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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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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소는 후한 말에서 삼국 시대 동오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고, 낭야의 조욱, 동해의 왕랑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손책을 보좌하며 교위, 장사, 무군중랑장을 역임했고, 손책 사후에는 손권을 보좌하여 주부로 임명되었다. 손권 시대에는 승상으로 추대되었으나 고옹이 임명되었고, 보오장군, 누후에 봉해졌다. 236년에 81세로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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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소
원어 이름張昭
로마자 표기Jang Jo
자포(子布)
시호문후(文侯)
출생
출생일156년
출생지쉬저우(徐州), 장쑤(江蘇)
사망
사망일236년 (80세)
가족
자녀장승(張承)
장수(張休)
관직
손책 휘하무군중랑장(撫軍中郎將)
장사(長史)
손권 휘하장사(長史)
군사(軍師)
수원장군(綏遠將軍)
보오장군(輔吳將軍)
봉작루후(婁侯)
기타 정보
직업서예가, 수필가, 군사 장군, 정치인
활동 시기후한 말 ~ 삼국 시대 (동오)
이미지
장소의 청나라 시대 삽화
장소의 청나라 시대 삽화

2. 생애

(내용 없음)

2. 1. 출사 전

장소는 후한 말기, 현재의 장쑤성 쉬저우시 지역인 쉬주의 펑청국 출신이다.[1]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서예 중 예서에 뛰어났다.[1] 백후자안(白侯子安)에게서 《좌전》과 《춘추》를 배웠고 역사에도 정통했다.[2] 젊은 시절부터 낭야 사람 조욱, 동해 사람 왕랑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1][2]

19세 혹은 20세 무렵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3] 대신 왕랑과 함께 고대 군주의 이름 사용 금기(휘)에 대한 글을 써 진림 등 동향 학자들에게 주목받았으며,[3] 이는 잉사오의 주장에 반박하는 내용이었다.[4]

이후 서주자사였던 도겸이 장소를 무재로 천거했지만, 장소는 이 역시 거절했다. 도겸은 이를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로 여겨 장소를 투옥시키는 편협한 모습을 보였다.[5] 당시 도겸 휘하에 있던 친구 조욱이 적극적으로 나서 변호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5]

2. 2. 손책 시대

후한 말, 동탁의 전횡 등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서주 팽성군에 살던 장소는 혼란을 피해 남쪽으로 양쯔강을 건너 양주 지역(강동)으로 이주했다.[6]

194년부터 199년 사이, 군벌 손책이 강동 지역을 정복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던 중 장소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했다. 장소가 합류하자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교위(校尉중국어)로 임명하고 스승처럼 예우했다.[7] 이후 장소를 장사(長史중국어)로 삼고 무군중랑장(撫軍中郎將중국어)으로 승진시켰다. 손책은 장소의 능력을 높이 사 문무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으며, 개인적으로도 장소의 집에 방문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등 깊은 신뢰를 보이며 오랜 친구처럼 대했다.[8]

장소는 손책 휘하에서 일하며 북방의 사대부들로부터 그의 공적을 칭찬하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 그는 이 편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숨기면 손책이 충성심을 의심할까 두려웠고, 공개하면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했다.[9] 손책은 이 사실을 알고 웃으며, 과거 제나라의 환공이 관중에게 모든 것을 맡겨 패업을 이루었던 고사를 언급하며 "오늘날 자부(子布, 장소의 자)와 같은 현명한 인재가 나를 돕고 있으니, 그의 영광 또한 나의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다.[10] 손책은 출진할 때 장굉과 장소 중 한 명을 항상 동반했으며, 남은 한 명에게는 후방의 일을 맡겼다.[93] 또한, 부장 등당이 사망하자 그의 의제였던 여몽을 후임으로 추천하기도 했다.[94]

건안 5년(200년), 손책은 임종을 맞이하며 장소를 불러 동생 손권의 보좌를 부탁했다. 손책은 손권에게 "안의 일(내정)은 장소에게 물어보라"고 말했으며, 장소에게는 "만약 중모(손권의 자)가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그대가 대신 자리를 취하라"는 유언을 남겼다.[12][95]

손책이 세상을 떠난 후, 장소는 즉시 손책의 옛 신하들을 이끌고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의 뒤를 받쳤다.[13] 그는 상주문을 후한 조정에 보내 손책의 사망과 손권의 승계를 공식적으로 알렸고, 동시에 손권 휘하의 관리들에게 동요하지 않고 기존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지시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2. 3. 손권 시대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세상을 떠나자 장소는 여러 관료를 이끌고 손권을 보좌했다. 당시 18세였던 손권은 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정사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장소는 손권에게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며, 주공의 아들 백금이 상례를 따르지 않은 고사를 들어 상복을 벗고 군대를 순시하도록 설득했다.[16][17] 손권은 장소의 조언을 따라 상복을 벗고 군대를 사열했으며, 이를 통해 손책의 옛 신하들은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정권은 안정을 찾았다.[18] 손권은 장소를 장사(長史)로 삼아 이전과 같은 임무를 맡겼다.[19] 장소의 도움으로 손권은 강동의 불안정한 정권을 안정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기반을 다졌다.[20] 이후 손권이 정벌에 나설 때는 장소가 후방에 남아 막부의 일을 총괄했다. 장소는 때때로 직접 군대를 이끌기도 했는데, 손권이 합비를 공격할 때 별도로 광기(匡琦중국어)를 공격했으며, 예장군(豫章郡)의 도적 주봉(周鳳)을 토벌하기도 했다.[21][33] 그러나 점차 군사 지휘보다는 손권 곁에서 모신(謀臣)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34]

건안 12년(207년), 감녕이 투항하여 황조 토벌을 건의하자, 장소는 오나라 영토가 아직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감녕은 장소를 소하에 비유하며 반박했고 손권은 감녕의 의견을 따랐다.[23][24][25] 이듬해인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장소는 진송 등 많은 신하와 함께 현실적인 전력 차이를 고려하여 항복을 주장했다.[29] 그러나 손권은 주유노숙의 주전론을 받아들여 적벽 대전에서 승리했다. 이 일은 훗날까지 영향을 미쳐, 손권이 황제에 즉위한 후 "만약 장공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쯤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장소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58] 배송지는 장소가 손권 개인보다 백성의 안위를 우선하여 항복을 건의했을 것이라고 평했다.[59]

건안 14년(209년), 유비의 추천으로 손권이 거기장군() 대행이 되자, 장소는 군사()에 임명되었다.[35]

장소는 손권의 행동에 대해 자주 직언했다. 손권이 말을 타고 호랑이를 사냥하다 위험에 처하자, 장소는 "군주는 인재를 부리는 것이지, 맹수와 용맹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라고 간언했다.[37] 손권은 사과했지만[38], 이후 특별히 제작한 수레 안에서 호랑이 사냥을 계속 즐겼다.[39] 또한 손권이 연회에서 신하들에게 과음을 강요하며 지나치게 즐기려 하자, 장소는 은나라 주왕의 고사를 들어 이를 비판했고, 손권은 부끄러워하며 연회를 중단시켰다.[48][49]

황초 2년(221년), 위나라 사신 형정(邢貞)이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책봉하러 왔을 때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장소는 "예법은 법의 집행과 같다"며 그의 무례함을 꾸짖어 태도를 바꾸게 했다.[41][42] 이후 장소는 수원장군(綏遠將軍)에 임명되고 유권후(由拳侯)에 봉해졌다.[43] 그는 손소, 등윤, 정례 등과 함께 오나라의 의례 제도를 정비하는 데 참여했다.[44]

손권이 처음 승상(丞相)을 두려 할 때 많은 이들이 장소를 추천했지만, 손권은 손소를 임명했다.[51][52] 황무 4년(225년), 손소가 죽자 다시 장소가 추천되었으나, 손권은 "장소는 성정이 너무 강직하여 마찰이 많을 것"이라며 고옹을 승상으로 삼았다.[54]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장소는 노령과 병을 이유로 관직과 병권을 반납하고 은퇴하려 했다.[55] 손권은 그를 보오장군(輔吳將軍)으로 임명하고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대우를 했으며, 누후(婁侯)로 고쳐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하사했다.[60] 은퇴 후 장소는 주로 집에 머물며 《춘추좌씨전》 해설서와 《논어》 주석서를 저술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61] 그는 여전히 조정의 일에 관심을 보였는데, 엄준이 손권 앞에서 《효경》의 첫 구절을 암송하자, 자신이 나서서 군주를 섬기는 도리에 관한 구절을 암송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63]

황룡 3년(231년), 요동의 공손연이 오나라에 복속하겠다는 뜻을 표하자 손권은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그를 연왕(燕王)으로 봉하려 했다.[69] 장소는 공손연의 진심을 의심하며 강력히 반대했다.[70] 손권과의 논쟁은 격렬해져 손권이 칼을 잡고 위협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장소는 눈물을 흘리며 오태부인의 유언을 언급하며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72] 손권도 칼을 놓고 함께 울었지만, 결국 사신 파견을 강행했다.[73]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소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손권은 이에 분노하여 장소의 집 문을 흙으로 막아버렸다. 장소 역시 안에서 흙으로 문을 막으며 맞섰다.[74]

결국 공손연은 오나라 사신들을 죽이고 배신했다.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러 차례 장소에게 사과했지만, 장소는 계속 칩거했다.[75] 손권이 직접 찾아가 불러도 나오지 않자, 손권은 장소의 집 문에 불을 질러 나오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장소는 오히려 집 안의 문과 창문까지 닫아버렸다.[76] 손권은 불을 끄게 하고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고, 장소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오자 손권은 그를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와 깊이 사과했다. 이후 장소는 다시 조정에 참석했다.[77] 《삼국지》 시의호종전에서는 이때 호종의 중재가 두 사람의 화해에 기여했다고 전한다.

장소는 용모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매우 근엄한 태도를 유지했다. 손권조차 "나는 장공과 이야기할 때는 감히 농담도 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였다.[79] 그는 가화(嘉禾) 5년(236년), 81세(만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장례가 치러졌으며, 손권도 상복을 입고 직접 장례에 참석했다. 시호는 문후(文侯)가 내려졌다.[80]

2. 4. 학문적 업적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고 예서에 능하며 지략이 뛰어났다. 백후 자안이라는 인물에게서 《좌씨춘추》를 배웠고, 그 외에도 널리 서적을 읽었다. 이 시기에 왕랑, 조욱과 함께 높은 명성을 얻어 서로 친하게 교류했다.

출사하기 전, 왕랑과 함께 옛 군주들의 휘사(諱事, 이름 부르기를 피하는 일)를 논했는데, 진림 등 동향 사람들이 모두 이를 좋게 평가했다. 이 논쟁은 《풍속통의》라는 서적에 기록되었다.[91]

손권황제로 즉위한 후 은퇴하였을 때, 집에서 일이 없어 《춘추좌전해》와 《논어주》를 저술했다. 손권이 일찍이 위위 엄준에게 어렸을 적 외운 책을 암송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엄준은 호경의 〈중니거〉를 외웠다. 장소는 “엄준은 비루한 서생입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외우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고, 《예기》의 〈군자지자 상〉 편을 외웠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장소가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장소의 전기를 쓰며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조는 (손권)을 보좌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의 공헌은 뛰어났다. 그는 충성스럽고 솔직하며 정직했다. 그의 행동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엄격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샀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기피당했다. 그는 재상이나 황실의 스승 역할을 맡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경력을 쌓았고, 노년을 은퇴로 보냈다. 이는 손권이 손책만큼 현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83]

《典略|전략zho》에 따르면, 형주 자사 유표손책에게 보낸 편지를 미형에게 보여주자, 미형은 "이 편지는 손책의 영토에 있는 아이들이 읽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장자부(張子布)가 읽도록 하려는 것인가?"[84]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독설로 유명했던 미형조차 장소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85]

장소는 손권 앞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때로는 그 강직함 때문에 손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공손연이 거짓으로 투항했을 때, 장소는 손권의 사신 파견을 극력 반대했다. 손권이 분노하여 칼까지 빼 들었지만, 장소는 오부인과 손책의 유언을 언급하며 눈물로 간언했다. 손권은 결국 장소의 말을 듣지 않고 사신을 보냈고, 장소는 이에 항의하며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손권이 흙으로 장소의 집 문을 막자 장소도 안에서 흙으로 문을 막으며 맞섰다.[103]

결국 공손연이 사신들을 살해하자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러 차례 사과했으나 장소는 나오지 않았다. 손권이 직접 찾아가 문 앞에서 불을 지르며 협박해도 장소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손권이 불을 끄고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자, 장소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손권은 장소를 자신의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가 깊이 사과했고, 이후 장소는 다시 조정에 나왔다.[103] 이러한 일화는 장소의 굳은 절개와 손권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동진 시대 원굉은 "삼국명신서찬"(《문선》 수록)에서 오나라의 명신 7명 중 한 명으로 장소를 선정하여 그의 공적과 명성을 기렸다.[105][106] 장소가 집 앞에 판 연못은 그의 작위(누후)를 따 '누호'라 불렸는데, 이는 그가 관개 사업에도 기여했음을 시사한다.[104]

4. 가족 관계

장소에게는 최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두 아들 모두 동오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첫째 아들 장승(張承)은 이미 자신만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둘째 아들 장수(張休)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누후(婁侯중국어)가 되었다.[81]

장소의 조카 장분(張奮중국어)은 19세에 공성 병기로 사용될 전차를 설계하는 재능을 보였다. 보즐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오나라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추천했으나, 장소는 조카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군 복무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염려하여 반대했다. 장분은 장소에게 "옛날 춘추 시대 노나라의 소년 영웅 왕기는 어린 나이에 공을 세우고 죽었으며, 제나라의 자기는 15세에 현을 다스렸습니다. 저는 비록 재능이 부족할지라도 더 이상 어리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이후 장분은 군에 입대하여 장군까지 승진했으며, 평주도독(平州都督중국어)이라는 높은 직책까지 역임하고 낙향정후(樂鄉亭侯중국어)에 봉해졌다.[82]

장소의 손자들도 오나라에서 고위 관직에 올랐다. 장승의 아들인 장휴(張休)는 이궁의 변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장승의 다른 아들 장진(張震) 역시 친척인 제갈각이 숙청될 때 함께 목숨을 잃었다.

후대에 이르러, 동진 시대에는 장소의 증손자인 장개(張闓)가 고위 관직에 올랐고, 그의 아들인 장혼(張混)까지 역사 기록에 이름을 남겼다.

5. 기타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장소의 허구적 인물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인물과 유사하다. 소설에서 그는 15장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주유가 그와 장굉강동의 "이장"(二張|얼장zho)이라고 칭하며 손책을 돕는 인재로 추천한다. 손책은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을 참모로 삼는 데 성공했다.[86] 소설 속에서 장소는 오(吳)의 참모 수석으로 취급되며, 장굉과 함께 "강동의 이장(江東의 二張)"으로 불리는 재야의 현자로 묘사된다. 29장에서 손책이 죽기 직전, 그는 손권이 국내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경우 장소에게, 국외 문제에 대해서는 주유에게 각각 자문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87]

43장에서 49장까지, 적벽 대전 직전 조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손권이 신하들과 논의할 때, 신하들은 조조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측과 조조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으로 나뉜다. 장소는 항복을 주장하는 측의 선두 주자 중 한 명이다.[88] 특히 43장에서는 제갈량과 손권 휘하의 여러 문신들 사이의 허구적인 논쟁이 묘사되는데, 장소는 제갈량에게 도전하는 첫 번째 인물로 등장하며 논쟁에서 패하는 중신 중 한 명으로 그려진다. 제갈량은 유창한 답변과 조롱, 모욕으로 장소를 포함한 모든 문신을 침묵시킨다.[89]

관우가 죽은 후, 장소는 손권에게 그 화를 위(魏)로 돌리도록 진언하여, 관우의 염장된 머리는 조조(曹操)의 곁으로 보내졌다. 정사에서는 장소가 한 번 관위와 영지를 반납한 후에도 정치에 계속 관여하지만, 연의에서는 이 시점 이후 완전히 은퇴한 것으로 묘사되는 차이가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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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Sanguozhi vol.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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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Sanguozhi vol. 52
[17] 서적 Sanguozhi vol. 47
[18] 서적 Sanguozhi vol.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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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Sanguozhi Sanguozhi vol. 52
[81] Sanguozhi Sanguozhi vol.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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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간행물 太平広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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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呉서 『三国志』呉書 孫策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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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呉서 『三国志』呉書 甘寧伝
[99] 呉서 『三国志』呉書 呉主伝
[100] 원자 『三国志』蜀書 諸葛亮伝注『袁子』
[101] 呉서 『三国志』呉書 虞翻伝
[102] 呉서 『三国志』呉書 諸葛恪伝
[103] 문서
[104] 문서 『景定建康志』『元和郡県志』『江南通志』
[105] 문서
[106] 문서 張昭は「子布擅名 遭世方擾 撫翼桑梓 息肩江表 王略威夷 呉魏同寶 遂獻宏謨 匡此覇道 桓王之薨 大業未純 把臂託孤 惟賢與親 輟哭止哀 臨難忘身 成此南面 寔由老臣 才為世出 世亦須才 得而能任 貴在無猜」と謳われている
[107] 서적 晋書
[108] 웹사이트 三国時代の呉の重臣・張昭の墓、南京で見つかる https://www.recordch[...] Record China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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