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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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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굉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학문과 문장에 능했으며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이름을 알렸고, 조조에게 발탁되기도 했으나 손책과의 의리를 지켰다. 손책 사후 조조의 침공을 막고 손권을 보좌하며 외교와 계략에 기여했다. 손권에게 수도를 건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실현시키는 등 오나라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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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굉
원어 이름張紘
자강(子綱)
출생153년
사망212년 (59세) 또는 229년?
출생지양주, 강소성
직업정치인, 학자
자녀장선
관직
초대 장사 (長史)(손권 휘하)
임기 시작208년
임기 종료212년
임기 시작1기원후 200년대
임기 종료1208년
임기 시작2199년
임기 종료2기원후 200년대
군주헌제
섬긴 군주

2. 생애

장굉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지극히 모셨으며,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경서를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약관의 나이에 집안을 일으켰다.[9] 젊은 시절에는 수도 낙양(洛陽)으로 유학하여 학문을 닦았고,[2] 고향으로 돌아와 태수 조욱에게 효렴으로 추천받고 무재로 천거되었다.[3]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 주준(朱儁), 사공 순상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8][10][3]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후, 손책이 거병하자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4] 손책은 장굉을 정의교위로 임명하고 단양 토벌에 종군시켰으며, 이때 장굉은 손책에게 총대장이 최전선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했다. 손책은 장굉을 장소 (동오)(張昭), 진송, 진단과 함께 참모로 중용했으며, 여포가 서주목이 된 후 장굉을 무재로 초빙하려 했으나, 장굉이 여포를 싫어하고 손책 또한 장굉을 아꼈기에 손책이 대신 거절 편지를 보냈다.[10]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으로 허도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조에게 시어사로 임명되었고, 공융 등과 친교를 맺었다.[8][5] 손책 사후 조조가 강동을 공격하려 하자, 장굉은 타인의 상을 틈타는 것은 옳지 않으며 손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조의 출병을 막았다.[8][6]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 겸 회계 태수로 임명하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보좌하도록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8] 이후 장굉은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동부'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오부인의 부탁을 받고 손권의 행실을 바로잡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문장 작성 능력이 뛰어나 문서 기안과 사서 기록에 관여했고, 시와 부 등 문학 작품도 많이 남겨 진림에게 칭찬을 받았다.[5] 은인인 조욱이 착융에게 살해당하자, 장패에게 의뢰하여 조씨 가문의 제사를 잇게 했다. 손권이 강하로 원정했을 때 수도 유수를 맡아 그 공적을 인정받았으나 포상을 사양했고, 합비 출병 시에는 장사로 종군하여 손권에게 경장 기병만으로 전선에 나서는 것을 경계하도록 간언했다.

손권에게 오군에서 말릉(후의 건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여 211년 천도가 이루어졌다.[7] 장굉은 오군에서 손권의 가족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향년 60세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아들 장정에게 손권에게 보내는 유서를 맡겼고, 손권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장굉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지극히 모셨으며,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경서를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약관의 나이에 집안을 일으켰다.[9] 젊은 시절에는 수도 낙양(洛陽)으로 유학하여 학문을 닦았고,[2] 고향으로 돌아와 태수 조욱에게 효렴으로 추천받고 무재로 천거되었다.[3]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 주준(朱儁), 사공 순상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8][10][3]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후, 손책이 거병하자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4] 손책은 장굉을 정의교위로 임명하고 단양 토벌에 종군시켰으며, 이때 장굉은 손책에게 총대장이 최전선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했다. 손책은 장굉을 장소 (동오)(張昭), 진송, 진단과 함께 참모로 중용했으며, 여포가 서주목이 된 후 장굉을 무재로 초빙하려 했으나, 장굉이 여포를 싫어하고 손책 또한 장굉을 아꼈기에 손책이 대신 거절 편지를 보냈다.[10]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으로 허도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조에게 시어사로 임명되었고, 공융 등과 친교를 맺었다.[8][5] 손책 사후 조조가 강동을 공격하려 하자, 장굉은 타인의 상을 틈타는 것은 옳지 않으며 손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조의 출병을 막았다.[8][6]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 겸 회계 태수로 임명하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보좌하도록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8] 이후 장굉은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동부'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오부인의 부탁을 받고 손권의 행실을 바로잡는 간언을 하기도 했다.

문장 작성 능력이 뛰어나 문서 기안과 사서 기록에 관여했고, 시와 부 등 문학 작품도 많이 남겨 진림에게 칭찬을 받았다.[5] 은인인 조욱이 착융에게 살해당하자, 장패에게 의뢰하여 조씨 가문의 제사를 잇게 했다. 손권이 강하로 원정했을 때 수도 유수를 맡아 그 공적을 인정받았으나 포상을 사양했고, 합비 출병 시에는 장사로 종군하여 손권에게 경장 기병만으로 전선에 나서는 것을 경계하도록 간언했다.

손권에게 오군에서 말릉(후의 건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여 211년 천도가 이루어졌다.[7] 장굉은 오군에서 손권의 가족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향년 60세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아들 장정에게 손권에게 보내는 유서를 맡겼고, 손권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2. 2. 손책과의 만남과 등용

장굉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젊은 시절 수도 낙양에 유학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태수 조욱에게 효렴으로 추천받았다.[3] 무재로도 천거되었으며, 하진, 주준, 순상삼공에게 초빙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8][10]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 후, 195년 장소와 함께 '이장(二張)'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4][8]

손책은 이들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방문하여 등용하려 하였고, 결국 장굉은 손책의 휘하에 들어가 정의교위로 임명되었다.[8] 손책의 단양 토벌에 종군하였으며, 이때 손책이 진두지휘하려 하자 총대장이 최전선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하였다. 장소, 진송, 진단과 함께 손책의 참모로 활동했으며, 장소와 장굉 중 한 명이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한 명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4] 여포서주목이 되자 장굉을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손책도 장굉을 아껴 여포에게 보내지 않았다.[10]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으로 조조가 있는 허도에 사신으로 갔다가 시어사 벼슬을 받고 그곳에 머물렀다.[5] 이때 공융 등과 친교를 맺었다.[5] 조조는 장굉을 사공연으로 삼고 구강태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장굉은 손책의 은혜를 생각해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10] 200년 손책이 죽자 조조가 오 땅을 도모하려 할 때, 장굉은 타인의 상을 틈타서는 안 되며 손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8]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손권을 토로장군·영 회계태수로 임명하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돕게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6][8]

이후 손권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동부'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장소와 함께 계략과 외교 임무를 맡았다.[4] 오부인에게서 손권을 부탁받아 손권의 행실에 대해 간언하기도 했다.[4] 208년 적벽 대전 당시에는 장소, 고옹 등과 함께 조조와의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손권이 혈기에 넘쳐 전선에 나서려는 것을 간언하였다.

손권이 강하로 원정했을 때 수도 유수를 맡았고, 합비 출병 시에는 장사로 종군하여 손권이 경장 기병만 이끌고 전선에 서려는 것을 경계했다. 손권에게 오군에서 말릉(후의 건업)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여 211년에 천도가 실시되었다.[7]

2. 3. 조조와의 관계

젊어서 수도인 낙양(洛陽)에 유학하였고, 광릉군으로 돌아가 무재로 천거되어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 주준(朱儁), 사공 순상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8][10] 195년, 재야에 묻혔을 때 장소 (동오)(張昭)와 함께 이장(二張)으로 불려, 손책(孫策)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 장소와 장굉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한 끝에 등용하였다. 장굉은 정의교위로 임명되었다.[8]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령으로 당시 최대 군주인 조조가 있는 낙양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시어사가 되었고, 소부 공융(孔融)과 친교를 맺었다.[8] 사공 조조(曹操)는 장굉을 천거하여 사공연으로 삼고, 나중에는 구강태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장굉은 손책의 옛 은혜로 말미암아 칭병하고 물러났다.[10] 200년, 손책이 죽자 조조가 이를 틈타 오 땅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간하여, 이를 기회로 강동에 은혜를 베풀기를 주장했다.[8]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손권을 토로장군·영 회계태수로 임명했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돕게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8]

208년, 적벽 대전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장소, 고옹(顧雍) 등의 문관들과 함께 조조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2. 4. 손권을 섬기다

장굉은 젊어서 수도인 낙양(洛陽)에 유학하였고, 광릉군으로 돌아가 무재로 천거되어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 주준(朱儁), 사공 순상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8][10] 태수 조욱으로부터 효렴으로 추천받고, 삼공의 관청에서 초빙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3]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고, 이후 손책이 거병했을 때 처음으로 벼슬을 했다.[4]

195년, 재야에 묻혔을 때 장소 (동오)(張昭)와 함께 이장(二張)으로 불려, 손책(孫策)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 장소와 장굉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한 끝에 등용하였다. 장굉은 정의교위로 임명되었다.[8] 손책은 상소를 올려 정의교위로 임명했다. 손책의 단양 토벌에 종군했으며, 이때 손책이 진두지휘를 하려 하자 "총대장인 자가 최전선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했다. 장소와 동향의 진송, 진단과 함께 손책의 참모로 섬겼다. 장소와 장굉 중 한 명이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한 명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오서』).

여포(呂布)가 서주를 습격하여 서주목이 되자 장굉을 무재로 천거하였으나,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손책도 장굉을 아껴 여포에게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10] 여포서주목이 되자, 장굉을 무재로 천거하여 불렀지만, 장굉은 여포를 혐오했고, 또한 손책도 장굉을 붙잡아두고 싶어했기에, 손책이 대신 여포에게 거절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오서』).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령으로 당시 최대 군주인 조조가 있는 낙양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시어사가 되었고, 소부 공융(孔融)과 친교를 맺었다.[8] 건안 4년 (199년), 손책의 명으로 허도에 사자로 갔을 때, 조조로부터 시어사의 벼슬을 받고 머무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시기에 공융 등과 친밀하게 교류했다.[5] 사공 조조(曹操)는 장굉을 천거하여 사공연으로 삼고, 나중에는 구강태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장굉은 손책의 옛 은혜로 말미암아 칭병하고 물러났다.[10]

200년, 손책이 죽자 조조가 이를 틈타 오 땅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간하여, 이를 기회로 강동에 은혜를 베풀기를 주장했다.[8] 손책 사후, 그 틈을 타 조조가 공격하려 하자, "타인의 상을 틈타서는 안 된다. 손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조는 그 말을 듣고 출병을 멈추고, 손권에게 토로장군의 지위와 회계 태수의 직을 주었다.[6]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손권을 토로장군·영 회계태수로 임명했고, 장굉에게는 손권을 돕게 하여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했다.[8] 조조는 또한 손권을 자신의 산하에 두려고 생각했기에, 장굉을 사자로 손권에게 보냈다. 손권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장굉을 회계 동부 도위에 임명했다.[6]

이후, 손권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아, 항상 "동부"라는 존칭으로 불렸다(『강표전』). 또한, 장소와 함께 계략과 외교의 임무를 맡았다(『오서』). 손권의 어머니인 오부인에게서도 손권을 부탁받아(『오서』), 손권의 일상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간언을 하여, 그 행실을 고치게 했다.

208년, 적벽 대전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장소, 고옹(顧雍) 등의 문관들과 함께 조조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손권에게 손책과 같이 혈기에 넘쳐 전선에 나서려는 것에 간언하였다. 손권이 합비로 출병했을 때, 장사로 임명되어 종군했다. 손권이 경장 기병만 이끌고 전선에 서려 하자, 이를 경계했다. 또한, 합비에서 귀환한 다음 해에도 출병하려 하자, 다시 한 번 경계했다.

그 후, 손권에게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였고, 손권이 실행한 후 병사하였다. 손권에게 오군에서 말릉(후의 건업)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했기에, 건안 16년 (211년)에 천도가 실시되었다(「오주전」)[7]

2. 5. 수도 천도 건의와 죽음

장굉은 젊어서 수도인 낙양(洛陽)에 유학하였고, 광릉군으로 돌아가 무재로 천거되어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 주준(朱儁), 사공 순상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8][10] 태수 조욱으로부터 효렴으로 추천받고, 무재로 천거되었다. 삼공의 관청에서 초빙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3]

195년, 재야에 묻혔을 때 장소 (동오)(張昭)와 함께 이장(二張)으로 불려, 손책(孫策)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 장소와 장굉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한 끝에 등용하였다. 장굉은 정의교위로 임명되었다.[8] 여포가 서주를 습격하여 서주목이 되자 장굉을 무재로 천거하였으나,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손책도 장굉을 아껴 여포에게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10] 손책의 단양 토벌에 종군했으며, 이때 손책이 진두지휘를 하려 하자 "총대장인 자가 최전선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의 명령으로 당시 최대 군주인 조조가 있는 낙양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러 시어사가 되었고, 소부 공융(孔融)과 친교를 맺었다.[8] 사공 조조(曹操)는 장굉을 천거하여 사공연으로 삼고, 나중에는 구강태수에 임명하려 했으나, 장굉은 손책의 옛 은혜로 말미암아 칭병하고 물러났다.[10] 공융 등과 친밀하게 교류했다.[5]

200년, 손책이 죽자 조조가 이를 틈타 오 땅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간하여, 이를 기회로 강동에 은혜를 베풀기를 주장했다.[8] 조조는 그 말을 듣고 출병을 멈추고, 손권에게 토로장군의 지위와 회계 태수의 직을 주었다. 조조는 또한 손권을 자신의 산하에 두려고 생각했기에, 장굉을 사자로 손권에게 보냈다. 손권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장굉을 회계 동부 도위에 임명했다.[6] 이후, 손권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아, 항상 "동부"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208년, 적벽 대전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장소, 고옹(顧雍) 등의 문관들과 함께 조조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손권에게 손책과 같이 혈기에 넘쳐 전선에 나서려는 것에 간언하였다. 손권이 합비로 출병했을 때, 장사로 임명되어 종군했다. 손권이 경장 기병만 이끌고 전선에 서려 하자, 이를 경계했다. 또한, 합비에서 귀환한 다음 해에도 출병하려 하자, 다시 한 번 경계했다.

손권이 강하로 원정했을 때, 장굉을 수도로 불러 유수를 맡기고, 도위로서의 업무도 수행하게 했다. 손권이 장굉의 유수로서의 공적을 칭찬하고 포상하려 했지만, 장굉은 굳이 사양했다.

그 후, 손권에게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였고, 손권이 실행한 후 병사하였다. 손권에게 오군에서 말릉(후의 건업)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했기에, 건안 16년 (211년)에 천도가 실시되었다.[7] 장굉은 오군에서, 손권의 가족을 맞이하러 가는 임무를 받았지만, 오군으로 가는 도중에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다. 죽기 직전, 아들 장정에게 손권에게 보내는 유서를 맡겼다. 그 편지를 읽은 손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장굉

삼국지연의》에서의 장굉은 정사와 비슷하게 묘사되지만, 손권에게 수도를 건업으로 옮길 것을 진언하고 병사한 것으로 나온다. 손권은 죽기 전까지 나라를 생각하는 장굉을 충신이라 칭하며 건업으로 천도하였다.

4. 친족 관계

장현(張玄)은 남군태수와 상서(尙書)를 지냈다.[8] 《강표전》에서는 아버지 장굉(張肱)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11]

장상(張尙)은 말제 손호(孫皓) 시대에 시랑(侍郞)이 되었고, 시중(侍中),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8] 말제의 명령으로 고금(古今)을 익혀, 후에 진 평공사광에게 청각조(淸角調)를 연주하게 한 옛 일을 들어 말제를 깨우치고자 했다.[8] 말제는 이를 싫어하여, 나중에 다른 일로 장상을 하옥하고, 건안(建安)으로 보내 배를 만들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주살했다.[8]

5. 평가

장굉은 당대의 명사로, 그의 재능과 학식은 널리 인정받았다. 특히 경학에 밝아 많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지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했다.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인물 평가 (예시)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呉書
[3] 서적 呉書
[4] 서적 呉歴
[5] 서적 呉書
[6] 문서 구강태수 임명 거절
[7] 서적 강표전
[8] 서적 삼국지
[9] 서적 강표전
[10] 서적 오서
[11] 서적 강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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