉위했으나, 곧 무후(당시 황태후)에게 불복종하는 징후를 보여 폐위되었고, 이단(李旦)이 예종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황태후 무씨가 섭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했다. 684년 봄, 무후는 장군 구신기(丘神勣)를 파주로 보내 "전 황태자 이현의 집을 조사하여 외부의 공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이현을 죽이라는 암시였다.[1] 구신기는 파주에 도착하여 이현을 작은 방에 가두고 자결하도록 강요했다.[1] 이현의 사망 소식이 낙양에 도착하자, 무후는 공개적으로 구신기를 비난하고 첩주(疊州, 대략 현대의 간난 티베트족 자치주, 간쑤성)의 지사로 강등시켰으며, 이현을 애도하고 영왕(雍王)의 시호를 추증했다.[1] (구신기는 곧 낙양으로 소환되어 다시 장군이 되었다.)[1] 705년 무후가 죽고 중종이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중종은 이현의 관을 장안으로 반환하여 고종 황제의 능 근처에 묻도록 했다.[1] 710년 예종이 다시 황제가 된 후, 이현의 태자 칭호를 복원했다.[1]
5. 이현이 등장한 작품
6.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675-07-03
[2]
서적
Zizhi Tongjian
0680-09-20
[3]
서적
旧唐書
[4]
웹사이트
大唐盛世 唐代帝陵
http://www.sxlib.org[...]
[5]
서적
旧唐書列伝第三十六 高宗中宗諸子
"[[s:zh:舊唐書/卷86#賢子邠王[...]
[6]
웹인용
당 장회태자묘 벽화 신라사신,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https://web.archive.[...]
2015-02-23
[7]
웹인용
국립중앙도서관 - 後漢書
https://web.archive.[...]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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