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협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협우는 일제강점기 말 고등계 형사, 국회의원, 민간인 학살 혐의를 받은 인물이다.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청년단 활동, 자유당 경주군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경주 내남면에서 30명을 학살한 혐의로 4.19 혁명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도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차례 당선되었다. 1975년 유신 체제에 반대했으며, 1987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청년단 - 장택상
    장택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임시정부 활동,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지지 후 야당 정치인으로 반독재 투쟁을 전개했다.
  • 대한청년단 - 유진산
    유진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 우익 청년 단체를 이끌며 반공주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7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민주당 구파 지도자로서 신민당 총재를 역임하며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 자유당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자유당 - 김영삼
    김영삼은 1929년 거제 출생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군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으나 IMF 외환 위기를 겪고 2015년 서거했다.
  • 경북대학교 동문 - 이진숙 (언론인)
    이진숙은 문화방송의 기자 및 간부로 활동하다가 대전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했고, 걸프 전쟁 등 다양한 보도 활동을 펼쳤으며,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2024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직무가 정지되었다.
  • 경북대학교 동문 - 김윤환 (1932년)
    김윤환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으로 5선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장, 정무장관을 역임하며 정권 창출에 기여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이협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협우
이협우 의원
국적대한민국
출생일1921년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경주군
사망일1987년 8월 11일
본관알 수 없음
학력알 수 없음
직업알 수 없음
경력알 수 없음
부모알 수 없음
형제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군 복무알 수 없음
종교알 수 없음
서명알 수 없음
의회 활동
의원 선수3
의원 대수2·3·4
정당알 수 없음
상훈알 수 없음

2. 생애

이협우는 경주군 내남면 망성리(현재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경주군당 위원장, 내남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0년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4], 낙선하였다.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7년 8월 11일 새벽 0시경 경북 경주시 성건동 장미아파트 2동 102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화천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2. 1. 일제강점기 및 해방 초기 활동

경주군 내남면(현재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경주군당 위원장, 내남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 경주군 내남면에서 명계리 마을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사건). 이 사건으로 4·19 혁명 이후 체포 돼 1961년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무죄로 석방되었다.[2] 간첩으로 몰렸던 유족회는 2010년 12월 14일 무죄판결을 받았다.[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단 활동으로 앞장서서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6월 28일 새벽 5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망성리 1리 11가구의 일가족을 학살했다. 비슷한 시기에 망성 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망성 2리 출신으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변 부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의 청년단이 날마다 몇 트럭씩의 사람들을 태워와서 남산(금오산)의 골짜기에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2. 2. 민간인 학살 가담

이협우는 1949년 경주군 내남면에서 명계리 마을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사건).[2] 이 사건으로 4·19 혁명 이후 체포되어 1961년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무죄로 석방되었다.[2]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단 활동으로 앞장서서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6월 28일 새벽 5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망성리 1리 11가구의 일가족을 학살했고, 비슷한 시기에 망성 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망성 2리 출신으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변 부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의 청년단이 날마다 몇 트럭씩의 사람들을 태워 와서 남산(금오산)의 골짜기에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 재판에서 감형 후 1963년 초 석방되었다. 한편 간첩으로 몰렸던 유족회는 2010년 12월 14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3]

2. 3. 정치 활동

경주군 내남면 망성리(현재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말기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경주군당 위원장, 내남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 경주군 내남면에서 명계리 마을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사건). 이 사건으로 4·19혁명 이후 체포 돼 1961년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무죄로 석방되었다.[2] 한편 간첩으로 몰렸던 유족회는 2010년 12월 14일 무죄판결을 받았다.[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단 활동으로 앞장서서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6월 28일 새벽 5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망성리 1리 11가구의 일가족을 학살했다. 비슷한 시기에 망성 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망성 2리 출신으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변 부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의 청년단이 날마다 몇 트럭씩의 사람들을 태워와서 남산(금오산)의 골짜기에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감형 후 1963년 초 석방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4], 낙선하였다.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 4. 민간인 학살 혐의와 재판

이협우는 1949년 경주군 내남면에서 명계리 마을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사건).[2] 4·19 혁명 이후 체포되어 1961년 사형을 판결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무죄로 석방되었다.[2] 유족회는 간첩으로 몰렸으나 2010년 12월 14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단 활동에 앞장서서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6월 28일 새벽 망성리 1리 11가구의 일가족 50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망성 2리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몰살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망성 2리 출신으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변 부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협우의 청년단은 날마다 몇 트럭씩 사람들을 태워 와서 남산(금오산)의 골짜기에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감형 후 1963년 초 석방되었다.

2. 5. 석방 이후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감형되어 1963년 초 석방되었다.[2]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4] 낙선하였다.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7년 8월 11일 새벽 0시경, 경북 경주시 성건동 장미아파트 2동 102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화천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2. 6. 사망

1987년 8월 11일 새벽 0시경 경북 경주시 성건동 장미아파트 2동 102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2] 시신은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화천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인김기원(金基瑗)
자녀3남 4녀
동생이한우


4. 평가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면 해당 내용을 바탕으로 위키텍스트를 작성하겠습니다.)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0년총선대한청년단7,825표16.60%1위당선초선
1954년총선무소속9,305표19.38%1위당선재선
1958년총선자유당13,088표42.81%1위당선3선


참조

[1] 서적 김주완, 풍운아 채현국
[2] 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3] 뉴스 48년 만에 '민간인학살 유족회' 재심서 http://www.nocutnews[...] 노컷뉴스 2010-12-14
[4] 뉴스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27)]6대 총선때 14표 차로 낙선, 재검표까지 했지만 판세 못뒤집어" http://www.ksilbo.c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