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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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락행은 안휘성 출신의 염군 지도자이다. 1852년 기근으로 염자를 결성하고, 이듬해 태평천국군에 호응했다. 1855년에는 '대한명왕'으로 칭하며 군대를 조직했고, 1857년 태평천국과 연합하여 정북주장, 옥왕에 봉해졌다. 1862년 태평천국 세력 약화 이후, 1863년 치하집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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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행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락행 |
로마자 표기 | Zhang Lexing |
출생 | 청나라 가경(嘉慶) 13년 (1808년) |
사망 | 청나라 함풍(咸豐) 8년 (1858년) |
생애 | |
주요 활동 | 염군(捻軍)의 지도자 |
봉기 시작 | 1852년 |
최후 | 청나라 군대에 체포되어 처형됨 |
2. 생애
1853년, 태평천국군이 안휘성·하남성을 통과하자 염군도 이에 호응했다.
1855년, 치하집에서 각지의 염군 수령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맹주로 추대되어 ‘대한명왕’(大漢明王)이라고 칭했다. 노랑, 흰색, 남색, 검정, 붉은색의 ‘오기군제’를 제정하고 그 아래에 군사(軍師)·사마(司馬)·선봉(先鋒) 등의 직을 두었으며, ‘행군조례’(行軍条例)를 제정했다. 이들은 안휘성 북부·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를 전전하며 거점을 만들지 않아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1862년 겨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회하 북방 염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863년 2월 염군은 치하집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장락행은 사로잡혀 박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자리는 양왕(梁王) 장종우가 이어받았다.
2. 1. 초기 활동 (1811년 ~ 1852년)
안휘성 박주 장노가(張老家) 출신이다. 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소금을 밀수했고, 임협을 좋아했다.1852년 안휘성 북부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장락행은 공득수, 소천복 등과 함께 염자(捻子)를 결성했다. 염(捻)은 회하 북방 방언으로 ‘한가닥 실을 더 주는, 즉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염자는 안휘·하남 일대의 유민과 수운업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으며, 18명의 수령이 모여 장락행을 총수령으로 뽑았다.
2. 2. 염군 결성 (1852년)
1852년, 안휘성 북부에 기근이 발생하자 장락행은 공득수, 소천복 등과 함께 염자(捻子)를 결성했다.[1] 염(捻)은 회하 북방 방언으로 ‘한가닥 실을 더 주는, 즉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1] 염자는 안휘성·허난성 일대의 유민과 수운업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1] 그리고 18명의 수령이 모여 장락행을 총수령으로 뽑았다.[1]2. 3. 염군 지도 (1853년 ~ 1862년)
1853년, 태평천국군이 안휘성·하남성을 통과하자 염군도 이에 호응했다.1855년, 치하집에서 각지의 염군 수령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장락행을 맹주로 추대하여 ‘대한명왕’(大漢明王)이라고 칭했다. 노랑, 흰색, 남색, 검정, 붉은색의 ‘오기군제’를 제정하고 그 아래에 군사(軍師)·사마(司馬)·선봉(先鋒) 등의 직을 두었으며, ‘행군조례’(行軍条例)를 제정했다. 이들은 안휘성 북부·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를 전전하며 거점을 만들지 않아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1857년, 염군은 태평천국과 회합하여 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장락행은 천왕 홍수전으로부터 정북주장(征北主將)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옥왕(沃王)에 봉해졌다. 그는 진옥성과 함께 하남성, 산동성·안휘성·강소성을 전전했다.
1862년, 태평천국이 안휘성 북부의 거점을 잃고 형세가 악화되었다. 겨울에는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회하 북방 염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 4. 태평천국과의 연합 (1857년 ~ 1862년)
1857년, 염군은 태평천국과 연합하여 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장락행은 천왕 홍수전으로부터 정북주장(征北主將)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옥왕(沃王)에 봉해졌다. 그는 진옥성과 함께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일대에서 활동했다.[4]2. 5. 최후 (1862년 ~ 1863년)
1862년, 태평천국이 안휘성 북부 거점을 잃으면서 형세가 악화되었다. 그해 겨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회하 북방의 염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63년 2월, 염군은 치하집 전투에서 패배했고, 장락행은 사로잡혀 박주에서 처형되었다.장락행의 사후, 양왕(梁王) 장종우가 염군의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3. 평가
장락행은 청나라 말기 염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태평천국 운동과 연계하여 농민 봉기를 이끌었다. 장락행의 활동과 염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장락행은 가난한 농민들의 어려움을 대변하며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사회 개혁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1] 태평천국 운동과 협력하여 청나라 정부에 대항한 점도 민중 봉기의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장락행과 염군의 활동에는 한계점도 존재했다. 봉건적인 질서를 완전히 타파하지 못하고, 지도력 부족으로 인해 내부 분열을 겪기도 했다.[2] 이러한 한계는 결국 염군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張樂行|장락행중국어은 민중 봉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했지만, 시대적 한계와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4. 기타
은 염군의 일원이었던 장락행이 1854년에 일으킨 봉기이다. 관련된 주요 인물로는 홍수전, 진옥성 등이 있다.
4. 1. 관련 항목
참조
[1]
서적
Revolution and its Past
Prentice Hall
2002
[2]
논문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Nien—Some Tentative Thoughts on Terminology
[3]
서적
Rebels and Revolutionaries in North China, 1845-1945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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