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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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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희승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 언론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국어 문법 연구와 국어 사전 편찬에 기여했다. 1961년에는 『국어대사전』을 발간하여 한국어 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아일보 사장, 대구대학교 총장,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학술원 부회장,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 등을 지내며 국어 교육 발전에 힘썼고, 5·16 군사정변과 유신체제, 5공화국 시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시집 《박꽃》, 수필집 《딸깍발이》 등이 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석 국어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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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희승
출생일1896년 6월 9일
출생지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 (현 의왕시)
사망일1989년 11월 27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직업언어학자
시인
수필가
대학 교수
활동 기간1930년 ~ 1989년
언어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학력
학력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경력
주요 경력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단국대학교 대우교수
동아일보 사장
한국독립당 고문 겸 당무위원
신민당 고문 겸 당무위원
광복회 고문
가족
배우자이정옥
자녀이교웅(아들)
이교순(딸)
부모이종식(부)
작품 활동
장르
수필
저술

2. 생애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의 대한민국 의왕시 포일동)에서 태어나[1] 개풍군을 거쳐 시흥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선어학회 활동 중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 경험을 회상하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국어학 연구와 국어사전 편찬에 힘썼다.

특히 이희승의 한국어 문법 체계는 최현배의 문법 체계와 함께 광복 이후 대한민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중요한 기반을 이루었다. 1961년 발간한 《국어대사전》(25만 7854 단어 수록)은 한국어 연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68년부터 20년간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으로서 단군 숭상 사업에 공헌하였고, 1969년부터 19년간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국한문혼용 주장 등 어문 교육의 올바른 방향과 시정에 힘썼다. 1971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현정회 이사장, 광복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희승의 주요 활동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기주요 활동
1930년조선어학회 회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참여
1932년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조선어학회 간사 및 한글학회 이사
1945년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1952년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
1954년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 선출
1957년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1961년서울대학교 정년퇴직, 국어대사전 발행
1962년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추대
1963년동아일보사 사장
1965년대구대학교 총장
1968년학술원 부회장
1969년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대학원장,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
1971년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


2. 1. 생애 초반 (1896년 ~ 1910년)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의 대한민국 의왕시 포일동)에서 태어나[1], 개풍군시흥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5세 때 천자문을 외울 정도로 총명했으며, 1903년부터 5년간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4]

1908년, 13세에 경주 이씨 이정옥(李貞玉)과 혼인 후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학교가 폐교되면서 3년 만에 조기 졸업하였다.[4]

2. 2. 수학과 청년기 (1911년 ~ 1922년)

1911년 9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지만, 일본어 강요에 반발하여 자퇴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 교원으로 취임하였지만, 학구열이 높았던 이희승은 1915년 사립 중동학교 야간부에 통학하였으며, 1918년 사립 중앙학교 4학년을 졸업하였다.[4]

같은 해 경성직뉴주식회사에 서기로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1919년부터 4년 반 동안 경성방직주식회사(현 경방)에서 근무하였다.

2. 3. 언어 연구와 독립운동 (1923년 ~ 1945년)

1923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졸업하고,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하였다.[9] 같은 해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과 ‘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1937년 완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9]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9]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고문당한 경험을 술회하기도 했다.[9]

2. 4. 광복 이후 교육 및 연구 활동 (1945년 ~ 1989년)

1945년 광복 후, 이희승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국어학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였다.[8] 최현배와 함께 국어학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한자 혼용을 주장하였다.[8]

1947년 《조선어학논고》, 1949년 《초급국어문법》, 1955년 《국어학개설》, 1957년 《새고등문법》을 간행하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 1955년 김성수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8]

1961년 25만여 개의 어휘를 수록한 《국어대사전》을 발행하여 한국어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8]

1963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군사정권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8] 1965년 대구대학교 총장, 1968년 학술원 부회장, 1969년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겸 대학원장,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8]

1971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대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8] 유신체제 하에서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을 맡아 독재에 맞섰고, 5공화국 때도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8]

2. 5. 최후 (1989년)

1989년 11월 27일 94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선영에 안장되었다.[9] [4]

3. 학문과 업적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고문을 당한 경험을 술회하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국어학 저술활동을 했고 국어사전을 편찬했다.

이희승의 한국어 문법 체계는 최현배의 문법 체계와 더불어 광복 후 대한민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중요한 계열을 형성하였다.

1968년부터 20년 동안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으로서 단군 존숭 사업에 공헌하였고, 1969년부터 19년 동안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국한문혼용 주장 등 어문 교육의 올바른 방향과 시정에 힘썼다. 1971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漢韓)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현정회 이사장, 광복회 고문 등으로 활약하였다.

3. 1. 국어학 연구

최현배와 함께 대한민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양대 계열을 형성하였다. 문법론, 단어, 어휘 분야를 연구하였다. 1955년에 간행된 《국어학개설》은 대한민국 국어학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명저로 평가받는다.[1] 품사론은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존재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 접속사, 조사로 분류하였고, 지정사 '이다'는 서술격조사로 처리하였다.[1]

용언의 활용어미는 독립된 품사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체언과 결합되는 여러 가지 곡용(曲用)어미는 이를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여 ‘조사’라고 하였으며, 체언에 조사가 결합되는 언어형식을 ‘어절(語節)’이라고 하고, 품사론의 단위는 단어, 글월의 단위는 어절로 잡았다.[1]

이희승의 이러한 문법 체계는 최현배의 문법 체계와 더불어 대한민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2대 계열을 형성하여 왔다. 1961년에 발행한 《국어대사전》(수록 어휘 25만 7854)은 한국어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는다.[1]

3. 2. 한글 문법 연구

이희승은 용언의 활용어미는 독립된 품사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체언과 결합되는 여러 가지 곡용(曲用)어미는 이를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여 ‘조사’라고 하였으며, 체언에 조사가 결합되는 언어형식을 ‘어절(語節)’이라고 하고, 품사론의 단위는 단어, 글월의 단위는 어절로 잡았다.[9]

품사는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존재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 접속사, 조사로 하고, 지정사(指定詞)‘이다’는 체언의 활용인 서술격조사로 처리하였다.[9]

이희승의 이러한 문법 체계는 최현배의 문법 체계와 더불어 대한민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2대 계열을 형성하여 왔다.[9]

3. 3. 사전 편찬

1961년 이희승은 25만 7854개의 어휘를 수록한 《국어대사전》을 발행하였고, 이는 한국어 연구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는다.[1]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3. 4. 교과서 편찬

초급국어문법한국어(1949)과 이를 보완한 새고등문법한국어(1957)을 출간하였는데, 문법을 '단어와 단어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어서 글월을 이루는 법칙'이라 정의하고, 문법의 영역을 총설, 품사, 글월 문(文)의 3부문으로 제시하였다.[4] 이는 최현배의 우리말본한국어(1937) 등에서 문법의 영역을 소리갈(음성학), 씨갈(사론), (글)월갈(문장론)과 같이 음성학이나 음운론 분야를 문법학에 포함시켜오던 연구 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3. 5. 일석 국어학상

1989년 이희승의 유지(遺志)를 기려 국어학 연구자 지원을 목적으로 일석국어학상이 제정되었다. 이희승은 사재 2억을 기금으로 내놓았다.[12]

2003년 6월 10일 제1회 일석국어학상 수상자로 이익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선정되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12] 2010년에는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일석국어학위논문상(연구비 500만)이 신설되었다.[9][10]

4. 사상과 평가

이희승은 조선어학회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일제강점기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8]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국어학 저술 및 국어사전 편찬에 힘썼다.

특히 이희승의 한국어 문법 체계는 최현배의 문법 체계와 더불어 광복 후 한국 언어학 문법 체계의 중요한 기반을 이루었다. 1961년 발행된 《국어대사전》(수록 어휘 25만 7854자)은 한국어 연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8]

1968년부터 20년 동안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으로서 단군 숭배 사업에 공헌하였고, 1969년부터 19년 동안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국한문 혼용 주장 등 어문 교육의 올바른 방향과 시정에 힘썼다. 1971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대사전 편찬에 참여했으며, 현정회 이사장, 광복회 고문 등으로 활약하였다.[8]

1955년 2월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한한대사전을 편찬하는 등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기여하였다.[8]

이희승의 별명은 '딸깍발이'인데, 이는 마른 날 나막신 굽이 땅에 부딪혀 딸깍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고 한다.[8]

4. 1. '딸깍발이' 정신

이희승은 수필 '딸깍발이'에서 "겨울이니 땔나무가 없을 리 없다. 온몸을 곧추세워 다리와 팔이 딱딱 소리를 낼 만큼, 사지가 제대로 웅크리고, 이를 악물고 애쓰며 내뱉는 말, '이 망할 놈의 추위야, 네가 이렇게 되었으니. 서두르지 말고, 어디 봄에 다시 만나 보자'"라고 썼다.[3]

5·16 군사 정변 이후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군사독재를 거부했고, 유신 헌법 시대에는 민주회복 국회의원 자문으로서 독재에 단호하게 맞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3]

4. 2. 민주화 운동 참여

5·16 군사정변 이후 동아일보 사장 재직 시 군정에 반대하였고, 유신체제 하에서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서 독재에 저항하였으며, 1980년대 제5공화국 시기에도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8]

5. 저서 및 작품


  •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한국어 (1956)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728#cm_multimedia
  • 수필집: 소경의 잠꼬대한국어 (1962)
  • 수필집: 먹추의 말참견한국어 (1975)
  • 수필집: 딸각발이 선비의 일생한국어 (1996)
  • 시집: 박꽃한국어 (1947)
  • 시집: 심장의 파편한국어 (1961)

6. 수상

연도상 이름
1957년학술원 공로상
1960년서울시 교육공로상
1962년건국훈장 독립장, 학술원 공로상
1978년인촌문화상
1989년국민훈장 무궁화장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인이정옥 (1894년 ~ 1987년 12월 29일)
아들이교웅 (1925년 ~ 2014년 1월 3일)
이교순



아들 이교웅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명륜동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23-06-25
[2]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23-06-25
[3] 웹사이트 http://www.imaeil.co[...] 2010-08-03
[4]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6-26
[5] 뉴스 이희승선생 기린 '일석 국어학賞' 제정 Establishment of 'One Stone Korean Linguistics Award' for Dr. Lee Hee-seung http://news.naver.co[...] 2003-06-05
[6] 웹사이트 https://e-gonghun.mp[...] 2023-06-28
[7] 기타
[8] 뉴스인용 ‘선비 정신’의 세계화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0-08-03
[9] 뉴스인용 일석 이희승 전집 출간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0-12-05
[10] 뉴스인용 이희승선생 기린 '일석 국어학賞' 제정 https://news.naver.c[...] 동아일보(네이버) 2003-06-05
[11] 뉴스 애장품으로 보는 초기 여성작가의 삶과 문학 http://art.chosun.co[...] 조선일보 2012-09-06
[12] 뉴스 이희승선생 기린 '일석 국어학賞' 제정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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