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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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입헌국민당은 1910년 3월 헌정본당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의 정당이다. 헌정주의와 책임내각제 수립, 해군 확장 등을 주장하며, 이누카이 쓰요시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다이쇼 정변 이후 분열과 쇠퇴를 겪으며, 1922년 해산되었고, 이후 이누카이 쓰요시가 혁신구락부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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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국민당 | |
---|---|
기본 정보 | |
정당 명칭 | 입헌국민당 |
로마자 표기 | Rikken Kokumintō |
한자 표기 | 立憲国民党 |
창당일 | 1910년 3월 14일 |
해산일 | 1922년 9월 1일 |
해산 이유 | 당세의 부진 |
전신 정당 | 헌정본당 우신회 무명회 보신구락부(일부) |
후신 정당 | 혁신구락부 |
정치 성향 | 중도우파 ~ 중도좌파 |
이념 | 입헌주의 개혁주의 자유주의 |
본부 | 도쿄 |
국가 | 일본 |
주요 인물 | |
당수 | 이누카이 쓰요시 |
정치적 입장 | |
주요 정책 | 세제 정리 정치 혁신 민당주의 |
관련 정보 | |
기관지 | (정보 없음) |
상징 | (정보 없음) |
국제 조직 | (정보 없음) |
2. 역사
1910년 3월, 이누카이 쓰요시의 주도로 헌정본당과 일본 의회 중의원 내 여러 소규모 정당 및 단체들이 합병하여 입헌국민당이 창당되었다.[1] 입헌국민당은 헌법, 보통 남성 선거권, 해군 증강을 주장했으며, 원로와 메이지 올리가르히의 권력에 반대했다.[2] 1912년 총선거에서 95석을 확보하여 입헌정우회에 이어 제2당이 되었으나, 1913년 당원 절반가량이 가쓰라 다로가 설립한 입헌동지회에 합류하면서 제3당으로 전락했다.[10]
이후 1915년 총선거에서 27석, 1917년 총선거에서 35석, 1920년 총선거에서 29석으로 점차 의석수가 감소했다. 결국 1922년 9월 해산되었고, 많은 전 당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끄는 각신클럽의 핵심을 이루었다.
2. 1. 창당 배경 (1910년 이전)
1910년 3월 14일, 헌정본당을 중심으로 우신회와 무신구락부 3파가 합동하여 헌정국민당이 결성되었다.[9] 이는 헌정정우회가 의회 운영에서 장기간 권력을 독점한 것에 대한 비정우회계 당파들의 합동 운동의 결과였다.[8]헌정국민당은 정치혁신[6]과 헌정주의[9]를 표방하고, 책임내각제 수립, 해군 확장, 관료주의 타파, 지방자치 확장, 세제 정리, 농상공업 장려 및 발달을 주장하였다.[4][7]
당수는 없었고, 오이시 마사미, 이나가키 이쓰키, 시마다 사부로, 코노 히로나카, 카타오카 나오아쓰, 센고쿠 미츠구 등이 중심이 되어 당을 운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나가키를 중심으로 민당의 전통을 지켜 정부와 대립하는 "비개혁파"와, 오이시, 시마다, 코노 등 정부와의 타협을 꾀하는 "개혁파"가 대립하였다. 1911년 1월 19일 당대회에서 당수를 대신할 상무위원으로 이나가키, 코노, 오이시가 선출되었다.
2. 2. 창당과 초기 활동 (1910년 - 1913년)
1910년 3월, 헌정본당과 일본 의회 중의원 내 여러 소규모 정당 및 단체들이 합병하여 이누카이 쓰요시의 주도로 국민당이 창당되었다.[1] 국민당은 헌법, 보통 남성 선거권에 기반한 선거권, 해군 증강을 주장했다. 또한 원로와 메이지 올리가르히의 권력과 영향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2]메이지 후기 일본 제국 의회에서는 헌정정우회(총재: 니시조노지 긴모치)가 안정적으로 중의원 제1당을 유지하며, 범벌정부의 의회 운영에 협력하여 장기간 권력을 독점하였다(가쓰라 시대). 이에 대해 비정우회계 당파 사이에서 합동 운동이 일어났고, 1910년(메이지 43년) 3월 14일, 야당 제1당인 헌정본당을 중심으로 우신회와 무신구락부 3파(창립 직후 제27회 제국의회 개회 시 대의원 93명[8])가 합동하여 헌정국민당이 결당되었다.[9]
정치혁신[6]과 헌정주의[9]를 표방하고, 책임내각제 수립, 해군 확장, 관료주의 타파, 지방자치 확장, 세제 정리, 농상공업 장려 및 발달을 주장하였다.[4][7]
1912년 총선거에서 국민당은 95석을 확보하여 중의원에서 입헌정우회에 이어 최대 야당이 되었다.
당수는 없었고, 헌정본당의 오이시 마사미, 이나가키 이쓰키, 우신회의 시마다 사부로, 고노 히로나카, 무신구락부의 가타오카 나오아쓰, 센고쿠 미쓰구 등이 중심이 되어 당 운영에 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나가키를 중심으로 민당의 전통을 지켜 정부와 대립하는 자세를 명확히 하는 “비개혁파”와, 오이시·시마다·고노 등 정부와 타협을 도모하는 “개혁파”가 대립하였다. 1911년(메이지 44년) 1월 19일 당대회에서 당수를 대신할 상무위원을 설치하여 이나가키·고노·오이시를 선출하였다.
결당 경위로 인해 의회 활동에서는 일관되게 야당 입장을 취했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이나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남북조정윤문제나 행재정 개혁 등에서 정부 자세를 추궁하였다.
1913년(다이쇼 2년), 다이쇼 정변이 발생하였다. 정우회와 결별한 가쓰라 수상은 자신의 정권 여당 결당을 꾀했다. 국민당은 야당으로 전향한 정우회와 연계하여 제3차 가쓰라 내각을 공격하였다(제1차 호헌 운동). 그러나 가쓰라 수상의 신당 운동에 가타오카가 호응하자, 이나가키가 가타오카를 제명 처분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이시·시마다·고노 등 개혁파가 반발하여 탈당하고, 가쓰라 신당(후의 입헌동지회)에 참가하는 자가 다수 나와 세력은 반감(분열 직후 제31회 제국의회 개회 시 대의원 41명)되어 제3당으로 전락하였다.[10]
2. 3. 분열과 쇠퇴 (1913년 - 1922년)
1913년 1월, 당원 절반가량이 가쓰라 다로가 설립한 입헌동지회에 합류했다.[10] 1915년 총선거에서 국민당은 27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1917년 총선거에서 35석으로 의석수를 회복했지만, 1920년 총선거에서는 다시 29석으로 줄었다.1922년 9월, 국민당은 해산되었고, 많은 전 당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끄는 새로운 각신클럽의 핵심을 이루었다. 국민당은 헌법개정당(立憲改進党)의 계보를 잇는다. 메이지(明治) 후기부터 일당 우위 상태였던 헌정동우회(立憲政友会)와 대치했지만, 헌정동지회(立憲同志会) 결성 이후 야당 제1당 자리를 내주게 되고, 당세가 축소되어 결국 해산에 이르게 된다.
1913년(다이쇼 2년), 다이쇼 정변 발생 당시 정우회와 손을 끊은 카쓰라 수상은 자신의 정권 여당 결성을 꾀했다. 국민당은 야당으로 전향한 정우회와 연계하여 제3차 가쓰라 내각을 공격하였다(제1차 헌정 운동). 그러나 카쓰라 수상의 신당 운동에 가타오카 나오아쓰가 호응하자, 이나가키가 카타오카를 제명 처분했다. 이를 계기로 오이시, 시마다, 코노 등 개혁파가 반발하여 탈당하고, 카쓰라 신당(후의 헌정동지회)에 참가하는 자가 다수 나오면서 세력이 반감(분열 직후 제31회 제국의회 개회 시 대의원 41명)되어 제3당으로 전락하였다.[10]
이후 비정우회 세력의 중추 자리를 동지회에 빼앗기고 당세가 저조하였다. 1914년, 범벌을 포함한 “비정우회 세력 결집”을 위해 오쿠마 시게노부가 수상에 취임하며 정계에 복귀했지만, 제2차 오쿠마 내각은 과거 당수를 역임한 헌정본당의 후계인 국민당이 아니라, 헌정본당에서 많은 의원이 넘어간 동지회를 여당으로 삼아 동지회가 사실상 “후계 정당”으로 여겨졌다. 1916년 10월, 동지회가 오쿠마 내각 여당을 구성한 다른 소회파와 합동하여 헌정회를 발족하자 당세는 더욱 열세에 놓였다.
1918년(다이쇼 7년) 6월 20일, 분열 이후 유일한 상무위원이었던 이나가키를 총리(당수)로 선출했다.
1920년(다이쇼 9년), 정우회 수반 하라 내각 아래에서 치러진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9명 당선에 그치며 부진했고, 1922년(다이쇼 11년) 9월 1일 해산되었다.
2. 4. 해산과 그 이후 (1922년 이후)
1922년 9월, 입헌국민당은 해산되었고, 많은 전 당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끄는 새로운 각신클럽의 핵심을 이루었다.[1]대일본제국의 국정에서 양대 정당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입헌개진당의 계보에 속한다. 메이지 후기부터 일당 우위 상태였던 입헌정우회와 대치했지만, 입헌동지회가 결성되자 야당 제1당의 자리를 내주게 되고, 당세는 축소되어 결국 해산에 이르게 된다.
1918년(다이쇼 7년) 6월 20일, 분열 이후 유일한 상무위원이었던 이나가키 이네지로를 총리(당수)로 하고, 간사장에 스즈키 우메시로, 정무조사회장에 오구치 기로쿠, 총무(1명)에 세키 나오히코를 임명하였다.
1920년(다이쇼 9년), 하라 내각 아래에서 행해진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29명이 당선되어 부진했고, 1922년(다이쇼 11년) 9월 1일, 해산하였다.
; 그 후
이나가키 이네지로는 같은 해 11월 8일, 혁신구락부를 결성한다(결성 당시 46명). 그 후는 제3회파로서 활동하고, 제2차 호헌 운동에서는 입헌정우회, 헌정회와 함께 호헌 3파를 결성,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 성립한 가토 고메이 내각에서는 여당에 들어가지만, 동 내각 기간 중에 당내 대립에 의해 해산하였다. 입헌개진당 이래의 양대 정당의 영웅의 직계는 소멸한다(단, 전술한 바와 같이 입헌동지회→헌정회가 개진당의 사실상의 직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나가키 이네지로는 옛 라이벌이었던 입헌정우회에 입당하고, 동당 총재, 수상에 오르게 된다.
3. 이념 및 정책
정치 혁신과 헌정주의를 표방하고, 책임내각제의 수립, 해군의 확장, 관료주의 타파, 지방자치의 확장, 세제 정리, 농상공업의 장려와 발달을 주장하였다.[4][7]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 수 | 증감 |
---|---|---|---|---|
1912년 | 381,465 | 28.50 | 95 / 381 | |
1915년 | 106,445 | 7.51 | 27 / 381 | 68 |
1917년 | 125,974 | 9.68 | 35 / 381 | 8 |
1920년 | 140,397 | 5.32 | 29 / 464 | 6 |
5. 평가
헌정본당을 중심으로 우신회, 무신구락부 3파가 합동하여 결성된 입헌국민당은 책임내각제 수립, 해군 확장, 관료주의 타파 등을 주장하며 야당의 입장을 취했다.[9][4][7] 그러나 당내에서는 정부와의 타협을 추구하는 "개혁파"와 정부와의 대립을 명확히 하는 "비개혁파"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1913년 다이쇼 정변 당시 제1차 헌정 운동에 참여하여 제3차 카쓰라 내각을 공격하였으나, 카쓰라의 신당 운동에 당내 일부가 호응하면서 분열되고 제3당으로 전락하였다.[10] 이후 당세가 저조하였고, 제2차 오쿠마 내각에서는 헌정동지회가 여당으로 선택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1917년 제1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내각 불신임안 제출을 둘러싸고 헌정회를 공격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헌정회에 대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1922년 해산되었고, 이후 혁신구락부가 결성되었으나 헌정개진당 이래 양대 정당의 직계는 소멸하였다.
참조
[1]
서적
The Pursuit of Power in Modern Japan
[2]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3]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1991
[4]
웹사이트
立憲国民党
https://kotobank.jp/[...]
2018-09-20
[5]
서적
日本全史(ジャパン・クロニック)
講談社
1991
[6]
웹사이트
かくしんクラブ【革新俱楽部】
https://kotobank.jp/[...]
2018-05-07
[7]
웹사이트
こくみんとう【国民党】
https://kotobank.jp/[...]
2019-02-28
[8]
간행물
第一六回総選挙における政党合同の影響について-革新倶楽部系候補者の動向を中心に-
慶應義塾大学法学研究会
2012-03
[9]
뉴스
立憲国民党の宣言書及綱領
https://dl.ndl.go.jp[...]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36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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