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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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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네시아 학살은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반공주의적 정치 숙청과 대량 학살을 의미한다. 수카르노 대통령의 '지도 민주주의' 하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영향력 증대에 대한 군부와 이슬람 세력의 우려가 고조되면서, 9.30 사건을 계기로 군부는 PKI를 쿠데타 시도 세력으로 몰아 숙청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수하르토 정권을 지지하며 학살을 묵인하거나 지원했다. 학살은 국내적으로 수카르노의 권력 붕괴와 수하르토의 집권을 가져왔으며, 국제적으로는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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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학살
개요
사건 명칭1965–66년 인도네시아 대량 학살
일부아시아 냉전 및 신질서로의 전환
시기1965년–1966년
장소인도네시아
대상PKI 당원, PKI 동조 혐의자, 제르와니 회원, 부기스족 비수, 자바 아방안, 무신론자, 화교
유형정치적 대량 학살, 대량 살인, 집단 학살
사망자500,000명–1,000,000명 이상
가해자인도네시아 육군 및 다양한 암살단, 미국, 영국 및 기타 서방 정부의 지원
동기반공주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9월 30일 운동에 대한 복수, 중국인 혐오, 이슬람 극단주의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인도네시아 화교 학생
레스 푸블리카 대학교의 인도네시아 화교 학생이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1965년 10월 15일).
배경
원인9월 30일 운동 쿠데타 시도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력 약화
PKI의 급부상
육군의 권력 장악 시도
전개
주요 사건공산주의자 및 공산주의 혐의자 체포 및 처형
화교에 대한 공격 및 학살
정치범 수용소 운영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력 약화 및 수하르토의 권력 장악
결과
정치적 영향수하르토의 신질서 체제 수립
PKI의 해체 및 공산주의 금지
서방 국가와의 관계 강화
사회적 영향사회 분열 심화
트라우마 및 피해자 발생
과거사 청산 문제 지속
논란 및 평가
학살 규모정확한 사망자 수에 대한 논쟁 지속
책임 문제인도네시아 육군의 주도적 역할
민간인 학살 가담
서방 국가의 지원 및 개입
국제적 반응UN의 진상 조사 요구
국제 사회의 비판
과거사 청산 노력진실화해위원회 설립 시도
피해자 지원 및 보상 요구
역사 교육 및 기념 사업
기타
관련 문서9월 30일 운동
수카르노
수하르토
PKI
신질서

2. 배경

수카르노의 "지도 민주주의" 하에서 인도네시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군부, 종교 단체,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간의 불안정한 연합(나사콤)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27]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간부 약 30만 명, 정식 당원 약 2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이었다.[28][29] 이들은 토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토지를 가진 자들과 무슬림 성직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위협했다.[30] 수카르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만나 제5군이라는 민병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주문했다. 그는 1964년 카이로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정상 회담에서 군대의 "반동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32]

1955년 반둥 회의비동맹 운동의 전신이었는데, 미국은 이를 통해 수카르노가 공산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의심했다.[15]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50년대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다른 정당들보다 부패가 덜하고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15]

1958년부터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 군부가 좌익에 대해 강경하게 행동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명성을 훼손하기 위한 비밀 선전 캠페인, 군대 내 반공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이 포함되었다.[1] 중앙정보국(CIA)은 수카르노 암살을 고려하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하는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했으나 공개되지는 않았다.[15]

2. 1. 9·30 사건

1965년 9월 30일 저녁, 9·30 사건으로 알려진 무장 단체가 인도네시아 최고위 장군 6명을 납치하여 처형했다. 이 단체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친서방적인 "반 수카르노" 장군 회의가 일으킬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한 선제 공격이라고 주장했다.[33]

이 단체의 병력은 자카르타의 메르데카 광장과 대통령궁을 점령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 단체가 자신의 최고위 장군들을 납치하고 암살했기에 이 단체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이 단체의 미숙한 지도력이 드러나 엉뚱한 라디오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주요 통신 건물을 점령하려 했지만, 수하르토(Major General Suharto) 소장이 지휘하는 무력 전력인 ''코스트라드''가 위치한 광장 동쪽은 무시했다. 수하르토는 점령 소식을 듣자마자 이 단체의 약점을 파고들어 저항 없이 광장의 통제권을 되찾았다.[33] 이 단체의 병력은 항복 후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수하르토(Major General Suharto) (오른쪽 앞) 1965년 10월 5일 암살된 장군들의 장례식에 참석


수하르토와 군부는 쿠데타 시도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연결하는 군사적 선전 캠페인을 10월 5일(군대의 날이자 6명의 장군 국장일)부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살해당하고 고문당하고 심지어 거세된 장군들의 충격적인 이미지와 묘사가 전국에 퍼졌다. 이 캠페인은 조작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었으며, 인도네시아와 국제 사회 모두에게 이 살인 사건이 수카르노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려는 PKI의 시도였다고 믿게 만들었다. PKI는 연루 사실을 부인했지만, 수년간 쌓여온 긴장과 증오가 폭발했다.[33]

9·30 사건으로 12명이 사망했지만, 수하르토는 이를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는 전국적인 음모로 묘사했다. PKI와 관련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 심지어 외딴 마을의 문맹 농민들까지도 살인자이자 이 단체의 공범으로 묘사되었다. 1966년 초, 코넬 대학교의 인도네시아 전문가인 베네딕트 앤더슨과 루스 맥베이는 코넬 논문에서, 수하르토의 군대가 9·30 사건이 붕괴된 후 한참 뒤에 반공산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가 끝난 순간부터 군대의 대규모 체포가 시작된 순간까지 3주가 흘렀고, 심지어 군대 스스로도 폭력이나 내전의 흔적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수카르노는 군대가 "쥐를 잡으려고 집을 불태우고 있다"고 항의하며 숙청을 끊임없이 비판했지만, 수하르토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무력했다.[34]

3. 정치적 숙청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에 동조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최고위 문민 및 군 지도자들을 제거했다.[35] 의회와 내각에서 수카르노 지지자들이 축출되었고, PKI 관련자들은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주요 PKI 구성원들은 즉시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즉결 처형되었다.[36] 육군 지도자들은 자카르타에서 시위를 조직했으며,[36] 10월 8일에는 PKI 자카르타 본부가 불탔다.[37] 육군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 학생 행동 전선(KAMI), 인도네시아 청년 및 학생 행동 전선(KAPPI), 인도네시아 대학 동문 행동 전선(KASI) 등 반공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었다.[38] 자카르타와 서자바에서는 유명 소설가 프라모에디아 아난타 투어를 포함하여 10,000명 이상의 PKI 활동가와 지도자가 체포되었다.[38]

초기 사망자는 육군과 PKI 사이의 조직적인 충돌 중에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동정적이며 수하르토 장군의 탄압에 저항하는 일부 인도네시아 군대 및 경찰 부대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해병대, 공군, 경찰 기동여단의 많은 군인과 지휘관조차도 PKI 또는 관련 조직 회원증을 가지고 있었다.[39] 10월 초, 전략사령부(수하르토의 ''코스트라드'')의 부대와 사르워 에디 위보워 대령이 이끄는 RPKAD 특공대가 PKI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지역인 중부 자바로 파견되었고, 충성심이 불확실한 육군 군인들은 계급에서 해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8] 동시에, 실리왕기 사단은 자카르타와 서자바를 경비하기 위해 배치되었는데, 중부 자바와 동부 자바와 달리 대량 학살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40] 중부 자바 고지대와 마디운 주변의 초기 전투는 PKI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경쟁 정권을 수립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파벌 간의 내전에 대한 광범위한 두려움은 수하르토가 파견한 군대가 통제권을 잡으면서 빠르게 사라졌다.[39] 수하르토가 파견한 군대가 도착하자 많은 반군 사령관들이 싸우지 않기로 선택했지만, 수파르조 장군과 같은 일부는 몇 주 더 저항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직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수하르토가 쿠데타 시도 이후 자신의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PKI의 최고 지도부가 추적되어 체포되었고, 일부는 즉결 처형되었다. 10월 초, PKI 의장 D. N. 아이다트는 중부 자바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쿠데타 시도는 욕야카르타살라티가 및 중부 자바의 세마랑에서 좌익 무장 세력과 경찰관의 지원을 받았다.[36] 동료 PKI 지도자 느요토는 11월 6일경에 총격을 받았고, 아이다트는 11월 22일에 총격을 받았으며, PKI 제1 부의장 M. H. 루크만은 그 직후 사망했다.[41]

4. 학살

1965년 10월,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학살은 중부 및 동부 자바, 발리로 확산되었고, 수마트라 등 다른 섬에서도 소규모로 발생했다.[43][44] 군 지도부는 공산주의자를 악마로 묘사하며 증오를 조장했고, 많은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이 학살에 가담했다.[45] PKI 지지가 강했던 아체, 발리, 중부 및 동부 자바에서 특히 심각한 학살이 일어났다.[46]

군의 역할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군이 민간 단체와 민병대를 조직, 장려, 훈련, 지원했다.[44] 다른 지역에서는 민간 자경단의 행동이 먼저 일어났지만, 대부분 군 부대가 폭력을 승인하기 전에는 학살이 시작되지 않았다.[48] PKI와 충돌하던 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학살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다.[39] 10월 말, 독실한 무슬림 그룹은 공산주의자 숙청을 종교적 의무로 여기며 학살에 동참했다.[39]

일부 지역에서는 민간 민병대가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을 찾아냈고, 다른 지역에서는 군이 촌장에게 명단을 요구했다.[49] PKI 회원 자격은 위장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용의자는 공동체 내에서 쉽게 식별되었다.[50] 자카르타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인도네시아 군에 최대 5,000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제공하기도 했다.[134][51][140] PKI 일부 지부에서 저항과 보복 살인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았다.[52] 희생자 모두가 PKI 회원은 아니었으며, PNI보다 좌익에 속한 사람, 공산주의자로 의심되거나 주장된 사람, 정치적 동기가 거의 없는 불만 해결의 희생자도 있었다.[53][38][63][68] 희생자 대부분은 농부, 노동자, 학생, 교사, 예술가, 공무원 등 가난한 사람과 중산층이었다.[1]

학살은 조직적으로 수행되었고, 대부분의 희생자는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구금된 후 약식 처형되었다.[1] 처음에는 많은 좌파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자수했지만, 이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15] 학살은 르완다나 캄보디아처럼 '대면'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총격, 칼, 둔기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다.[55][1] 시체는 강에 버려지거나 유기되었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잘린 머리를 뾰족한 곳에 내걸기도 했다.[58]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은 반중국적 인종 차별로 인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53] 기독교인이 다수인 누사 텡가라에서는 기독교 성직자와 교사가 무슬림 청소년들에게 고통받았다.[47]

1966년 3월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살이 잠잠해졌지만,[62] 솔로 주민들은 솔로 강의 이례적인 홍수를 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63]

PKI 제거를 위한 기부금에 대한 슬레만 군주의 감사 증서

4. 1. 지역별 학살

자바에서는 학살이 대부분 ''알리란''(문화적 흐름)에 따른 충성심을 따라 이루어졌다. 육군은 자바인들 중 ''아바간''(덜 정통적인) 자바인들 사이에서 PKI 당원을 찾아내도록 ''산트리''(더 독실하고 정통적인 무슬림)를 장려했다.[68] 1963년 나들라툴 울라마 (NU)와 PKI 사이의 갈등은 10월 둘째 주에 살인으로 이어졌다.[38] 무함마디야는 1965년 11월 초 "게스타푸/PKI"(게스타푸는 9.30 운동에 대한 군대 명칭) 근절이 성전이라고 선포했고, 이는 자바와 수마트라의 다른 이슬람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많은 청년에게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종교적 의무였다.[64] 중부 및 동부 자바에 공산주의 중심지가 있던 곳에서는 1948년 마디운 사건을 언급하며 살인을 정당화했다.[53] 가톨릭 학생들은 족자카르타 지역에서 밤에 기숙사를 나와 트럭에 실린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하는 데 참여했다.[63]

1966년 초,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살이 잠잠해졌지만, 동부 자바 일부 지역에서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블리타르에서는 생존한 PKI 당원들이 1967년과 1968년에 패배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벌였다.[65] 신비주의자 음바 수로는 공산주의가 주입된 그의 전통적인 신비주의 신봉자들과 함께 군대를 건설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 80명은 인도네시아 육군과의 저항 전쟁에서 사망했다.[65]

발리 섬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 전역의 사회 분열 심화로, 발리 카스트 제도 지지 세력과 PKI를 거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을 겪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섬의 문화, 종교, 특징을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받았으며, 발리인들은 자바인들처럼 PKI를 파괴하라는 촉구를 받았다. 수카르노 대통령 재임 말기, 정부 일자리, 자금, 사업상 이점 등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66] 토지 및 임차인 권리 분쟁은 PKI의 "일방적 행동" 추진으로 토지 몰수와 살인으로 이어졌다.[67]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힌두교도가 다수인 발리에는 자바의 이슬람 세력이 없었으며, 상위 카스트 PNI 지주들이 PKI 제거를 주도했다.[68] 고위 힌두교 사제들은 과거의 신성모독과 사회 혼란에 분노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희생을 요구했다.[63] 발리 힌두교 지도자 이다 바구스 오카는 "우리 혁명의 적은 또한 종교의 가장 잔인한 적이며, 뿌리까지 제거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다.[69] 동 자바 일부 지역처럼, 발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재결집으로 거의 내전 상태를 경험했다.[53]

1965년 12월, 육군 공수특전연대와 제5 브라위자야 군사 지구 부대 병력이 자바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발리에 도착하면서 권력 균형이 반공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수하르토의 주요 문제 해결사인 사르보 에디 위보보가 이끄는 자바 군 지휘관들은 발리 부대가 제지될 때까지 살인을 허용했다.[70] 중앙 자바와 달리, 발리는 살인에 대한 열의가 엄청나고 자발적이어서, 초기 물류 지원을 제공한 육군은 결국 혼란을 막기 위해 개입해야 했다.[71] 수카르노가 발리 주지사로 선택한 수테자는 해임되었고 공산주의 봉기 준비 혐의로 친척들과 함께 추적되어 살해되었다.[72] 검은 셔츠를 입은 PNI 청년들이 중앙 및 동 자바와 유사한 일련의 살인을 주도했다. 민병대 살인 부대는 몇 달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용의자를 체포하고 끌고 갔다.[53] 보복 십자군 시작 일주일 만에 공산주의자와 그 친척들의 집 수백 채가 불탔고, 집에서 도망치는 거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초기 추산에 따르면,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5만 명이 이 작전에서 살해되었다. 1965년 마지막 몇 달 동안 발리 여러 마을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73] 싱가라자와 덴파사르 마을의 모든 중국계 상점은 파괴되었으며, "게스타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고 주장되는 많은 상점 주인들이 살해되었다.[73] 1965년 12월부터 1966년 초까지 약 8만 명의 발리인이 살해되었는데, 이는 당시 섬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며, 인도네시아 어느 곳보다 높은 비율이었다.[74]

4. 2. 종교 및 민족적 요인

자바 섬에서는 이슬람교 분파인 아방안과 산트리 간의 갈등이 학살에 영향을 미쳤다.[79][80][81] 많은 아방안이 공산당 지지자였으며,[82] 이들은 학살의 주요 희생자가 되었다.[83][84] 아방안은 인도네시아 군의 도움을 받은 나들라툴 울라마의 청년 단체인 안소르와 산트리에 의해 공격 대상이 되었다.[85][86] 무신론자 및 공산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방안 무슬림은 학살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힌두교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강요받았다.[87][88][89][90]

안소르는 부기스 제3의 성별 비스수를 포함한 성 소수자를 표적으로 삼아 그들의 문화를 이슬람교에 반한다고 여겼다. 일부 '비스수'는 머리를 강제로 삭발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환 중단 또는 죽음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다.[91] 안소르는 본의 '비스수' 지도자인 산로 막강케의 머리를 잘라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전시했다.[92]

화교 탄압은 수마트라와 칼리만탄에서 일어난 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집단학살이라고 불렸다.[94] 수마트라에서는 반 자바 수마트라 청년들이 북수마트라 전역의 민족 자바 농장 노동자와 PKI 당원을 학살했다.[93] 롬복에서는 원주민들이 대부분의 발리인을 지역 전체에서 학살했다.[75]

추정에 따르면 약 2,000명의 화교가 살해되었으며 (총 사망자 수는 50만 명에서 300만 명 사이로 추정),[95] 마카사르, 메단 및 롬복 섬에서 학살이 기록되었다.

5. 사망자와 수감자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71][106][68][107][1][15] 1966년 베네딕트 앤더슨은 사망자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했으나, 1985년에는 5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정치를 변경했다.[71] 인도네시아군은 학살 직후 78,5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100만 명으로 추정치를 변경했다.[105][71][65] 수하르토의 측근이었던 얀 왈렌도우는 12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했다.[1]

학살 이후에도 체포와 투옥이 계속되었으며,[68] 1977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약 100만 명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원 및 관련 혐의자들이 구금되었다.[71] 1970년대 중반에는 10만 명이 재판 없이 투옥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109] 한때는 150만 명이 투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0]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160만 명에서 180만 명 사이의 전직 수감자들이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추정했다.[108]

수감자들은 광대한 교도소 및 강제 수용소 네트워크에서 극도로 비인간적인 환경에 놓여 있었다.[15][3]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구타로 사망했다.[65] 1966년부터 1968년까지 투옥된 사람들의 수는 고문 등을 통해 지하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증가했다.[1] 고문 방법에는 심한 구타, 손가락 부러뜨리기, 발가락과 발 으깨기, 손톱 뽑기, 전기 충격, 피부 태우기 등이 있었다.[1] 구금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문을 보거나 들어야 했으며, 남녀 모두 강간과 생식기 전기 충격 등의 성폭력을 당했다.[1] 특히 여성들은 잔혹한 성폭력을 당했으며, 국제앰네스티에는 13세 미만 소녀의 피해 사례도 보고되었다.[15][111] 석방된 사람들은 가택 연금, 군대 보고, 정부 취업 금지 등의 제약을 받았으며, 이러한 제약은 자녀에게까지 확대되었다.[65]

6. 결과 및 영향

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최소 5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한다.[106] 이는 인도네시아 역사상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많은 숫자이다.[68] 초기에는 사망자 추정치가 78,500명(인도네시아군 초기 추산)[105]에서 200만 명(PKI 추산)[71]까지 다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50만 명에서 100만 명 사이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였다.[71][15]

학살 이후 10년 동안 체포와 투옥이 계속되었으며,[68] 1977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약 100만 명의 PKI 간부 및 연루 혐의자들이 구금되었다.[71] 1970년대 중반까지도 10만 명이 재판 없이 투옥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109] 한때는 150만 명이 투옥되기도 했다.[110]

6. 1. 국내적 영향

9·30 사건 이후 수카르노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인도네시아 군부는 점차 영향력을 강화했고, 며칠 안에 정부는 수하르토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33] 육군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에 동정적이라고 믿었던 최고위 문민 및 군 지도자들을 제거했다.[35] 서서히 의회와 내각은 수카르노 충성파로부터 숙청되었고, PKI와 관련된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주요 PKI 구성원들은 즉시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즉결 처형되었다.[36]

육군 지도자들은 자카르타에서 시위를 조직했으며,[36] 10월 8일에는 PKI 자카르타 본부가 불탔다.[37] 육군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 학생 행동 전선(KAMI), 인도네시아 청년 및 학생 행동 전선(KAPPI), 인도네시아 대학 동문 행동 전선(KASI) 등 반공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었다.[38] 자카르타와 서자바에서는 유명 소설가 프라모에디아 아난타 투어를 포함하여 10,000명 이상의 PKI 활동가와 지도자가 체포되었다.[38]

수카르노 대통령직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수하르토가 쿠데타 시도 이후 자신의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PKI의 최고 지도부가 추적되어 체포되었고, 일부는 즉결 처형되었다. 10월 초, PKI 의장 D. N. 아이다트는 중부 자바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쿠데타 시도는 욕야카르타살라티가 및 중부 자바의 세마랑에서 좌익 무장 세력과 경찰관의 지원을 받았다.[36] 동료 PKI 지도자 느요토는 11월 6일경에 총격을 받았고, 아이다트는 11월 22일에 총격을 받았으며, PKI 제1 부의장 M. H. 루크만은 그 직후 사망했다.[41]

체포와 투옥은 숙청 이후 10년 동안 계속되었다.[68] 1977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는 "약 100만 명"의 PKI 간부 및 정당 연루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구금했다고 밝혔다.[71] 1970년대 중반에는 10만 명이 재판 없이 여전히 투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9] 살해되거나 투옥되지 않은 PKI 회원들은 숨어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과거를 숨기려 했다.[68]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프라모에디아 아난타 투어와 같은 주요 정치인, 예술가 및 작가, 농민 및 군인이 포함되었다.

광대한 교도소 및 강제 수용소 네트워크에 수감된 사람들은 "극도로 비인간적인 환경"에 놓였다.[15],[3] 많은 사람들이 이 첫 번째 구금 기간 동안 살아남지 못하고 영양실조와 구타로 사망했다.[65]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지하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강요와 함께 빈번하게 고문이 자행되면서 투옥된 사람들의 수가 증가했다. 고문의 방법에는 전기 케이블 및 큰 나무 조각과 같은 임시 재료로 심한 구타, 손가락 부러뜨리기, 테이블과 의자 다리 아래에서 발가락과 발을 으깨기, 손톱 뽑기, 전기 충격, 녹은 고무나 담배로 피부 태우기 등이 포함되었다. 구금된 사람들은 때때로 배우자나 자녀와 같은 친척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고문을 보거나 들어야 했다. 남녀 모두 구금 중에 성폭력을 당했고, 성폭력에는 강간과 생식기에 대한 전기 충격이 포함되었다.[1] 특히 여성들은 잔혹한 성폭력을 당했고, 심지어 간수들의 소변을 섭취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생식기와 유방이 훼손되었다.[15] 국제앰네스티에 수많은 고문 및 강간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일부 피해자는 13세 미만의 소녀였다.[111] 석방된 사람들은 자주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정기적으로 군대에 보고해야 했으며, 정부 취업이 금지되었고,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그 금지가 확대되었다.[65]

6. 2. 국제적 반응

서방 정부들은 이 학살과 숙청을 냉전의 절정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로 여겼다. 서방 정부와 언론은 수하르토와 "신질서"를 PKI와 좌경화된 "구질서"보다 선호했다.[122] 영국 대사 앤드루 길크리스트는 런던에 "인도네시아에서 약간의 총격전이 효과적인 변화의 필수적인 전제가 될 것이라는 제 생각을 당신에게 숨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123] 학살 소식은 서방 정보 기관에 의해 신중하게 통제되었으며, 인도네시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언론인들은 서방 대사관의 공식 성명에 의존했다. 자카르타 주재 영국 대사관은 싱가포르의 정보 본부에 "적절한 선전 주제는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장군을 살해한 PKI의 잔혹 행위, ... 외국 공산주의자의 대리인으로서 인도네시아를 전복하는 PKI. ... 영국의 참여는 신중하게 숨겨야 합니다."라고 뉴스 보도 방식을 조언했다.[124]

''U.S. News & World Report''는 "인도네시아: 희망... 한때는 없었던 곳"이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125] 호주 총리 해럴드 홀트는 ''The New York Times''에서 "50만에서 100만 명의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제거되었으니, 재편성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논평했다.[126][1] 민족주의적 석유 사업가 H. L. 헌트는 인도네시아를 냉전에서 미국에게 유일한 밝은 곳이라고 선언하고 수카르노의 축출을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 이후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승리"라고 불렀다.[145] ''타임''은 PKI의 진압을 "아시아에서 수년 동안 서방에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묘사했고,[127] 수하르토 정권을 "엄격하게 헌법적"이라고 칭찬했다.[128] BBC 기자 로버트 챌리스는 "그것은 서방 선전의 승리였다"고 회상했다.[128]

많은 서방 언론 보도는 인도네시아 군의 입장을 반복하며 대량 학살의 책임과 조직적인 성격을 축소했다. 대신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며, 인도네시아인을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오리엔탈리즘적 고정관념을 불러일으켰다. ''뉴욕 타임스''는 "한 국가가 광란에 빠졌을 때"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살인이 "생명이 싼 폭력적인 아시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129]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대량 학살에 대해 "거의 일치하게 축하했다".[15] 국무부 정보관 하워드 페더스필은 "그들이 공산주의자인 한, 그들이 도살되는 것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살인에 대한 태도를 밝혔다.[130] 로버트 F. 케네디는 미국 내에서 대학살을 비난한 유일한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66년 1월에 "우리는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학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1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 혐의자들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인도네시아의 비인간적인 학살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것입니까?"라고 말했다.[131] 1967년 수하르토의 권력 강화 이후 프리포트 설퍼(그라스버그 광산 참조), 굿이어 타이어 앤드 러버 컴퍼니, 제너럴 일렉트릭,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캐터필러, 스타키스트,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 록히드 마틴을 포함한 많은 미국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했다.[15][145][132]

수하르토 집권 후 1967년 4월 베이징의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 시위


소련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이 학살을 '비극적인 사건'이자 "극단적인 반동, 인종차별, 군국주의의 사례"라고 묘사했지만, 소련의 공식적인 반응은 비교적 조용했다.[131] 이는 PKI가 중소 분쟁에서 중국 편을 든 것에 대한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 다른 공산 국가들은 학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중국 정부는 그것을 "역사상 전례가 없는 흉악하고 악마적인 범죄"라고 말했다.[131] 중국은 또한 폭력을 피해 도망친 인도네시아 좌익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1] 한 유고슬라비아 외교관은 "정치국 [PKI 지도부]의 유죄를 가정하더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이 대량 학살을 정당화합니까? 중앙위원회를 죽여라, 그러나 10만 명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9.30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31] 이 학살은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숨겨진 부르주아 요소"가 좌익 운동과 조직에 침투하거나 파괴할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수하르토 정부를 "군사 파시스트 정권"으로 규탄했다.[131]

국제 연합은 학살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를 UN에 복귀시켰을 때, 알바니아 인민 사회주의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항의했다.[131]

6. 3. 외국의 개입

미국, 영국, 호주 등 서방 강대국들은 인도네시아 군의 대량 학살을 촉진하고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수카르노 암살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대신 수카르노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하는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려 했으나, 설득력 있는 영상을 만들지 못해 공개하지 않았다.[15]

서방 정부와 언론은 수하르토와 "신질서"를 PKI와 좌경화된 "구질서"보다 선호했다.[122] 영국 대사 앤드루 길크리스트는 "인도네시아에서 약간의 총격전이 효과적인 변화의 필수적인 전제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123] 서방 정보 기관은 학살 소식을 통제했고, 인도네시아에 입국 금지된 언론인들은 서방 대사관의 공식 성명에 의존했다. 영국 대사관은 싱가포르 정보 본부에 "장군을 살해한 PKI의 잔혹 행위", "외국 공산주의자의 대리인으로서 인도네시아를 전복하는 PKI" 등을 선전 주제로 제안하며, 영국의 참여는 숨길 것을 조언했다.[124]

''U.S. News & World Report''는 "인도네시아: 희망... 한때는 없었던 곳"이라는 헤드라인을 사용했다.[125] 호주 총리 해럴드 홀트는 ''The New York Times''에서 "50만에서 100만 명의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제거되었으니, 재편성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라고 말했다.[126][1] ''타임''은 PKI 진압을 "아시아에서 수년 동안 서방에 가장 좋은 소식"이라 묘사하며,[127] 수하르토 정권을 "엄격하게 헌법적"이라고 칭찬했다.[128]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대량 학살을 축하했다.[15] 국무부 정보관 하워드 페더스필은 "그들이 공산주의자인 한, 그들이 도살되는 것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130]

7. 유산

인도네시아 학살은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오랫동안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신질서 시대에는 학살이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책임으로 돌려졌으며, 교과서에서도 축소되어 기술되었다.[163] 1998년 신질서 체제 붕괴 이후 학살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증가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제약이 존재한다.[161][162]

1990년대, 특히 1998년 신질서 정부 붕괴 이후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학살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증가했다. 수카르노 정권의 투옥되고 망명한 인사들과 일반인들이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외국 연구자들은 군사 정권의 종식과 그러한 연구 시도를 좌절시키는 교리의 종식으로 인해 이 주제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출판하기 시작했다.[161][162]

인도네시아 교과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8만 명 미만의 사망자를 낸 "애국적 캠페인"으로 묘사했다. 2004년에 교과서는 이 사건을 포함하도록 잠시 변경되었지만, 군대와 이슬람 단체의 항의로 2006년에 중단되었다.[166] 대량 학살을 언급한 교과서는 인도네시아 법무부 장관의 명령으로 불태워졌다.[166][164] 존 루사의 ''대량 학살의 구실'' (2006)은 처음에 법무부 장관실에 의해 금지되었다.[165]

인도네시아 의회는 학살을 분석하기 위한 진실 및 화해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인도네시아 대법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2009년 싱가포르에서 학살에 관한 학술 회의가 열렸다.[166] 1998년 이후 생존자와 가족들의 조심스러운 집단 매장지 수색이 시작되었지만,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인도네시아 사회에는 이 사건에 대한 큰 적대감이 남아 있다.[162]

수파르조 문서는 9·30 사건에 관한 수파르조 장군의 개인적인 메모 사본이다. 이 사건에 대한 몇 안 되는 1차 자료 중 하나이며, 수파르조의 실패 원인에 대한 의견을 포함하여 군사적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2015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65년 인도네시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국제 민간 법정(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 on 1965 Crimes Against Humanity in Indonesia)이 열렸다. 이 법정은 2014년 인권 운동가, 학자, 인도네시아 망명자들이 "진실 규명에 기초한 공식적인 국내 과도기 정의 절차의 부재"에 대응하여 설립했다.[175] 2016년 7월, 재판장 자크 야쿠브는 인도네시아 국가가 해당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또한 수하르토가 허위 선전을 퍼뜨려 학살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학살이 "인구의 일부를 전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집단 학살로 분류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179]

보고서는 노역 수용소에서의 노예화, 무자비한 고문, 조직적인 성폭력, 강제 실종 등 재판부가 근거가 있다고 판단한 다른 혐의들도 강조했다.[175][179] 인도네시아 정부는 법정의 판결을 거부했다. 루훗 판자이탄 안보 장관은 "그들은 우리의 상사가 아니며,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76] 이 법정은 구속력 있는 결정이나 판결을 내릴 법적 권한이 없다.[178]

야쿠브 재판장은 "미국, 영국, 호주는 모두 이러한 반인도적 범죄의 실행에 다양한 정도로 공모했다"고 말했다.[177] 재판관들은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대에 "대량 살상 프로그램을 시작했음을 잘 알고" 지원했으며,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보안군에 공산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명단을 제공하여 "이들이 지명된 사람들의 체포 및/또는 처형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강한 추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영국과 호주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허위 선전을 반복했는데, 이는 "살해와 기타 반인도적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175][177] 호주 외무부는 이 법정의 결론을 "인권 NGO"라고 칭하며 거부했고, 호주가 살해에 어떤 방식으로든 공모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미국과 영국은 법정의 판결에 응답하지 않았다.[178] 인도네시아 인권 변호사 누르샤바니 카자숭카나(인도네시아어)는 세 국가 모두가 다양한 외교적 소통을 통해 입증되었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공모 사실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179]

인도네시아 학살은 소설,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서 다뤄졌다. 신질서 시대에는 사건에 대한 특정 역사, 즉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에게 책임을 돌리는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언론이 심하게 영향을 받고 검열을 받았다.[180] 수하르토가 권력에서 축출된 후, 관련된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책과 영화에서 사건의 다른 버전을 이야기했다.[182]


  • 영화 ''PKI의 배신(Pengkhianatan G30S/PKI)''은 신질서의 사건 버전을 지지하며, 정부 텔레비전 방송국 TVRI에서 매년 9월 30일에 방송되었다.[181]
  • 1982년에 국제적으로 개봉된 영화 ''위험한 해(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 (film))''는 학살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며, 2000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186]
  •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은 대량 학살에 참여한 개인과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으며,[182] 그에 따른 작품인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은 대량 학살 배후자들이 5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범죄를 즐기고 있으며,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혐의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해체하고, 내장을 적출하고, 거세하고, 참수했는지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83][184]


학살은 많은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 사건을 지역적, 사회 문화적 수준 또는 국가적, 정치적 수준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현하도록 했다. 신질서 시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쓰여진 책들은 특정 개념에 대한 검열에 직면한 경우가 많았고, 해외에서 쓰여지고 출판된 책들은 국내에서 금지되었다.

  • 아흐마드 토하리의 삼부작 소설 『무용수(The Dancer)』(롱갱 두쿠 파루크, Ronggeng Dukuh Paruk)는 혁명에 휩싸인 마을 공동체를 묘사하며 대량 학살에 대한 더 대중적인 설명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관점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 에카 쿠르니아완의 『아름다움은 상처(Beauty is a Wound)』(2002)는 1965년 전후 국가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역사, 풍자, 비극, 초자연적인 요소를 엮는다.
  • 루이스 도티의 『검은 물(Black Water)』(2016)은 유럽인의 관점에서 1965년 사건을 다룬다.
  • 빈센트 베빈스의 『자카르타 방식(The Jakarta Method)』(2020)은 학살의 유산을 더 자세히 조사하고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자신의 글을 바탕으로 한다.

7. 1. 역사 기술

학살은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오랫동안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신질서 시대에는 학살이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책임으로 돌려졌으며, 교과서에서도 축소되어 기술되었다.[163] 1998년 신질서 체제 붕괴 이후 학살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증가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제약이 존재한다.[161][162]

1990년대, 특히 1998년 신질서 정부 붕괴 이후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학살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증가했다. 수카르노 정권의 투옥되고 망명한 인사들과 일반인들이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외국 연구자들은 군사 정권의 종식과 그러한 연구 시도를 좌절시키는 교리의 종식으로 인해 이 주제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출판하기 시작했다.[161][162]

인도네시아 교과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8만 명 미만의 사망자를 낸 "애국적 캠페인"으로 묘사했다. 2004년에 교과서는 이 사건을 포함하도록 잠시 변경되었지만, 군대와 이슬람 단체의 항의로 2006년에 중단되었다.[166] 대량 학살을 언급한 교과서는 인도네시아 법무부 장관의 명령으로 불태워졌다.[166][164] 존 루사의 ''대량 학살의 구실'' (2006)은 처음에 법무부 장관실에 의해 금지되었다.[165]

인도네시아 의회는 학살을 분석하기 위한 진실 및 화해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인도네시아 대법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2009년 싱가포르에서 학살에 관한 학술 회의가 열렸다.[166] 1998년 이후 생존자와 가족들의 조심스러운 집단 매장지 수색이 시작되었지만,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인도네시아 사회에는 이 사건에 대한 큰 적대감이 남아 있다.[162]

수파르조 문서는 9·30 사건에 관한 수파르조 장군의 개인적인 메모 사본이다. 이 사건에 대한 몇 안 되는 1차 자료 중 하나이며, 수파르조의 실패 원인에 대한 의견을 포함하여 군사적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7. 2. 국제 민간 법정

2015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65년 인도네시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국제 민간 법정(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 on 1965 Crimes Against Humanity in Indonesia)이 열렸다. 이 법정은 2014년 인권 운동가, 학자, 인도네시아 망명자들이 "진실 규명에 기초한 공식적인 국내 과도기 정의 절차의 부재"에 대응하여 설립했다.[175] 2016년 7월, 재판장 자크 야쿠브는 인도네시아 국가가 해당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또한 수하르토가 허위 선전을 퍼뜨려 학살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학살이 "인구의 일부를 전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집단 학살로 분류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179]

보고서는 노역 수용소에서의 노예화, 무자비한 고문, 조직적인 성폭력, 강제 실종 등 재판부가 근거가 있다고 판단한 다른 혐의들도 강조했다.[175][179] 인도네시아 정부는 법정의 판결을 거부했다. 루훗 판자이탄 안보 장관은 "그들은 우리의 상사가 아니며,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76] 이 법정은 구속력 있는 결정이나 판결을 내릴 법적 권한이 없다.[178]

야쿠브 재판장은 "미국, 영국, 호주는 모두 이러한 반인도적 범죄의 실행에 다양한 정도로 공모했다"고 말했다.[177] 재판관들은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대에 "대량 살상 프로그램을 시작했음을 잘 알고" 지원했으며,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보안군에 공산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명단을 제공하여 "이들이 지명된 사람들의 체포 및/또는 처형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강한 추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영국과 호주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허위 선전을 반복했는데, 이는 "살해와 기타 반인도적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175][177] 호주 외무부는 이 법정의 결론을 "인권 NGO"라고 칭하며 거부했고, 호주가 살해에 어떤 방식으로든 공모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미국과 영국은 법정의 판결에 응답하지 않았다.[178] 인도네시아 인권 변호사 누르샤바니 카자숭카나(인도네시아어)는 세 국가 모두가 다양한 외교적 소통을 통해 입증되었고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공모 사실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179]

7. 3. 예술 작품

인도네시아 학살은 인도네시아의 많은 소설,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서 다뤄졌다. 신질서 시대에는 사건에 대한 특정 역사, 즉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에게 책임을 돌리는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언론이 심하게 영향을 받고 검열을 받았다.[180] 수하르토가 권력에서 축출된 후, 관련된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책과 영화에서 사건의 다른 버전을 이야기했다.[182]

  • 영화 ''PKI의 배신(Pengkhianatan G30S/PKI)''은 신질서의 사건 버전을 지지하며, 정부 텔레비전 방송국 TVRI에서 매년 9월 30일에 방송되었다.[181]
  • 1982년에 국제적으로 개봉된 영화 ''위험한 해(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 (film))''는 학살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며, 2000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186]
  •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은 대량 학살에 참여한 개인과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으며,[182] 그에 따른 작품인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은 대량 학살 배후자들이 5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범죄를 즐기고 있으며,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혐의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해체하고, 내장을 적출하고, 거세하고, 참수했는지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83][184]


학살은 많은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 사건을 지역적, 사회 문화적 수준 또는 국가적, 정치적 수준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현하도록 했다. 신질서 시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쓰여진 책들은 특정 개념에 대한 검열에 직면한 경우가 많았고, 해외에서 쓰여지고 출판된 책들은 국내에서 금지되었다.

  • 아흐마드 토하리(Ahmad Tohari)의 삼부작 소설 『무용수(The Dancer)』(롱갱 두쿠 파루크, Ronggeng Dukuh Paruk)는 혁명에 휩싸인 마을 공동체를 묘사하며 대량 학살에 대한 더 대중적인 설명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관점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 에카 쿠르니아완(Eka Kurniawan)의 『아름다움은 상처(Beauty is a Wound)』(2002)는 1965년 전후 국가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역사, 풍자, 비극, 초자연적인 요소를 엮는다.
  • 루이스 도티(Louise Doughty)의 『검은 물(Black Water)』(2016)은 유럽인의 관점에서 1965년 사건을 다룬다.
  • 빈센트 베빈스(Vincent Bevins)의 『자카르타 방식(The Jakarta Method)』(2020)은 학살의 유산을 더 자세히 조사하고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기고한 자신의 글을 바탕으로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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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Army and the Indonesian Genocide: Mechanics of Mass Murder https://www.routledg[...] Routledge 2018
[3] 서적 The Legacy of Nuremberg: Civilising Influence Or Institutionalised Vengeance?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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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간행물 Indonesia Still Haunted by 1965-66 Massacre https://time.com/405[...] Time 2023-03-09
[6] 서적 The Killing Season: A History of the Indonesian Massacres, 1965–66 https://press.pri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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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The Jakarta Method: Washington's Anticommunist Crusade and the Mass Murder Program that Shaped Our World PublicAffairs 2020
[16] 논문 U.S. Covert Action in Indonesia in the 1960s: Assessing the Motives and Consequences 2002
[17] 웹사이트 Judges say Australia complicit in 1965 Indonesian massacres https://www.abc.net.[...] 2021-01-14
[18] 뉴스 Indonesia Revives Its Communist Ghosts https://www.usnews.c[...] U.S. News & World Report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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