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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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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잠팽은 후한 시대의 무장으로, 신나라 말기 혼란기에 활약했다. 그는 현한 시대에는 극양현의 현령을 지냈으나 녹림군의 공격으로 인해 남양군으로 피신했다. 이후 경시제에게 귀덕후에 봉해졌으며,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정위, 자간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잠팽은 형주, 남방 평정, 외효, 공손술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을 보여주었으나, 공손술과의 전투 중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시호는 장후(壯侯)이다.

2. 생애

신나라 극양현(棘陽縣)의 현장으로 재직 중, 지황 3년(22년) 11월[7] 유인의 반란군과 녹림군의 공격으로 극양을 잃고 전수대부 진부에게 피신했다. 진부는 잠팽에게 책임을 물어 어머니와 아내를 가두고 공을 세울 것을 명했다. 잠팽은 분투했으나, 지황 4년(23년) 정월 초하루[7] 진부가 전사하자 부상당한 채 완성으로 돌아와 전수이(전수대부의 부) 엄열[8]와 함께 성을 지켰다. 한나라 군대의 공격에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자, 엄열과 함께 항복했다.

대사도 유인[9]은 잠팽이 충성을 다해 성을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하여 경시제에게 건의하여 귀덕후에 봉해지고 대사도에 속하게 되었다. 유인이 경시제에게 살해된 후에는 대사마 주유의 교위로 있었고, 주유를 따라 신나라양주 이성(李聖)을 쳐 죽여 회양성(淮陽城)을 평정했다. 주유의 천거로 회양도위, 영천태수를 역임했다.

후한 광무제가 하내로 오자 한흠은 저지하려 했고, 잠팽은 이를 만류했으나 한흠은 듣지 않았다. 광무제는 한흠의 모략을 알고 분노하여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잠팽은 광무제를 칭송하고 자신이 유인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설득하여 한흠은 등우의 군사로 삼았다.

기원(淇園)에 주둔한 경시제의 대장군 여식(呂植)을 설득하여 항복시키고 자간대장군(刺姦大將軍)이 되어 군영들을 감독·시찰하는 일을 맡았으며, 항상 절을 가졌다[지절(持節)]. 하북 평정에 종군했고, 건무 원년(25년) 광무제 즉위 후 정위가 되고 귀덕후 작위는 유지되었으며, 대장군의 업무를 겸했다.

건무 원년(25년) 7월,[10] 주유가 굳게 지키던 낙양성을 항복시키기 위해 광무제의 명으로 주유와 교섭했다. 잠팽은 광무제가 주유를 용서할 것을 약속했고, 주유는 신뢰의 징표로 잠팽에게 밧줄을 잡고 성에 홀로 올라올 것을 요구, 잠팽이 응하여 결국 주유는 항복했다.

건무 2년(26년)부터 11년(35년)까지 광무제를 도와 형주, 남방, 촉나라의 군웅들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군대를 이끌 때 규율을 엄격히 하여 약탈을 금지하고 백성들을 안심시켜 항복을 유도했다.

건무 11년(35년), 공손술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5] 시호는 장후(壯侯)로 추증되었으며, 군대를 이어받은 오한공손술과 촉을 항복시켰다.

잠팽은 병법에 뛰어났고 군대를 규율 있게 통솔하여 가는 곳마다 군현이 앞다투어 항복했다.

2. 1. 현한 시절

신나라에서 고향인 극양현(棘陽縣)의 현장을 지내고 있었는데, 지황 3년(22년) 11월[7] 유인이 반란을 일으켜 녹림군을 끌어들여 함께 공격해 와 극양을 빼앗기고 가속들과 함께 전수대부 진부에게 달아났다. 진부는 잠팽이 극양을 지키지 못한 것에 분노해 어머니와 아내를 사로잡고 공으로써 보상하게 했다. 그래서 빈객들을 거느리고 분투했으나, 지황 4년(23년) 정월 초하루[7]에 진부가 전사하자 부상을 입은 채로 완성으로 돌아와 전수이(전수대부의 부) 엄열[8]와 함께 성을 지켰다. 한나라 군대가 몇 달을 공격해 오니 성에 양식이 떨어져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엄열과 함께 성을 들어 항복했다.

제장들은 주살하기를 청했으나, 대사도 유인[9]이 관리로서 충성을 다해 성을 지켰으므로 그 의를 표창하고 제후로 봉해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시제가 이를 받아들여 귀덕후에 봉하고 대사도에게 속하게 했다. 유인이 경시제에게 살해된 후에는 대사마 주유의 교위로 있었고, 주유를 따라 신나라양주 이성(李聖)을 쳐 죽여 회양성(淮陽城)을 평정했다. 주유가 천거해 회양도위가 됐다. 경시제는 입위왕(立威王) 장앙과 장군 요위(徭偉)를 보내 회양을 진무하게 했는데 요위가 반란을 일으켜 장앙을 쳐 내쫓으니, 요위를 공격해 무찔렀다. 영천태수가 됐다. 그러나 용릉병 출신의 유무가 거병해 영천군을 함락하니, 관직을 얻지 못하고 수하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동향 사람으로 하내태수를 지내는 한흠에게 투항했다.

2. 2. 광무제에 귀순

후한 광무제가 하내로 오자 한흠은 저지하려 했고, 잠팽은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미 하내군의 치소가 있는 회현(지금의 허난성 우즈현)에 있었고, 한흠은 급히 투항했다. 광무제는 한흠의 모략을 알고 노하여 한흠을 사로잡아 베려 했고, 잠팽을 불러들였다. 잠팽은 먼저 광무제를 칭송한 후 자신은 예전 광무제의 형 유인 덕분에 살았으나 아직 그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 광무제에게 몸을 던지고 싶다고 했고, 한흠은 남양군의 대인이니 등용할 만하다고 권했다. 그래서 광무제는 한흠을 용서하고 등우의 군사로 삼았다.

기원(淇園)에 주둔한 경시제의 대장군 여식(呂植)을 설득해 항복시켜 자간대장군(刺姦大將軍)이 돼 군영들을 감독·시찰하는 일을 맡았고, 항상 절을 가져[지절(持節)], 하북 평정에 종군했다. 건무 원년(25년)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정위가 됐고, 귀덕후 작위는 예전처럼 유지되었으며, 대장군의 업무를 겸했다.

7월,[10] 대사마 오한을 필두로 한 11명의 장수와 함께 낙양성을 몇 달 동안 포위했으나 주유가 굳게 지켜 함락하지 못했다. 잠팽은 일찍이 주유의 교위였기에 광무제의 명령으로 주유에게 찾아가 항복 교섭을 했고, 주유와 개인적으로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주유는 항복 권고에 대해, 광무제의 형 유인을 죽이고 경시제가 광무제를 하북에 원정 보내는 것도 반대했기 때문에 항복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잠팽은 이 말을 광무제에게 전했고, 광무제가 주유를 용서해 준다고 약속하자 그 말을 주유에게 전달했다. 주유가 신뢰의 징표로 성에 홀로 밧줄을 잡고 올라오라 하자 잠팽은 이에 응해 결국 주유를 항복하게 했다. 5일 후에 주유가 홀로 나와 면박하고 광무제를 찾아갈 때도 잠팽은 함께했다. 광무제는 주유의 결박을 풀고 잘 대우하여 낙양성으로 돌려보냈고, 이튿날 9월 신묘일[10][11]에 주유는 낙양성과 함께 완전히 항복했다.

2. 3. 등봉의 난

건무 2년(26년), 잠팽은 광무제의 명으로 형주를 공격하여 주(犨)·섭(葉)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형주에는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진풍은 여구(黎丘)를 거점으로 12현을 거느리며 스스로 초려왕(楚黎王)이라 칭했고, 동흔(董訢)은 도(堵)향에, 허한(許邯)은 남양군 복양현 행(杏)취에 웅거하고 있었다. 또한 경시제의 장군들이 남양군의 각 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정벌을 맡긴 오한이 약탈과 포학을 일삼자, 광무제의 파로장군 등봉이 남양군 신야현에 돌아왔다가 자기 고향을 오한이 약탈한 것에 분노해 오한을 쳐서 치중을 빼앗고 육양현에 웅거했다. 가을이 되어 잠팽은 허한을 행에서 무찔러 항복시켰다. 광무제는 주우·가복·건위대장군 경감·한충장군 왕상·무위장군 곽수(郭守)·월기장군 유굉(劉宏)·편장군 유가·경식(耿植) 등을 보내 잠팽을 도왔다. 이들과 함께 등봉과 싸웠는데, 먼저 도를 쳤으나 등봉이 동흔을 도왔고, 등봉과 동흔의 군대가 모두 남양군의 정병이라 몇 달을 쳐도 이기지 못했다.

건무 3년(27년), 광무제가 직접 와서 섭에 이르렀고, 동흔이 길을 끊으려 하자 이를 쳐서 크게 무찔렀다. 광무제가 도양에 이르자 등봉은 밤을 틈타 육양으로 달아났고 동흔은 항복했다. 잠팽은 경감·적노기도위 장궁 등과 함께 소장안취에서 등봉을 추격했고, 광무제가 친히 싸워 대파했다. 등봉은 궁박해 항복했다. 광무제는 등봉이 원래 공신이고(광무제의 매부이며 역시 공신인 등신의 조카이기도 함), 반역한 것도 오한의 잘못 때문이기에 용서해 주려 했다. 그러나 잠팽은 경감과 함께 반대했다.

“등봉은 은혜를 배반하고 반역했고, 해를 넘어 원정하게 했고, 가복을 다치게 했고 주우를 사로잡았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오셨음에도 참회하지 않고 친히 싸우셔서 지니까 항복한 겁니다. (등)봉을 주살하지 않는다면 악을 징치할 수 없습니다.”[2]

그래서 등봉은 참수되었다.

2. 4. 남방 평정

광무제는 낙양으로 돌아가면서 잠팽에게 부준과 장궁 등 3만여 명을 이끌고 여구의 군웅 진풍을 토벌하게 했다. 황우를 함락시키자 진풍과 그의 대장인 채굉이 등에서 잠팽 등을 막아 수개월 동안 진격할 수 없었다. 광무제는 잠팽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두려워한 잠팽은 병마를 정비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새벽에 서쪽의 산도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하여 포로의 밧줄을 풀어 도망갈 수 있도록 하여, 도망간 포로가 돌아가 진풍에게 보고했다. 진풍은 즉시 그 군세를 모아 서쪽으로 잠팽을 맞이하려 했다. 잠팽은 몰래 병사들에게 면수를 건너게 하여 아두산에서 진풍의 장수인 장양을 쳐서 대파했다. 강을 따라 계곡의 나무를 베어 길을 열고, 곧장 여구를 습격하여 여러 둔영에 있던 병사들을 격파했다. 진풍은 이를 듣고 크게 놀라 급히 구원에 나섰지만, 잠팽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동쪽의 산지에 의지하여 막영을 세우고 있었고, 진풍과 채굉은 야간에 북을 울리며 공격해왔지만, 잠팽은 미리 대비를 해두었고, 병사를 내어 이를 맞이하여 격파했다. 진풍이 패주하자 추격하여 채굉을 참했다. 이 공적으로 잠팽은 새로 무음후에 봉해졌다.[3]

건무 4년(28년), 진풍의 재상인 조경이 의성을 들어 항복하여, 성한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잠팽과 함께 여구에서 진풍을 포위했다. 이릉에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전융은, 진풍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려 생각하여, 봄, 아내의 형인 신신을 이릉에 남겨두고,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면수를 거슬러 올라가 여구에 멈춘 후 투항 기일을 정했다. 그런데, 신신이 후방에서 전융의 진귀한 보물을 훔쳐 달아나 간도를 통해 먼저 잠팽에게 항복했고, 의심에 휩싸인 전융은 반대로 진풍과 결탁했다. 잠팽은 병사를 출격시켜 전융을 공격하여 수개월 만에 이를 대파했다. 그의 대장인 오공이 잠팽을 찾아와 항복했기 때문에, 전융은 이릉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12월, 광무제는 여구에 어행하여 군대를 위로했고, 잠팽의 관료와 사졸 중 공적이 있는 백여 명을 봉했다. 잠팽은 3년여 만에 진풍의 수하 9만 명을 참수했고, 남은 병사는 겨우 천 명, 성안의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몰아붙였다. 광무제는 약화된 진풍을 상대로, 주호를 잠팽과 교체시켰다.

잠팽


건무 5년(29년), 부준 등과 함께 전융을 진향에서 격파하고, 이릉을 함락시켜 자귀까지 이르러, 그 처자 및 사졸 수만 명을 모두 사로잡았다. 패배한 전융은, 촉의 공손술에게 의탁하여 도망갔다. 잠팽은 촉한을 정벌하려 했지만, 곡물이 적고 수류가 험하여 조운이 어려웠기 때문에, 위로장군 풍준을 강주, 도위 전홍을 이릉, 영군 이현을 이도에 배치하고,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진향에 주둔하여, 형주의 요충지에서 합류할 것을 생각했으며, 여러 오랑캐들에게 항복한 자는 상주하여 그 땅의 장관으로 봉한다고 타일렀다. 잠팽은 교지등양과 친선 관계였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국가의 위덕을 설명하는 한편, 편장군 굴충으로 하여금 강남에 격문을 전달하게 하여, 조명을 반포하게 했다. 그리하여 등양과, 강하태수 후등·무릉태수 왕당·장사 한복·계양태수 장륭·영릉태수 전흡·창오태수 두목·교지태수 석광 등이 서로 통솔하며, 사자를 보내 공헌해왔기 때문에, 모두 봉해져 열후가 되었다. 자식을 보내 병사를 이끌게 하여, 잠팽의 정벌을 돕게 하려는 자도 있었고, 이렇게 하여, 강남의 진귀한 물건이 처음으로 유통되었다.

건무 6년(30년), 경사로 가서 두터운 상을 받았다. 다시 남쪽의 진향으로 돌아와 본가를 지나가며 제사를 지냈다.

2. 5. 공손술과의 전쟁

건무 8년(32년), 잠팽은 광무제를 따라 외효와의 싸움에 나서 천수군을 무찔렀고, 오한과 함께 외효를 서성에서 포위했다. 공손술이 이육(李育)을 보내 외효를 구원하게 해 상규현을 지키니, 광무제는 갑연과 경감에게 포위하게 하고 돌아가면서 잠팽에게 글을 남겼다(고사성어 득롱망촉의 유래).[4]

“두 성이 함락되면 장병들을 거느리고 남으로 촉을 쳐도 좋다. 사람의 고생은 족할 줄을 모르니, 이미 농(隴)을 평정했거늘 다시 촉(蜀)을 바라는구나. 병사를 낼 때마다 머리털은 새하얘진다.”

잠팽은 계곡 물을 서성에 들이부었으나, 성은 한 장도 잠기지 않았고 공손술의 원병이 와서 외효를 기현으로 탈출시켰다. 식량이 떨어져 남은 치중을 태우고 농으로 군대를 물렸고, 갑연과 경감도 퇴각했다. 잠팽이 후미를 지켜 외효의 추격에서 군대를 보전할 수 있었고, 잠팽은 형주의 진향으로 돌아갔다.

건무 9년(33년), 공손술이 임만(任滿)·전융·정범(程汎)이 거느리는 수만 군대를 보내 풍준·전홍·이현 등을 모조리 무찌르고 이릉·이도를 함락하고 형문(荊門)과 호아(虎牙)에 주둔했다. 강을 가로질러 부교와 싸움용 누각을 가설하고 물길을 끊고 산에 영채를 세워 한군과 맞섰다. 잠팽은 몇 번 쳤으나 지기만 해, 누선과 돌격용 군선 수천 척을 건조했다.

건무 11년(35년) 봄, 오한과 주로장군 유륭(劉隆)·보위장군 장궁·효기장군 유흠(劉歆)과 함께 군대를 냈는데, 남양·무릉·남군 외에 또 계양·영릉·장사군에서 수군을 징발하니 총 6만여 명과 5천 필의 말이 형문으로 모였다. 오한은 수군 비용이 비싸므로 해산할 것을 주장했고 잠팽은 반대했는데, 광무제는 오한이 수전을 잘 모르므로 잠팽의 뜻을 따르게 했다.

잠팽은 부교를 칠 군사를 상을 내걸고 모으니 편장군 노기(魯奇)가 선봉에 섰다. 마침 바람이 거세게 불자, 이를 타고 노기 등이 거슬러 올라가 부교에 들이받았는데, 성군이 설치한 장애물은 바람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노기 등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고 횃불을 던졌는데, 바람이 거세 불이 잘 일어나 누각을 태워 무너뜨렸다. 잠팽은 바람을 타고 전군을 진격시켰고, 성군은 혼란에 빠져 수천 명이 빠져죽었다. 임만을 죽였고 정범을 산 채로 사로잡았고 전융만 도망가 강주를 지켰다.

잠팽은 상주해 유륭을 남군태수로 삼고 장궁과 유흠과 함께 깊숙이 진격해 강관으로 들어갔고, 군에 약탈을 금했다. 백성이 소와 술로 맞이하러 오면, 장로들을 만나 한나라가 파촉 백성들을 애달프게 여겨 원정 왔으니 죄 있는 자만 치고 백성들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무하고, 소와 술은 받지 않았다. 백성들은 기뻐해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조서가 내려와 익주이 됐고, 투항하는 군들의 태수 업무를 대행하게 했다.

강주에 이르러서는 전융이 곡식이 많으므로 함락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겨, 풍준에게 지키게 하고 자신은 파군 점강현으로 가서 평곡을 무찌르고 곡식 수만 석을 얻었다. 공손술은 이 소식을 듣고 연잠·여유·왕원과 자기 아우 공손회를 보내 광한현과 자중현에서 저지하게 하고 후단에게는 2만여 명을 주어 황석에서 저지하게 했다. 잠팽은 가짜 병사를 늘어놓아 호군 양흡(楊翕)과 장궁 등에게 연잠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의 군대는 일부는 강주현으로 가고 일부는 성도 근처를 흐르는 도강(都江)을 건너게 해 후단을 대파했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무양(武陽)현을 함락하고, 정예 기병을 광도현까지 다다르게 하니 성도까지 수십 리에 불과했다. 당초에 한군이 평곡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공손술이 연잠 등에게 요격하게 한 것인데, 잠팽이 연잠 군의 후방에 나타나니 촉은 진동하고 공손술은 매우 놀라서 말했다.

“무슨 신이라도 된 것이냐?”[5]

2. 6. 죽음과 평가

잠팽은 건무 11년(35년)에 공손술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5] 시호는 장후(壯侯)로 추증되었으며, 군대를 이어받은 오한공손술과 촉을 항복시켰다.

잠팽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병법에 뛰어났다. 진풍과의 전투에서는 서쪽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고 포로를 일부러 도망치게 한 후, 밤중에 강을 건너 정보를 믿고 전군을 이끌고 출진한 진풍의 허술한 진지를 공격하여 그 동쪽에 진영을 쳤다. 또 밤중에 기습해 올 것을 예상하고 이를 격퇴했다. (동쪽을 공격하고 서쪽을 친다[6]) 공손술과의 전투에서는 전격전을 감행했다. 먼저 부하 장궁 등에게 공손술 휘하의 연잠을 공격하게 한 후, 은밀히 강을 내려가 강주로 돌아가 성도강을 거슬러 올라가 공손술의 장수 후단을 격파하고 (매미 허물 벗기), 밤중에 행군 거리를 두 배로 늘려 무양을 함락시키고 정예 기병을 광도에 보냈다. 잠팽이 평곡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공손술은 연잠 등에게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우게 했으나, 연잠의 배후에 잠팽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신의 솜씨인가"라며 경악했다.
  • 군대를 규율 있게 통솔했으며, 약탈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잠팽이 가는 곳마다 군현이 앞다투어 항복했다.
  • 邛穀王(경곡왕) 임귀는 잠팽의 위세를 듣고 수천 리 밖에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는데, 당시 잠팽은 이미 사망한 후였고, 광무제는 임귀가 헌상한 물건을 모두 잠팽의 처자에게 하사했다.
  • 훗날 장익은 잠팽과 내흡이 자객에게 살해된 것을 예로 들어 비의를 경계했다.

참조

[1] 서적 後漢書
[2] 인용
[3] 서적 資治通鑑
[4] 인용
[5] 인용
[6] 문서 耿弇
[7] 서적 후한서
[8] 서적 동관한기
[9] 역사
[10] 서적 후한서
[11]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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