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다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다조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의 무장이다. 용감하고 궁술에 능했으며, 군사적 업적으로 우응양대장군이 되었다. 흑수말갈을 토벌하고, 동돌궐, 거란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 정변에 가담하여 요양군왕에 봉해졌으나, 이후 이중준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사후 요양왕으로 복권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54년 출생 - 이현 (당)
    이현은 당 고종의 아들이자 측천무후의 아들로, 학문에 능통하여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폐위되어 유배된 후 자결했으며, 예종 복위 후 장회태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 707년 사망 - 몬무 천황
    문무 천황은 15세에 즉위한 일본의 제43대 천황으로, 다이호 율령을 완성하여 일본 법제를 정비하고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하는 등 국가 체제 기틀을 마련했다.
  • 707년 사망 - 교황 요한 7세
    교황 요한 7세는 705년부터 707년까지 재임한 제86대 교황으로, 칼라브리아 출신 동로마 제국 관료의 아들이며, 랑고바르드족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는 갈등을 겪었고, 로마에 여러 기념 건물을 세우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 말갈 사람 - 걸사비우
    걸사비우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억류되었다가 걸걸중상과 함께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을 시도했으나 천문령 전투 이전에 전사한 고구려 유민이다.
  • 말갈 사람 - 생해
    생해는 말갈 출신의 고구려 장군으로, 661년 뇌음신과 함께 신라의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다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다조
원래 이름이다조(李多祚)
작위문신, 무신
출생일654년
사망일707년
사망지장안성(長安星)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부친무씨(武氏)
모친미상
자녀무씨(武氏)
친인척미상
종교미상
가문미상

2. 출신 배경 및 초기 생애

이다조는 용감하고 궁술에 능했으며, 이러한 군사적 재능으로 배행검의 추천을 받아 발탁되었다.[2]

2. 1. 고구려 유민 출신

이다조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신당서》에는 그의 선조가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 불린 말갈 추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4] 반면, 1991년 낙양 용문산에서 발견된 이다조의 묘지명에는 그가 옛 고구려 개모성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6]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 이납(訥), 조부 이리(利), 부친 이변(辯)은 모두 오몽주도독(烏蒙州都督)을 지냈고, 부친은 사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추증되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다조는 불열말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7] 그의 가문은 고구려로부터 오몽주도독과 황두도독 직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7]

2. 2. 당나라 무장으로 발탁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되었으며,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황실 근위대를 지휘하는 장군 중 한 명인 '우응양대장군'(右鷹揚大將軍)이 되었다.[2] 수공 3년(687년) 흑치상지의 부총관으로 일테리쉬 카간과 아시테 투뉴쿠크가 이끄는 튀르크군과 교전하였다. 흑치상지의 군은 튀르크군을 황화퇴(黃花堆)에서 대파하고 40리를 쫓아 그들을 적북(磧北)으로 내몰았는데, 이때 중랑장(中郎將) 찬보벽(爨寶璧)이 표문을 올려 남은 적들을 더 뒤쫓을 것을 조정에 청해 놓고 공을 독차지하려 흑치상지와 모의도 하지 않고 무리하게 진군했다가 전군이 패몰되는 참패를 겪었다. 이후 흑치상지는 혹리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우응양장군(右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 등과 모반하였다는 죄로 옥에 갇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한편 이다조는 군공으로 우응양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무주 천수 2년(691년) 흑수말갈과 무주 사이에 벌어졌던 무력 충돌에서 이다조는 흑수말갈의 추장을 유인해 술에 취하게 해놓고 죽이는 계략을 써서 그의 군을 패배시켰다.[3][8]

3. 주요 군사 활동

이다조는 당나라무주 시기에 걸쳐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배행검(裴行儉)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군문에 들어선 그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우응양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3]

687년 흑치상지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돌궐군을 격파하였고, 691년에는 흑수말갈을, 696년에는 거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702년, 무측천이 동북쪽에서 추가적인 군사 작전을 고려하여 당나라 재상 위원충을 지휘관으로 임명했을 때, 이다조는 유주(幽州, 대략 현대의 베이징)의 임시 지휘관이 되었으나, 군사 작전은 실제로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1. 돌궐과의 전투

687년, 흑치상지의 부총관으로 돌궐군과 교전하였다. 흑치상지의 군은 황화퇴(黃花堆, 현재 산시성 숴저우시)에서 돌궐군을 크게 격파하고 40리를 추격하여 적북(磧北)으로 몰아냈다.[3][4]

3. 2. 흑수말갈 토벌

무주 천수 2년(691년) 흑수말갈과의 무력 충돌에서 이다조는 흑수말갈의 추장을 유인해 술에 취하게 해놓고 죽이는 계략을 써서 흑수말갈 군대를 패배시켰다.[3][8]

3. 3. 거란 토벌

만세통천 원년(696년) 5월, 영주(營州)에서 거란의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이 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영주를 함락시키며 무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3] 이때 이다조는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 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과 함께 토벌에 나섰다.[3] 성력 원년(698년) 8월, 튀르크의 카파간 카간이 무주에서 통혼을 위해 보낸 무연수가 이씨가 아님을 트집잡아 규(媯), 단(檀) 등의 주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참전했다. 이때 이다조는 사속경(司屬卿) 고평왕(高平王) 이중규(重規), 우무위위대장군 사타충의, 유주도독 장인단(張仁亶)과 함께 병사 28만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다.(《구당서》 측천황후본기)

4. 측천무후 퇴위와 당 중종 복위

이다조는 30년 동안 금군(禁軍)을 맡아 북문(北門)의 숙위(宿衛)를 담당했다. 신룡 원년(705년), 장간지 등 여러 대신들의 설득으로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중종을 복위시키는 정변에 가담했다.

705년 봄, 측천무후가 병에 걸리자, 그녀의 총애를 받던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가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황태자 이현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재상 장간지는 최현위, 환언범, 경휘, 원서기 등과 함께 이들 형제에 대항할 계획을 세우고 이다조를 끌어들였다.

결국 쿠데타 주동자들은 장역지와 장창종을 살해하고 측천무후의 궁궐을 포위하여 중종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했다. 이 공으로 이다조는 요양군왕에 봉해졌다.

4. 1. 정변 가담

신룡 원년(705년) 이다조는 재상 장간지(张柬之) 등의 설득으로 측천무후의 퇴위와 중종의 복위에 가담했다.[3] 장간지는 이다조에게 "지금 대황제(고종)의 아들들이 두 불량배(장역지와 장창종)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데, 대황제에게 보답하고 싶지 않소?"라고 물었고, 이에 이다조는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재상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정변 참여에 동의했다.

이다조는 왕동교(王同皎)와 함께 태자(당 중종)를 현무문으로 데려와서 관문을 지키던 자를 죽이고 궁으로 들어와 측천무후가 있는 장생전(長生殿)으로 압박해 들어갔다.[3] 이 공으로 요국공(遼國公)에서 요양군왕으로 봉해졌으며, 식실봉 8백 호를 받았다. 아들 이승훈(承訓)은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

복위 직후 중종이 태묘에서 제사할 때, 이다조에게 안국상왕[9]과 함께 연(輦)을 타도록 하는 파격적인 특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감찰어사(監察御史) 왕적(王覿)이 이다조가 이인(夷人) 출신임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3]

4. 2. 요양군왕 책봉

705년, 신룡 원년에 이다조는 재상 장간지 등의 설득으로 측천무후의 퇴위와 중종의 복위에 가담했다. 그는 왕동교(王同皎)와 함께 태자(당 중종)를 현무문(玄武門)으로 데려와 관문을 지키던 자를 죽이고 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가 있는 장생전(長生殿)으로 갔다.[3] 이 공으로 이다조는 요국공(遼國公)에서 요양군왕(遼陽郡王)으로 진봉되었고, 식실봉 8백 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승훈(承訓)은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

복위 직후 중종이 태묘에서 제사할 때, 특별히 이다조에게 안국상왕(安國相王)[9]과 함께 연(輦)을 타도록 하였다. 그러나 감찰어사(監察御史) 왕적(王覿)은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인(夷人) 출신인 이다조가 천자의 가마에 함께 오른다는 것은 참람하다"며 간언하였으나, 중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5. 이중준의 정변과 최후

이다조는 배행검(裴行儉)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신룡 원년(705년)에는 재상 장간지(张柬之) 등과 함께 중종 복위에 가담하여 요국공(遼國公)에서 요양군왕(遼陽郡王)으로 봉해지고 식실봉 8백 호를 받았다. 아들 이승훈(承訓)은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3]

중종 복위 직후, 이다조는 중종과 함께 태묘 제사에 참여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감찰어사(監察御史) 왕적(王覿)은 이다조가 이인(夷人) 출신이라는 이유로 천자의 가마에 함께 타는 것을 비판했지만, 중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3]

이후 황태자 이중준과 가까워져 우우림대장군(右羽林大將軍) 지위에 올랐다. 최현위 등이 숙청된 뒤에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위황후에게 복종하는 척했다.[3]

5. 1. 정변 가담 배경

당 중종 복위 후, 위황후와 무삼사의 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이중준 태자는 무삼사와 그의 아들 무숭훈이 자신의 아내 안락공주를 통해 태자 자리를 교체하려 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분노했다.[3] 경룡 원년(707년), 이중준은 이러한 상황에 분노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이다조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연합했다. 이다조는 위황후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이중준의 정변에 가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3]

5. 2. 정변 실패와 처형

경룡 원년(707년) 7월, 황태자 이중준무삼사와 위황후 일족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정변에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將軍)으로 참여했다.[3] 이다조는 무삼사와 그의 아들 무숭훈(武崇訓)을 저택에서 죽이고, 무삼사의 당여 10여 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중준의 군대는 현무문 밖에서 저지당했고, 중종의 설득에 이중준을 따르던 군사들은 이중준에게 가담했던 무장들을 공격했다. 이때 이다조는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가문은 몰락했다.[3] 향년 54세였다.

예종 즉위 후 이중준이 절민태자(節愍太子)로 복권되면서 이다조의 관작도 복구되었다.[3]

6. 사후 복권과 평가

신당서에는 이다조의 선조가 말갈의 추장으로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 불렸고[3][4] 후에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는 그가 말갈인이라고 기록하면서도, 사후 그를 복권하는 조서에서 "삼한(三韓)의 귀종(貴種)"이라고 적고 있다.[5] 1991년 낙양 용문산에서 발견된[6] 이다조의 묘지명에는 이다조를 개모성 출신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다조는 배행검의 추천으로 발탁되었으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무주 천수 2년(691년) 흑수말갈과의 전투에서 계략을 써서 승리했고,[3][8] 만세통천 원년(696년) 영주(營州)에서 일어난 거란의 반란과 698년 튀르크의 침입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당 중종 복위에 가담하여 요양군왕에 봉해졌으나, 당 예종 즉위 후 복권되기 전까지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와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6. 1. 당 예종의 복권

신룡 원년(705년), 이다조는 재상 장간지(张柬之) 등의 설득으로 측천무후를 몰아내고 중종을 복위시키는 데 가담했다. 그는 왕동교(王同皎)와 함께 태자(당 중종)를 현무문(玄武門)으로 데려와 궁궐로 들어왔다.[3] 이 공으로 이다조는 요국공(遼國公)에서 요양군왕(遼陽郡王)으로 봉해졌고, 식읍 8백 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이승훈(承訓)은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3]

복위 직후 중종이 태묘에서 제사할 때, 중종은 특별히 이다조에게 안국상왕[9]과 함께 연(輦)을 타도록 했다. 그러나 감찰어사(監察御史) 왕적(王覿)은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인(夷人) 출신인 이다조가 천자의 가마에 함께 오른다는 것은 참람하다"며 간언하였으나, 중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3]

경룡(景龍) 원년(707년) 7월, 황태자 이중준무삼사(武三思)와 위황후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이다조는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將軍)으로서 이중준을 따랐으나,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이중준과 함께 이다조도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3]

예종이 즉위한 뒤, 이중준이 절민태자(節愍太子)라는 시호와 함께 복권되면서 이다조의 관작도 함께 복구되었다.[3]

6. 2. 역사적 평가

이다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복합적이다. 신당서는 이다조의 선조가 말갈 추장 출신으로 훗날 당나라에 귀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4] 반면 구당서는 이다조를 말갈인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를 복권하는 조서에서 "삼한(三韓)의 귀종(貴種)"이라 칭하고 있다.[5] 1991년 발견된 이다조의 묘지명에는 그가 옛 고구려 개모성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시사한다.[6]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다조는 불열말갈 출신으로, 그의 선조들이 말갈인임에도 불구하고 황두도독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말갈과 실위의 언어 및 풍습이 유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7] 이다조의 가문이 고구려로부터 오몽주도독과 황두도독을 수여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

이다조는 배행검의 천거로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흑수말갈과의 분쟁에서 계략을 써서 승리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3][8] 무주 시기에는 거란의 반란 진압에 참여했고, 당 중종 복위에도 가담하여 요양군왕에 봉해지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다조는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와 정치적 격변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경룡 원년(707년) 황태자 중준의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가문은 몰락했다.[3] 이후 당 예종 때 복권되기는 했지만, 그의 죽음은 당나라 내 이민족 출신 무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이다조는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정체성과 당나라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활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결국 이민족 출신으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비극적 결말은 당나라의 포용력 부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 이다조가 등장한 작품

2006년부터 2007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배우 장건이 이다조 역을 맡았다.[4]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 서적 Li Duozuo's biographies in the ''[[Old Book of Tang]]'' and the ''[[New Book of Tang]]'' did not give details on LI Duozuo's early military achievements, but the conversation between Li Duozuo and Zhang Jianzhi implied that they occurred during the reign of [[Emperor Gaozong of Tang|Emperor Gaozong]].
[3] 서적 《신당서》권제110 열전제35 제이번장.
[4] 서적 황두부는 『구당서』권199下 열전제149하 북적(北狄) 실위(室韋)에 “…又云,室韋, 我唐有九部焉. 所謂嶺西室韋, 山北室韋, 黃頭室韋, 大如者室韋, 小如者室韋, 婆萵室韋, 訥北室韋, 駱駝室韋, 並在柳城郡之東北, 近者三千五百里, 遠者六千二百里”, 『신당서』권219, 열전제144, 북적 실위조에 “…分部凡二十餘. 曰嶺西部, 山北部, 黃頭部, 彊部也. 大如者部, 小如者部, 婆萵部, 訥北部, 駱丹部, 悉處柳城東北, 近者三千, 遠六千里而贏…”라고 되어 있어 실위의 부족 가운데 하나이다. 히노 가이자부로(日野開三郞)는 단순히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지적했지만(日野開三郞 「粟末靺鞨の對外關係」『史淵』41~44,1949~1950;『東北アジア民族史(中)』, 三一書房, 1991, 재수록, 224쪽) 김락기는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며 설령 그렇다 해도 굳이 같은 이름으로 말갈전이 아닌 실위전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말갈'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범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김락기 《5~7세기 고구려의 동북방 경역과 물길 · 말갈》 인하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21쪽).
[5] 서적 《구당서》 권109 열전제59 “遼陽郡王李多祚, 三韓貴種, 百戰餘雄.”
[6] 웹인용 洛阳龙门山出土的唐李多祚墓志(중국어) http://xuewen.cnki.n[...] 2019-04-29
[7] 저널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 이타인(李他仁)의 족원(族源)과 책성(柵城) 욕살(褥薩) 수여(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 http://kiss.kstudy.c[...] 대구사학회 2017
[8] 웹인용 黑水靺鞨与渤海关系考(중국어) http://bianjiang.css[...] 2019-04-29
[9] 문서 당 중종의 동생으로 훗날의 당 예종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